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론에 대하여
펠라기우스'이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라는 질문만큼 오래도록 논쟁되어 온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유의지의 규명이라는 작업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존재’의 의미, 윤리적 책임의 귀책 가능성 등 많은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 에라스무스와 루터, 서로가 신학적인 차이에 있어 공히 서로가 자유의지의 신학적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에 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 전지, 전능, 죄와 은혜의 개념등과 같은 신학적 틀안에 문제들로 인하여 더욱 복잡해지는데 비해, 자유의지론은 '의지', '동기', '성격', '자유' 등과 같이 그 정의 자체가 신학적 틀을 벗어나, 보다 더 큰 사상의 배경하에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므스는, 신학적 문제들을 하나로 묶어 버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성서의 권위는 물론 교회의 전통도 동일한 결과물로 보았다.
2. 반면에 루터는 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와 sola fide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주장하며 에라스므스의 점진적 개혁보다는 잘못된 기존의 로마카톨릭의 틀을 급진적으로 빠른 시일안에 개혁하고자 했다. 루터는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은 보증된다고 그러므로 자유선택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라 하면서 인간의 본성의 불완전성이 구원에 대한 불가능한 작품들의 어떤 사고를 낳게 했다고 주장했다.
(문) 루터가 어디에서 이런 식으로 주장했는가? 루터의 ‘의지의 속박에 관하여’ 어디에 이런 엉터리 주장이 나오는가?
(답) 루터가 ‘의지의 자유’를 거부한 까닭은, 자신의 칭의론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그 어떤 행위와 무관하며 더구나 그것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의를 수용하는데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은총의 위로와 구원의 확신으로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자유의지론’에서 루터의 은총론을 반대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팰라기우스를 대변하지도 않았고 스코투스*와 오캄의 입장에서도 거리를 두고 우선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연관성을 다루고자 했다. 예수의 산상설교를 통해서 새롭게 거듭난 기독교를 만들고자 하였고 자유의지에 대해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공감을 보였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을 의지의 자유가 박탈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과 함께 협력하도록 격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년~1308년)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 '영민한 박사'(Doctor Subtili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오컴의 윌리엄과 함께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학자 중 한 명이다.그는 '주의주의'적 신학관을 주장하였다. 즉, 신을 믿는 것은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그는 아퀴나스 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학자로 꼽힌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스콜라 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에라스므스는 사람의 영혼구원을 위해 신인협력설 (theological synergism)로 불리우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노력함으로 구원도 상승됨을 믿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오로지 신의 선택적이고 주권적인 힘에만 의존해야 한다면 곧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 인간이라는 것은 신에 결정에 의한 잘 만들어진 컴퓨터를 장착한 자동기계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에게 행동에 대한 책임을 과연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직접 동행하는 아담에게는 중재자 (중보자)가 필요 없지 않은가? 또한 그것은 아담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지금도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는 성경상의 증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칭의론과 성화론에 있어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신과 사람이 서로 관계적 교감에 의해서 성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학자 김세윤의 말이 .....(아래 계속)
(문) 김세윤이 어디에서 이런 식으로 주장하였는가?
(답) =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말하는 김세윤이 주장하는 ‘관계적’이라는 의미가 사실 무엇인지 모호하다. 그의 ‘칭의와 성화’에서 주장하는 ‘관계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자적 관계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양자간의 관계적이라 한다면, 그 관계적 범주가 구분되고 서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 옳다면, 역시 반(semi)- 아우구스투스 (반펠라기우스) 적인 성향으로 에라스무스적의 사고가 더 구원의 조건에 맞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의지론 제4장’에서 “만일 어떤 자유의지도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신정론이 가능한가?” 라고 말하는 에라스무스의 의문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 구원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제1원인이고, 인간의 의지는 제2원인이 되는 것이라 에라스무스는 말한다.(= De libero arbitrio II a 11)
4. 같은 시대에 있었으나, 정치적-지역적-국가적-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상황속에서 서로 다른 캐릭터와 품성및 사고 그것들로 인한 성향에 따른 시각차를 좁힐 수 없었고, 두 사람의 그와 같은 신학적인 차이는 종교개혁 기간 내내 두 학자 사이의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구원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몹시도 반대하게 되었다. 그 점을 주장하기 위해 루터는 '속박의 의지'(The Bondage of The Will)를, 에라스므스는 '자유의지'(The Freedom Of The Will)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1) 로마인들에 호흥을 받던,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를 받은 자유인의 의지를 말하는, 펠라기우스와 .. 한계가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노예로 순종해야만 한다는, 로마교회가 미치는 땅에 교권의 권위가 있던 아우구스투스간의 자유의지 논쟁과, 2)자유의지에 관한 아르미니우스주의 (the Arminian)와 칼빈주의(Calvinism)간의 의견차가 오버랩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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