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 루터는 광산업을 하던, (그때는 직물 산업과 광산업은 중세의 산업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부유한 부친의 뜻에 따라 법률학을 공부하려 했는데, 뜻밖의 친구의 참혹한 사건을 접하고 수호신께 서원하고 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약관의 나이었던 당시에는 신비감과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마음이 훗날 오히려 자만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정치적이고 책략적인 품성으로 나타났다.
■ A source(root) of religion : Nobody knows the nature of God. However, religion begins from believing in the thought of somebody who thinks it by analogy. Therefore God was made.
■ 그림은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Work), 《'하나님으로 태어난 어린아기' : "the Baby, who was born as God"》
■<Mom Maria> sits on the knee of the <GrandMa Anna>, who was the <patron saint> of the so-called religious reformer, <Luther>'s family, and is taking care of <little baby Jesus(=God)>, playing with the Lamb.
- 소위 종교개혁가 '루터' 가정의 <(광산업)'수호신' 이기도 했던, 할머니 Anna의 무릅위에 <엄마Maria>가 앉아서 '어린양'과 놀고 있는 '하나님' 이신 <little baby God, 예수>를 돌보고 있다.
2.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우신예찬”그리고 “라틴어 성경”은 루터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고, 그래서 인문주의와 에라스무스를 연구하였으나, 멜랑히톤과 달리 에라스무스의 카톨릭 개혁에 대해 수용하질 못한 루터는 카톨릭 교회의 부패는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은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라는 명분으로 극단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3. 사실 개혁초기에 루터는 사제의 하이락키적 헤게모니 표현행위의 하나인 성례전도 성례복도 없애고 민중들도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실행하려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예배의식을 바꾸자, 권위가 없어보이는 곳으로 여겨, 다시 성례복을 환원시켰다. 루터의 민중에 대한 하이어라키Hierachy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 1) 이런 평가의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답1) =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생명의 말씀사, 대한기독교서회)’의 저자 정승훈에 의하면 1518년 95개조 해설시, ‘의로운 것은 성례나 (성)예복이 아니라 신앙이다.’ 라고 말하면서 개혁초기에는 경멸하였다고 함. 선배인 칼 슈타트는 루터의 그 말을 따르며 루터와 달리 평생을 일반인과 동일한 복장으로 살았다. 루터의 3대 논문집에서 기독교 개선부분으로 ‘예복비’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래서 루터는 종교개혁초기에 카톨릭이 시행하고 있는 성례전을 없애야겠다는 초심을 버리고 미사를 다시 시행하고, 의례용 제복들을 복원시켰고, 결국에는 에라스무스 심지어 (훗날에 루터를 따라갔던) 멜랑히톤의 성례에 대한 사고를 경원시하는 자만심이 밖으로 들어나게 되었다.
(문 2) 이런 평가의 근거는 무엇인가?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는 멜랑히톤의 설득 때문에 츠빙글리와 제휴하지 않았다.
(답2) = 이 엣세이를 전부를 읽어보면 필자가 그렇게 평가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마흐부르흐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루터에게 다가오던 쯔빙끌리와 성례전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국 이 회담을 끝으로 둘은 영원히 결별했을 뿐더러 그리고 훗날 쯔빙글리의 어이없는 죽음......
(문 3) 츠빙글리의 전사 및 임종의 순간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일이 어떤 점에서 ‘어이없는’ 죽음인가? 그리고 루터는 츠빙글리의 죽움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평가를 내어놓았다.
(답3)= 쯔빙글리의 죽음은 마치 이스라엘 사울왕의 마지막 전투였던 길보아 최후 장면과 같은 느낌이었음. 쯔빙글리에 부정적인 루터의 평가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쯔빙글리의 상대편 카톨릭교도들의 목을 죄는 정책은 좀 과했던 방법이었다 생각한다. 쯔빙글리 죽음에 대한 루터에게서는 아무런 멘트도 없었고, 에라스므스도 참석했던 쯔빙글리 장례식에도 루터는 참석하지 않았다. 루터의 성품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515년, 루터는 그가 한때 따랐던 마지막 스콜라 철학자이며 영국의 오컴의 학설을 체계화 시킨 가브리엘 비엘에 반대하여......
※가브리엘 비엘 Gabriel Biel (1420경 - 1495년 12월 7일), https://james-kang-2019.tistory.com/65
(문 4) 가브리엘 비엘의 어떤 주장을 어떻게 반대하였다는 것인가? 루터는 일반적으로 비엘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선 이후에 그의 책을 읽고 그 사상의 주요한 내용에 찬동하였다.
(답4)= 루터는 초기에, 적어도 1514년 이전까지는 비엘(Gabriel Biel)의 비아 모데르나 (via moderna 새로운 길) 신학에 빠져 있었다. ‘자기안에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하여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 ... 말하자면 자유의지에 의한 능동적 신앙관이다. 하지만 1515년에 그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이른 바 “탑체험”(Turmerlebnis)으로 하나님 주권적 속박의 수동적 신앙관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급진적 종교개혁에 대한 의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3년후 그는 95개조의 비텐베르크 선언으로 교황과 카톨릭에 전면적으로 맞서게 된다. 그 다음해인 1516년 로마서 강해에서 노예-종속 의지(servum arbitrium)를 처음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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