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비교

11. 에라스무스 후기

Narin Pusil 2021. 1. 24. 21:05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자 :  

  1. 비이성과 불합리의 사회구조속에 장기간의 축척은 특히 르네상스(인본주의)를 기점으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긴 하나 자조적인 체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기존의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낳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급격한 개혁을 원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온건한 변화를 유도하는 집단의 2가지 성향으로 분류가 된다.

 

  2. 인문주의자들 스스로는 결코 반종교적 성향의 집단으로 여기지를 않았다. 고대 철학을 교리해석에 만 이용하던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교회가 저질러 온 복음에 반하는 잘못과 그에 대한 교정을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고 추구했던 고전의 미덕이 기독교의 이상을 표현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에라스무스를 필두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대응방식은 이후 전개될 종교개혁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3. 에라스무스는 일생을 통한 균형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사제와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교회(교황청)는 틀렸다고 했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는 폐습일 따름이니 초기의 순수하고 좋았던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온건한 변화를 원했던 것이다. 당시 에라스무스의  실패는  위대한 지성의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세계관 즉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실패였다.  그는 미덕이  인간성에  근거할 수 있다는  믿음, 관용이 정치와 종교는 물론 학문과 예술 사회에서 적극적인 추진력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자신의 생애를 걸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신적인 삶을 믿었다.  사려 깊은 사람은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역사상 모든 시대의 위대한 저술들을 읽고 사랑하는 자는 자기 시대를 좀더 올바르게, 그리고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4.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그리도 놀려먹었던 가톨릭교회를 허물어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개신교 정통이라 불리우는 A 교단에서 그 교단을 잘못됐다 말하며, 그 교단에서 나와 자신이 따로 A’교단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때의 환경으로 그가 실패했다고 할런지 모르나 오늘날에서는 과연 그가 실패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나온지 1년후, 그가 루터 지지자인 요한-랑에게 보낸 서한에 “나는 로마교황의 왕국이 암적인 존재로 봅니다. 하지만 곪아터진 그 환부에 공공연하게 손을 대는 것이 이로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읍니다.”라고  썼다. "그는 로마 가톨릭에 매서운 비판을 가했지만 로마 가톨릭에 남으려 했다. 동시에 그는 힘을 보태왔던 종교개혁, 심지어 인문주의 흐름과도 거리를 두었다."

  5. 사고의 형성에 대한 환경, 네덜란드 저지대, 산이 없는 평평한 땅에서 자란 에라스무스는 자라온 풍토속에 온화함, 겸손함, 평화로움이  "일치와 평화"의 에라스무스를 만들었고 ..... 그리고 산악지역에서 자라난 그래서 어둡고 무시무시한 풍토의 자양속에서  '갈등'의 깊이가  크게 있는 질풍노도와 같은 성품의 루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터의 등장으로 에라스무스의 개혁은 빛을 바래게 되었다.

  6. 천부인권적 가치와 존엄성과 자유의지, 갈등을 불러와 결국 오늘날 여러 수백종파로 나뉘게 만든 루터보다는 통합을 이끌어 내려 애쓴 에라스무스의 개혁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적용되어야,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표가 믿음으로 내세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외쳤던 로마 카톨릭이나 루터시대의 종교개혁....  지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며, 개개인의 삶에도 그 나름대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들이 권력적 힘과 시대적 사조의 힘에 눌려 밀려있던 당대에 용기로 민중들에게 Remind 시켜주려 노력했던  펠라기우스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역설했던 덕분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인권적 가치와 존엄성과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라 여긴다.  

Pelagianism is a heterodox Christian theological position which holds that the original sin did not taint human nature and that humans have the free will to achieve human perfection without divine grace. 펠라기안주의는, 원죄가 인간의 본성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성한 은혜없이도 인간의 완전성을 달성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디른 기독교 신학적 입장입니다.


  7. 북부 유럽의 예술로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반도에서 인본주의는 당시 사회에 깊은 특징이었던 개인의 자기 완성에 대한 관심에 몰두하던 동안, 에라스무스와 같은 북부 유럽의 인본주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남용의 폐해에 대한 개혁을 우려했었다.  그 문제에 있어 에라스무스는 온건한 수단을 선호하였고 그는 결코 회의적이지 아니한 교회의 점진적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교회가 초기의 순수한 믿음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급진적인 개혁과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루터에 의해 리드되는 종교개혁의 목표에 현저하게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8. 노벨상 독일 작가, 요한 하이제는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말하기를  “중도를 거닐은 사람”(그런점에서 모호하게 보였던 사람)이었으며  항상 글을 쓰고 정리하여 책을 만드는데 몰두했었고, 갈등과 싸움보다는 글로써 주장을 펼치며 기다리며 평화를 누리고자 한 사람, 신약성경을 좋아했고 그것을 통해 사람을 개발하고 양육하려 했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다.

  9. 시대적 소명이었고 깨우침을 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교정번역본을 역시 독일어로 옮기며, 자신의 깨우침으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치켜든 마르틴 루터는 여러 차례 에라스무스에게 루터의 로마카톨릭 개혁에 동참하라고 제안했으나, 로테르담 출신의 인문주의자는 끝내 제 발걸음을 반-가톨릭 운동으로까지 내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써 그는 가톨릭 광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광신자들의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그를 미워하던 양쪽 세력들이 참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펠라기우스 못지않은 그의 경건한 인품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위스 바젤에서 치러졌는데도 10년후에 죽을 루터는 여전히 독일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복음주의 운동 (Evangelisme) 의 중심에 있었던 에라스무스.... 그의 경건은 카톨릭 극단과 반 카톨릭의 극단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로마 카톨릭과 루터 사이를 조심조심 거니는 경건의 지성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양쪽의 대화를 가능케 하여 화평케 하는자의 상징이었다.  

  11. 올해가 그가 번역하여 많은이들이 성경을 접하게 하였던 라틴어 성경이 나온지 500년이 되는해다. 지금은 그보더 훨씬 잘 번역된 성경들이 나와 있으나 당시 그의 배려심을 알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오백년후의 오늘날,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의견이 다르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대화의 마음을 열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위하려고 하는 에라스무스의 태도를 배워, 서로가 자신들이 맞네 틀리네 그러다 극으로 갈라져 반목을 일삼으며 높은 경계의 담을 쌓고 하이라키와 헤게모니속에 서로를 차별시 하는 동안 그 좁은 가운데 길로 다니며 양쪽에 질시를 받으면서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내 마음이 참으로 민망하도다. 
   사랑하는 하나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위의 문장은 마지막 순간에 가까스로 토해내었던 에라스무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