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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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 정착

6-2. 노예상태(출1:11)에서 출애굽하다.

Narin Pusil 2020. 5. 17. 20:26

 

6.2  람세스성과 비돔성을 건설하던 노예상태(1:11)에서 출애굽하다.

 

 

 

 

 

1. 기원전 1279년에 이집트 파라오로 등극한 람세스 2 치세에는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히타이트[1]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람세스는 재위 2년만에 바다 민족을 토벌했는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는 족속들을 단 한 차례의 기습작전으로 소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람세스가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상전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해안선을 비롯한 당시 지형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2. 자신감을 얻은 람세스는 북벌 준비에 착수했고,

재위 4년에 비블로스(레바논)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전투에 직접 출정하여

미탄니 왕국을 멸망시킨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시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 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3.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69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받는다

 

4. 또한 신전에 기록되어 있는 카데시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오히려 방해했고

히타이트 역시 이 전쟁이후로 급격한 세력 약화로 인해

히타이트는 기원전 12세기에 멸망할때까지 이집트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후 아나톨리아 지방에는 약 1000년 동안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이 난립했으며,

그와 함께 팔레스타인 도시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이 소진되었던 이집트 제20왕조에서

재앙의 불씨로 작용하게 되어

21왕조에 이르러 타니스의 사제단에 권력을 이양하게 되고 몰락한다.

 

The Temple of Ramses III in Medinet Habu - Reconstructed.

 

하비루 : http://m.cafe.daum.net/bgtopia/73AA/26083?svc=cafeapp 

 

이집트 왕조와 하비루(하피루, 아피루)

이스라엘이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 고대에는 가나안 지역에 원래부터 살았던 민족이 아니라는 것에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이동해 와서 가나안 땅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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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손 F 레이니-  R.스티븐 나틀리 성경 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강성열 (이레서원,2010,서울)p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