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비교 11

12. 참고서적

참고 서적 및 논문과 인용 [1]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암 L.랭어, 박상익,(푸른역사, 서울, 2001)p372 [2] 루이스 W.. 스피츠, 서영일 역, "종교개혁사",(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7)p90-101 [3]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암 L.랭어, 박상익,(푸른역사, 서울, 2001)p372 [4] E.M.번즈, R.라너, S.미첨 공저, 박상익 역, "서양문명의 역사 II", (서울: 소나무, 1994)p503-562 [5] “한 인문주의자의 초상” 김인(서울교육 대학교, 한국도덕교육학회, 도덕교육연구 제26권,2014) [6]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암 L.랭어, 박상익,(푸른역사, 서울, 2001)p357 [7] “미완의 에라스무스 종교개혁” ..

11. 에라스무스 후기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자 : 1. 비이성과 불합리의 사회구조속에 장기간의 축척은 특히 르네상스(인본주의)를 기점으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긴 하나 자조적인 체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기존의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낳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급격한 개혁을 원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온건한 변화를 유도하는 집단의 2가지 성향으로 분류가 된다. 2. 인문주의자들 스스로는 결코 반종교적 성향의 집단으로 여기지를 않았다. 고대 철학을 교리해석에 만 이용하던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교회가 저질러 온 복음에 반하는 잘못과 그에 대한 교정을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고 추구했던 고전의 미덕이 기독교의 이상을 표현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에라스무..

9. 자유의지론 (자유의지가 없다면, 구원론-신정론도 필요없다)

자유의지론에 대하여 펠라기우스'이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라는 질문만큼 오래도록 논쟁되어 온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유의지의 규명이라는 작업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존재’의 의미, 윤리적 책임의 귀책 가능성 등 많은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 에라스무스와 루터, 서로가 신학적인 차이에 있어 공히 서로가 자유의지의 신학적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에 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 전지, 전능, 죄와 은혜의 개념등과 같은 신학적 틀안에 문제들로 인하여 더욱 복잡해지는데 비해, 자유의지론은 '의지', '동기', '성격', '자유' 등과 같이 그 정의 자체가 신학적 틀을 벗어나, 보다 더 큰 사상의 배경하에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므..

8. Erasmus & Luther(에라스무스와 루터)

에라스무스에 대한, 루터의 불손(不遜)한 말씨(言辭). 에라스므스나 마틴 루터 공히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개혁에 있어 적용되어야 할 시대적 세계관에 따른 방법론에 서로의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16세기 로만카톨릭에 대한 교회개혁에 있어 로테르담의 에라스므스와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 그들의 자세와 역할을 대조하여 비교해 본다. ※ 단락마다, 제임스강의 에세이Essey에 대한 Lecturer의 질(문)과 제임스강의 (답)변이 있다. 1. 에라스무스의 저서들을 연구하던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할 당시에 에라스무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편지들을 여러번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들에 담긴 루터의 생각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즘 그 자체와 그에 따른 학문의 부흥 그리고 그가 ..

7. 독일 농민 반란(?)과 루터

독일 농민운동과 루터 그런 반면에 루터의 초기 개혁정신과 같은, 말과 행동을 견지하고 있었던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소위 급진종교개혁 세력이 주도하던 농민운동,은 당시 루터의 위치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당시 서민층의 대부분이 농민들이었고 그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말하자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라는 삶을 살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십자가, 성상(relic), 성화, 성물 등을 교회에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우상파괴운동' 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수많은 도시에 영향을 미쳤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영향을 받은 할레 대학 교수이던 토마스 뮌처등은 스콜라의 신비주의보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의 실제적 객관적 요소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문) 이 역시 토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