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비교

6. 루터의 책략과 독일 영주들

Narin Pusil 2021. 1. 6. 20:58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 ( Friedrich III, 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 , 1463년 1월 17일 ~ 1525년 5월 25일)

1. 루터는 자신이 주장한 신앙체계가 남에게 인정받고 널리 전파되려면 (영방)제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써서 독일 귀족들이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할 것을 권고하였다. 독일의 귀족들에게 매우 호소력과 함깨 그 책을 쓴 까닭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입장은 귀족 곧 제후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문 1)이 책을 정독하였다면, 이런 평가나 나올 수 없다.

(답) = 이 대목은 학계에도 나와 있는 주장이지만 ‘CTMnews’에 올린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논문들을 설명한 김진흥의 내용중에 교황의 영향력 배제와 더불어 카알5세의 지배권을 그치게 만들겠다는 내용이 역설적으로 아래와 같이 설명이 된다.


      ▶따라서 독일 영주들은 루터를 지원함으로써, 첫째로 경제적 이익과 동시에 교황의 영향을 배제할 수 있는 잇점이 생겼고,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지배권을 견제할 수 있었다. 

 

Trick or Treat? It’s Martin Luther


2. 이리하여 독일 귀족과 루터가 연합할 근거가 마련되었고, 루터는 교황청의 파문과 황제 카를 5세의 국법 제외자라는 처벌에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글로 천명하게 되었고,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번역된 ‘독일어성경’으로 말미암아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널리 이해시키고 옹호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였지만, 근대 독일어의 표준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3. 루터를 지원한 제후들은 주로 중북부 독일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제후뿐만 아니라 이 지역 농민과 도시민들도 루터를 봉건적 억압의 굴레를 없애버린 영웅으로 숭배하였다. 그래서 루터파 교회가 중북부 독일에서 성립되었다. 여기서 알고 넘어갈 것은 루터파 교회의 성립은 일반 신도들, 즉 농민이나 도시민의 지원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후원으로 가능하게 된것이라는 것이다.

 

   

(문 1) 이것 역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신분과 계층을 망라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역사적 사실과 충돌한다. 이데올로기적 서술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못할 때 학문적 에세이에서 설 자리가 없다.

(답) = 카톨릭의 부패와 횡포에, 농민이나 도시 근로자들의 지지를 루터는 처음에는 받았으나, 차츰 제후의 편에 선 것은 바로 루터였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마련해준 커다란 저택에 머물며 뒤에 서술되는 농민전쟁의 참상을 본것도 루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후들을 위한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하여야 한다. (루터가 농노제도를 인정하는 바람에, 유럽의 주변 국가들보다 150년이나 뒤떨어진 독일을 물려주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훗날 독일에서는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덕분에 국가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및 사회분야에서도 우월함을 가능케 하여 가톨릭을 대신하는 전능의 권위를 지닌 국가주의가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