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시드니 인문학

시드니 인문학교실 홍길복의 일곱 번째 강의 : 인문학의 주제-사람III 04 / 05 / 2023 제7강 인문학의 주제: 사람(3)

Narin Pusil 2023. 5. 2. 19:45

    ⚫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는 세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화두는 ‘균형잡힌 사람’, ‘중용적 인간형’ 입니다. ‘바람직한 사람이란 어떤 인격을 지닌 사람일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시간에 걸쳐 ‘사람 공부’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는데는 고대와 현대 사이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또 동양과 서양 사이에도 엄청난 관점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지역과 사회적 전통, 교육과 관습에 따라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대하는데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음도 발견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한 이런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과 생각을 넘어서서 성별의 차이나 세대의 차이, 교육이나 소유의 차이, 신념이나 사상의 차이, 종교나 문화의 차이등 각양 사회적 다양성과 그 다양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불균형의 차이를 넘어서서 균형잡힌 인간형, 중용적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고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쳐진 사람의 모습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추천도서는 데이비스 브룩스(David Brooks)가 지은 ‘인간의 품격’(The Road to Character)입니다. (김희정 옮김, 부키, 2015년) 우리는 이 책을 주교재로 삼아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 유대인 출신의 랍비(American Orthodox Rabbi)이며 현대적 정통 유대교 철학자(Modern Orthodox Judaism)인 조셉 솔로베이치크(Joseph Soloveitchik,1903-1993)는 1965년에 “Lonely Man of Faith”(고독한 신앙인, 2011년 Korean Publishers Jerusalem에서 재판이 되었으나 아직 한국어로는 번역되지 않았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히브리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처음 두 장에 주목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출현하는 아담(Adam – 그 뜻은 고유 명사 ‘아담’이 아니라 보통 명사로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을 분리하여 해석합니다. 창세기에 출현하는 인간 창조 스토리에는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인간형, 두가지 판이한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담은 ‘아담I’로 명명하고,  2장에 나오는 아담은 ‘아담II’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는 이 강의안을 쓸 때까지 아직 솔로베이치크의 이 책을 구하지 못하여 읽지를 못했습니다만 데이비드 브룩스의 책과 저의 성서 신학적 이해를 덧붙여서 ‘아담I’과 ‘아담 II’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 아담I은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에서 출발합니다.
문서설에 의하면 이 귀절은 E 문서입니다. ‘하나님’(Elohim)이 나옵니다. 그분은 ‘자기의 모습(imago Dei)을 따라서 사람을 만듭니다’ 인간 창조에 있어서 무슨 재료를 사용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이 앞에서 다른 모든 만물을 만드실 때도 ‘이르시되’ ‘가라사대’로 되어 있으니까 인간 역시도 하나님이 그냥 말씀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ex nihilo). 그렇게 만든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은 5가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것들은 모두 ‘승리하는 인간형의 5가지 성공논리’입니다. 이것들은 많은 출산, 대량생산, 끊임없는 노력, 창조, 발견, 건설, 쟁취, 드높은 위상, 승리하는 인간형을 나타냅니다. 이는 정복의 논리요, 성공과 성취의 이론입니다. 목적 지향적 인간이 아니라 방법 제일형 인간입니다. 실용주의적 인간입니다. 경제학적 논리위에 서서 개인의 사익을 극대화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효용성의 확대를 제일의 목표로 삼습니다. 아담 I의 좌우명은 ‘성공’과 ‘승리’입니다. 오직 외적만족을 얻는데 목표가 있을 뿐입니다.    

 
아담II는 창세기 2장 7절과 18절을 중심한 인간 해석입니다.
물론 이 귀절은 창세기 1장과는 전혀 다른 문서인 J기자의 편집 귀절 중 하나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와’(Jehovah)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물론 오늘날 구약 학자들은 그 발음이 ‘여호와’가 아니라 ‘야웨’ 혹은 ‘야훼’라고 봅니다. 영어표기로는 Yahweh이고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표기했기에 YHWH로 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망령된 일이라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함으로 자음으로만 표기되어있는 이 YHWH를 ‘아도나이 –나의 주님- 이라고만 불러오다가 그만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그냥 말씀만 하심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재료(材料)를 사용하여 만드십니다. ‘땅의 흙’으로 사람의 외적 형상을 만드신 후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 곧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7). 그 다음 이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 곧 하나의 인간만으로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의 배필을 만드십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 하시니’ 서로 돕는 짝을 만들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창세기 1장과는 달리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먼저 인간부터 만드신 후 그 다음에 흙으로 각종 짐승들과 조류들을 만드십니다. 창조의 순서가 다릅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그것들의 이름을 짓게하고 이들 자연계와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여기 창세기 2장에는 1장과 달리 대단히 심오한 ‘4 가지 도덕적 논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그 제    1차적 재료가 흙이다.
둘째, 사람은 혼자서는 불완전한 존재다.
셋째, 사람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한다.
넷째, 사람은 자연계와도 서로 공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II는, 사람이란 유한한 존재요,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에 따라 내적인 고요함과 평화, 겸손과 선한 의지, 친밀성과 사랑, 자기 희생과 초월적 진리에 대해 순종하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아담II는 방법이나 수단 보다는 목적과 이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늘 자신을 성찰하며 욕망을억누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섬김의 논리와 포기의 논리 위에 서서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아담II의 좌우명은 ‘박애, 사랑, 은총’입니다. 인생의 외적 성공이란 실패로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믿으며, 가장 큰 실패는 자만이요, 가장 위대한 성공은 겸손이라고 확신합니다.    
 

■서양 윤리학사의 한 획을 긋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칸트의 견해를 극명하게 드 러내주는 특징은 도덕적 자율성에 토대를 둔 이성의 사실로서의 도덕법칙과 선의지의 실재성,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칸트의 도덕이론이 지니고 있는 주요한 성격들을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우며, 더욱이 칸트의 윤리설에 가해지는 많은 비판에 온전히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하여 칸트의 도덕이론을 도덕적 실재론으로 해석하면서 도덕적 실재론과 도덕적 반실재론 논쟁에 있어서 실재론자로서 칸트의 도덕적 견해가 갖는 몇 가지 특징을 객관주의, 내재주의, 경험적 직관주의, 절차적 구성주의, 덕 의무 등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통상 현대윤리학에서의 도덕적 실재론과 도덕적 반실재론 논쟁은 도덕적 주장의 진리 조건의 충족 여부 및 이를 논증하는 방법론적 관점과 관련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리며 전개되어 왔다. 만일 칸트의 도덕이론이 함의하고 있는 특징들을 보다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다면, 이를 통해 현대 도덕적 실재론 논쟁과 관련하여 도덕적 실재론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진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칸트의 도덕이론이 쟁점이 되고 있는 견해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며, 또 쟁론이 되고 있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솔로베이치크가 본 아담I 과 II에 대한 성찰은 서양 철학사와 윤리학에서도 퍽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오래된 도덕적 실재론(Moral Realism)과 18세기 이후 제기되어 온 도덕적 낭만주의(Moral Romanticism)는 솔로베이치크의 종교적 이론에 대한 철학적 개념들 입니다. 도덕적 실재론자들은 칸트가 인간을 가르쳐서 ‘뒤틀린 목재’라고 말하기 훨씬 이전 부터 인간은 죄인이요, 결함으로 가득찬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와 인간지식의 편협성을 내다 보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의 이성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인간은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결코 자신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인격을 연마하고 수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 부터  단테, 데이비드 흄, 에드먼드 버크, 몽테뉴, 죠지 엘리엇, 사무엘 존슨, 라인홀드 니버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인들과 도덕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한계를 역설해 왔습니다.
 
    살인과 거짓말, 간음과 도적질, 탐욕과 불신이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이것들이 나쁜일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이것들을 이겨내지 못하는가? 인간은 ‘뒤틀린 목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덕적 실재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오직 신의 은총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을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이들 도덕적 실재론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이기려고 몸부림 치면서 동시에 인간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격은 지적으로 가르쳐서 연마되는 것이 아니라 성찰, 노력, 그리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겸손, 절제, 과묵, 중용, 존중, 자기 수양은 평생토록 해야 할 숙제다. 거친 도전을 받아도 온화하게 응답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침묵을 지키고 모욕을 받아도 위엄을 잃지 말고 자극을 받아도 자제력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거나 희생을 하게 될 때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게 하고 내가 하는일이 인상적인지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절대로 독선적이거나 뽐내거나 고집을 세워서는 안 된다. 내가 얼마나 크고 많은 일을 했는지 또 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자랑하거나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 동안은 너는 아직도 인격자가 아니다’라고 가르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날 미국 뉴욕에서는 수 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We have Victory! We have won!’을 외치면서 승리의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미국의 한 공영 라디오 프로그램인 Command Performance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마를레네 디트리히, 케리 그란트, 베티 데이비스가 출연하여 대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긴 것은 우리가 그들 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감사와 기쁨 만이 아니라 슬픔과 의혹도 동시에 일으킵니다.’ 도덕적 실재론자들은 원자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가지고 이긴 군사적 승리는 참된 승리가 아니기에 오히려 이런 때 일 수록 더욱 더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삼가야하고 지나친 자만심이나 자기애로 흐르기 쉬운 인간의 본능에 제동을 걸어야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책에는 더 많은 실례들이 있지만 하여튼 지난세기까지는 그래도 아담II를 지지하고 도덕적 권위를 지지(Support)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는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아담 I과 도덕적 낭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하여튼 계몽주의 이후 부터는,
전통적인 도덕적 실재론에 맞서는 새로운 도덕적 낭만주의자(계몽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소가 첫 깃발을 들었습니다. 인간성 속에는 분명히 선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세상이 나쁘지 인간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인간 개개인과 자연계는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초창기 이 도덕적 실재론과 도덕적 낭만주의는 서로 다른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당한 선에서 공존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자 이 두 주장에는 균형이 깨지고 도덕적 낭만주의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 도덕율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믿어야한다’ ‘인간은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으로 부터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나 충동을 두려워하거나 숨겨서는 않된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못할 일도 없고 이루지 못할 기술도 없고 넘지 못할 산도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도덕적 낭만주의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넓혀 갔습니다. 전에 도덕적 실재론자들은 아이가 무엇을 훔쳤으면 야단을 치거나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낭만주의자들은 이 경우 아이가 훔친 물건과 비슷한 것을 선물로 사주면 아이는 사랑을 배우고 다시는 훔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벌로 다스리지 말아라 칭찬이 최고의 훈육이다 사랑으로 안아주어라’ 이것이 도덕적 낭만주의자들의 교육 철학입니다. 물론 도덕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도로시 파커는 ‘오늘날 미국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동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런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불신하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해리 오버스트리트 ‘성숙한 마음’) ‘누구나 마음 속에 있는부정적인 생각은 거두어 내고 스스로를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노만 빈센    트 필 ‘긍정적 사고의 힘’) ‘자신을 사랑하고 칭찬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 입니다’(칼 로저스) ‘나는 사랑스럽고 할 수 있습니다’(IALAC – I Am Lovable And Capable의 약자)    ‘자아는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나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느낌이 좋으면 그건 옳은 일입니다. 삶의 규칙은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 방식에 충실하면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챨스 테일러 ‘진정성의 문화’)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미국의 대학 졸업식에서 들려오는 축사나 졸업연설은 거의가 천편 일률적입니다. ‘당신들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자신을 믿으십시오. 자신에게 솔직하 십시오. 열정을 가지십시오. 한계를 거부하십시오. 운명을 개척하십시오. 당신은 위대하기에 반드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자신을 역사와 세계와 무대의 중심에 놓으라고 충고합니다. 
 

 
    조엘 오스틴을 비롯한 복음주의적 설교자들도 비슷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이 우주에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승리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설교자들도 대부분 이런 식의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설교를 마치 유행처럼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전통이나 불의에 대한 항거는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SNS에서 ‘좋아요’라는 댓글이 많이 달리면 자기 말은 맞고 자기는 승리했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셀카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자기 점수는 자기가 매깁니다. ‘나는 정말로 특별한 존재야!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라고 외치면서 자기광고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전 까지는 최소한 겉으로나마 겸손하고 신중하고 고상한척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아예 드러내놓고 ‘나는 돈 벌거예요. 돈이 제일 중요해요. 돈 보다 더 중요한게 뭔데요? 속으로 호박씨까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세요’ 라고 말해도 괜찮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엔 마트에 들어가면 담배는 열린 선반 위에 진열되어 있었고 콘돔은 계산대 뒤에 보관이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콘돔은 버젓이 열린 선반 위에 눈에 잘 띄게 진열해 놓고 담배는 계산대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모든면에서  Little Me는 사라지고 Big Me가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은 자기를 낮추라고 가르쳤는데 이제는 ‘네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부추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60년대 전반 까지는 자기 희생적 태도, 겸손, 공동체를 중하게 여기는 마음, community, share, united, common good, character, conscience, virtue, bravery, gratitude, humbleness, kindness 같은 말들이 문화의 중심 개념이었는데 그 후 부터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화려한 자기 도취와 자기 표현, 자기 중심적인 것들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I 이 존경받는 도덕적 낭만주의가 주도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 우리는 아담I 과 아담II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가면(Persona)을 쓰고 사는  우리 인간들은 겸손, 절제, 과묵, 중용, 존중, 자기수양과 같은 아담II 와, 반대로 이기심, 자만심, 탐욕, 쟁취, 만족, 자기기만과 같은 아담I 사이를 오가면서 편리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면서 살아갑니다. 도덕적 명령과 현실적 이익 사이에서 괴로워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갈등과 고민이란 것도 오늘날 나이가든 기성 세대에게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젊은 세대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아담I을 따라서 살 것이냐, 아니면 아담II 를 따라가야 할 것이야 하는 개인적 양심의 갈등과 고민이 있고, 또한 인생의 근본적 태도에 대해서 갖게 되는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가치관의 충돌에서 오는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어떻게 이 둘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마추면서 살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데이비드 부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아담I 과 아담II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합니다.
 
첫째는,  인생의 목적, 목표를 바로 세우라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성스러움을 위해서 살 것인가?
        그는 인생이란 향락의 드라마가 아니라 도덕적 드라마라고 봅니다.
둘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촉구합니다.
        그에의하면, 인간이란 결함을 지닌 존재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생각보다 아는 것이 적고, 아주 작은 유혹에도 아주 쉽게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셋째는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좋은 점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내적인 갈등입니다. 괴  로와 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또 다른 본능이 있음으로 늘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갈등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내적 투쟁을 멈추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이기심, 편견, 오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과 싸우는 것은 사실 이길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길수 없기 때문이며, 단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고 봅니다. 선택과 포기 사이에서 싸우는 노력은 평생토록 이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다섯째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도움을 받으려는 태도입니다.
       전진과 후퇴, 후퇴와 전진 사이에서 우리에게는 적절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하느님, 보이는 가족, 친구, 조상, 규칙, 전통, 제도, 롤 모델 등이 우리의 갈등 현장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줍니다. 혼자서 이기기 어려울 때는 도움을 받는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는 애정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이고 동시에 애정을 베풀어야 할 너그러운 존재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는 이 내적 투쟁의 목표를 완성에다 두지 말고 보다 나은 성숙한 상태에다 두는 것입니다.
       성숙이란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이전의 나와 비교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결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평생토록 그 결함과 싸우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도 결함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기쁜 소식입니다.    
       결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 입니까? 우리는 모두 발을 헛 디디고 휘청거리면서
       걸어갑니다. 인생의 묘미는 헛디디는 데 있고 인생의 아름다움은 휘청거리면서도 좀 더 우아하게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 ‘인간의 품격’은 제 I 아담과 제 II 아담 사이에서 자신의 내적 갈등과 대립하여 싸우면서 그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한 사람 8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하에서 간단 간단하게 이들의 삶의 태도와 생각들을 다듬어보겠습니다.    
 
* 프랜시스 퍼킨스(Francis Perkins 1880 – 1965) – 1911년 3월 25일 뉴욕 최대의 섬유공장 트라이앵글 블라우스사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7,8,9층에 자리잡고 있던 제조층의 여공들은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소방차의 호스는 6층 이상은 물을 뿜을수가 없었습니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의 손버릇을 단속한다고 모든 출입문을 잠궈놓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었던 젊은 여공들은 하루 13시간 작업에 비참한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번져가는 불길 속에서 많은 여공들이 불길에 사라져 갔습니다. 마침 두 소녀가 창문을 깨트리고 서로 손을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데려 가실려거든 고통 없이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두 어린 이민자 소녀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이를 바라보던 수많은 시민들 중에는 프랜시스 퍼킨스라는 뉴욕 소비자연맹의 사무총장도 있었습니다. 퍼킨스에게 이 일은 그녀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의 탐욕, 제도의 불법과 사악함에 치를 떤 퍼킨스는이후 평생을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에 헌신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여성장관. 루즈벨트 대통령 내각에서 12년동안 노동부장관.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주 40시간 노동 시간의 제도화. 아동노동 제한 법. 최저 임금제도. 고용보험제도의 도입. 30% 노조 가입률등을 이루어내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해냈습니다. 미국돈 10불짜리에는 그녀의 얼굴 모습이 나옵니다. 퍼킨스는 말합니다. ‘겸손 없이는 절대로 위대한 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겸손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이 모욕과 굴욕으로 그를 겸손하게 만드신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도덕적 분노가 인생을 바꾼다’ ‘주변사람들에게 기쁨이나 좋은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이냐?,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내게 무엇을 하라고 하느냐를 생각해야한다’  ‘Job은 내가 구하는 것이고 Vocation은 하느님이 주시는 일이다’  ‘job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vocation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내게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하고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 퍼킨스나 영국의 여왕은 자기가 한 일도 ‘I did this’라고 하지 않고 ‘One did this’라고 말한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 중 그 무엇이든 최종적인 것은 없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 -1969) 웨스트포인트 출신. 미국의 군인.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 사령관.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서 전공을 세움. 초대 나토 사령관. 미국 제34대 대통령. 그가 들려준 말들 중에서 기억해야 할 말들이 있습니다. ‘죄와 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억제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KO를 당한 다음 일어설 때 미소를 지을 수 없다면 절대로 상대를 이길수 없다’ ‘어렸을 때는 분노를 누르는 법을 배우고 커서는 야망과 능력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쟁에서 배우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순간 마다 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둘째는 그래도 끝까지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이다’
 
 
‘기다리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다’ ‘기다리면 된다. 대통령도 기다릴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극도로 상반되는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분노와 질서. 믿음과 의혹.
아담I과 아담II. 안전의 욕구와 위험의 감수. 자유와 통제가 공존한다. 여기에는 균형과 비율이 요구된다’
‘큰 문제는 특정한 원칙이나 하나의 시각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중용은 갈등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중용의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질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목표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안다.
중용이란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 도로시 데이 (Dorothy Day 1897 – 1980) 미국의 크리스챤 아나키스트. 여성운동가. 반전 평화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작가. 언론인. 반핵운동가. 흑인 민권운동가.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가. 75살에도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가담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일생동안 괴로운 사람들에게는 평안을 주고, 평안한 사람들은 괴롭게 한 사람’으로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훈장을 받음. (2015년 프랜치스코 교황이 미국 의회 연설시 한말 – 미국에는 위대한 인물 네 사람이 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토마스 머튼, 그리고 도로시 데이 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더 나온다고 했습니다’ ‘무슨 문제든지 유일한 답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도로시에게 있어서 분리는 죄였습니다. 하느님과의 분리든 사람들과의 분리든 분리는 죄요, 통합은 성스러운 겁니다. 도로시는 모든 큰 것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 정부 큰 회사 그리고 큰 독지가 조차도 다 의심스러웠습니다. 정부, 정권, 회사, 학교, 언론, 종교단체, 지식, 돈, 명예, 그 무엇이든지 크고 많은 것을 갖게 되는데는 그 과정과 그것을 유지하는 체계가 다 의심스럽다고 보았습니다. 도로시나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거처로 출퇴근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이 산 사람들이고 그들 자신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출퇴근하는 선교사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출퇴근하는 빈민 사업가는 빈민 사업가가 아닙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고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는 예수가 어디 있었습니까? 계속 도로시의 말입니다. ‘다른사람의  죄는 자기 자신의 더 큰 죄를 발견하게 해준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만죄를 짖는다.    봉사하는 일은 범죄의 유혹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기는 시련을 겪을 때이다. 시련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해 준다. 시련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파악하게해 준다. 시련은 모든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시련은 평상시  늘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던 사람을 나는 정말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데 그 동안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시련은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이 된다’ ‘칭찬받고 감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도로시는 자선을 베푼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 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게 자선을 베풀수 있다는 말인가?’고 묻습니다.
 
      도로시는 젊은 날 포스터 배터햄과 결혼했으나 이혼을 했습니다. 얼마후 포스터는 나네트라는 여성과 재혼을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전 남편 포스터가 도로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네트가 암에 걸렸는데 좀 와서 나네트를 지켜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도로시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의 부탁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곤 스태튼 섬으로 가서 자기의 전 남편 포스터의 새 아내 나네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 때 도로시는 나네트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해야 할 태도라고 믿었습니다. 안심시키는 말이나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풀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부산을 떠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때 그 자리에 그와 같이 있어 주는 것, 단순하게 밤을 새워 주는 것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며 진정으로 인간을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도로시는 교회의 결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인간 세상에는 일정한 제도와 틀도 필요하다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 죠지 마샬 (George Catlett Marshall 1880 -1959) 미육군 군인. 육군 원수. 육군참모총장. 주중대사. 국무장관. 미국 적십자사 총재. 노벨 평화상 수상. 제2차 세계대전시 미 육군참모총장. 전후 마샬 플랜으로 유럽 부흥에 공을 세우고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음. 그의 말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나는 화장실 청소 같은 잡일이 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마샬 장군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진실성이었습니다. 마샬의 유언장에는 ‘국장은 하지말게. 내 관을 국회 의사당 로툰다 홀에다 가져다 놓지 말게. 그냥 예배당에서 하면 되네’ 그의 장례식은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 몇명과 그의 이발사 니콜라스 토탈로만 참석했으며  장군 묘역이 아닌 일반 장교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 필립 란돌프(Philip Randolph 1889 – 1979) 미국의 노동운동과 공민권 운동 지도자. 미국노동위원회    초대 위원장. / 배이어드 러스틴 (Bayard Rustin 1912 -1987) 미국의 시민권, 성소수자 권리 운동가.  동성애자. 비폭력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자. 필립 랜돌프가 조직한 1963년 워싱톤 행 진의 핵심지도자.

     그의 말입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고난을 당한다. 불의한 자들은 번창한다. 옳다고해서 꼭 승리하는 세상은 아니다. 인간은 그 존재 부터가 죄인이다. 인간은 아무리 선한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불의한 것이라고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이타적 행동은 자신의 허영과 위선을 채우는 도구일 뿐이다. 인간은 힘을 얻으면 힘이 있어서 타락하고 힘이 없으면 없어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순간은 물론이고 유리한 순간에도 죄를 짓는다.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은 그의 정의로움에 취하여 타락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도덕적이지 않다’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만큼 순수한 존재가 아니다’   
 
 
 *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 1819 – 1880) 본명은 메리 앤 에반스(Mary Anne Evans).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국의 여류 소설가. 대표작으로는 플로스강의 물레방아(1860), 사일러스 마녀(1861), 미들 마치(1871), 대니얼 데론다(1876) 등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복음주의적 신앙인이었으나 후에는 보편적 인간성에 입각한 과학주의, 실증주의적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매리 앤은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교회에는 다니고 싶지 않았다. 여러 달 동안 두 사람은 교회 출석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 아버지는 진짜 순수한 교인이었고 매리는 진짜 순수한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두 사람은 타협점을 찾게되었다. 메리 앤(Mary Anne)이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 대신 아버지 에반스(Evans)와 아버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매리가 기독교 교리를 믿지도 않고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매리는 자신의 확신에 따라 용감하고 급진적인 행동을 할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예의와 관습을 지키면서 자신의 생각대로사는 방법을 배워야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모든 사람은 다 자기와 똑같은 신앙과 생각을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엘리엇이 남긴 말들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통제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사랑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가능성은 포기하게 된다. 신랑과 신부는 사랑의 약속을 통하여 사랑의 국지성과 제한성을 인정하게된다. 결혼에 동의하는 것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알리겠다는 약속이다’ ‘
 
결혼이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행동이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서약은 더 크고 넓고 위대한 다른 사랑들을 제한하거나 줄이거나 포기하겠다는 암묵적 약속을 하는 부도덕한 행위가 된다’는 포이에르바하의 말을 상기하게 됩니다.
 
‘당신이나 내가 평생을 그런대로 나쁘게 살지 않은 것은 반은 드러내 놓지않고 말없이 성실하게 산 사람들 덕택이고 또    다른 반은 지금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 덕택인 줄 알아야한다’    
 
 
* 아우구스티누스(라틴어로 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 – 430 ) 기독교 신학자. 주교. 교부철학자. 대표적 저서로는 고백록, 신국, 삼위일체론 등이 있다. 그의 책에 나온 말들입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손.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는 발길.   불행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 한숨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오만은 모든 죄의 뿌리다’    ‘모든 선행은 악행의 고백에서 부터 시작된다’ ‘정의의 시작은 악의 처벌에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죄를 지을 뿐만이 아니라 죄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다. 우리는 유명인사들이 스켄들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가 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게 되면 실망하는 존재들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심쩍어하는 것이다’  ‘안을 향하는 길이 사실은 위로 가는 길이다. 내면을 파고드는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선한 일을 할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선에는 항상 악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에는 자만심이 따르고 정직함에는 무자비함이 따라오고 용기에는 만용이 동반된다’ ‘우리의 내면 세계는 밤과 낮처럼 구분이 되는 게 아니다. 한 쪽에는 순수한 빛만 있고 다른 쪽에는 칠흑 같은 어두움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들>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스펙을 쌓는 식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교회 집회에 부지런히 출석하고 목사가 낸 숙제를 열심히 해서 스펙을 많이 싸아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선물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걸 돈내고 사려고 한다’  ‘은총을 받는 길은 은총에 대한 인간의 능동주의적 충동을 포기하는 길뿐이다’라고 말 합니다.    
 
* 사무엘 존슨 (Samuel Johnson 1709 -1784) 영국의 시인. 평론가. 영문학자. 처음으로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을 만듬. 그는 ‘글쓰는 일은 꼭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현실에서 선이 악을 이기는 글은 쓰기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선과 악이 공존하는 정도의 글을 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슨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서’ 교인이 되었습니다. 존슨의 말입니다. ‘나는 교회는 가지 않지만 교회앞을 지날 때는 모자를 벗네’ ‘결혼에는 고통이 따르고 독신에는 심심함이 따른다’ ‘돈을 바라고 결혼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사랑만 바라고 결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부패한 사회일수록 법이 많다’ ‘애국심이란 불한당들의 마지막 도피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것저것 생각만 하다가 끝나는 것이 인생이다’ 존슨에게는 모든 것이 다 도덕적 대결이었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자기와 싸웠 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의 동기를 의심했습니다. 자기 속에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속성과 싸움을 걸었습니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연구하거나 세상을 알기 위해서 자기를 연구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인간에게는 세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이해  하는 것
둘째는 이해한 것을 말하는 것
셋째는 말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 결론입니다. 균형잡힌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시드니 인문학교실’ 목표중 하나는 ‘죽을 때까지 고민 만이라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 Questions & Comments    11    시드니 인문학교실 Repeat 홍길복의 일곱 번째 강의: 인문학의 주제-사람III 04 / 05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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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 "도덕적 분노가 인생을 바꾼다."
 
로마제국과 유대왕정 그리고 헤롯성전의 종교권력의 착취와 수탈로,
'일용할 양식'이 '하루 삶'이 되 버렸던, 그와같은 '갈릴리 동포의 비참한 생활'을 직시했던,
'예수의 분노'를 어찌 생각하는가?
 
역사적 사건으로서 로마제국과 유대왕정 그리고 헤롯성전의 종교권력의 착취와 수탈이 갈릴리 동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일상적인 양식이 부족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분노를 경험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부자들과 종교 권력자들의 탐욕과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땅을 주유천하 하셨습나다.  또한 예수님의 비판과 교훈은 그분의 가르침과 뒤이어 그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분노는 그가 사랑과 동정심으로 가득 찬 인간으로서, 불공정하고 부당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불만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