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에 대한, 루터의 불손(不遜)한 말씨(言辭).
에라스므스나 마틴 루터 공히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개혁에 있어 적용되어야 할 시대적 세계관에 따른 방법론에 서로의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16세기 로만카톨릭에 대한 교회개혁에 있어 로테르담의 에라스므스와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 그들의 자세와 역할을 대조하여 비교해 본다.
※ 단락마다, 제임스강의 에세이Essey에 대한 Lecturer의 질(문)과 제임스강의 (답)변이 있다.
1. 에라스무스의 저서들을 연구하던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할 당시에 에라스무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편지들을 여러번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들에 담긴 루터의 생각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즘 그 자체와 그에 따른 학문의 부흥 그리고 그가 평생 일궈 온 학문과 예술의 명분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에라스므스는 루터의 과격한 교회 개혁에 대해 덜 호전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했기에 1524년 에라스므스는 루터를 설득하려는 인쇄물을 먼저 발간하면서 두사람의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라스므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게 루터는 더 독단적인 고집스러움을 보였고 에라스무스는 논리적으로 루터를 설득하려는 내용인 반면에, 한때 흠모했던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는 그가 보낸 서신에서 까지 욕설*들을 거침없이 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논리로는 에라스무스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문 = Lecturer) *루터의 욕설 -> 그가 논리적으로는 설득할 수 없음의 증거인가? 이것이야말로 논리없는 서술의 전형이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루터의 반론인, ‘의지의 속박에 관하여’는 그의 저서들 가운데서도 가장 논리적인 글이다.
(▶답 = 제임스강) 위 본문을 잘 읽어 보면 루터가 논리가 없는 글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논리가 서로에게 먹히지 않는 아포리아(Aporia)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이다.
(1)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해결점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둘이 결렬되기 시작한 것은 루터가 성찬에 관한 논문을 쓴 다음이었다. 루터는 카톨릭에 맞서 떡과 포도즙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나 에라스무스는 살덩어리라든지 피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과 생명이 문제라고 하였다.
(2) 에라스므스는 교회의 평화를 결코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생기는 불화와 다툼을 원치 않았던 반면에 루터는 교회를 모든 불순물에서 정화 시킬 수 있다면 교회의 절대적 교리에 충실함에 타협하지 않는것은 필수적이라고 했다.
(3) 루터는 에라스므스가 효과적인 개혁에 필요한 품성이나 소질이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루터는 겉으로 드러난 자신에게로 다가올 수 없는 에라스므스의 모습을 성실함의 결핍으로 인식하고 그를 조롱했다. 성급하고 무감각한 행동으로 다가오는 루터의 행동이 에라스므스를 소름끼치게(was horrified) 만들었다.
'The Divine Mill'(1521), Martin Seger
그리스도는 곡물을 맷돌에 붓고, 에라스무스가 모아서, 루터에 의해 복음으로 구워졌습니다.
하지만, 책의 형태를 띤, 이 '빵'은 승려, 주교, 교황이 거부합니다.
3. 에라스므스와 루터는 인간의 자유는 불완전하여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 Sola Fide)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한다. 그러나 예정론에 있어서는 루터는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축복을 주장했으나 에라스무스는 형벌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루터를 비난했다. 이에대해 루터는 “네가(에라스무스) 그 작은 머리로 어떻게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측량하여 판가름 하느냐?”고 욕설을 퍼 부었다.
(▷문) 이것이 왜 욕설인가?
(▶답) 루터는 어찌 하나님의 뜻을 자신만 안다고 장담하고 있는것일까 ..? 그런 가운데도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심복이 된 멜랑히톤과는 항상 서신연락을 하였다.
(▷답 댓글) 바로 여기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멜랑히톤은 인문주의자면서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엇보다도 높인 종교개혁의 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루터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4. 1525 년에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를 새로 번역한 후 당대의 학문의 대가 에라스무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해는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행동을 원하시며, 지금 우리의 때가왔다!” 라고 외치는 토마스 뮌처의 행동아래 독일 농민혁명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교회개혁에 대한 협조와 함께 같은 편에 서달라고 끈질기게 에라스무스에게 구하던 루터가 제후들에 비교해서 민중(농민)들을 대하는 그의 이중적 모습을 보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교리문답서, 《사도신경 해설》을 통해 루터의 교리를 비판했다.
(문) 에라스무스의 사도신경 해설의 저작 배경이 이것이라고? 필자는 사실적 근거를 올바르게 밝혀야 한다.
(답) = Opera omnia Desiderii Erasmi Roterodami, vol. V/1, Amsterdam: Norht-Holland, pp. 278-290
5.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논쟁의 단초가 될 서신을 루터에게 보낸다.
그 편지를 받아본 루터는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교리문답서를 비판하고 에라스무스를 "독사", "거짓말쟁이", "악마의 입과 장기"로 비하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보다 사제 서품도 훨씬 이전에 받았을뿐더러 로마 카톨릭이나 개혁주의 세력 양쪽에서 학자로써 최고의 권위를 받고 있던 때였다. 그 당시 수도사에 지나지 않았던 루터, 당시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의 본당신부였던 쯔빙글리도 결국 루터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아마도 루터의 이기심 강한 품성이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 아무튼 자유의지의 에라스무스와 노예(속박)의지의 루터 두 사람사이에 논쟁이 시작 되었다. 이 세상에 속한 자유의지라는 것은 자기 몸 만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루터의 말이 에라스무스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루터만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는듯 말이다.
(문) 학문적 에세이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로 추정하는 글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로써 뒷받침 하지 못하는 주장은 글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린다.
(답 )= (1) Ibid., pp. 245 and 279. (2) Upon the death of the humanist in 1536, Luther irrevocably condemned him : “the famous Erasmus has died in Basel without a priest or prayers, ready for Hell."
( 1536년 인본주의자가 사망하자, 루터는 그를 돌이킬 수없이 비난했습니다. "유명한 에라스무스는 바젤에서 지옥을 준비하는 사제였고 기도없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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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therlands of Erasmus and the Germany of Luther were the most fervent regions of Europe at the time and were central to the sphere of influence of devotio moderna, a spiritual movement turned towards the inner life, examination of the conscience, Bible reading, and prayer.
에라스무스의 네덜란드와 루터의 독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열렬한 지역이었으며 <※데보 티오 모더나>의 영향권의 중심이었으며, 내면의 삶을 향한 영적 운동, 양심의 검토, 성경 읽기 및 기도였습니다.
※ 디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또는 Modern Devotion, 현대적 경건)은,
겸손, 순종, 단순한 삶과 같은 참되며 경건한 실천을 재발견함으로써 사도적 개혁을 요구하는 종교개혁 운동이다..
A divided Europe
Their aborted dialogue ruined Christian humanism and gave Luther and the Reformation movement increased legitimacy. The Reformation definitively took hold within the European religious landscape, while Erasmian philosophy continued to nourish the thought of many irenists, before coming to a standstill during the Colloquy of Poissy in 1561 and the beginning of the wars of religion in 1562. Finally, for two centuries this conflict raised the question of the Christian view of humans and society: what was the European spirit? What was the basis for the European dream? It was with respect to these very questions that Erasmus and Luther were definitively unable to agree.
분열된 유럽
그들의 중단된 대화는 기독교 인본주의를 망치게 하였고, (시대적 요구에 의해) 루터와 종교개혁 운동은 합법성을 증가시켰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종교적 (미래)조망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고, 에라스무스 철학은, 1561년 Poissy의 Colloquy (= 1561 년 프랑스 Poissy에서 열린 종교 회의)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사이의 화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회의는 9 월 9 일 프랑스 국왕 포이시 수녀원의 구내 식당에서 열렸다.)와 1562년 종교전쟁이 시작되기 전 까지 많은 irenists (평화주의자들)의 생각을 계속해서 키웠습니다. 수세기 동안이 갈등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당시)유럽의 정신은 무엇이었습니까? 유럽의 꿈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확실히 동의 할 수 없었습니다.
참조
721 | ■모르면 믿고, 알면 못 믿는다. | 나린푸실(排假擁眞) | 20.09.10 | 173 |
720 | ■종교개혁, 그 당시 차별적 모순의 시대적 방편(方便, temporary fix) ......... [2] | 나린푸실(排假擁眞) | 20.09.09 | 177 |
443 | ■에라스무스(Erasmus)의 <Carpe Diem> [1] | 나린푸실 | 20.01.15 |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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