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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 정착

7-2. 가나안 정착 3가지 설과 히브리 개념

Narin Pusil 2020. 7. 10. 19:43

7.2  가나안 정착 3가지 설과 히브리 개념

■ 히브리 족속(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3가지 가설

 

 

 

▶히브리(Hebreer : hibri, habiru)[1]

   

1. 고대 이스라엘의 공용어이다.

2000여년 이상 유대(교)언어로 바이블이라 불리는 유대경전(타나크), 미쉬나 등의 연구,

종교의식, 기도, 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서로 떨어진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소통 수단에서나 사용하던 고대 유대인들의 언어를

근대에 와서 '엘리에제르 벤-예후다(אֱלִיעֶזֶר בֶּן־יְהוּדָה)'가 부활시킨 언어다.

 

이 언어의 이름인 '히브리'는,

2가지설이 있는데

 

첫번째는.

기원전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을

'헤브루 인'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3000년경, 가나안 땅(현재의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하는

아브라함 일족과, 그 자손들을 일러 '헤브루 인'이라 한 것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헤브루 어', '히브리어' 등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Rim-Sin I 시대(BC 1822~1763)에

수메르인들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아람 유목민 집단을 SA로 알고 있었습니다.

"무단 침입자"를 의미하는 GAZ.

후기 Akkadians는 calque Habiru,

적절하게는 ʿApiru로 번역 된 용어를 물려 받았습니다.

 

 

 

   2번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른다. 

히브리(Hebreer)는 hibri 또는 하비루(habiru)등으로

여러 다른 기록들에 보이고 있는데

아카드어(Akkadian)의 합비루(habbiru)와

이집트어 하비루(habiru)가 같은 근원이라고 본다.

 

ㅡ아흐모세 1세 가 힉소스인들을 전투에서 치는 장면

 

]고대 이집트 북부(하)이집트를

108여년간(BC 1663~1555년)을 지배하던

힉소스 파라오의 15왕조는,

원-이집트 16-17왕조를 이어 제18왕조를 세운

파라오 아(흐)모세'에게 이집트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그때 고센지역에 있던 힉소스 브라더쉽들은

갑자기 노예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들을 하비루(habiru)라 불렀다.

 

그 의미는, 18왕조의 원이집트인 보다

낮은계층의 집단으로 고센지역의 토지를 다 빼앗겨

그래서 그들은 땅에 고용(병)되지 못하면

질서 밖에서 약탈이나 강도짓을 무리지어 살아갔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브리는 처음부터 민족 개념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개념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람세스 2세와 4세때 자료에 히브리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성을 건축하는데 돌을 나르는 일에 동원되었던 노예계층이었다. 

그리고 탈출한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과 일치 시킴으로

이스라엘 민족사를 구속사로 심화 시켰다.[2]  

 

신약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셉푸스’는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 제사장이며

이집트 30왕조를 저술한 역사가인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이집트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 번성했던

히브리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통치했다고

그의 저서 ‘아피온 반박문”에 기록했다.

 

 

물을 찾아 헤메이던 유랑집단.

 

▶1.  윌리엄 알브라이트, 존 브라이트– “정복설

(BC13세기이집트 19왕조의 람세스2세 지지)

이집트를 탈출하여 군대의 대오를 갖춘 히브리가 일거에 가나안을 정복했다.

이는 싈레이만이 트로이, 미케네 문명문 발굴한 것을 계기로

바이블도 근거가 된다는 착안을 하였다.

 

 

▶2.  알브레이트, 알트, 마틴노트  – “평화 이주설

정복한것이 아니라 히브리족이 점차적으로 들어와 정착했다.

평야지대는 군주국가가  이미 체제를 이루고 있었고,

히브리족은 산악지대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3.  조지 멘덴홀, 노만 갓월드  - “민중봉기(혁명)”    

이집트에서 온 하비루, 히브리와

가나안의 군주국 밑에서

농노생활을 하던 히브리가 함께 봉기하여

점유한 지역에 종족동맹을 만들었다.

 


 

전쟁이나 지파간의 갈등에 따른 재판을 위해

12지파 종교연합체에서 지도자를 세웠지만

앞서 말한대로 200년후 왕정정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정착후에도 원주민과의 계속되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부족연맹체의 과도기적 신정정치의 무정부 상태로는

이민족이라는 원주민들의 지역국가들과 투쟁하는데는 항상 벅차기만 했다. 

거의 2,000년 전까지 유대인들이 그 땅의 일부를 차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시리아(셀류쿠스,Seleucid Empire)에 복속되고

또 이를 밀어내고 점령한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오는 동안,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후손인 아랍인들이

역시 2,000여년에 걸쳐 그 땅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다.

원주민인들인 그들 역시 유대인이라 자처하는 이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독일계 유태인 로스 차일드Rothschild 가문에 조종되던)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에 의해

2천년후에 그 땅을 차지한 유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디아스포라를 물려 받고 지금 살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그들도 앞으로 2천년후에는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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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희석,구약성서배경사 (대한기독교출판사,1992)135-140

[2] 안병무,역사와 해석 (한국신학연구소,2010,서울)79-80

 

ㅡ“Amarna Letters

Amarna Letters는 기원전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설형 문자("쐐기 모양")가 새겨진 수백 개의 점토판 그룹입니다.

Amenhotep IV / Akhenaten(기원전 약 1353–1336)의 통치 기간 동안

고대 이집트의 단명 수도였던 Tell el-Amarna 사이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Known as the “Amarna Letters,” many of these tablets are inscribed with text written by several different regional Canaanite rulers expressing consternation and even terror at the fact that “all the lands” were being overrun by a mysterious people they called the Habiru.

The Amarna Letters: Proof of Israel's Invasion of Canaan?

armstronginstitute.org
https://armstronginstitute.org › 881-the-amarna-letters-pr.
 
 
■아마르나 서한: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공의 증거?
"아마르나 편지"로 알려진 이 서판들 중 다수는
 "모든 땅"이 그들이 하비루라고 부르는 신비한 사람들에 의해
침략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과 심지어 공포를 표현하는 
여러 지역 가나안 통치자들이 쓴 텍스트로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