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비교

7. 독일 농민 반란(?)과 루터

Narin Pusil 2021. 1. 14. 21:23

독일 농민운동과 루터

하이라키에 억눌려있던 독일에 농노들은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다.    그림은 Martin Disteli의 농민운동 판화.


그런 반면에 루터의 초기 개혁정신과 같은, 말과 행동을 견지하고 있었던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소위 급진종교개혁 세력이 주도하던 농민운동,은 당시 루터의 위치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당시 서민층의 대부분이 농민들이었고 그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말하자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라는 삶을 살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십자가, 성상(relic), 성화, 성물 등을 교회에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우상파괴운동' 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수많은 도시에 영향을 미쳤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영향을 받은 할레 대학 교수이던 토마스 뮌처등은 스콜라의 신비주의보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의 실제적 객관적 요소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문) 이 역시 토마스 뮌처의 사상에 대한 권위 있는 개설서의 서술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필자는 과연 어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는가?

= 어떤 개설서의 서술과 무엇이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 인문주의의 대가인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본주의, 곧 수탈 당하고 있는 민중, 특히 농민들의 힘을 실어주기 위한 운동의 핵심 사상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1524년 독일에서 농민운동이 일어났을때 농민들의 편에 섰던, 오늘날 종교개혁가라 불리우는 ‘루터’는, 그 운동이 불리해짐을 느꼈던 제후들의 투정을 듣고  외려 “농민 전쟁은 종교적 신앙이 없는 가난한 빈민과 농민의 투정”이라면서 부정하며 다음해인 1525년 영주들 편에 서서 수십만의 농민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에 제후들이 요구하던 참살 시켜도 좋다는 시행서에 최후서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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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운동>과 <독일농민혁명운동>

독일 농민전쟁(獨逸農民戰爭, Peasants' War) ※(참조)종교개혁지 탐사 저널(클릭!) 젬스가 본 유럽 종교개혁지 학술 탐사 저널 - 5 ..... [주제] : 이제 결단할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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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독일 농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에 대하여 지극히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덧칠을 하고 있다. 농민들의 정당한 주장에 대한 루터의 옹호, 제후들에 대한 권고와 책망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폭력적인 무장 투쟁으로 나아간 농민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적 글쓰기에 걸맞지 않는 일이다.

 

  답1.   =《상식밖의 세계사》/안효상 지음/새길

1. 루터는 유대인들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그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까지 해 가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인도주의적인 복지를 제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2. 현실권력과의 결탁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배계급들과의 결탁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독일농민들이 제후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항쟁을 벌이자(독일 농민 전쟁), 제후들에게 서신을 보내 진압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3. 루터는 농민항쟁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후들의 착취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이는 농민들을 사회를 위험하게 하는 폭도라고 비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제후들과의 결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종교개혁이 진행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에서 농민항쟁 진압을 주장하였다.

4. 즉 루터에게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지배질서로부터 민중을 구원하는 성서의 하나님보다, 현실권력인 제후들과의 결탁을 통한 종교개혁 진행이 중요했던 셈이다. 이는 개신교도 기존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종교와 정치간의 결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답2.  국민일보 [크리스천 인문학] 혁명적 신학자 토마스 뮌처 (上)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643451>

  

  1. 토마스 뮌처는 농민 편에 선 개혁가였다.  “선제후 비위 맞추는 루터는 또 다른 비텐베르크 교황일 뿐이라고 맹비난 하였다.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

    2. “당신이 전에 보름스에서 주권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은 당신이 그 주둥이를 잘 어루만져 꿀을 발라 주었던 귀족들 덕분일 것이오. 왜냐하면 그 귀족들은 당신이 당신의 설교로 그들에게 보헤미아의 선물(교회 재산의 세속화)을 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영주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수도원들이 바로 그것이요. 만일 당신이 보름스에게 주춤거렸다면 당신은 석방되기는커녕 귀족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을 것이요.”

  3. 루터의 종교개혁은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교황과 황제에 반대했던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사실 루터는 이단 심문을 받고 진작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보호와 지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기 때문에 루터는 운신의 폭이 좁았을 수 있을 것이다.

  4. 또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 역학 관계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고민 끝에 농민전쟁에서 루터는 농민편이 아니라 영주들의 편에 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루터의 보수적인 입장은 급진파들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5. 그러했던 루터가 그의 3대 저서중에 하나인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대하여”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이제까지 사제, 승려, 성직자라는 말은 부당하게 사용되어 왔다. 만인이 사제라고 해도 모두가 봉사하거나 관리하거나 설교할 수는 없다. 이른바 성직자들은 봉사자,하인,관리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관리직으로 부터 저 공포스러운 지배와 권력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는 그리스도 교도가 아닌 것처럼 다루어져 왔다.”라고 마치 하이라키를 배격하는 듯한 주장을 했었던, 루터였다.

  5. 역설적으로 루터와 루터를 후원하던 그 당시 제후들은 그 사상(주장)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일까?  루터가 가증스럽지 아니한가? .... 참혹한 결말을 본 농민혁명, 그런 반면에 그후에 농노제도와 농장직영지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 무슨 말인가? 농민전쟁 후에 누가 어떻게 농노제도를 폐지했다는 말인가? 아무런 사실적 뒷받침이 없이 불쑥 제시하는 맥락없는 주장이다.

= 농노제도가 바로 폐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농민들이 요구한 12개조항 중에 농노제도의 폐지가 나와 있듯이 민중들의 마음속에는 노예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나 그후에도 여전히 종교적 갈등으로 독일은 분열되고 있었고 봉건적 질서가 계속되었다. 그로인해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150년 이상의 후진성을 보여 18세기 초가 되서야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차에  농노제도가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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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Vs.고라, ■루터Vs.토마스 뮌처

■모세(Moses)  Vs.  고라(Korah)           그리고■루터(Martin Luther)   Vs.  토마스뮌처(Thomas Müntzer) ■ 지금 이 시대에 법과 사회통념에 배치되는, 마치 3천여년전에 모세와 고라의 논쟁(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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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Luther)보다 정의로운,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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