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철학 이야기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

Narin Pusil 2022. 9. 23. 22:22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열린 사회는모든 비판을 허용하는 다원적 사회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없는 '닫힌 사회'로 규정

 

칼 포퍼 (Karl Popper, 1902~1994)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전체주의 허구성 통렬히 비판 과학의 '반증가능성' 이론 제시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의 모든 시도는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결국 지옥을 만들 뿐이다.”

“인류 역사는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간 투쟁의 역사다.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이다. 그는 1945년 출간한 이 책에서 나치즘과 마르크스주의 등 전체주의를 개인의 자유가 없는 닫힌 사회로 규정했다. 이런 닫힌 사회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를 존중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이 보장되는 열린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요지다.

칼 포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이다. 나치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에 망명 중이던 1938년 독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린 사회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집합으로 파악했다. 개인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고유한 자유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열린 사회에선 사회 규범도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며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라며 “그래야 정책 실패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역설했다. “비판을 허용하는 열린 사회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는 다원적인 사회”라는 게 그의 견해다.


반면 닫힌 사회에선 도덕과 법률, 정치제도가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는 역사법칙주의와 민족주의를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으로 꼽았다. 특히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역사법칙주의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닫힌 사회의 주범’이라고 공격했다. 서문에서 이들을 겨냥, “이 책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에게 거친 말들이 퍼부어졌다. 그것은 나의 확신에 뿌리를 두고 한 소리”라고 썼을 정도다.

역사는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게 역사법칙주의다. 역사는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에 의해 정해진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법칙주의의 뿌리는 플라톤에게 있으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으로 구현돼 전체주의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게 포퍼의 견해다. (예정론)

포퍼는 “플라톤과 마르크스는 개인을 인류 역사의 발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구로 여기며, 역사엔 그 종착역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종착역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다. 또 “이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족들의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계급, 위대한 이념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지도자는 시민보다 우월한 사람이므로, 그가 절대 권력을 갖고 이상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그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 정책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은 지도자의 조건은 철학자(철인왕)여야 하고, 선천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리스인-야만인 관계를 주인과 노예 관계로 본 것이 그 예다. 포퍼는 “플라톤의 이런 관점이 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운 히틀러식 파시즘의 뿌리가 됐다”고 분석했다. 또 “플라톤은 개인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짓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간주함으로써 전체주의 사상에 초석을 놨다”고 공격했다.

 



반증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는 없어

포퍼는 “개인의 책임을 집단의 책임으로 대체하는 민족주의는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열린 사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항쟁으로 보는 관점이 20세기를 지배했고, 그 절정은 나치즘”이라고 규정했다. 포퍼는 전체주의에 맞서 ‘점진적 역사발전론’을 내세웠다. 그는 “사회는 혁명이란 수단을 동원해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거에 발전하는 게 아니다”며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비판·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발전하고 개선돼야 한다. 이게 열린 사회”라고 강조했다.

이 책의 핵심 중 하나는 ‘반증가능성 이론’이다. 과학에서 반증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가설 제기와 기존 이론이 지닌 오류를 찾아 반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이론을 정립하면서 조금씩 진리에 접근한다는 이론이다. 포퍼는 “사회도 마찬가지”라며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비판을 허용하고 반증을 거쳐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플라톤의 철인왕과 마르크스의 노동자 계급은 역사법칙의 절대적 존재, 절대적 진리처럼 군림하고 있다”며 “이는 반증가능성이 없는 닫힌 사회의 대표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포퍼의 열린 사회는 사고의 개방을 존중하고, 자기 교정이 가능하며 반대를 허용하는 비판적 합리주의를 추구한다.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반증될 수 있는 사회가 열린 사회다. 개인들은 이 사회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역사를 만들어가고 책임진다. 이게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홍영식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칼 포퍼 반증주의

“과학실증주의는 틀렸다”

 

"검증 가능한 것만 과학"이라는 논리실증주의에 맞서
반증주의는 "완벽한 검증은 불가능"이라는 주장이죠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논리적으로 자명하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만이 의미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을 의미없는 것으로 보고 과학 지식만을 철학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선포했다. 하지만 포퍼가 보기에 그들이 내세운 검증 원리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먼저 무엇이든 엄밀하게 검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흄이 제시한 질문, “내일 또 해가 뜰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를 보면 귀납 논리로는 이제껏 셀 수 없는 해가 떠올랐으니 내일도 해가 떠오를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결과가 많이 나온다고 절대적인 진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러셀 또한 “칠면조 입장에서는 매일 모이를 주던 주인이 어느 날 목을 비틀어 죽이는 상황은 귀납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귀납적으로 명제의 ‘참’과 ‘거짓’을 확실히 검증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검증 원리는 그들이 몰아내려 했던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그들이 옹호하려 했던 과학적 지식까지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까마귀는 검은색’ 반증될 수 있어

칼 포퍼   그래서 포퍼가 과학 이론을 정당화시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반증 가능성 원리’다. “과학 이론은 검증될 수 없어도 반증될 수 있다”는 말 속에는 그의 반증주의 원리가 잘 요약돼 있다. 이 말은 아무리 많은 실험의 반복도 과학 이론을 확실히 검증해주지는 못하지만,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단 한 번의 부정적인 실험결과로 충분하다는 의미다. 가령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다’는 명제는 검은 까마귀를 수십억 마리 찾아낸다 하더라도 확실히 검증할 수 없지만, 검은색이 아닌 까마귀를 한 마리만 찾아내면 거짓임을 반증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이와 같은 검증 원리와 반증 가능성 원리의 특징을 정치인과 테러리스트에 비유해 정치인의 신변 안전은 철통경호에 의해 하루하루가 잘 보장돼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테러리스트는 단 한 번의 성공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더 나아가 포퍼는 이와 같은 반증 가능성을 통해 과학적인 이론과 비과학적인 이론을 구분했다. 포퍼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은 사이비 과학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사례들은 지지자에 의해 얼마든지 발견되지만, 이 이론을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퍼가 든 사례를 따라가 보자.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경우 19세기에 영국은 노동자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도입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적 예언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자의 안전과 복지에는 무관심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예언이 맞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자들이 그런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것을 알고 노동자들을 달래려는 증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반증 가능성 없으면 비과학

 

포퍼가 보기에 이런 이론들은 마치 점성술과 같다. 이런 말의 특성은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아 결국 반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하지만 과학 이론들은 반증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이라는 말이다. 이론에서 예측이 틀리면 그 이론을 언제나 철회하겠다는 것이 진정한 과학의 특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은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날 경우 그것을 지적한 의견을 반박할 설명까지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부르주아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오히려 비난한다.

포퍼는 과학은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고 이를 반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올바른 과학 이론이란 ‘반증주의에 입각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며, 과학하는 참된 방법은 자신이 세운 이론이 거짓이라는 것을 계속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포퍼의 말처럼 자신의 앎과 삶을 치열한 반증의 잣대에 올려놓고 있는가.

● 기억해주세요

포퍼가 과학 이론을 정당화시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반증 가능성 원리’다. “과학 이론은 검증될 수 없어도 반증될 수 있다”는 말 속에는 그의 반증주의 원리가 잘 요약돼 있다. 이 말은 아무리 많은 실험의 반복도 과학 이론을 확실히 검증해주지는 못하지만,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데는 단 한 번의 부정적인 실험결과로 충분하다는 의미다.     김홍일

 

 

 

반증주의를 사회철학으로 확장한 포퍼의 '열린사회'

 "비판을 금지하는 전체주의는 열린사회의 적"

포퍼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 제목은 도발적이다. 

‘적(敵)’이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왜 투쟁의 대상인가?

먼저 ‘열린사회’의 철학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면 

그에 대립하는 ‘그 적들’의 정체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반증이 허용되는 열린사회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이론적인 토대는 그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이다. 

말하자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은 그가 과학철학에서 정리한 논리를 사회철학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따라서 포퍼의 과학철학에서 ‘반증’이라는 개념은 ‘열린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된다. 

 

그에 의하면 한 이론이 과학적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어떤 과학 이론이 제시되면 그 이론은 엄격한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반증되면 그 이론은 폐기되지만, 

반증되지 않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반증을 위한 비판과 토론이 살아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이 점에서 보면 과학자 사회야말로 ‘열린사회’의 표본이다.

 

포퍼가 제시하는 열린사회의 모습은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 사상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비판적 합리주의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의 전통을 따르되, 이성을 절대적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간의 이성은 원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며, 노력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며 

오류 가능성을 제시한 포퍼의 주장에는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함축돼 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열린사회는 상호 비판과 논의에 의해 그 오류를 교정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사회이다.

 

플라톤·헤겔·마르크스는 ‘적’이제 열린사회가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이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란 용인되지 않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 적들’의 정체를 밝히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열린사회와 대립되는 닫힌사회는 바로 전체라는 미명 아래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이 전체주의가 현실적으로 표출된 것이 나치즘과 마르크스주의이다. 

포퍼는 전체주의야말로 열린사회를 위협하는 ‘적’이라고 진단하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의 미신과 허구를 폭로하고 있다.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두 권짜리인데, 

제1권은 플라톤의 철학을, 제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 철학을 비판하고 있다. 

칼 포퍼가 이 책에서 생각하는 열린사회의 적들은 바로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가리킨다. 

이들이 비록 위대한 사상가일지라도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철학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포퍼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에 대한 비판을 보면 

그는 전체주의의 주창자로서 그의 철인정치론은 전체주의와 독재자를 옹호하였으며 

히틀러의 나치 뒷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이상국가론은 유토피아주의를 반영하고 있는데, 

미리 설계한 청사진에 따라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급진주의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이상을 실현한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긍정하게 되고 급기야는 폭력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태연하게 자행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포퍼의 견해다.

유토피아주의는 폭정그런데 전체주의와 유토피아주의를 이론적으로 지탱하는 사상은 역사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역사주의란 역사 전체의 진행방향이 필연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입장으로서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가 역사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역사란 이성적 존재자인 우리들 개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창조돼 간다고 한 점에서 볼 때,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필연적 법칙을 인간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부인하는 역사주의자들을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로의 길이 있을 뿐이다”라는 포퍼의 말은

나치의 폭정 아래서 인간을 금수처럼 취급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인간다운 열린사회를 열어야 한다는 포퍼의 간절한 열망이 담긴 외침이다.

 

● 기억해주세요

플라톤은 전체주의의 주창자로서 그의 철인정치론은 전체주의와 독재자를 옹호하였으며 히틀러의 나치 뒷배로 작용했다.

특히 그의 이상국가론은 유토피아주의를 반영하고 있는데, 미리 설계한 청사진에 따라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급진주의를 띠고

 

칼 포퍼의 어록과 사상

출처 : 모험러 2017. 5. 9

우리의 관심은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이론이 진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은

      이 이론보다 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ㅡ 옮긴이 서문)

 

①비엔나 대학 수학, 물리학, 철학 전공. 철학박사  

    1936년 나치스 폭압을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 뉴질랜드 대학에서 철학 강의, 

    런던 대학의 교수로 초대. 논리학과 과학방법론 강의,

    1965.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칼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음악 등을 전공했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퍼는 십대 청소년 시절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발견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였다.

포퍼는 1930년대 유럽 사상계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는 오스트리아 빈 학단의 논리실증주의에 맞서

반증가능성을 기축으로 하는 방법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20세기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1936년 포퍼는 나치스의 폭압을 피해 그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주된 망명지인 유럽과 미국이 아닌

머나먼 지적 변방인 뉴질랜드로 떠났다. 서구 지식인 사회의 주요 멤버들과 멀리 떨어진 채 포퍼는

뉴질랜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완성된 기념비적인 책이 그 유명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전체주의의 폭력을 체험한 포퍼는 이 책에서

위험천만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철학적이며 사상사적인 배경을 철저히 파헤쳐 보여 주었다.

특히 포퍼는 '열린 사회'의 최대 적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하며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 전후 사상계에 일대 파문을 던졌다.

나치스의 항복 이후 포퍼는 런던 대학의 교수로 초대되어 퇴직하기까지 논리학과 과학방법론을 강의하였다.

 

자유주의의 열렬한 대변인으로 전체주의와 싸운 사상적 투쟁에 대한 지성사적 공헌이 널리 인정되어

1965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94년 생을 마쳤다.

주요 저작으로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 <역사주의의 빈곤>, <추측과 논박>, <객관적 지식> 등이 있으며

이 책들은 29개 나라말로 옮겨져 세계 각국에서 읽히고 있다.

 


■비과학적인 것에도 의미가 있다

"포퍼는 과학의 합리성을 규명하는 작업과 유의미성을 밝히는 작업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포퍼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비과학적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문제는 형이상학이 과학을 자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 옮긴이 서문



■과학적 진술이 참인 이유

"과학적 진술이 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험에 의해 검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경험을 통한 반증을 견디어 냈기 때문이다."  - 옮긴이 서문


■과학이 과학인 이유는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은 검증이 아니라 반증 가능성이다.

과학은 검증된 경험적 진술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작업이 아니다.

과학은 오히려 대담한 추측과 상상력의 소산이다." - 옮긴이 서문


■열린 사회는 토론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포퍼에 의하면 우리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오류를 줄여 나가는 공동의 작업을 통한 ′진리에의 접근′이다."   - 옮긴이 서문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되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희생이 강요되고, 운명에 의해 자유가 질식되고,

맹신의 진리가 진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보다 소중하게 평가되는 닫힌 사회와 달리

열린 사회는 다수이건 소수이건 각자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고,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미신과 운명에 이성을 내맡기지 않는다.

열린 사회는 모든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 상황을 검토하여

여러 가지 대안들을 자유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사회이며,

타인 특히 정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놓은 제안들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사회이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정책이 비판의 빛 아래서 변경될 수 있는 사회이다."    - 옮긴이 서문


■행복은 긴급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고통이 합리적인 공공 정책의 가장 긴급한 문제이며, 행복은 긴급한 문제가 아니다.

행복의 성취는 개인적인 노력에 달린 문제" -    옮긴이 서문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다

"포퍼는 민주주의는 결코 국민의 지배가 아니며 국민의 지배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페리클레스는,

"우리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책을 고안하거나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것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국민의 지배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피를 흘리지 않고 타락한 권력을 제거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지혜로운 선택이다.

 

권력을 국민이 장악하고 있느냐는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권력소유의 주체 ― 다수의 국민이야 소수의 지배자냐 ― 문제로 보는 것은

안이한 풍자론적 물음으로 이것은 곧 자기 모순에 부닥친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유사결정의 제도적 틀로서 비판과 토론이 현실적 힘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 옮긴이 서문


■민주주의의 역설

"′다수에 의한 지배는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다수결의 원칙이나 다수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이른바 ′민주주의 역설′에 직면한다.

만일 다수가 자유 체제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더욱이 집권하면 자유 체제를 파괴할 것이 분명한

파시스트나 공산당을 다수의 뜻으로 선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수결에 의해서 정부를 선택해야 한다는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여기서 헤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한편으로 파시스트나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을 막으려는 어떤 노력도

그가 신봉하는 원리, 즉 다수결의 원리와 상반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파시스트나 공산당이 집권하면 그곳에선 민주주의가 종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수의 지지에 의해 선출된 독재 정권,

예컨대 나치스 정권과 같은 정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할 도덕적 기반이 상실될 것이다." - 옮긴이 서문


무장한 폭력 앞에 민주주의는 폭력으로 자기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이 자유 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다면

 물리적 힘에 의해 유지되는 정권에 가하는 물리적 힘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포퍼는 무차별적인 폭력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은 전쟁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 옮긴이 서문


무제한의 자유와 관용은 자기파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제한의 관용은 자유를 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한 사회가 무한히 관용을 베푼다면 그 사회는 파멸하기 쉬우며,

결국에는 그 사회와 함께 관용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른바 ′관용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관용이 있는 사회는 어떤 상황에서는 관용의 적을 제압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무제한의 자유는 또한 무제한의 관용과 마찬가지로 자기 파괴적일뿐 아니라 그 반대를 낳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모든 견제 장치가 제거되면 힘센 자가 약하고 선한 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자유는 자유의 종말을 초래한다.

또한 원래 의도야 어떻든 완전한 자유의 대변자는 실제로는 자유의 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의 역설′이다."   - 옮긴이 서문


완전한 경제적 자유는 착취를 정당화시킨다

"완전한 경제적 자유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무제한으로 착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결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든다."   - 옮긴이 서문



정부는 힘센 자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모두는 그 정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개입이 너무 적으면 자유는 죽고 만다. 반대로 정부의 개입이 너무 많으면 자유가 죽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우리에게 지배받는 자가 다스리는 정부의 간섭이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간섭이 효과적이려면 우리는 합리적 논의를 통해 언제나 그 정부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 옮긴이 서문


자유의 값은 영원한 불침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 보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럴 수 없다. 자유의 값은 영원한 불침번이다.

 포퍼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제도란 요새와 같아서,

제대로 쓸모가 있으려면 잘 지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요새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사람을 알맞게 충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일까? 포퍼가 말한 비판적 이성을 소유한 사람,

사실에의 존중과 비판과 토론에 열려진 정신, 타인과 자신의 오류에 대한 관용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타적 개인주의의 윤리를 지닌 사람이다." - 옮긴이 서문



미래의 지도자는 선정하거나 교육할 수 없다

"복종을 잘 하는 자가 지휘도 잘 한다는 생각은 지적 탁월성에 관한 한, 가장 거짓된 생각일 것이다.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거나 교육한다는 이념이야말로 자기모순적인 것이다.

 어쩌면 신체적 탁월성이나 물리적 탁월성의 면에서는 어느 정도 그런 선택과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적 탁월성이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적 탁월성의 본뜻은 비판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인 것이다.

···권위주의자는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복종하고, 믿고, 그의 영향력에 호응하는 자들을 뽑을 것이다.

 그는 반역하고, 의심하고, 그의 영향력에 감히 저항하는 자들은 배제할 것이다."


선보다 악

"추상적인 선의 실헌을 위하여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


제어 당하지 않은 정치 권력

어떤 정치적 권력도 제제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절대적이고 제어당하지 않는 정치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

가장 강력한 폭군까지도 자신의 비밀 경찰, 심복부하, 그리고 교수형 집행자에게 의존한다.


통치자에게 기대지 마라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가 거의 없었고, 더러는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인다.


이상은 억제될 때만 가치가 있다

플라톤이나 마르크스 둘 다 세계를 급진적으로 변모시키는 계시적 혁명을 꿈꾸고 있다.

즉 지금보다 좀더 낫고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추함이 전혀 없는 세계,

낡은 쪼가리들이 이리저리 붙어 있는 지저분한 의복이 아니라 완전한 새옷,

참으로 아름다운 새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그

러나 이런 탐미적 열광은 그것이 이성과 책임감, 그리고 남을 돕고 싶은 인도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억제될 때만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신경증이나 병적 흥분 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위험스런 열광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지성, 재능, 용기를 가진 사람들도 이데올로기의 힘 앞에 굴복한다

▶민주주의 핵심은 국민의 지배가 아니다. 핵심은 독재를 피하는 것, 부자유를 피하는 것,

  법의 지배가 아닌 다른 지배의 형식을 피하는 것.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누군가가 지나치게 인기를 얻는 것을 경계.

▶민주주의는 전제 정치를 피하는 수단. 그것이 전부.
▶다수가 언제나 옳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다

▶범죄자들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한 나라 안에서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듯이,

   나라간 평화도 무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유가 평등보다 중요하다. 자유를 잃어버린 부자유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평등이 있을 수 없다.

▶법의 지배. 일반적 합의를 깬 사람들의 비율이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법에 기초한 국가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심지어는 붕괴하게 된다.

   합의가 약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면, 억압적 정치가 채택된다.

 

▶현안 문제는 누가 지배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배할 것이냐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정부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대중의 주도권′과 같은 표현은 오도된 것이고 선전 문구에 불과하다.

   주도권은 보통 소수의 주도권이다. 그 소수는 기껏해야 비판적 평가를 위해서 국민들 앞에 세워진다.

▶′대중이 지배하는 체제′는 사실이 아니며 사실일 리도 없다.
▶자유와 권력의 오용 문제는 결코 법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영원한 불안정성. 늘 깨어있어야 한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본래적으로 가부장적이다.

   이는 위로부터나(자비심이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국가 기구에 있어서) 아래로부터나

  (누군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향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시민에 있어서) 모두 가부장적이다.

▶철학들은 국가 방위의 문제를 단순히 무시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 방위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매우 높은 대가를 요구한다.



도덕적인 이유로는 물론 원칙적으로도, 가부장주의 없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가부장적이 된다. ′작은 국가냐, 아니면 가부장적인 국가냐′ 하는 문제는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으로 가부장주의가 아닌가′라는 문제로 대체해야 한다.



관료주의는 반민주적이다. 관료주의 체제들에는 자신들의 행동과 태만에 관해서 더 이상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많은 ′작은 독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 그것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대신에 날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계에 대해서 투덜대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는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에 비하면 우리의 지식은 무지와 다름없다.



′너 자신을 알라!′ - 너 자신을 알고 네가 아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스스로에게 인정하라.



′민주주의′라는 말(어원상 ′국민의 지배′)은 불행히도 위험한 말이다. 국민 개개인은 그 자신이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민주주의는 사기라고 느낀다. 바로 여기에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대 이래 줄곧 ′민주주의′는 독재 정권, 즉 전제 정권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정체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돼 온 이름이었다고 학교에서부터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독재 정권은 사람에게서 도덕적 책임을 떼어내 버린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이 없다면 그 사람은 반쪽짜리 인간, 백 분의 일쪽짜리 인간에 불과하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적어도 페리클레스와 투키디데스 시대의 민주주의는 이미 국민 주권이 아니었으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제 정권을 피하려는 시도였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선거일은 새로운 정부에게 적법성을 부여하는 날이 아니라, 과거 정부에 대해서 우리가 재판하는 날, 즉 과거 정부가 그 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날이다.



주민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국민의 대표자들에게 비례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 주권 이론은 비합리적인 이데롤로기, 미신을 조장한다. 즉, 국민의 다수가 틀리거나 부당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



우리는 모두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민이든 인간이라는 존재로 구성된 어떤 집단이든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국민이 그 정부를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지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다수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독재 정권을 피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 법정으로서 이해되는 민주주의 ― 내가 지지하는 민주주의 ― 조차도 결코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



두려움이나 억측, 자만심으로 인해서 가장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것은 언제나 우리 지성인들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새로운 행복이 막 확립되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갈 때, 커다란 혼란이 시작되었다. 지성인들은 사악한 시대, 우리 사회, 우리 문명, 우리의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주아주 까다롭고 어려운 정부 형태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정부들은 언제나 붕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민주 정부는 여러분과 나에게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심판관, 배심원이지만 유행하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타락할 수 있다.



무책임한 지성인들은 우리 서구 세계에 있는 사악함만을 겨우 보아 왔다. 그들은 우리의 세계는 정의롭지 못하며, 그래서 불가피하게 몰락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



17/05/09



* 칼 포퍼,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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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 :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칼 라이문트 포퍼 / 생각의나무 / 2000.1.31

–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펴내 세계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칼 포퍼의 화제의 신작

20세기 인류의 역사를 단순한 문명발전의 역사로만 보는 현재의 시각에 경종을 울리면서, 만연하는 개인주의와 매스미디어의 권력화, 줄어들지 않는 폭력 등을 21세기 인류가 해결해야 할 ‘20세기의 산물’로 규정한다.

 

 


○ 목차

<20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1. 전쟁과 평화, 그리고 공산주의

2. 다시 돌아보는 마르크스주의

3. 1962년 – 사하로프, 흐루시초프, 그리고 소비에트의 쇠퇴

4. 오늘날의 정치적 의제 – 법의 지배와 교육 문제

5. 역사주의를 넘어서 열린 미래로

<세기의 문턱에서>

6. 우리는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7. 텔레비전은 인류를 타락시킨다. 전쟁처럼

<민주주의와 역사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8. 민주국가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반성

9. 자유와 지적 책임

○ 저자소개 : 칼 라이문트 포퍼 (Karl Raimund Popper)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 칼 포퍼. 그는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계 변호사인 아버지로부터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물려받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 제도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고등학교를 중퇴, 한때 목수의 도제로 근무했다. 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지적 욕구로 인해 뒤늦게 빈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물리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을 전공했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퍼는 십대 청소년 시절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곧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발견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졸업 후에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른바 과학철학 분야에서 ‘반증가능성’의 방법을 제시한 첫 저서 『탐구의 논리』(1934)를 출간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1930년대 유럽 사상계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는 오스트리아 빈 학단의 논리실증주의에 맞서 반증가능성을 기축으로 하는 방법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20세기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의 득세로 인해 외국행을 결심한 포퍼는 1937년에 그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주된 망명지인 유럽과 미국이 아닌 뉴질랜드에 위치한 캔터베리 대학 칼리지의 강사로 부임하여 철학을 가르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그곳에 머무르며 정치철학 분야의 주저인 『역사주의의 빈곤』 (1944)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이 시기에 그는 기념비적인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45)을 완성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의 폭력을 체험한 포퍼는 위험천만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철학적이며 사상사적인 배경을철저히 파헤쳐 보여 주었으며 ‘열린 사회’의 최대 적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하며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 전후 사상계에 일대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1946년에 포퍼는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 (LSE)으로 자리를 옮겨 1949년에 논리학 및 과학방법론 담당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비판적 합리주의’로 명명되는 특유의 신조에 입각하여 철학, 정치, 사회, 과학, 교육 분야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왕성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또한 그는 비트겐슈타인과의 ‘부지깽이 논쟁’ (1946), 아도르노 및 하버마스와의 ‘실증주의 논쟁’ (1961), 토머스 S. 쿤과의 ‘과학철학 논쟁’ (1965), 마르쿠제와의 ‘혁명/개혁 논쟁’ (1971) 등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열렬한 대변인으로 전체주의와 싸운 사상적 투쟁에 대한 지성사적 공헌이 널리 인정되어 1965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69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직후에도 지칠 줄 몰랐던 포퍼의 ‘끝없는 탐구’는 1994년 9월 17일, 영국 런던에서 그가 생을 달리하며 멈추게 된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 『역사주의의 빈곤』, 『추측과 논박』 (1963), 『객관적 지식』 (1972), 자서전 『끝없는 탐구』 (1976), 에세이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1994), 대담집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1996)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등이 있으며 이 책들은 29개 나라말로 옮겨져 세계 각국에서 그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책 속으로

Q. 선생님께선 소련의 쇠퇴와 연관하여 사하로프에 대한 의문과 1962년의 위기에 대해서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 연관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선생님의 견해로는 흐루시초프의 군사적 모험이 실패한 것이 종말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962년은 소련이 미국을 물리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A.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사하로프의 폭탄을 보유하기 전에는 전쟁 없이 – 다시 말해서 살육에 의하지 않고는 – 미국을 파괴할 기회를 그들은 갖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다시 발발한다면 미국인들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건과 더불어서 소련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 p. 91

˝우리의 문명이 살아 남으려면 우리는 먼저 위대한 인물에 맹종하는 습관부터 타파해야 한다. 역사에 관한 예언자로 행세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 사회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견해는 흔히, 너무나 쉽게 폭력적 조치를 초래한다. 지상에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만이 그의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지옥을 만들 뿐이다.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오히려 어떤 선한 의도에서, 즉 동료들의 참담한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우리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 (4쪽)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가 거의 없었고, 더러는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인다.˝ (41쪽)

소비에트가 쇠퇴한 이유들을 알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단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교육단계에 있는 학생들이 공산주의 교리를 배우는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시대가 되었을 때, 공산주의 지도층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황을 현상태로 유지하는 수단만 생각할 뿐,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교의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것만 진지하게 취급되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붕괴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 마르크스 이론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 73-74쪽

그 책(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은 20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특히 1962년 쿠바 위기로 대표되는 커다란 전환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소련은 그 시점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상실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소련은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마르크스 정권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상이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점은 소련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시초였으며 그후 전반적인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76쪽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사하로프 박사가 회고록에서 말한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는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그에게 형법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 사하로프는 베리아와 함께 합동으로 스탈린 통치하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으며, 수소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베리아와 반복적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수년간의 실험을 거쳐서 완성품 폭탄이 1961년에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흐루시초프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국이 모르게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할 생각이 떠오른 것은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미국은 이미 때를 놓치게 될 것이었다.”- 77-79쪽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폭탄의 사용을 지지하는 편지에 서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편지에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기에는, 흐루시초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자본주의의 ‘타파’를 원하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격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타도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탄을 실험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으며, 함대의 포민 소장을 만나러 갔을 때는 마흔 살이었습니다(*사하로프는 핵어뢰 프로젝트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 86쪽

사하로프는 그가 만든 초강력 폭탄을 실험할 때마다 방사능으로 인해서 수천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그래서 실험을 실시하지 않도록 흐루시초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화를 내며 ‘정치적인 것’과 ‘과학적인 이슈’가 섞이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사하로프가 맹세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사하로프에 대해서 말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87쪽

나는 말년의 사하로프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꼭 수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가 전범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하며, 그가 말년에 한 일로 인해서 그의 죄가 완전히 용서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탈리아의 한 언론인과의 이 대담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 – 88-89쪽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155쪽)

˝합리적 접근법은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0쪽,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재인용)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논문들과 강의는 매우 간단한 주제의 변주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182쪽, 『추측과 논박』 머리말 중에서)

˝우리의 행정은 소수 대신에 다수를 옹호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이유이다. 법률은 개인들의 사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정의를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탁월한 자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떤 시민이 뛰어나면, 그는 다른 사람에 앞서서 국가에 봉사하도록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장점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 203쪽

˝우리는 마르크스의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의 열린 마음과 사실에 대한 감각, 그리고 쓸데없는 말장난에 대한 혐오, 특히 도덕적 훈화조의 말장난에 대한 혐오는 그를 위선과 표절에 대해 싸우는,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투사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불타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입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의 재능은 주로 이론적인 데 있었으므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투쟁을 위한 과학적 무기라고 그가 믿는 것을 주조해 내는 데 엄청난 노력을 바쳤다. 진리를 모색하는 성실성과 지적 정직성은 그를 그의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구별해 준다.

지적 원천에서는 헤겔의 철학과 거의 동일하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주의적 충동이 밑에 깔려 있다. 더구나 헤겔 우파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문제 가운데 가장 절박한 문제에 합리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가치는 그 노력이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는 사실에 의해 감소되지 않는다. 과학은 시행착오에 의해서 진보한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행착오를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경제적 힘이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다는 독단은 없애버려야 한다. 오히려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은 모든 형태의 통제되지 않은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 경제적 힘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돈이 직접 권력을 살 수 있게 된다든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파는 경제적 약자를 노예화함으로써 권력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게 될 때이다. (…) 우리는 경제적 힘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착취를 방어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 239쪽

˝선거일은 새로운 정부에 적법성을 부여하는 날이 아니라, 과거 정부를 우리가 재판하는 날, 즉 과거 정부가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날이다.˝ – 249-259쪽

○ 출판사 서평

칼 포퍼는 반 세기 이상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자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그는 종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비롯한 모든 영역의 인문학 분야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마르크스주의 비판서이자 새로운 철학 연구 방법론을 제시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명저로 꼽힌다.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서 포퍼는 점증하는 폭력과 시건방진 민족주의, 절대권력화한 매스 미디어, 그리고 우리 시대의 집단적.개인적 이기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고 있다.

환경, 인구, 부패 문제 등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조장하는 폭력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우리는 또 어떻게 세게 평화를 위한 길을 닦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을까? 포퍼는 철학자들이 시대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여하고,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운명과 역사의 법칙이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운명과 역사를 선택하고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이 역사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