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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 정착

6-3. 출애굽은 언제 일어 났을까?

Narin Pusil 2020. 5. 17. 20:33

6.3  출애굽은 언제 일어 났을까?  

 

 

1. 앞장에서 람세스는, 라모세(RaMose)와 같다고 유추해 보였듯이

출애굽기 본문은 출애굽 당시 파라오의 이름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1]

아울러 출애굽 사건의 연대를 암시하는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때문에 출애굽이 과연 있었다면 언제 어느 파라오 시절에 있었을지

학계에서 갑론을박과 함께 여러 유추해석이 존재한다

 

 

2. 그 중 1명이 위에 언급한 람세스 2.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라므셋이 바로 그다,

국고성 비돔 등과 람세스 치세에 조성된 페르라메수를 비롯한 국경도시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치세 내내 토목사업을 벌였던 람세스 2세가

히브리인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고

자기 이름을 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3. 앞서 말한바와 같이 람세스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하던 시기의 파라오라는 설을 후기설이라 부른다.

한편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2(혹은, 투트모세3)라는 설은

후기설에 대비해 <전기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직도 논쟁 중인 것으로는 람세스라는 데에 동의해도

또 람세스 1세냐, 2세냐, 3세냐 하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4. 상술했듯 이집트 상형문자 역시 히브리 문자나 아랍 문자와 마찬가지로

모음을 표기할 수 있는 음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찌 읽는지를 가지고도 논쟁이 있다.

더군다나 람세스를 표기하는 상형문자 기호는

전부 표의기호기 때문에 어찌 읽는지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5. <후기설> 중에는 아케나톤이 시작한 유일신 <아톤-신앙>을 믿던

일부 남은자들에 모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아케나톤, 투탕카멘 이래로 몰락한, <유일신 사제>들이

그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OO모세를 중심으로 무력을 동반한 대 탈주극을 벌였다는 것.

 

6.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 문자 mese(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때

그가 이집트 출신임은 확실하며,

히브리 유일신교의 배타적 성향이

아케나톤의 급진적 종교개혁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서 나오는 모세의 이미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2]

이 해석에 따르면

수 많은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갸날픈 어린이로 나오는 파라오의 장자도

사실은 대리청정에 준하는 위치의 장성한 아들이었거나

람세스의 오랜 통치로 그의 아들들이 그보다 일찍 죽었으므로

그런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3][4]

 

 

7. 그런데 성경에서 나오는 시기에 대한 묘사에 따르면

람세스 2세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라고 보기는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장성하는 기간 동안 선대 파라오가 죽었다'고 나오는데,

람세스 2세 이전의 전대 파라오였던 세티 1세나 람세스 1세 등은

모세가 장성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만 재위했다는 점이 문제다.

(è 하지만, 필자는 모세가 자라난 시점을, 힉소스 파라오의 15왕조테베의 이집트17왕조 교체기로 본다)

, 성경 내용에 맞게 후기설을 굳이 끼워맞춘다면

오히려 람세스 2세보다는 그의 아들인 메르넵타(그의 치적을 기록한 석비를 보면) 때가

출애굽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8. 람세스 2세는 정말 길게 장수했으니 모세가 충분히 장성할 만하다.

더구나 앞서 말한 성경의 라므셋이라는 단어도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모세가 태어난 시점의 파라오의 치세 때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의 라므셋과 끼어맞춘다고 해도

람세스 2세는 모세가 태어난 시점의 파라오이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렇게 해석해야 출애굽 당시,

80세의 노인이 된 모세의 나이까지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9. 한편, 이집트 탈출 자체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대에 기록되 가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하나의 책으로 되었다는 것 있이다.

알다시피 고대 사서의 형성 과정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거나 규모가 큰 사건이

람세스 2세의 치세에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비교적 확실한 것은, 일단 출애굽 사건은

람세스 2세의 다음 파라오인 메르넵타의 치세 이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메르넵타의 비문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5]

 
 

 

 


[1] 창세기에서 파라오를 왕이름 없이 사용한 것은, 기원전 15-10세기의 이집트 관행과 일치한다.

   일상 대화나 문서에서는 람세스 시대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자신 왕을

  '파라오' 또는 '우리 선한 주님, 파라오' 등으로 불렀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2]  크리스티앙 자크 Christian Jacq 람세스(문학 동네, 1997)

[3]  그런데 후기설람세스 2와 더불어서 출애굽 당시 파라오 후보로 오른

     전기설아멘호테프 2 또한 웨벤세누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고,

     그 경우에는 진짜로 10살 남짓한 나이에 일찍 죽어서 웨벤세누의 동생인 투트모세 4세가 왕이 된 전례가 있다.

     즉, 장자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후기설과 전기설 중 어느 게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전기설 못지않게 후기설 역시 맞는데도 불구하고 정설은 아니다.

     그래서 이에대한 반박 비평도 있다. 애초에 아케나톤의 아톤 신앙과 모세를 연계시킨 게 사실프로이트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아케나톤 이후 람세스 2세까지의 기간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간에 비해 너무 짧다. 

     성경에는 한 무리의 가족이 60만명이 된 기간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람세스라는 이름의 도시는 테베등과 같은 도시 이름은 흔했다는 설이 있으며,

     람세스가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지었다는 것도 역사적 기록엔 없다.

    더우기 그 방대하고 엄청난 람세스 2세의 치세를 다룬 기록에서 출애굽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후기설 내에서도 람세스 2세 대신,  투트모트 3세나 아버지 세티 1, 람세스 1세 등이 거론되며,

    전기설에서는 아예 아케나톤 이전인,  아멘호테프 3, 아멘호테프 2세 등이 거론 되고 있다.

 

[4]  이 부분에 한해서 만큼은 오히려 전기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멘호테프 2세의 전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는 54년 동안 재위를 했고, 이 기간 동안 모세는 충분히 장성할 만하다.

     더욱이 투트모세 3세와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하트셉수트가 아기 모세를 건진 후 그가 장성할 때까지

     투트모세 3세의 눈을 피해 돌봐줄 권력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투트모세 3세가 죽고 아멘호테프 2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세가 복귀했다는 가정에도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아멘호테프 2세 다음 대의 왕인 투트모세 4세는 그의 장자가 아닐 뿐더러 당시에는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출애굽기에 나오는 장자의 죽음과 이집트의 재앙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 

     따라서 전기설은 대략 15세기 경, 즉 아멘호테프 2세 등을 대표로 그쯤의 파라오들이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후기설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람세스 2세를 대표로 대략 13세기 무렵의 파라오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양상이다.

     2개의 설 다 나름대로의 논리와 허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5]  람세스 2https://namu.wiki/w/람세스%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