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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금나라 시조는 신라인, 여진의 역사도 한국사

Narin Pusil 2021. 6. 6. 21:20

이지란 초상화(용인 경기도박물관 소장)

황경원의 이지란 신도비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부터 훈춘강까지 천여리의 땅이 조선의 땅이 된것은 이지란의 이성계와의 의형제를 맺어 조선 사람이 되어 이루어진것으로 이지란의 공이라고 했다. 이지란은 여말선초에 활약했던 장군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태조 이성계의 심복 중 심복이였으며, 조선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청해 이씨의 시조. 이름은 이지란으로, 여진족 시절의 성은 퉁(佟),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로서 보통 '퉁두란'으로 불렸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이씨 성을 붙여서 '이두란'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지란과 이두란이라는 이름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다.

청해 이씨 족보에 따르면, 남송의 명장 악비(1103~1142)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5남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으며,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중 수교 이후 청해 이씨 문중은 중국에 있는 악왕묘에 참배하러 가는 등 정기적으로 중국 쪽 악씨 문중과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한 국가의 지배층이 적국에 귀화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옛날 사람들은 온갖 가문을 주장하고 다닌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신뢰성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고려는 태조 왕건이 당 숙종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https://interstory.tistory.com/17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 신라인 김함보 (1)

지난번 요하 유역의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그 당시 만주 지역의 세력권과 고조선에 대한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포스팅의 연장선상에서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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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중국 측에서는 예맥족(또는 부여족)이 말갈족(여진족)과 일부 북쪽의 선비족, 흉노족 등을 흡수하였고 예맥족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고 한다. ‘예맥’은 ‘더럽고 사납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사실 말갈족과 부여족은 외견상 구분이 어려우며 언어 소통에서도 통역이 필요 없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제주도의 방언이 한양의 말과 매우 달랐던 것과 유사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유일한 차이는 말갈은 조상이 황견의 도움을 받았다는 전설 때문에 개고기를 먹지 않고, 부여족은 개고기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 말로 “말갈”은 촌놈이라는 뜻으로 부여족과 말갈은 생활 양식도 유사해서, 주변의 몽골족이나 거란 등 유목 민족과는 달리 농업과 목축을 겸한 생활을 했다. 그들은 고구려는 물론 발해에서도 함께 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성계는 물론 많은 신라 유민들이 여진(구 말갈)족의 상당부분을 통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여진의 영토는 조선의 영토였던 간도와 함경도 평안도에도 걸쳐있다.

 

그들이 변방 주민으로 괄시를 당했지만 조선의 영토에 살았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부에서는 여진이 신라 후예라는 이야기도 있고, 유전자 검사의 경우 우리와 매우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 역사학자는 <'고려사'는 물론 '이역지'와 '신록기'등 중국 문헌들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 역시 금나라 시조를 신라인으로 밝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진의 역사도 한국사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그들은 시대에 따라 숙신, 물길, 말갈로 불렸다.

 

발해가 망한 후 부터는 여진이라 불렸다. 아마 그들의 지역을 지배하는 민족이 바뀔 때마다 지배세력이 부르는 대로 이름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여진은 고려의 제후국에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 고려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가 압록강을 건너가서 요나라 영토였던 보주를 회복하겠다고 했을 때 완안 아골타는 고려와의 교전을 피하도록 지시했고 오랜 외교적 접촉을 거쳐서 보주(지금의 의주 일대)를 고려에 양보했다고 한다. 영토 분쟁에서 거란이나 몽골의 반응과는 대조적인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