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그리스도의 교리가 희랍의 철학사상과 결부되어 있다. ■신앙은 사실에 오지 않고, (시대 시대마다의 사회적)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

Narin Pusil 2024. 1. 30. 10:47

■하르낙(Adolf von Harnack,1851~1930)

 

▪︎일반적으로 하르낙은, 루터신학자 아버지밑에서 출발한 독일의 개신교회 교회사가,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라고 했다.

 

▪︎러시아의 도르파트에서 출생. 1876년에 라이프지히대학의 교회사 교수가 되었다.

▪︎또한 1879-86년 기센대학, 1886-89년 마르부르그대학, 1889-1921년 베를린대학 등에서 교수로 활약하였다.

1900년에는 프러시아 과학원의 회원이 되었고, 1902-12년에는 복음적 사회협회 회장에, 1905-21년에는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또 1910년에는 카이저 빌헤름 학술장려협회 총재로 봉직했다.▪︎그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의 20년대까지 학계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력한 지도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는 리츨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역사주의의 대표적인 발언자였다. 그가 전문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고대교회사의 사료 검토였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그의 유명한 Lehrbush der Dogmengeschichte (기독교 교리의 특수한 역사, History of the Dogmatic Doctrine)가 3권을 저술했다(1885-89년).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리가 희랍의 철학사상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복음의 기반 위에 희랍 정신과 사상이 결합되었다고 단정하고 여기에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하르낙의 학문경향은 세밀하고도 정밀하며 관련된 고증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했고, 그의 생각과 논리 전개는 독창성이 있었다.

 

 

 

 

■현대신학에서의 리츨(Albrecht Ritschl)의 위치를 평해서  최종의 교부라고 한  하르낙의 말은 타당한  표현이다.

 

▪︎하르낙이 가장 존경했던  신학자가 리츨이었으며, 그리고 엄밀히 이야기해서 리츨학파라는 말을 쓴다면 하르낙도 그 학파의 한 사람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이 낭만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응답이었고, 스트라우스로 대표되는 성서비평학이 그 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학문 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면, 리츨은 Kant의 철학과 씨름한 대표적인 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리츨은 1822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뛰어난  설교가요 루터파 교회의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유능한  감독이었다.

 

▪︎1852년부터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Halle대학 출신으로 본(Bonn),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에 관해 강의했다.

 

   ▪︎▪︎▪︎▪︎ 그에 따르면, 신앙은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경험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신앙은 사실에 오지 않고, (시대 시대마다의 사회적)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신성은 그를 하나님으로 신뢰하는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계시적 가치"를 표현할 때 가장 잘 이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공동체에 헌신되어야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리츨(Ritschl) 학파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mateo501&logNo=30110391465&proxyReferer=

 

4. 리츨(Ritschl) 학파

        슈트라우스가 주장한 예수만이 참 진리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회...

blog.naver.com

 

 

 

   

 

■미국의 현대신학을 연,  라우션부시(Walter Rauschenbusch, 1861-1918)

 

 

월터는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침례교 목사, 사회복음주의 운동가이다.

뉴욕에서 독일계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체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현재 로체스트 신학교에서는 기념관을 만들어 월터 라우셴부시를 기념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성공회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그의 손자인 리처드 로티에게 영향을 주었다.

 

▪︎ 1866년 독일유학,

▪︎ 1891년 유니온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취임연설 '성경의 권위',

 

그는 1880년경에 뉴욕시의 헬키친(Hell Kitchen)의 근처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 영혼과 몸' 모두를 사역하는 데에 올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성경과 속죄의 교리를 포기하고,

예수께서 오직 이타주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주장하였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57

 

비참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 - NEWS M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는 북미 사회 복음의 가장 선도적인 신학적 주창자였습니다. 그는 이 세기적인 운동으로 사회정의의 문제와 개인 신앙의 내용을 서로 관련시키기 위해

www.newsm.com

 

■리츨의 영향을 받은, 미국신학

   ㅡ독일의 역사비평을 공부하고 돌아 온, 미국 New School 신학자들

 

▪︎ "더 이상 성경본문은 불변하는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그 본문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쓰여진, 당대의 공동체 종교적 문화의 산물이다."

 

▪︎ "성경은 오류가 있고, 상호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 "인간문화의 그 진보적 발전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은 일하신다. 그것이 진리의 표현이다."

 

▪︎ "교회가 살아 남으려면, 현대의 시대적 지적 흐름과 조정되어야 한다."

 

 

찰스 브릭스(Charles Augustus Briggs; 1841 - 1913)는 미국 장로교 학자이며 신학자이다.

뉴욕시 출생으로 장로교에서 이단성으로 파면당하여 성공회로 가서 재임용되었다.

그는 고등비평(북장로교)이 입증한, 모세오경 저자는 모세가 아니다라는 성경 비평적 견해를 피력.

1892년 뉴욕 노회에서 이단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취소되었다.

그의 이단성은 그가 성경의 해석에 관하여 이성과 교회가 모두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기인하였다.

 

그는 성경의 원문에 오류가 있다고 하였으며,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모세 5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이사야서의 저자도 이사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893년에 장로교 총회에서 그는 면직당하였다.

그는 그 이후 성공회로 교단을 옮겨서 프로테스탄트 성공회에서 목사로 임명되었다.

 

  미국 뉴스쿨 리츨학파의 사회운동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수정

▪︎1906년 북과 컴벌랜드 장로교와의 연합

 

찰스 브릭스( 유니언, 뉴스쿨, 고등비평)

찰스 핫지   (프린스턴, 올드스쿨, 보수)

 

  올드 - 뉴 스쿨 1868년 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