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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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 정착

7-1 가나안 정착 스토리에 들어가기 전에 .....

Narin Pusil 2020. 7. 6. 20:58

7-1.  가나안 정착 이야기 들어가기에 앞서

 

출애굽을 논하기 앞서 <들어가기>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필자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논하기 앞서,

성경이라는 바이블의 실체  특히, 그 기록에 대한 독자는 누구였을까?

.. 를 생각하며 우선 당시 상황을 파악하고 에세이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사실의 실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보기때문이다.

 

 

1.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출애굽의 엑소더스나 디아스포라가 상기되는 민족으로

2천년전 강대국에게 정복당하는 유랑 민족으로 인식되지만,

앞서 전개한 내용대로 힉소스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기록으로만 보아도

남의 땅을 빼앗는 적극적인 침략을 통해 첫 국가를 건설을 시작했다.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친 것으로부터 독립의 기원으로 간주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유대경전에 의하면(여호수아서), 여리고(Jerico)전투를 통해

선주민의 도시국가들을 축출하고 처음으로 가나안에 발을 붙이면서다.

 

 

2. 유대교에서는 국가와 종교체계의 기원을 여기까지 소급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는 일신교의 유물에 비해서

다신교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실제로 히브리인의 지배가 얼마나 공고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성경 자체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실록과 비교해보자면

‘세대 간 기술력’, ‘기록 보존’, ‘지은이의 입장’등의 기술에서 차이가 뚜렸하다.

고고학적 유물 출토와 같이

바이블 구약에도 일단 다신교를 믿는 도시국가들의 민족들과

잡거(雜居)하여 공존하거나 서로 싸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도시국가의 왕과 족속들이 잡신들을 섬겨 부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견해의 대립은 있어 왔으나 여리고-전투부터

고고학적 실증성은 높지 않아 보통 200년 뒤인 기원전 1000년경을

남유다 왕국의 역사가들의 고고학적인 시작으로 본다.  

 

 

 

3. 그럼 계속해서 가나안 정착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한다. 

 

힉소스족의 이집트 칩입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집트의 중심인 하-나일강 지역을 차지하고

이집트 선주민 왕조를 상-나일강 지역에 몰아냈던

가나안족의 15왕조가, 상나일에서 17왕조를 세우는 이집트 선주민 왕조에

이집트에서 밀려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시리아 방향으로 올라가다,

(미탄니왕국?) 강력한 세력의 장벽에 할 수 없이

야곱(이스라엘)의 가나안으로 쫒겨간다.  

 

역사적 상황적으로 보면,

쫓겨간 15왕조의 힉소스인들은

가나안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들의 도시국가의 하층구조로 들어 가기도 하고,

산악지역에 소규모의 집단들을 세우고 정착했는데,

이후 대략 100년후 고센의 모세의 출애굽무리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에 들어올때에, 

그 지역에 이미 하부구조로 정착해 있던 앞서 온 동족들과 함께

도시국가의 왕들을  하나 둘 몰아내기 시작하여 

평화와 전쟁을 거듭하던 판관시대를 거쳐 비로서 사울의 (도시)왕국을 세우게 된다.

 

 

■ 의문 ?

 

430년동안 이집트에 살면서

땅을 분배의 중심인 12지파의 개념이 훗날까지 종속했을까?  

그 개념은 외려 솔로몬 시대의 12행정구역의 소급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ㅡ솔로몬 시대의 12(징세)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