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안병무, 변선환

Narin Pusil 2022. 11. 14. 12:48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

대한민국의 신학자이며 한신대학교의 교수였다. 민중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호는 심원(心園)이다.  

1922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여성운동가 박영숙과 결혼했고, 박영숙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의 민중신학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도 한국신학연구소는 계간지 《신학사상》(神學思想)와 신학서적들을 간행하고 있으며, 진보적인 기독교출판사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안병무는 1953년 5월 1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를 홍창의 등 12명의 형제들과 함께 ① 생활공동체입체적 선교공동체평신도교회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정신을 가지고 설립하였다. 저서로는 성서연구서 《역사와 해석》(1981년作, 대한 기독교 출판사 刊),《갈릴래아의 예수》 등이 있다. 

 

“성서에는 민중을 표시하는 두 그리스어가 있지요.

하나는 ‘라오스’(laos)이고 또 하나는 ‘오클로스’(ochlos)입니다.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과 통하는 말로 어떤 제도권 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민중의 칭호인 데 반해서

오클로스는 권외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천민들입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이들 오클로스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주제는 오클로스입니다. 나는 민중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민중은 스스로 합니다.

죄인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새 질서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너희가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칼럼] 다시 읽는 안병무의 「갈릴래아의 예수」

"칼럼을 쓰고 있는 필자는 안병무 교수가 1970년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초빙되면서부터 가까이 모시면서 그의 사랑을 받았고, 안 박사의 인간적 참 실상과 소위 민중신학에로의 올인(all in)하는

veritas.kr

[칼럼] 다시 읽는 안병무의 「갈릴래아의 예수」
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본지 자문위원)

Sep 28, 2022

 

 

1. 한 성서학자의 탄생 100주년이 뜻깊은 이유

 

지난 여름은 한반도에서도 무더위, 태풍, 홍수 피해 등 자연이 주는 시련과 고통이 컸다. 특히 수확을 앞둔 농촌의 과수원이나 논과 밭 농작물 피해를 당한 동족과 소상인들 및 반지하에 생활하는 주민의 고통이 컸다. 그럼에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천지불인'(天地不仁) 이라는 옛글에도 불구하고 오곡백과가 출하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에는 또 다른 특이한 수확의 학술잔치가 요즘 한창 준비되고 있다. 한국 성서신학계 제2세대를 대표할만한 안병무 교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하는 아주 중요한 학술잔치다. 그가 개척한 향린교회를 비롯하여 민중신학회, 크리스챤 아카데미,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한국여성신학회, 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등 20여 개 진보적 연구단체들이 참여하는 공동주관의 학술잔치다.

 

칼럼을 쓰고 있는 필자의 기억에 남는 한국 신약성서학계 제2세대로서 활동하고 업적을 남긴 학자들로 전경연, 허혁, 안병무, 김용옥, 문상희, 박창환, 김철손 교수 등 이름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안병무(1922-1996)는 민중신학자로서 보수적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계에서 보다 세계 성서학계에서 높이 인정받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성서신학자이다. 그의 저술물들이 집대성되어 6권으로 편찬된 『안병무전집』(한길사, 1991)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안병무 선생은 1922년 평안남도 신안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채 1살도 되기 전에 유교경전에 밝은 한학자이면서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결단에 따라 만주 간도로 이주하여 청소년 시기를 간도에서 살았으니 북간도가 그의 실질적 고향인 셈이다. 당시 간도는 일본군이 주둔한 점령지였으나, 한민족의 어려운 사람들이 개척자적 정신을 가지고 많이 이주해간 땅이어서 말하자면 '한국의 갈릴래아'였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문익환의 고향 마을 명동촌,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명동촌이 그 대표적 예이다. 안병무는 간도 땅에서 청소년기를 지나며 두 가지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이요, 다른 하나는 가난과 천대에 시달리는 조선민족과 민중에 대한 가슴앓이 하는 아픈 연대감이다.

 

안병무 선생의 아호는 심원이다. 심원 안병무는 간도 지역 용정시에 있는 캐나다 선교부계열 용정중학교에서 강원용, 문동환, 이상철 등과 함께 김재준의 진보적 기독교 샘물을 마신다. 해방 후 분단 상황에서 1946년 남하 이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신학교를 재건하면서, 「야성」,「현존」잡지를 통하여 그의 목소리를 내다가 향린교회라는 평신도 공동체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느끼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유럽 성서신학계의 모든 진수를 철저히 연구한다. 1970-80년대는 안병무의 성서신학이 민중신학으로서 꽃필 때이며, '3.1민주구국선언문'에 서명자로서 감옥 생활을 4년 동안 경험하면서 구체적으로 한국의 민중체험을 하고, 그가 평생 추구하던 '역사적 예수'를 민중들의 삶의 사건 속에서 만난다.

 

 

2. 갈릴래아와 '역사적 예수'

 

칼럼을 쓰고 있는 필자는 안병무 교수가 1970년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초빙되면서부터 가까이 모시면서 그의 사랑을 받았고, 안 박사의 인간적 참 실상과 소위 민중신학에로의 올인(all in)하는 동기와 과정을 지켜보았다. 안병무 교수에게서 나는 3가지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에 관하여 새롭게 눈뜨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 첫째는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깊은 눈뜸이요, 그 둘째는 예수의 공생에서 갈릴래아라는 지명이 갖는 의미에 눈뜨면서 맨 처음 복음으로 돌아가려면 '갈릴리의 복음'이어야 한다고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째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중층적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 현실성에 대하여 마치 날고기를 직접 입에 넣고 씹는 신학적 회심을 한 점이다.

 

안병무라는 신학자가 누구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안병무 그 신학자는 학자이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 못지않게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고 사모하여 평생 학문하고 투쟁하고 증언하며 산 사람이다." 속된 말로 "그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 그것을 학술적 용어로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고상한 말로 학계에서는 표현한다.

 

안병무는 소년기 유교적 가정 분위기 때문에 일찍부터 유교 경전 공부도 하였고, 성장하면서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비숫한 연령의 한국 어느 신학자보다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그는 공자, 붓다, 노자, 소크라테스보다도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깊이 알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인간 예수에 대한 존경, 흠모, 사랑의 열정이 안병무로 하여금 불트만이라는 유럽 신학계의 거성이 주장하는 '케리그마 그리스도'에 안주하지 않고, 양식사학파의 예수론이나 심지어 그가 한때 심취했던 '실존론적 그리스도론'을 넘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라는 어휘가 너무 신학적 전문용어가 되어버려서 안병무의 예수사랑 진의를 깨닫기 어렵게 만든다. '역사적 예수'라는 어휘는 '신앙적 그리스도'라는 어휘에 대조하여 생겨난 말이다. 크리스천들이 예배 시간에 너무 쉽게 입에 올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휘는 단순한 호칭이나 이름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 구세주)이시다"라는 가장 짧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신앙고백문'의 줄임말이라고 폴 틸리히는 갈파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개 단어로 구성된 표현을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 목회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고 무게중심이 거기에 실려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2,000년 기독교 신학사는 왜 갈릴래아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라고 하는가 변증하기 위해 시간을 바쳤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 로고스(말씀)의 화육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 신성을 지닌 분, 등등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론'이 신학의 핵심이었다. 물론 초대교부 시대부터 가현론자(假現論者)과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과 싸우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논쟁점이 '참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라는 교리적 변증론이었던 것이고, 정작 인간 예수의 '리얼한 실상'은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신앙적 경건성이 '역사적 예수의 리얼한 실상'을 철저하게 묻기를 주저하게 하였다.

그것은 불경건한 태도이고 심지어 불신앙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독생자요 신성을 지니신 영원한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것은 신자의 경건성이 용납하지 않았다.

 

둘째는, 학문적으로, 특히 19-20세기 신약성서 학계의 복음서 연구 결과, 불트만이 그 대표적으로 말하기를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를 알려주려는 객관적 예수 전기 작품이 아니고,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복음선포(케리그마)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우리에겐 없다' "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명저로서 평가받는 『예수』와 『공관복음 전승사』는 역사적 예수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결정적 근거를 제시한 듯했다.

 

안병무는 불트만이 가르쳤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가서 불트만의 신학을 철저히 연구했다. 20세기 위대한 성서신학자의 학문적 연구태도와 그 업적을 존경하고 큰 영향을 받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불트만의 불가지론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안병무는 계속 역사적 예수를 찾고 물었다. 안병무는 서양신학자 불트만과 그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역사적 예수의 삶과 언행(言行) 없이 어떻게 케리그마 그리스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안병무는 역사적 예수 추구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고, 마침내 한국의 민중들의 삶과 행태 속에서 큰 영감을 얻고 갈릴래아 민중들 '오클로스'와 혼연일체 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3. 갈릴래아 오클로스의 '삶의 자리'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갈릴래아는 새번역 성경에서 말하는 갈릴리(Galilee)지역을 말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갈릴리 바다'라는 말에 익숙하여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 주변을 말하는 지역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본래 호수 이름은 게네사렛 호수인데, 그 호수가 매우 큰 호수이고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라고 흔히 부르기도 할 뿐이다. 예수님 당시 요단강 서편 쪽 팔레스타인의 지도를 맘속에 그린다면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4:3-4) 증언처럼 팔레스타인 맨 아래 지역은 이두메, 그 윗 지역은 유대, 그 위쪽은 사마리아, 그리고 맨 위쪽 지역이 갈릴리였다. 우리나라 지도로 예든다면 갈릴리는 평안남북도 지역에 해당하고, 황해도 및 경기북부 일부는 사마리아 지역에, 그리고 서울 아래 지역은 유대 지역에, 그리고 제주도가 육지에 붙어있다면 이두메에 해당한다.

 

갈릴래아(갈릴리)는 밀농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살리는 곡창지대였지만, 앗수리아와 바빌로니아와 로마 등 식민지 제국의 탐욕과 유대민족 부유층 및 사제계급에 의해 '이방의 갈리리여!'(이사야 9:1-2, 마4:15-16)라고 불리우는 호칭처럼 정통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의 거주지역이다. 반체제적인 기질이 농후한 열혈당원(젤롯당)과 예루살렘 사제집단의 교권주의에 반기를 드는 무력항쟁파와 폭도들의 근거지였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고향 나사렛에서 성장 시기와 공생애 대부분 시간을 보낸 활동 지역이 바로 갈릴래아(갈릴리)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대부분 농촌이나 어촌의 주민들을 복음서 기자들은 '오클로스' (민중)라고 불렀다. 시민 혹은 국민의 의미를 지닌 '라오스'에 대조되는 어휘를 썼다.

 

갈릴리 지방의 민중들의 '삶의 자리'란 그들이 처한 정치경제적, 문화종교적, 인종차별적 삶의 총체적 정황, 사정,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요, 그늘에 앉은 자들"(마4:16)이었다. 절대빈곤의 소농들과 어부들, 땅 없는 소작인들, 율법을 규정대로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길 잃은 버림받은 양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안병무는 이들 갈릴래아 '오클로스'(민중)들에 대하여 새롭게 눈뜨고 난 이후, 그 중요성을 발견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르며 섬기면서 끝까지 십자가 처형 형장을 지켰고,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되어 복음을 전승해준 '갈릴래아의 여인들'을 주목하도록 우리들의 눈을 뜨여주었다.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실존론적 의미에서 개인의 맘속의 절대평화나 사후에 맞이하는 초월적 하늘나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압도적으로 갈릴래아의 오클로스들에게 정치경제적 절대빈곤과 억압수탈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병 치유, 율법과 성전 종교가 덧씌어 준 종교문화적 옥죄임과 죽임세력을 극복하여 '생명의 빛'을 되찾아주는 '현실적 생명 살리기 운동'으로서 그의 일차적 사명을 삼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진리와 은혜 안에서 행하는 '새로운 삶의 질서 개벽운동'이었지 흔히 오해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좌파적 사회혁명도 아니었다. 좌파적 사회혁명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만사형통의 보편적 기독교 신학이기를 거부하고 원하지도 않는다. 물론 더 깊이 논쟁해야 할 신학적 주제들도 많다. 특히 예수의 부활사건 이해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안병무를 비롯한 한국의 주체적 민중신학은 정통적 서구신학을 유일한 신학인 양 '전달, 복습, 반복'하는 한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등애'가 된 것처럼, "진솔한 예수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도록 하는 꺼지지 않는 불기둥이요 기득권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 어깨에 내려치는 죽비(竹篦)가 될 것이다.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

 

        전태일의 죽음이 던진 충격
        죽어가고 있는 사회와
        신음하는 민중 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뼈저린 반성

 

1971년 11월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가 죽으면서 외친 목소리는 광야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안병무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선 자리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된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노동자 전태일!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학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눈을 뜬다. 그러나 그 관심사는 ‘인권’이라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권’이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권리가 박탈되는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인식하고 그 밑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청년 전태일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민중을 정확히 바라보고 각계에 호소했으나 이 사회는 카프카의 ‘성’처럼 그에게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육탄으로 이 굳은 성을 폭파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세례를 짙게 받은 안병무는 세상을 새롭게 만나고 있었다.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7)수난의 길에서 역사의 주인공 ‘민중’을 만난 신학자

1973년 가을,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 연구실로 안병무(安炳茂·1922~96) 교수를 방문했다. 나는 그때...

m.khan.co.kr

 

 

 

 

 

 

김홍도 목사 등의 여론몰이에 '출교' 당했던 감신대 학장 고 변선환(邊鮮煥, 1927 ~ 1995)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7271

 

'종교다원론자 변선환', 사후 10년만에 사실상 복권되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고온 생지옥에 절규하는 미국 뉴올리언즈 주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수십만 명을 사망케 한 서남아시아의 쓰나미는 우연이 아니라...

www.pressian.com

   ‘종교의 벽’ 허문 변선환 박사, “기독교 밖에도 구원은 있다”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파문당한 뒤 ‘교회가 아니라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했던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1703~1791)가 세상을 뜬지 200년 만이었다.  

 

이듬해인 92년 5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금란교회에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은 김홍도 목사가 이끄는 금란교회 신자 3천여 명의 야유로 가득했다. 스승을 구하려는 감신대 대학원생들의 절규는 수천 군중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렸다. 감리교회 목사직을 파면하는 것은 물론 신자 자격까지 박탈한 것이었다.종교재판 받고 목사자격 박탈현실 눈뜬 신학, 타종교와 대화 수많은 ‘교회 희망’ 길러낸 스승변선환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 “나는 죽지만, 내 제자들은 노다지”라고 했다. 그가 내 제자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노 타치’(손대지 마라)의 어원인 ‘노다지’라고 했지만 말 그대로 그의 제자들은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을 나눠주는 노다지가 되었다.

 

그는 서구 신학의 틀대로 만들어진 모조품을 찍어내는 신학자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수천 수만년 동안 이 땅의 자연 속에서 잉태 되어온 영성을 깨닫게 한 스승이었다. 비록 변선환 자신은 오직 책 속에만 묻혀 산 학자였지만, 그로 인해 이현주 목사, 최완택 목사, 2년 전 타계한 채희동 목사 등 동양적 영성의 우물을 길러내는 영성가들이 나왔고, 한국와이엠시에이(YMCA) 환경위원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 연세대 교목실장 한인철 교수,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수원등불교회 장병용 목사, 홍천동면교회 박순웅 목사, 기독교환경연대 양재성 사무총장 등 한국 교회의 ‘희망’들이 탄생했다.

 

변선환은 평안도의 항구 진남포에서 태어나 유가적 가풍에서 자랐다. 해방 후 그를 기독교로 인도한 것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명인 신석구 목사였다. 신석구는 처음엔 3·1운동 가담을 주저한 인물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다른 종교인들과는 어울리지도 말고, ‘정치적인 일’엔 관여치 말라고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기도하던 중 응답을 얻은 뒤 가장 늦게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6명의 기독교인 민족대표 가운데 마지막까지 지조가 꺾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 신석구가 변선환의 첫 스승이었다.

 

 

감신대와 한신대를 거쳐 육군 군목과 이화여고 교목을 지낸 그는 미국과 스위스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 7년의 유학생활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나는 결코 서양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가족과 벗들과 동포들이 있는 고국의 역사 현장에서 우뚝 섬으로써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좋은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교적 기독교신학을 했던 두 번째 스승 윤성범한테 배웠던 변선환은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를 비롯한 많은 타 종교인들과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변선환은 공항에서 책을 보다가 비행기를 놓치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물 내려가는 소리가 자신의 오줌 소리인 줄 알고 30분을 바지춤을 내린 채 서 있을 만큼 뭔가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유학자 유승국 교수,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 강원용·김흥호 목사, 가톨릭 토착화 신학자 심상태 신부 등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렇게 집중했다. 대화가 깊어갈수록 그의 세계는 풍성해졌다. 마침내 그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성과 민중성(가난)을 놓치면 아시아의 신학일 수 없다면서 아시아인은 아시아의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늘 두루마기를 입고 보따리에 책을 싸들고 다니면서 제자들이 찾아오면 한결같이 을지로4가 우래옥에서 냉면을 사준 뒤 비원과 창덕궁 길을 걸으며 동양과 자연의 신비를 넘나드는 신학과 개인적 고뇌를 나누고, ‘스승의 노래’를 부르는 제자들 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변선환은 당시 감신대생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이정배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새해 첫날이면 꼭두새벽에 스승에게 안부전화를 드렸던 이현주 목사는 변선환의 10주기 추모 예배에 올린 ‘우리의 스승 변선환’이란 헌사에서 “우리의 진실한 친구 변선환, 살아있는 동안 너로 하여 우리 외롭지 않았노라’고 노래했다.어떤 이들은 자신의 구원은 뒤로한 채 마지막 한사람까지 지옥에 내보낸 뒤 가장 마지막에 지옥문을 나서겠다는 불교 지장보살의 서원을 들어 자신과 타자, 기독교와 타 종교, 선과 악 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다른 쪽을 지옥으로 내쳐버리는 기독교의 한계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년 8월8일이면 용인의 변선환 묘소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제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도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교회 밖에 내동댕이쳐졌던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