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시드니 인문학

이탈리아 미술에서 읽는 인간관

Narin Pusil 2023. 8. 16. 22:41

이야기가 세상을 구원한다

이탈리아 미술에 배인 인간관.pdf
4.18MB


 
 

이탈리아 미술에서 읽는 인간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까지
최광열 인문지식소매점 <구멍가게>
 

■ 오늘의 이탈리아는 지중해로 뻗어난 장화 모양의 반도와 알프스 남쪽의 평야, 그리고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으로 구성된 육지와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그리고 서쪽의 티레니아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태백산맥처럼 이탈리아 반도에는 알프스산맥에 맞닿은 아펜니노산맥이 척추처럼 남으로 길게 뻗어있다. 이탈리아는 지질 활동이 잦은 지역이기도 하다.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의 지각 경계부에 있어 지진이 잦다. 하지만 우리가 이탈리아를 공부하는 이유는 자연 지리학의 관찰에 있기보다 인문학에 있다.

    예술사에서 고대와 중세의 로마네스크와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그 중심이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자 르네상스의 발화점이기도 하다. 베수비오 화산에 묻혔던 고대도시 폼페이가 1748년부터 프랑스에 의하여 발굴되면서 19세기 초까지 프랑스가 주도한 신고전주의조차도 그 밑절미는 역시 고대 로마였으니 인류의 예술사에서 이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만하다. 서양 미술사에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사실 남는게 없고 설명의 고리가 빠진다. 
 
 
■ 495년 로마제국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리되어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지만,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멸망하였지만 이탈리아에 터한 전통과 문화는 쇠망하지 않고 야만인을 문명화하여 천년이 넘도록 인류 공동체의 중심 자리를 지켰다. 신고전주의 시대에 ‘로마대상Grand Prix de Rome’은 프랑스 예술인으로서 로마를 국비 유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영국 귀족 가문들이 자기 자녀에게 해외 문화를 교육시키기 위해 여행하게 하는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의 최종 목적지는 이탈리아였다. 20세기 러시아에서도 로마 유학은 예술인의 최고 영예였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또는 이탈리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뜻하는데 보통 그것을 ‘고전classicus’이리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고풍’보다는 ‘모범성과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 이탈리아 예술에 스며있는 인간관을 살피는 일은 뜻있다.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그리고 신고전주의 예술가 안에 스며있는 인간성에 근접하는 재미를 잠시 누리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ㅡ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지도
ㅡ1796년의 이탈리아
ㅡ1860년의 이탈리아 통일 현황

 

1. 르네상스 인간관

1. 르네상스는 14세기~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 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ㆍ합리성ㆍ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反)중세적 정신 운동을 일으켰으며, 문학ㆍ미술ㆍ건축ㆍ자연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화에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1)  중세 교회의 드높은 영광은 끝이 없어 보였지만 그 그늘은 깊었다. 이를 인지한 사람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이다.
 
이탈리아의 계관시인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았다2).  그는 종교 권력이 세속권력을 능가하며 성직자의 기세가 등등하던 시대에 교회의 종탑이 하늘을 찌르며 하늘의 영광을 땅에 구현하던 시대를 어둠으로 인식했다. 불손하고 무례하고 반-종교적인 인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의 안목을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오직 교회, 그것도 권력화된 교회의 뜻에 일이관지하던 시대에 자기 객관의 안목을 갖지 않았다면 르네상스의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란 토양과 서 있는 터전을 객관화한다는 점은 쉽지 않다. 그렇게하므로 새로운 시대, 1000여 년 전에 있었던 과거를 현재화(그러나 플라톤 이데아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 틈을 만들지 않았다면 누구도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2. 다음으로 피렌체시뇨리아(Signoria)3) 체제를 구축한 메디치 가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금융을 통하여 든든한 재물을 모은 이 가문은 정계에 진출하여 14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피렌체의 실권자가 되었다.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 등 4명의 교황과 카트린드 메디치(앙리 2세), 마리 드 메디치(앙리 4세) 등 프랑스 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하는 명문가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메디치가는 문화와 예술의 넉넉한 후원자였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르네상스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 보오나로티(1475~1564)같은 걸출한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공공도서관을 설립하여 인문지식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는 당시 피렌체의 개혁자 지로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와 부딪쳤다.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인 사보나롤라는 교황권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고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책망하고 신정적 민주정을 주장하다가 교회에 의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1) 네이버 국어사전
2)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브룩은 《수도원의 탄생》에서 4세기에 등장한 수도원이 천년을 이어오며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키워낸 열린
공간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당사자로 보기도 한다.
3) 시뇨리아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통치 방식의 하나로 참주정을 말한다. 공화정적 자치제인 코무네와 대립되는
제도이다
 
 
 
 *이태리 빈치(Vinci)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공증인인 아버지와 하녀 사이에 태어났으나 출생 직후, 아버지는 귀족 처녀와 어머니는 도기장이와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사생아가 된 소년은 시골 할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며 자연을 유일한 벗 삼아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래도 가끔씩 들러 아들을 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의 낙서를 보고 놀란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 판을 내어 주며 방패를 만들어 보라는 숙제를 하나 내줬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만든 방패를 본 소년의 아버지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맙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끔찍한 악룡의 형상이 살아 움직이듯,너무도 정교하게그려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수기 노트에 그때의 회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푸른 도마뱀을 잡아 악룡의 철갑을, 박쥐를 관찰하여 날개를, 라에서는 등껍질과 발톱을, 풍뎅이에서 뿔을, 물뱀에서 비늘과 혀를 묘사해 냈다."  
 
   화가란, 제 뜻에 따라 아름답거나, 끔찍하거나, 우스운 형상을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소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에겐 그림  '모나리자'로 더 친근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입니다.  이태리 지방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로 자라야 했던 상처 때문이었는지,그는 일생 가정을 이루지 않고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옆에다 두고 간직했다는 '모나리자'는 어쩌면 그의 채워지지 않은 모성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에 대한 표현이었는지 모릅니다.
 

 -소위 독실한 카톨릭 신도였던 로렌초 메디치와 함께 자라난, 그의 부친 코시모 메디치가 거두어 준 미켈란젤로 ... 자유분망한 생각뿐만 아니라 인생관도 그랬기에 로렌초의 눈에 벗어났던 다빈치 .. 밀라노의 스포르차(Francesco Sforza)공의 눈에 들었기에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서 생각을 펼쳤다.
 

 
■재능때문에 메디치 가문 사람이 되어 훗날 교황이 된 로렌초의 아들과 조카와 형제처럼 자라났던 '미켈란젤로'와, 재능때문에 로렌초 메디치가 두려워했던, '레오나드로 다빈치'
 
ㅡ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년에 자신의 노트에 .. “나를 만든 것도 메디치 가문이고, 나를 파멸시킨 것도 메디치 가문이다” .. 라고 적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작업노트 속에 솔직히 적은 것이다.
 
ㅡ다빈치는 메디치 가문의 식솔로 들어가 여러 문인들을 만나고 고대 조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때 받은 인문적 교육이 향후 그가 수학부터 공학, 해부학 등 다방면에 걸쳐 보여준 관심의 원천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메디치 가문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하는 것일 테다.
 
ㅡ그러나 그가 메디치 가문이 자신을 망쳤다고 말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오랜 견습 기간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때 그를 내친 사람이 바로 '로렌초 메디치'이기 때문이다.
 
ㅡ1482년 갓 서른 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로렌초가 싸인해준 자기소개서를 들고 밀라노로 간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라는 야심가가, 밀라노 정계를 완벽히 장악하게 되자 그의 궁정에 들어가면 큰 일감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밀라노로 향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로 간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예술가를 외교적 채널로 이용하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전략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정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학사    런던대학교 University College London 미술사학과 철학박사 Ph.D)
 

 

 

3.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보다 없는 일이 많다.
 
돈으로 고가의 사치품을 살 수는 있으나 행복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 있다면 문화와 예술을 권장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메디치가는 르네상스의 온상이었다. 르네상스는 조화와 통일과 균형의 예술세계를 실현하였다. 그 이전의 예술은 예술이라기보다 솜씨와 손재주, 또는 기술이라고 표현함 직하다. 예술의 생명인 창작의 자유와 개성이 예술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 구현의 홍보 도구에 불과하였다. 문맹률이 높던 시대에 미술은 종교가 가르치는 교훈과 추구하는 교리를 전달하는 아주 좋은 방법,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인간 해방을 구현하는 종교가 인간의 감성에 기반하는 예술에 담긴 창조성을 억제하고 제한하였다는 점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의 가치를 스스로 생각하고 발현하고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근법과 스푸마톤 기법sfumato이다4).  원근법은 2차원의 지면에 3차원을 구현하는 기법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고,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바림하여 경계선을 없애는 방법이다. 원근법에 의하여 그려진 작품으로는 마사초(1401~1428)의 <성 삼위일체>(1427)와 파울로 우첼로(1387~1475)의 <산 로마노전투>(1432) 등이 있고 스푸마토 기법의 작품으로는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가 유명하다. 그동안 예술가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볼 수 없는 영혼의 세계를 그리기에 주목하였다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원근법과 스푸마토 기법을 통하여 보이는 현실 세계를 묘사하고자 하였다.5)
 


4) 최광열, 『그리스에서 바로크까지: 기독교와 미술 1』(동연, 2021), pp. 83-86.
5) 같은 책, p. 88.

그림 3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 프레스코화 680×475cm,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 피렌체
그림 2 파울로 우첼로 <성 로마노전투> 1485, 판자에 템페라, 182×320cm, 내셔널갤러리, 런던
그림 3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그림 4 다빈치 <모나리자> 1503~1506, 판자에 유채, 77×5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4. 르네상스는 인간을 아름답게 보는 시대였다.
지난 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되어 어둡게 묘사되었다. 영광은 신에게만 돌려야 했고 인간의 신체는 어두운 천으로 감싸야 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은 신화를 빗대어 그리기는 하였지만,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유쾌한 반란의 작품이다. 인간예찬은 미켈란젤로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다비드>1501~1504는 성경의 신앙 영웅 이스라엘 왕 다윗이 아니다. 다비드는 단지 제목일 뿐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할례받지 않은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외침은 ‘인간은 위대하다’에 있었다.6)
 

  ※ 마니에리스모 인간관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작은 실개천이 흘러 둑을 가득 채우면 물은 둑 너머를 넘보기 마련이다. 1520년경부터 16세기 말까지 미술사에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조화와 균형과 통일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미술이 익을 대로 익어가는 즈음에 자신들이 그동안 소중히 여겨온 가치와 습성으로부터 일탈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표현하는 방법과 기법에 복잡성을 탈피하려는 의도가 노골화되기 시작하였고 원근법에 의해 생긴 깊은 공간은 다시 메꾸어졌다.
 
과장과 대조가 시도되었고 형태와 개념을 단순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결과 비정상의 비례감과 다소 기괴한 현상이 나타나 관람자를 불편하게 하였다. 이런 현상을 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보듯이 작품의 완성도는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1499를 통하여 불세출의 예술가로 등장하였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아픔이 관람객의 마음을 후벼 판다. 신의 아들은 아름다워야 하고, 신의 어머니도 그러해야 한다는 미켈란젤로의 생각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앞서 <다비드>에서 언급하였듯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의심한다.7) 미켈란젤로는 그 후에도 <피에타>에 매달렸다. 마지막 <론다니니의 피에타>1564는 완성하지도 못했다. 첫 <피에타>의 완성도는 차츰차츰 해체되었다. 그리스도는 완벽한 육체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던 첫 <피에타>의 안전한 구도와 아름답고 거룩한 완성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마리아는 아들의 실루엣 처럼 존재한다. 아들 역시 꼬인 다리에 힘이 들어있지 않다. 이렇게 능력을 상실한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위태로운 구도와 극대화된 무능의 모습에서 첫 <피에타>를 뛰어넘는 감동을 마음에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6) 프란시스 A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서구 사상과 문화의 부흥과 쇠퇴』(생명의말씀사, 1984),p. 84.
7)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의 <십자가에 내리는 그리스도>와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리는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보라.

 

 5. 미완성 작품에서 완성품보다 뛰어난 예술성을 발견하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무렵 미켈란젤로는 반동종교개혁에 참여하고 있는 로마의 여류 시인 비토리아 콜론나(1492~1547)와 교류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종교개혁 정신이 만년의 미켈란젤로 예술에 스며든 것은 아닌지 짐작한다. 인생도 모순투성이다. 꼭 완성되어야만 성공하는 게 아니다. 거칠고 힘겨운 세파와 싸우느라 세련미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신이 타박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신 신은 탕자의 아버지 아니시던가! 마니아리스모는 이탈리아어 마니에라maniera에서 따온 말이다. 마니에라는 ‘기법’이다. 꾸밈이 많고 기교적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화사첨족(畫蛇添足)에 근접한다.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부분을 모아 합치면 이상적인 걸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술사가 바사리(1511~1574)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 마니에리스모 미술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화가들과 작품으로 파르미자니노(1503~1540)의 <목이 긴 성모>1534, 아뇰로 브론치노(1503~1572)의 <마리아 데 메디치>1551, 주세페 아르침볼도(1526~1593)의 <사계> 연작 등이 있다. 빈첸초 캄피(1536~1591)의 <과일 장수>1580 역시, 마니에리스모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그림 5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 프레스코화 680×475cm,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 피렌체
그림 6 파울로 우첼로 <성 로마노전투> 1485, 판자에 템페라, 182×320cm, 내셔널갤러리, 런던
그림 7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그림 8 다빈치 <모나리자> 1503~1506, 판자에 유채, 77×5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그림 9 다빈치 <모나리자> 1503~1506, 판자에 유채, 77×5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6. <과일 장수> 속 과일들은 하나같이 싱싱하고 먹음직하다.
사실적인 묘사로 과일들은 살아있고 풍성한데 뭔가 아쉽다. 그게 뭘까? 완벽함이 주는 모자람, 르네상스 미술이 정점을 향해 치달리고 있을 때 거기에서 결핍을 느끼는 예술가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고 놀랍다. 그리고 반갑다. 현상계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을 놀라게 한 르네상스도 저물고 있었다. 교회는 양분되어 서로 싸웠고 봉건제는 절대군주제로 변했다. 지리적 발견은 세상을 흥분시켰고, 탐욕과 광기를 부채질하였다. 극도로 불안한 시대에 그 정신사적 고뇌가 예술에 스며드는 일은 자연스럽다. 마니에리스모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참신성이 모자라고 정체성이 모호할 수 있지만 이후 등장할 바로크의 가교가 된 것은 분명하다.
 
수학에서 두 번 미분이 가능한 함수를 ‘변곡점’이라고 한다. 그래프의 방향이 바뀔 때의 곡선 위의 점이 바로 마니에리스모이다. 세상과 인생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해서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마니에리슴을 타락과 파괴와 무질서로 인식하였지만, 근대에 이르면서 심리적 불안에 매력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근대 표현주의 미술의 경향성을 앞서 잉태하고 있다고 본다.8)  마니에리슴이 없으면 발전은 없다.
 
 https://m.blog.naver.com/sunmodol/120035951296

마니에리스모 (Manierismo)

Manierismo ('양식'이나 '구성형식'을 뜻하는 '마니에라'에서 유래) (프) Manierisme.   전성기 르...

blog.naver.com

 
그림 10 파르미자미노 <목이 긴 성모> 1534~1540, 판자에 유채, 219×13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그림 11 브론치노 <마리아 데 메디치> 1551, 캔버스에 유채, 53×38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그림 12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1573, 캔버스에 유채, 76×63.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그림 13 빈첸초 캄피 <과일장수> 1580, 캔버스에 유채, 145×215cm,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3. 바로크 인간관
커피 메뉴 가운데 ‘카페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더한 커피를 말한다. 유럽식 커피와 다른 미국식 커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 진주한 미군들이 이탈리아의 진한커피 마시기를 어려워했다. 우유를 타 마시고 싶었으나 전쟁 중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물을 타 마셨다고 전해진다. 이런 모습을 이탈리아인들은 반쯤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9)

 
바로크도 그렇다. 포르투갈 말로 바로크Barroco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이다. 지나친 장식과 과장된 표현을 비꼬는 표현이다. 앞서 존재한 르네상스의 모범, 조화와 균형과 안정감과 합리성에 터한 르네상스의 고전미를 예술 규범으로 믿는 이들에게 바로크는 기괴하고 이상한 예술의 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17세기 격동하는 유럽의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특히 종교개혁으로 교인과 땅과 재산을 절반이나 잃고 수세에 몰린 로마가톨릭교회는 절치부심하며 만회를 꾀하는 도구로 미술을 선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바로크이다.
 
수세에 있던 로마가톨릭교회는 미술을 선택한데 비하여 개혁교회 진영은 문자를 택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감성과 이성, 이미지와 문자의 대결인 셈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미술에 신앙의 감동을 담기 시작하였다. 영적인 초월과 신비를 시각화하여
여전히 문맹이 대부분인 교인들을 설득하였다. 이처럼 미술은 이탈하려는 교인을 막는 둑의 역할을 하였고 프로테스탄트 교인을 끌어들이는 그물의 역할을 하였다.10)  그림책 신학

 
교회당 건축은 천국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더 화려하여졌고 교회의 장식은 더 사치스러워졌다. 조각가 로렌초 베르니니
(1598~1680)의 <성녀 테레사의 환희>(1647~1652)와 베드로 대성당 큐폴라cupola 아래의 제단 <발다키노>Baldacchino, 1623~1634를 들 수 있고 안드레아 포초(1647~1652)의 <성 이냐시오의 영광>(1685~1694)은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카라바조(1571~1610)는 바로크의 문을 연 로마가톨릭교회가 기다리던 화가이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로 공세를 펴는 프로테스탄트를 향한 방패이자 창 역할을 하였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에 터하여 공세를 펴던 시점이어서 그의 작품 <바울의 회심>(1600~1601)은 신학적 공수를 전환할 기회가 되었다. 

 
빛과 어둠의 절묘한 명암 차를 이용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기법은 그의 작품을 연극의 정지된 한 장면처럼 각인시켜 그 효과를 증폭시켰다. 그는 마태와 관련한 작품들을 여러 점 그렸는데 <마태의 영감>(1602)은 같은 주제로 그린 렘브란트의 <마태와 천사>(1661)와 신학적 차이를 보인다.
 

9) https://namu.wiki/w/카페%20아메리카노

카페 아메리카노 - 나무위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물 탄 커피'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의아해한다. 양을 늘리려고 곰탕 진국에 물을 타서 파는 몰염치한 음식을, 게다가 대부분의 음식은 물은 더 첨가하면 물냄새가 심해서 맛

namu.wiki

 

10) 최광열, 같은 책, p. 191

그림 14 로렌초 베르니니 <베드로대성당 발다티노> 1623~1634, 베드로데성당, 바티칸
그림 15 로렌초 베르니니 <테레사의 환희> 1647~1652, 대리석,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박물관, 로마
그림 16 빈안드레아 포초 <이냐시오의 영광> 1685~1694, 천정화, 성 이냐시오성당, 로마

 
 



 
지중해 중심의 정신은 지브롤터 해협을 벗어나 점차 대서양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변방으로 여겨지던 이베리아반도와 저지대(네덜란드)에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의 발화점이 된 피렌체와 로마가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에 기반하여 예술과 문화의 중흥을 이끌었지만, 욕망을 실현하는 경제와 정치의 무게 중심이 흔들리고 점차 쇠락함에 따른 것이다.
 
17세기 이탈리아는 역사와 문화의 중심 무대와 주인공의 자리에서 교체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11)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로 페테르 루벤스1577~1640와 렘브란트1606~1669를 빼놓을 수 없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인 두 사람은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이 더 많다. 

 
 

11) 이광래, 『미술 철학사 :권력과 욕망, 조토에서 클림트까지』(미메시스, 2016), pp. 84-85.
그림 17 카라바조, <바울의 회심> 1600~1601, 캔버스에 유채, 230×175cm, 산타마리아델포폴로, 로마
그림 18 카라바조, <마태와 천사> 1602, 캔버스에 유채, 232×183cm, 1945년에 파괴됨
그림 19 카라바조, <마태의 영감> 1602, 캔버스에 유채, 292×186cm, 성 루이지 데이 프란시스성당, 로마
이야기가 세상을 구원한다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이 강한 저지대 남쪽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 교도였지만 그는 역동성과 환한 색상을 통한 관능미에 터하여 반동종교개혁에 이바지하였다. 청년 시절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미술을 습득하여 로마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608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제단화로 세 폭의 <십자가에 달리심>1610~1611을 그렸다.12) 한편으로는 영국과 에스파냐를
오가며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53세이던 1630년에는 16살의 엘렌 푸르망과 결혼하였다.

 
반면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어머니가 로마가톨릭교회 교인이었지만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세계관에 입각하여 활동한 화가이다.13)   네덜란드를 벗어나 미술 공부한 적은 없지만 당시 네덜란드에는 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 태동하여 성공한 상인들의 초상화 수요가 많았다.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 젊은 나이에 대성하였다. 하지만 성공의 단맛은 잠시였고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 고통이 심하여 신용 파탄에 처해 그의 말년은 비참하였다.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후 다행히 두 번째 아내 헨드리케의 도움을 받아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당시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렘브란트 부부의 결혼을 의심하였다.14) 

 


12) 만화영화로도 알려진 《플랜더스의 개》에서 어린 소년 네로가 보고 싶었던 바로 그 그림이다.
13) 렘브란트의 신앙적 정체성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림 20 루벤스, <십자가에 달리다>, 1610~1611, 판자에 유채, 460×430cm,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트베르펜
그림 21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오다>, 판자에 유채, 1612~1614, 421×311cm,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트베르펜
그림 22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오다>, 1634, 캔버스에 유채, 158×117cm,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스부르크
 

 

그런 중에도 렘브란트는 끊임없이 성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수 없이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물론 둘 다 돈이 되지 않는다.15)  그래서 렘브란트의 예술은 더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 <마태와 천사>(1661), <돌아온 탕자>(1668) 등에는 그가 터한 네덜란드의 시대정신인 칼뱅주의가 스며있다고 보는 것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고 선전하는 도구로 등장한 바로크가 프로테스탄트 이념을 표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놀랍다.

 
바로크는 우리말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뒤집는다. 매사에 모범적이고 완벽한 형 밑에서 자란 동생의 독립선언으로 보아 틀리지 않는다.
 

나가는 말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좋은집, 고급 자동차, 고급 요리와 고가의 장식품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지만 행복과 건강을 돈으로 살 수 없다. 이탈리아는 예술과 문화의 저수지였고 보물창고이다. 메디치가는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고전이 숨 쉬는 세상으로 되돌렸다. 그 물이 넘쳐흘러 프랑스와 독일과 이베리아반도와 네덜란드와 영국과 러시아까지 흘러 들어갔다. 르네상스에서 모범정신을 보는 일은 당연하다. 그 이전 1000년동안 종교는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마니에리스모는 완벽한 조화와 통일, 그 다음을 꿈꾸는 귀여운 악동(樂童)이다. 어떤 세상이든 완벽하지 않다는 도전정신이야말로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성에 이를 수 없는 게 인생 아니던가!
예술사에 등장하는 화가의 작품과 그 인생에 스며있는 인간관을 그 꼴만의 것으로 특정하여 고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을 아름답게 보는 긍정의 시각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을 죄인으로 보려는 종교적 시선이 다 틀린 것은 아니더라도 구원 이후를 사는 인간은14)  렘브란트의 <다윗의 편지를 든 밧세바>1654에 담긴 맥락을 이해하면 더 의미있는 감상에 이른다.
 
렘브란트는 가정부이자 어린 아들 티투스의 유모인 헤르트헤로부터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하였는데 이는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 렘브란트에게 치명적이었다. 이때 헨드리케가 렘브란트를 대리하여 교회 재판 법정에 출석하였다. 참회 명령과 성찬 금지 등을 명령받았다. 렘브란트와 헨드리케가 정식 부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재혼할 경우 유산 상속이 무효화한다’는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이다. 헨드리케는 교회 재판소의 출석요구서를 반복하여 받으면서도 렘브란트를 이해하고 곁을 지켰다. 그녀가 딸을 출산하여 호사가들의 구설수에 올랐을 때도, 렘부란트가 법적파산자가 되어 알거지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었다.
 
렘브란트는 헤르트헤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지만 헨드리케를 성경의 여인으로 분장하여 여러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윗의 편지를 든 밧세바>이다.15)
http://www.zone47.com/crotos/?p=3&p136=21074330 

church interior - Crotos

www.zone47.com

 
당시 네덜란드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칼뱅주의가 주도하는 세상이었다. 페테르 얀츠 산레담(1597~1665)의 <성 바보교회의 인테리어>는 이미지를 제거한 교회의 단순함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종교화를 그리는 일은 소득과 상관없이 일이다. 아름다운 존재이다.16) 
 
그런 사람은 자신을 하나의 개념에 복속하기를 거부한다. 미래가 뚜렷하지 않더라도 과거가 만든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뮤어 우즈 국립공원과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높이 자라는 나무인 레드우드Redwood가 서식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112미터 이상이고 직경도 7미터 정도이다. 아파트 30층에 이르는 높이이다. 레드우드는 보통 2000년 이상 살 수 있다고 하니 그 아래에서 생명의 경외심을 배운다.
 
하지만 크다고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교목들도 관목이 된다. 백두산 밀림에는 우아하게 자란 자작나무가 하얀 자태를 뽐내지만,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곧은 기둥은 휘어지고 구부러져 자작나무의 성질을 변형시킨다. 강한 바람과 모진 추위에 몸을 비틀면서도 하얗고 단단한 본성을 지키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꼿꼿한 자작나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휘어지고 구부러지면서도 본성을 잃지 않는 자작나무에게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배운다.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 그리고 바로크의 꼴에서 배우는 인간상이 있다. 자기 양식만의 특질도 있겠지만 에두르고 뭉뚱그려 배우는 교훈이 있다. 한마디로 하면 ‘질문하며 살기’,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기’이다. 더 나아가 ‘있으나 마나 한 사람 되기’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될 때 사람들은 적이 만족한다. 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야 흡족해한다. 그래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판단한다. 정말 그럴까?
 
굵고 큰 나무 아래에는 작은 나무들이 저라지 못한다. 산업혁명 이후 사람들은 크고 높고 빨라지려고만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인류의 미래는 점점 아득해지고 있다. 지금은 품부된 삶을 잘사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할 때이다. 지금은 한 사람 위대한 영웅이 필요한 세상이 아니라 강아지풀과 질경이와 달개비가 어울려 사는 세상이 아닌가!
 
    “들의 꽃이/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그 흔한 꽃이 산의 나무가/가르쳐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음~”17)   
 
 
최광열

인문지식소매점 <구멍가게>에서 예술과 역사에 깃든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벗들과 소통하기를 즐거워하는 그는 담을 허물고
경계를 건너 성큼성큼 다가오는 세상을 추구한다. 월간신문 <아름다운 동행>과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에 그림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고, 《그리스에서 바로크까지》, 《클래식에서 이동파까지》, 《코스모스와 에클레시아》 등의 책을 낸 바 있다.
16) 최광열, “세상을 훔친 종교, 시대를 고친 미술”, https://pop-store.tistory.com/51

세상을 훔친 종교, 시대를 고친 미술

종교개혁과정에서 미술의 역할과 기능의 엇물림에 대하여 최 광열 나비통신 편집주간 자유혼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기 전에도 진리를 왜곡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하여

pop-store.tistory.com

 
 
17) 한희철, 홍순관이 짓고 한경수가 곡을 붙인 노래 <나처럼 사는 건>의 일부이다.

church interior - Crotos

www.zone4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