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철학 이야기

제 29강 정말 생각없이 사시겠습니까? 한나 아렌트의 도전

Narin Pusil 2021. 3. 25. 21:30

제 29강 정말 생각없이 사시겠습니까? – 선과 악이 투쟁하는 인간의 본성

 

(한 위대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도전)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은 나를 기분 좋게 해 주고,

나와 생각이 다른 분은 나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해줍니다.

 

 

 

⚫ 질문 –

          당신은 일단 생각을 먼저한 다음에,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스타일입니까?  아니면 별로 깊은 생각 없이, 말이나 행동을 먼저 한 다음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편입니까?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의 주인공처럼 ‘To be or not to be?’ 하면서 행동에 앞서 깊이 생각하고 심지어는 우유부단하는 사고형(思考型) 혹은 신중형의 사람에 가까운 편입니까, 아니면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의 주인공 처럼 ‘햇볕이 비치는 동안에 건초를 말려야한다’고 하면서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는 식으로 결정이 빠르고 심지어는 저돌적인 행동형(行動型) 혹은 신념형(信念型)의 사람에 가까운 편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주어진 일이나 상황에 따라 사고형과 행동형 사이를 오고 가는 편이라고 보시는지요?

 

⚫ 주제 –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주제는 생각(生覺), 사유(思惟), 사고(思考), 사색(思索)입니다. 물론 이 개념들은 제각기 약간의 차이가 있기에 후에 좀더 살펴보겠습니다만, 하여튼 인간의 사유가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 즉 무사유(無思惟)가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끼치는 위험성에 대하여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 - 폴커 슈피어링 Volker Spierling이 쓴 책 <철학 옴니버스, 정대성옮김, 자음과 모음, 2013>(Kl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Glosse Denken von der Antike bis zur Gegenwart, 1990)에는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로 부터 현대의 리챠드 로티에 이르기까지 모두 55명의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유일한 여성 철학자는 오직 한나 아렌트 한 사람뿐이라는 점에 대해 저는 깊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 그녀의 출생과 삶 – 독일 하노버(Hanova)에서 출생하여 미국 뉴욕에서 사망한 정치철학자이지만 우리는 그녀가 1,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통치로 부터 받은 시대적 영향 및 그녀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여성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녀는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정통적 유태교인이 아니라 근대화된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습니다. 중학생때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사를 했고 고등학생 때는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었습니다. 1924년 부터 28년까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와 불트만에

게서 그리스어를 비롯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는 훗설에게서 배웠으며 그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는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23살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아렌트는 18살 때 35살 된 스승 하이데거를 만나 평생 그와 더불어 연인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때는 하이데거가 나치를 지지함으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의 정치적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 평생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하며 그를 떠났지만 그러나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자신의 지도교수 야스퍼스와도 평생을 걸쳐 사제의 관계를 잘 유지했습니다. 독일의 여러대학에서 강사를 하던 중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곧 이어 시온주의자들을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게쉬타포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파리로 망명했습니다.

 

1937년 독일 국적을 완전히 상실한 다음 41년엔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뉴욕을 거점으로 유럽, 특히 독일에서 망명온 유태인 공동체에서 반유태주의에 항거하는 등 저항활동을 하다가 59년 프린스톤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아렌트는 프린스톤 설립후 최초의 여성 전임교수였습니다. 63년 이후엔 시카고대학과 뉴욕대학등 여러 대학에서 주로 정치이론을 가르쳤습니다. 학술상을 비롯하여 많은 봉사상을 받았으며 10여개의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특기할 것은 61년 뉴요커지의 요청으로 아우슈비츠 범죄의 주동자 중 하나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던 예루살렘 법정에 가서 그의 전 공판 과정에 참여하고 돌아와 보고서를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였습니다.

 

⚫ 대표적 저술 – 영문으로 출간된 그녀의 주요저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The Origin of Totalitarianism, 1951 (전체주의의 기원)

2) Rahel Varhagen : The Life of a Jewish Woman, 1958 (라헬 바르하겐 : 한 유대인

여성의 삶)

3) The Human Condition, 1958 (인간의조건)

4) Between Past and Future, 1961 (과거와 미래 사이)

5)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예루살렘의 아

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6) On Revolution, 1963 (혁명에 관하여)

7) Men in the Dark Times, 1968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8) Crisi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 (공화국의 위기: 정치에 있어서 거짓말)

9) Civil Disobedience, 1969 (시민적 불복종)

10) On Violence 1969 (폭력론)

11) The Life of the Mind –Thinking and Willing, 1978 사후 출간 (정신의 삶:사유와 의지)

      한글로 번역 출간된 것으로는 한길사에서 김선욱 번역으로 2011년에 출판된 6권의 셋트가 대표적입니다.

      1) 전체주의의 기원 1권, 2권, (이진우 박미애 공역)

      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 인간의 조건

      4) 혁명론

      5) 공화국의 위기

      6) 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홍원표 옮김, 푸른 숲, 2019

(이중에서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포함한 3권

을 그녀의 대표적 저술이라 하겠습니다만 우리는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

이히만이라는 2권의 주저를 중심하여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 아렌트 사상의 기본 개념 –

      학자에 따라 아렌트에 대한 이해의 깊이나 정도, 방향이나 방법론을 비롯하여 표현의 차이가 있음으로 몇가지 다른 것들이 추가 되기도 합니다만,(예컨데 그녀의 ‘인간의 조건’ 같은 것을 중요 저서로 볼 경우) 오늘 이 강좌에서는 1) 전체주의 2) 악의 평범성, 3) 인간의 무사유(無思惟)라는 3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그녀의 사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 이해 -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지 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하는 전체주의란 여러가지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쓰임새 – 우리말로는 흔히 ‘이념’(理念) 혹은 ‘사상’(思想)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Ideology, 독일어의 Ideologie는 그리스어에서 플라톤이 사용했던 이상, 이념이라는 뜻을 지닌 ‘이데아’(idea) 개념과, 논리, 이론, 학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로기아’(logia)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일종의 관념적이며 이상적이며 이념적인 논리체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란 인간이 관념적으로, 머릿 속에서 생각하는 어떤 추상적이고 아이디얼한 비실재적 이상이나 사상이나 믿음 같은 것을 이론적으로 다듬어서 체계화한 이론입니다.

 

        이 개념을 학문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했던 철학자 트라시(Antoine Destutt de Tracy)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나폴레옹은 정치를 이데올로기화시킨 사람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념적으로 ‘유럽은 하나가 될수 있다’ ‘유럽 사람들은 본래부터 하나다. 따라서 유럽은 얼마든지 한 사람에 의해서 통치되는 하나의 정치체제를 가질수 있다’는 이상적 신념(꿈과 같은)을 지닌 이데올로기스트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데올로기 개념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었고 무쏠리니와 히틀러를 가쳐 스탈린 시대에 이르러 구체화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칸트로 부터 헤겔까지 이어진 독일관념론을 ‘독일 이데올로기의 앞잡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후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쓴 ‘독일 이데올로기’(1845)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두개의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고 보고 그 하나는 경제적 기초로써의 하부구조(Unterbau)이고 다른 하나는 이 하부구조를 바탕 삼아 그 위에 만들어 놓은 종교나 도덕, 문화나 예술 같은 상부구조(Uberbau)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둘 중에서 그 기본, 바탕, 근본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이며 물질적인 하부구조라고 보았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먼저 먹고 살수 있어야지 그 다음에 문화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를 논하게 된다’는 입장입니다. ‘세끼만 굶어봐라. 배부른 소리하지마라’ 그의 유물론적사상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지금 까지의 인류 역사와 사회는 종교나 철학, 도덕이나 권력 같은 상부구조를 이데올로기화한 세력이 노동자들과 농삿꾼들과 노예들 처럼 먹고 입고 살아가느라고 정신 없어 해 온 경제적 하부구조를 폭력으로 지배해 온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합니다. ‘지난날 인류의 역사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위선적이며 허위로 가득찬 이데올로기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계급들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사’ 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양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더 나아가 공산-사회주의적 계급투쟁은 점차 사라지는 시대를 경험히면서 지난날과 같은 계급적이며 정치적인 투쟁적 이데올로기는 점차 약화되거나 종언을 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이전 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자유, 평등, 정의, 신념, 소명, 자선과 같은 긍정적 요소들을 포함하여 여전히 독재, 권력, 전체, 억압, 획일화 같은 부정적 요소들로 뒤섞여 있는 시대를 경험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현실’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탈이데올로기 시대 속에서 더 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말로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산다고 하면서도 정치, 경제, 노조를 포함하는 각종 이익집단이나 단체는 물론이고 신문, 방송을 포함하는 각종 메스 미디어와 심지어는 종교라는 이름을 지닌 이데올로기 집단은 물론이고 교육기관을 빙자한 이데올로기 양성과 훈련 집단, 심지어는 자선 단체의 구제 행위까지도 이데올로기화 되어가는 세태속에 갇혀 있습니다.

 

       ‘자유스러운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거의 예외 없이 조직화된 이데올로기의 구성원들이 되어 자신이 소속된 집단적 이익

의 이데올로기적 하수인들이 되었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며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정치나 경제, 윤리나 종교를 보면서도 다른 이데올로기, 즉 다른 입장과 시각을 지닌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른 판단과 지지를 보내게 됩니다. 여기에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한 가지 사실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여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만리장성에 올라가서 이를 바라보는 제각기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요. ‘아 그 옛날 어쩜 이렇게 방대한 토목건설 사업을 일으켜서 과학과 기술을 발전

시키고 인민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먹고 살게 했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다!’  ‘아 진시왕은 정말 악독한 봉건군주였구나! 이러한 장성을 쌓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고 피눈물을 흘리게 했겠나!’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대다수 백인 중하층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경제와 살림을 향상시키느라 많이 애를 쓰고 노력한 좋은 정치가야! 또한 그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닌 독실한 크리스챤이야!’ ‘아니야 트럼프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세계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자기 나라 밖에 모르는 국수주의자이며 표를 위해서라면 종교나 교회 까지도 이용해 먹는 사깃꾼이야!’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그가 원주민이냐, 이민자냐, 그가 제 1세계의 사람이냐, 제 3세계의 사람이냐, 그

가 기독교인이냐, 무슬림이냐, 혹은 그가 호남 사람이냐, 경상도 사람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이데올로기스트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혼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읽기를 권장하는 책:

겟 리얼 (Get Real) - 이데올로기는 살아있다, 일레인 글레이저, 최봉실옮김, 마티,

2013 / 이데올로기의 종언, 다니엘 벨, 이상두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2) 이데올로기의 종류들 – 지난 역사에서 우리 인류가 경험해 본 각종 이데올로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일레인 글레이저는 ‘Get Real - 이데올로기는 살아

있다’에서 ‘인류를 속이고 또 속아온 이데올로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철학적 이데올로기 – 관념론, 합리주의, 계몽주의, 이성주의, 현실주의, 회의주의, 낭

만주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공리주의, 절대주의, 상대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실

존주의, 이상주의, 허무주의, 객관주의, 주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뉴 에이지. 문화상

대주의, 주지주의, 반지성주의 등등

종교적 이데올로기 – 무신론, 유신론, 창조설, 진화론, 영지주의, 신비주의, 근본주의,

복음주의,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 정통주의, 신정통주의, 창조과학, 해방신학, 여

성신학, 민중신학, 흑인신학, 교권주의, 신사도운동, 시오니즘, 이슬람극단주의, IS,

지하드, 불교정화운동, 선종교, 밀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미륵신앙, 호국불교, 삼종

지도, 위정척사, 성리학, 실학 등등

정치 –경제 - 사회적 이데올로기 – 귀족주의, 봉건주의, 사대주의, 권위주의, 전체주

의, 국가주의, 군국주의, 영웅주의, 국수주의 쇼비즘, 파시즘, 나치이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선민주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주체사상(선군

사상),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직접, 대의, 참여, 풀뿌리 등), 자유주의, 자유방

임주의,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평등주의, 시장경제주의, 포퓰리즘, 지역주의, 백인

우월주의, 히피, 국익우선주의, America First, 등등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남

한을 중심으로 볼 때) – 유교적 이데올로기(충효사상, 남존여비사상, 가부장적 사상),

 

사대사상, 반일주의, 반공주의(멸공통일운동, 북진통일), 자유민주주의, 근대화, 산업

화(경제발전 이데올로기, 수출주도형 이데올로기), 새마을운동(잘 살아보세!), 국산품

애용운동, 사회정화운동(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신앙촌, 민족복음화운동, 성시화

운동, 교회성장운동, 국가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친미주의, 반미주의, 반일주의, 평

화통일론, 평화경제론,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한국적민주주의, 한국적사회민

주주의(진보당), NL주의(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주의), 등등

 

 

 

⚫ 전체주의(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

 

       프로타고라스를 중심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보고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니 정치적 동물이니 하면서 인간 일반을 다른 존재와는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규정해왔습니다. 중세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틀 위에서 인간이란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이요, 동시에 죄인이라는 카테고리로 정형화해서 설명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근세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이며 합리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고 칸트와 헤겔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극치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지난 날 인간을 그 어떤 카테고리로 묶어서 정형화해 온 것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며 표현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인간 앞에 그 어떤 형용사를 붙이더라도 이는 인간 모두를 묶어서 하나로 보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아렌트는 시오노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를 미화하고 영웅화 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체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를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면서 또 다른 전체주의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유혹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김일성 같은 정치권력자만이 아니라 종교, 자본, 문화, 예술 등 우리 삶은 거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익명의 존재’로 살면서 자기는 숨기고 집단적 울타리 속에서 집단의 들러리가 되려는 경향마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대로, 키에르케고르로 부터 시작된 실존주의는 바로 이런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실존주의는 꼭 정치나 경제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상과 이념, 생각과 주장에 대한 ‘통일성’과 ‘전체주의적 발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실존주의철학은 인간에게는 그 어떤 공통적으로 지닌 본질이란 처음부터 없다고 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개별적 독단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실존철학자의 범주에 속하는 아렌트도 이런 입장에 서서 철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인간을 전체주의적 사고와 행위로 묶어 두질 못하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단독자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으로써 반유태적 나치즘이라고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그녀의 온 몸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그의 학문적 과제를 ‘전체주의의 기원과 본질과 정체’를 밝히려는데 헌신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대표적 철학저서요, 동시에 정치이론서이기도 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Totalitarianism, 1951)입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분석한 사람들은 아렌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는 아우슈비츠 대학살은 인류역사상 전체주의가 빗어낸 최악의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1) 전체주의(Totalitarianism)란 무엇인가? –

 

     한 마디로 하면 ‘국가나 어떤 특정한 집단을 개인 보다 우위에 두고 개인은 그 국가나 특정집단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상’입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와는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국가가 있어야 개인도 있다. 우리들의 조직이 살아야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도 살수 있다. 국가나 조직이 없으면 개인은 존립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 가치도 없다’ ‘전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나 집단이 결정하면 개인은 그 결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국가 안에 개인이나 가정이 있다. 국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에 반대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없애 버려야한다’ 이런 사상적 터전 위에서 첫째로 전체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의사결정과 집단적 행동을 강제와 억압을 통하여 실현하려고 합니다. 둘째로 전체주의는 대중조작대중선동을 통하여 집단적 행동을 이끌어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포퓰리즘적 전체주의라고 합니다.

 

     – 이렇듯 전체주의는,

(1) 민족의식과 국가주의를 고취시키고 (2) 억압을 통한 공포정치를 하며 (3) 법치주의를 말살하고 (4) 인권을 무시, 억압하고 (5)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을 선택적으로 차별하며 그들을 국가적 원수로 만드는 것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전체주의가 출현하는 배경에는 유태인들의 선민의식이나 자기 민족, 자기 그룹, 자기 신에 대한 우월의식과 이에 대한 히틀러식의 반대급부가 충돌하면서 양쪽 모두로부터 드러나게 됩니다.

 

전체주의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는 흔히 집단주의(Collectivism)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을 듭니다. 물론 이들 개념은 개인주의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는 일정 부분 전체주의와 유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을 강조하고 개인의 목표 보다는 그룹의 목표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는 전체주의와 흡사합니다. 개인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준거를 개인에게 두지 않고 집단에게 둔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전체주의적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주의에서는 그 집단의 목표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체주의적 폭력성 보다는 비교적 민주적 의사결정과 수평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국가로는 흔히 일본이나 인도를 자주 거론합니다.

    (그러나 한국국회에서의 의사결정을 비롯하여 종교단체나 각종 이익단체들은 아직도 의원이나 회원 개개인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개인주의 보다는 그가 소속된 당이나 단체의 결정에 거이 반대하지 못하고 표결하는 것을 보면 전체주의형 집단주의적 이기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 근세 역사에서 경험한 전체주의의 몇 가지 유형과 실례들

 

     (1) 이탈리아 파시즘(Fascismo Italiano, 영어로는 fascim)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정치사상으로 처음에는 국가사회주의, 전체주의, 국수주의, 인종주의, 일당독재를 지칭했습니다만 후에는 반공과 국가 자본주의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이탈리아

어 ‘파쇼’ fascio는 원래 ‘묶음’ ‘하나로 묶는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운 파쇼’ un fascio라고 하면 ‘노동조합’을 의미합니다. 일본이나 북한에서는 주로 ‘파쑈’라고 발음합니다.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밀라노에서 시작된 이 정치운동은 그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와 그가 이끈 정당의 당명과 이념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전쟁 후 이어지는 경제적 공항 속에서 파시스트들은 민족혁명을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대중동원을 통한 혁명적 방식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 국민주의로서 이탈리아 국민의 우수성과 탁월성을 강조하고 이탈리아 국민은 고대 로마제국과 그 시민정신의 뒤를 잇는 후계자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시대의 영광과 그 찬란함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고대 로마 시대의 영토를 회복하고 이탈리아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고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첫째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그런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는 독재정당이 있어야만 하고 셋째 그런 정당을 통해 개인은 통제되고 국가

의 계획은 일사 분란 하게 수립, 추진 되어야한다고 믿었습니다.

 

(2) 독일의 나치즘(Nationalsozialismus, Nazismus, Natism) –

        독일의 나치즘은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전체주의 사상 중 하나입니다.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혹은 ‘민족사회주의’인데 이에 반유대주의와 반자유주의를 결합하면서 나치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인류의 보편적 평등주의를 부정하고 게르만족을 포함한 아리안 이외의 인종은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에서 처음 시작된 나치즘은 히틀러의 인종주의를 바탕으로합니다. 그가 처음 사용했던 이름은 ‘독일민족사회주의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cshe Deuts -che Arbeiterpsrtei)이었습니다만 후에는 Nationalsozialistische에서 알파벳의 처음 글자인 Nati의 독일식 발음인 ‘나치’를 따서 ‘나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게르만민족(아리안) 같이 우수한 민족이 우상학적으로 열등한 민족

을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라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게르만민족의 혈통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게르만족이 세계의 Master Race로써 지배인종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게르만족의 순수혈통을 다른인종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과 집시들과 슬라브족과 유색인종들과 혼혈인들은 제거하고 육체적 정신적 장애인들과 치매, 간질환자, 자폐아, 다운증후군등은 박멸하고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프리메이슨, 페미니스트, 아나키스트들도 모두 타락한 족속이기에 없애 버려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 알려진 나치의 상징물인 ‘하켄크로이츠’ (Hakenkreuz)는 불교에서 만(卍)자가 ‘아릅답고 행복함’을 상징하듯이 방향은 반대이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나치 지도자들은 카톨릭교인들이었습니다. 카톨릭교회와 민족사회주의 정당의 제도와 선교, 선동에는 유사성이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나치 최대의 선동, 선전 지도자였던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예수회에서 교육받은 신학도였으며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5세기 스페인의 신학

자요, 수도자이며, 사제였던 그는 예수회 설립자입니다)의 ‘진실 보다는 복종이 아릅답다’ ‘어떤 거짓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유용하다’는 구절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에 의해서 히틀러는 마치 예수처럼 종교적 위인으로 추앙받고 거의 절대적 숭배의 대상 으로까지 격상되었습니다. 오른 손을 높이 치켜 올리면서 ‘하이 히틀러’(Heil Hitler)라고 외치는 인사법은 ‘히틀러 만세!’ 라는 뜻으로 로마시대로부터 연유해온 것으로 절대적 충성과 복종을 서약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관심하는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런 전체주의적 나치정권 아래에서 한 사람의 유태인으로, 유태인 여성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싸워온 우리 시대의 한 빛나는 지성입니다. 그녀는 이런 나치 치하에서 살다 망명을 했고 그 후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에서는 전체주의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책을 쓰고 대학에서 정치이론을 가르친 사람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나치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세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나치는 대의민주제도가 지닌 허점과 맹점을 이용하고 조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의를 조작하고 국민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특별한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선출된 권력’을 빙자하여 모든 국민을 환상적 축제 속으로 유인했습니다. 이미 로마 시대의 황제들이 콜로세움의 축제로 민의를 조작하고 환상의 기쁨을 통하여 악을 선으로 만들었듯이 1934, 35, 36년 뉘른베르크의 축제와 37년의 베를린 올림픽까지 ‘게르만민족은 그 어떤 다른 민족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민족임’을 세뇌 시키고 우리와 타인, 아군과 적군, 우리 편과 너희 편을 가르면서 그야말로 ‘대가리가 깨져도 히틀러’ ‘세상의 종말이 와도 나치’라는 구호 아래 튼튼하고 완벽하고 절대적인 자기 편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3) 스탈린주의 (Stalinism) –

 

원래 이 정치사상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슷한 것으로 오해되어왔지만 실제로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스탈린식의 전체주의적 폭정을 이르는 개념입니다. 스탈린(Joseph Stalin 1858-1953) 은 레닌 사후, 1927년부터 1953년까지 러시아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여 철권통치를 이끌어 갔습니다. ‘모든 인민은 정부의 영도를 받아야한다. 정부는 당(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한다. 당은 반드시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를 받아야한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당과 당중앙위원회의 권력을 석권한 후 일국사회주의 체계를 세우면서 당 주도하에 산업을 개발하고 모든 재화를 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앙집권적 국가조직을 통하여 집단농장, 집단이주, 소비에트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그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요하면서 이에 대해 반대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비밀경찰을 통하여 가차없이 숙청을 감행하고 공개적 인민재판(show trials)이나 혹은 아예 법과 재판 없이 처형했습니다. 대숙청 기간, 일명 ‘대공포 시대’(Great Terror)기간동안 스탈린은 약 70만명의 정적들을 총살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축출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치면서 ‘스탈린주의’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그를 지도자가 아닌 독재자로 규정했습니다.

 

 

(4) 마오이즘(毛澤東思想 Maoism) –

       모택동을 중심한 중국공산당의 정치이념을 통칭하여 모택동사상, 영어로는 ‘Maoism”이라고 부릅니다. 핵심은 ‘중국식 공산주의’ ‘중국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공산주의는 주로 도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이들 노동자들의 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으나 마오이즘은 농촌을 중심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어 농민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유럽에서는 농민이란 소부르주아적 성격이 강한 편이어서 혁명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고 본 것에 대하여 모택동은 중국의 산업화와 공업화가 늦어진 것을 이용 전통적으로 중국은 넓은 토지에 대다수의 인민이 농민으로 형성된 농업중심의 국가임을 포착하여 집단농장과 같은 형태의 농촌혁명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모택동은 전통적으로 농민반란이 많았던 중국의 역사를 보면서 ‘농민을 조직화하고 농민을 통치하는 자가 중국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전체주의적 사상을 지닌 독재자로써 대공무사(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우선한다), 대중로선(농촌 대중에게 정치적 실천을 하게한다), 실사구시(현실에서 배우며 이론을 세워간다) 같은 3가지 명분과 원칙을 세운 후 당과 군을 장악하고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를 앞세우면서 문화대혁명 같은 참극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5) 주체사상(主體思想) –

       조선민주주의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의 공식적인 통치 이념으로 김일성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서구의 전통적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북한식 혁명이론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수령 중심의 유일영도체제를 구축함으로 혁명을 완수하자는 것입니다. 핵심 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민 대중이 혁명과 건설의 주인이며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상적 바탕 위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정치를 풀어가며 국가와 인민을 이끌어 가

겠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이루어가는 방법론입니다. 여기에선 두가지 방법론이 제기됩니다.

 

      첫째는 혁명입니다. 지난 날의 인류역사를 이끌어 온 봉건주의와 제국주의를 무너트리고 사람중심, 인민 중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수적이라는 논리입니다.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혁명을 통해서 모든 식민주의 국가와 인민들을 해방시키고 참된 평등과 자유를 구현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주입니다. 정치적 자주, 경제적 자주, 국방의 자주를 포함하는 자주적 능력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자주를 통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이라는 3대혁명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을 추진하는 구체적 방법은 앞에서 본 다른 전체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수령 유일사상, 수령개인숭배사상을 강화하고 이에 반대하는 정적들은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인민들을 강권적이며 불법적으로 수탈하는 것입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 –

 

       이 책은 아렌트의 처음 책인 ‘전체주의의 기원’에 이은 두번째 주요 저서입니다. 아렌트는 1961년 12월 부터 New Yorker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재판의 전 과정에 참관하여 모든 공판 과정을 직접 보고 들은 후 재판 참관기 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의 주인공인 아이히만이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악의 평범성’과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며 생각으로 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무사유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독일로 이주해온 사람으로 처음엔 평범한 한 정유회사의 외판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 그는 독일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처음 그는 말단 공무원으로써 유대인 관계 부처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성품상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는 점차 진급을 하게 됩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독일을 정화하기 위해 게르만 민족은 우대하고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정책을 정하고 이를 하급 공무원들에게 실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유대인 이민부서에서 일했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이주정책이라는 숨겨진 암호에 따라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하다가 후에는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일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는 나치의 당원이었고 SS의 대령으로 600만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어 죽음으로 몰아넣는 최고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그의 결재서류와 서명에 따라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의 가스 열차에 실려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약 1100만 정도의 유태인들이 있었는데 게슈타포의 유태인 과장이었던 아이히만에 의해서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되어 독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태인만 해도 약 500만이 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이탈리아를 거쳐 1950년엔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였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은 그의 도피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그를 체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범죄자 인도 협정이 없어서 그를 보내 줄수 없다고 했지만 모사드는 그를 강제로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히만은 그 전 뉘른베르크 재판에 섰던 다른 전범들과는 달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아이히만과 당시 나치 독일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과 지명 몇 가지를 정리해 둡니다.>

뉘른베르크(Nurnberg / 영어로는 Nuremberg)는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인데 바

이에른에서는 뮌헨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잡을 때 이곳에

서 전당대회를 열고 집권에 성공한 곳입니다. <뉘른베르크 특별국제군사재판>이란 연

합군이 승리한 후 1945년 부터 48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이 홀로코스

트대학살이 진행되었던 도시중 대표적인 뉘른베르크에서 독일의 전범들을 소추, 처벌하

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 재판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집권 기간 중 그들의 모든 점령지역에

서유태인들을 비롯하여 슬라브족들과 집시들, 장애인들과 성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정치

범들을 무차별로 살상한 사건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Holocaust란 그리스어의

holokauston에서 온 단어로 이는 holos, (모두, 전부, 전체)라는 말과 kautos, (불로 태

운다, 불에 태워서 죽인다)라는 말의 합성어로 ‘불에 태워서 죽여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는 고대 중동지역에서 동물을 제단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서 드린 ‘동물제사’에서 연유

된 개념입니다. 그런데 나치는 앞서 말씀드린 비게르만족을 말살하기 위한 인종청소로

이 개념을 이용하였습니다. 나치는 홀로코스트, 즉 불에 태워 말살하는 행위를 통하여 유

태인 어린이 100만, 여인들 200만, 남자들 300만, 총 600만을 죽였고 기타 다른 민족과

정치범들을 약 1100만이나 죽였습니다. 나치의 주요 강제 살인 수용소인 홀로코스트로

유명한 곳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움(제 2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말리트로스테네츠, 야세노바츠 등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와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 /

Das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서쪽으

로 약 50km 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공업도시 오시비엥침(Oswiecim)에 세운 유태인 강

제 수용소요. 집단 처형소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입니다. 당시 유

럽에서 살던 유태인의 2/3에 해당되는 600만 이상을 학살한 나치는 아우슈비츠에서만

110만을 죽였습니다. 나치는 매일 샤워를 하라면서 유대인들의 옷을 벗긴 후 마치 짐승

몰이를 하듯이 한번에 약 2000명씩 가스실로 밀어넣어 죽인 후 그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현재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사족: 인간은 결코 이성적 동물이 아닙

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한국 전쟁에서만도 150만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70년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 170만의 양민을 학살했으며 가장 최근인 1994년 르완다의

투치족(Tutsis)은 불과 두 달 사이에 100만 이상이나 인종청소(genocide)로 당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법정에 섰던 대부분의 전범들은 거의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그렇질 않았습니다. 그는 1심 재판은 물론 최종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나는 공무원으로써 국가의 명령에 따라 공무를 집행했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책임도 없습니다. 나는 우편 배달부와 같았습니다. 봉투에 쓰여진 주소에 따라 우편물을 배달한 집

배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까지 언급하면서 자기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란 모든 사람은 인간의 보편적 도덕률과 양심에 따라 그 누구든지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할 그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자기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역시도 자기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유태인들을 이주시켰다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법을 준수했고 법에 따라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아이히만은 끝까지 ‘아우슈비츠 살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이주’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아이히만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린 조종사와 자기는 똑같이 명령에 따른 공무 수행자인데 왜 그 조종사는 재판을 받지 않고 자기만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쪽은 승전국의 공무원이고 다른 한쪽은 패전국의 공무원이기 때문인가?’ 이런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보고 그의 주장을 다 듣고난 후 아렌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 첫째는 ‘악의 평범성’ – The Banality of Evil – 입니다.

       본래 ‘악의 평범성’이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붙여진 부제입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것 중 첫째는 ‘악이란 일상적이며 평범한 삶 속에서 누구나 범 할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악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범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악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소위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든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악인이 악을 행하고 선인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함으로 악인이 되고 선한 일을 함으로 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는 달리 악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 악은 평범한 것이다’ 악이란 겉으로 ‘나는 악입니다’라고 간판을 내걸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악이 자기의 정체성을 악이라고 보여준다면 어느 누가 그 악을 따라 가겠습니까?’

 

       아렌트는 우리가 하는 행위 중에는 어떤 일이든지 ‘이것은 악한 일이라’는 성격이 처음부터 붙어진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도 생각없이 반복함으로 악한 일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 윤리의식은 무디어지고 구조적 악은 상대화되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인간 행위는 생각없이 반복됨으로 악으로 변질된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악한 재벌, 악한 정권, 악한 종교, 악한 교육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치 중립적인 것들 조차도, 심지어는 전에는 선한 것이라고 불리웠던 것들 조차도 생각없이 그냥 맹목적으로 반복함으로 ‘악은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이 아이히만을 통하여 아렌트가 발견한 첫번째 문제였습니다.

사실 히틀러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착한 소년이었고 아이히만도 그의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이요, 자녀들에게는 훌륭한 아빠였으며, 동네에서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생활인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악마의 뿔이 달린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잊지마십시요! 당신도 넉넉히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모든 일상적 일들은 아무리 착하고 아름다운 일처럼 보이고 종교적 거룩함과 도덕적 선행처럼 비쳐진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이란 다 그렇고 그렇지 뭐’ 하면서 냉소하거나 생각없이 반복하는 일에는 악의 잠재력이 숨어있습니다. 진짜 히틀러나 아이히만, 스탈린이나 모택동만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앉아 보질 못해서 그렇지 우리에게도 같은 기회가 온다면 넉넉히 악의 평범성에 물 들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렌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악의 평범성 - 악은 도처에 깔려 있다. 모든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악이란 별것이 아니다. 선이 부족하면 악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악은 실체가 아니다. 그 무엇인가가 결핍되면 거기에서 악이 나온다’ 우리의 손가락은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판 아이히만 같은 공직자들만이 아니라 실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 둘째는 무사유(無思惟) – Thoughtlessness- 입니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생각이 없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아렌트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자기 발전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특별히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무원으로써 출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상사들에게는 복종하고 부하들에게는 친절하고 자상했습니다. 만약 그의 상관이 히틀러가 아니라 선한 정치가였다면 그는 독일 공무원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록될 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고 무능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습

니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좋은 남편이요 좋은 아버지였고 이웃들에게도 칭찬받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렌트가 이런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사유: Thoughtl essness’ 였습니다. ‘도대체 그는 생각이 없고 생각을 않하고 생각없이 행동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의 법정진술은 거짓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다. 그 면만 보면 그의 주장대로 그는 무죄일수 있다. 그의 주장은 일면 타당한 논리라고 볼수도 있다. 도대체 이런 아이히만 – 자신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공무원이요, 훌륭한 가장이요, 선한 이웃이라고 주장하면서 끝끝내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는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어떻게 <아니야! 너는 악한 일을 한 죄인이야!’>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설득할수 있을까?’(이 점에서 아렌트는 수많은 유태인들에게서 아이히만을 부당하게 옹호했다는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래 다 좋아! 맞다고 쳐줄께! 그러나 아이히만, 당신은 사람이잖아? 짐승이 아니잖아? 돌맹이나 기계가

아니잖아? 사람이잖아! 사람이란 뭐야?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 생각을 안하거나, 생각을 못하면 그 때 부터는 돌맹이나 짐승이 되는 거야! 당신의 죄는 바로 ‘무사유 Thoughtless -ness야!’>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 ‘無思考’ ‘無思惟’였습니다. 사실 아이히만에게는 특이할 만한 악의 동기도 없었고 어떤 이데올로기적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입력된 컴퓨터가 일을 처리하듯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렌트는 이런 아이히만에게서 ‘생각 없음’ ‘생각의 결여’ ‘생각의 불충분함’이 인간 최대의 비극을 불러온 악이라고 단정합니다. ‘무지’와 ‘무사유’는 다릅니다. 無知는 지식이 없는 것, 지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fact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無思惟는 의미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한 meaning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은 정보를 획득하게 하고 어떤 것

에 대한 개념적 의미를 추구하게 하지만 사유는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고 또 그 의미가 나와 우리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가게 하는 지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잘못된 행동, 악한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쌓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 즉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을 찾지 말고 의미를 찾아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어 그의 사후, 1977년에 출간된 ‘The Life of the Mind – Thinking and Willing’(한국어 번역, 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홍원표옮김, 푸른 숲, 2019)에서 힘주어 말하는 아렌트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판단’ ‘사유’ ‘의지’를 구분합니다. ‘판단’이란 자신의 과거를 비춰보는 Retrospect입니다. ‘사유’는 자신의 현재에다 자신을 투사하는 Object입니다. ‘의지’란 자신의 미래에다 자기를 던지는 Project 입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추궁한 것은 ‘철저한 무사유의 책임’과 동시에 ‘생각으로 부터의 도망’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는가? 아니다. 당신은 알았다. 다만 그 결과를 충분히 예측하면서도 <생각으로 부터 도피한 것이다>. 모든 무사유는 생각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도 억누르고 그 생각으로 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세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로 무사유는 우리를 ‘양심의 소리로 부터 도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종교적으로는 ‘신의 음성으로 부터의 도피’라고 할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양심이 회복된다. 양심이 회복되면 고통이 따라온다. 그는 고통을 원하지 않았다’ 둘째로 무사유는 ‘생각이 없음’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히만의 잘못은 ‘생각이 없음’이 아니라 ‘바꿔서 생각하질 못한 것’이다.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무사유이다” 아렌트는 무사유를 ‘생각이 없음’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생각하지 않음’으로 본 것니다. ‘무사유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셋째로 아렌트는 사유란 신이 인간에게 주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요, 책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유는 인간의 의무다! 사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를 유기하는 것이며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면서 저는 ‘사유의 의무’는 ‘타자에 대한 의무’와 동일한 것임을 다시 깨달으면서 아렌트의 말대로 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어서 우리가 이 사유의 의무를 지키지 아니할 때 저와 제 주변의 친구들도 제 2, 제 3, 제 4의 아이히만이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사전’(유영만저, 토트출판사, 2014)은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을 깨우치고

모든 일을 달리 보고 달리 생각해 보도록’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생각을 여러가

지 형태로 분리하여 설명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상기(想起)이며, ‘이것 저것 이

어서 생각 하는 것’은 연상(聯想)이고,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은 상상(想像)이고, ‘정

리되지 않은 채 이어지는 생각’은 상념(想念)이고, 한번 떠오른 생각을 다듬어서 정리한

것’은 사상(思想)이라고 가다듬어 줍니다. 想이란 ‘단순하게 떠오르는 생각’이고, 思란 ‘곰

곰히 따져가며 생각하는 것’이고, 考란 ‘과거를 거슬러 생각하는 것’이며, 念이란 ‘머릿 속

에서 떠나지 않고 맴도는 생각’이고, 慮란 ‘마음을 짖누르는 생각’ 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쓰는 사유(思惟)라는 개념을 영어로는 thinking of, reflecting upon, considering

으로 쓰고 독일어에서는 denken이라고 하는데 불교철학에서는 산스크리트어로 cintana

라고 합니다. Cintana는 어떤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 자세히 살펴보고, 추리하고 헤

아려서 판단하는 이성적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cintana는 오직 인간만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철학은 인간의 사유에는 무탐이나 해탈과 같은 正思惟(바른사유)와

탐욕이나 번뇌 같은 邪思惟(틀린사유)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아렌트로 돌아갑니다. 그녀에 의하면 사유란 동사입니다. 엄밀하게는 ‘사유함’입니

다. 명사로서의 사유나 생각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의사나 의견입니다. 사

람들은 대부분 노동에 대하여, 자본주의에 대하여, 종교나 정치에 대하여 자기들 나름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사로서의 생각함과 사유함은 그가 이미 지녔던 생각에 대하

여 생각을 이어가는 행위입니다. 생각함은 앞의 생각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전제로 합니

다. 아침이 되면 어제의 실타래를 풀어버리고 다시 짜는 것입니다. 사유의 방법은 날마

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지속성은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교정시

키고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나이가 더해가고 경험과 독서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증

가함에 따라 한 때 가졌던 ‘그 생각’은 ‘생각의 반역’을 불러오게 됩니다. ‘사유의 자기 반

역자’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유자가 아닙니다.

 

 

 

⚫ 맺는 말 – 사유의 결핍, 사유로부터의 도피는 반성적 자기 성찰을 앗아가고 결국은 아이히만 같이 악을 악인지도 모르고, 악을 악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게 함으로 개인적 비극과 시대적 파국을 맞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업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 조차도 일정한 전문직종의 사람들에게 청부를 주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주는 돈을 받고 내 대신에 생각 좀 해달라’는 식입니다. ‘나는 돈내고 당신의 생각을 사서 쓰겠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그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뭐 생각이 밥먹여 주나?’ 사실 사유 자체에는 유용성이 없습니다. 가치를 만들어내지도 못합니다. 돈이 생기거나 권력이 생기거나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사유는 양심을 살려냅니다. 사유는 자신과의 대화이고 그 내적 대화는 내적 양심을 일깨워줍니

다. 자신과의 무언의 대화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모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의 부당함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유가 없는 사람은 결코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일수 없습니다.

 

사유는 행동입니다. 사유 자체가 인간을 양심적이며 도덕적인 인간으로 반성하게 민듭니다. 제발 좀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제발 좀 생각 좀 해보라고 일러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곳곳에 요구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서 ‘생각하는 것’ 즉 사유를 앗아가는 것들로 과거에 가장 많이 지적된 것으로 ‘인문학의 원수들’은 흔히 3S라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은 Screen, Sports, Sex를 통하여 개인적 및 집단적 사고능력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강압적으로나 폭력적으로 사고를 차단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대체 무기들을 개발하였습니다. 요즘도 비슷하게 다음 4가지를 이야기합니다.

 

(1) 물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입니다. 생산과 소비를 경쟁화 시키면서 자본 주도 하에 ‘빨리 빨리’ 만들고 소비하면서 정신을 쏙 빼놓게 합니다. 즐겨라!’ 마셔라! 흥청대게 부추기면서 한번뿐인 인생이라고 Yolo(You only live once)를 합창시키며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생각이 밥먹여 주냐?’를 외치게 합니다.

 

(2) 홍보, 선전, 세뇌를 통한 사유불능 작전입니다. 이 역시도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합동 작전입니다. 자본가들과 국가권력은

각종 매스미디아를 석권하고 이들을 통하여 ‘생각은 우리가 해줄테니 너희들은 우리를 따라만 오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3) 종교적 신비주의와 맹신주의, 기복신앙 등의 결합입니다.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믿어!’를 주입시키는 겁니다.

 

(4) AI, 컴퓨터, 등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이 더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한 양 선전, 선동하고있습니다. 실로 현대인들은 돈과 권력, 종교와 과학의 노예로 전락되어 무사유한 짐승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사유하는 사람의 인간관, 세계관, 역사관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가 지닌 인간관과 세계관과 역사관이 그의 사유의 세계와 내용을 결정해 줍니다. 그러므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역사와 우주를 좀 더 큰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사람들의 기질은 열정, 뜨거움, 정과 같은 것에 더 가깝고 생각, 사유, 반성과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비판적 사고의 풍토’가 막혀 있는 사회는 ‘한번더 생각하고’ ‘뒤집어서 생각하고’ ‘반대 방향에서 생각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것이 없음으로 역사와 사회의 앞길을 가로 막게 됩니다. 공자님 말씀이라고 토달지 말고,예수님 설교라고 무조건 아멘만 외쳐 댔던 비극적 풍토에서 벗어나 아무리 공자님, 예수님 말씀이라고 해도 ‘그건 왜 그렇지요?’ 하면서 물어보는 세상이 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조금씩이라도 전진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성찰 1, 2권, 김우창, 민음사, 2016)

 

다행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내부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는 사유와 무사유, 도덕과 부도덕, 양심과 비양심,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어서 그 둘 사이에는 쉬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모순 속에서 우리는 사유하고 생각합니다. 반성하고 성찰합니다. 선과 악이 투쟁하는 우리 내부의 인간성에서 아이히만의 비극을 이겨내고 역사의 진보를 가능케하는 것에는 기도, 명상, 교육,수련, 등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을수 있겠지만 우리 인문학교실은 ‘생각없이 살지 말고 생각하면서 사는 훈련’을 깊이 되새겨 봅니다. ‘그래도 정말 생각없이 사시겠습니까?’

 

⚫ Comments, Questions & Sharing - 시작할 때의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