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다시 읽는 성서 : 마커스 J. 보그(Marcus J. Borg) -3

Narin Pusil 2021. 3. 21. 21:05

 

 

성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구체적 실례를 복기하며 지난 주 우리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시각적 문헌이 아니라,  청각적 문헌이었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짐작하다시피,  고대의  문맹률을 감안해 볼 때  당시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성서의 단편문헌들이 각지역 공동체(교회)들에게 전달되었을 당시 전령, 또는 낭독자에 의해 회중에게 낭독되는 용도로 필사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서를 대하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패러다임-전환(Paradigm Shift)을 요구한다.

 

 

1. 오늘날 과도하게 성서의 문자를 연구하고 쪼개고 구조분석을 하는 사실들이 성서연구와 이해에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과도하게 학자들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자에 집착하는 모습은 사실 균형을 필요로 한다. 차라리 성서, 그 단편 본문들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들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문자연구도 그 단어가 그 시대에 어떤 용도와 용어로 사용 되었는지 정확한 의미와 실예 등은 성서의 언어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성서를 문학적, 수사학적, 역사적 비평방식들에 의해 연구하는 것은 전체 배경이해와 함께 성서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되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성서언어의 문법과 시제, 능동태, 수동태등 단어들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오히려 성서의 본래 의미를 왜 곡시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2, 또 한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구약성서든 신약성서든 각 해당 책 들이(예를들어, 창세기, 출애굽기, 이사야, 마태복음, 데살로니가 전후서등) 각 저자들에 의해, 일률적으로(한 장소에서, 짧은 시간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하면 모세가 어느 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어느 장소에서 한번에 창세기를 기록했을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고린도서 하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한번에 기록해서 고린도에 보낸 편지라고 자연스럽게 추측한다. 하지만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종이가 없었다. 당시 종이에 해당되는 양피지와 파피루스는 매우 비싸고 구하기 힘든 재료들이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또는 후서에 해당되는 편지 분량을 적기 위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양피지나 파피루스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가 16 장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분량을 양피지에 적는 다면 양피지롤이 적어도 큰 이삿짐 가방 하나 이상 들어갈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 사람이 한번에 그 먼거리를 운반 해서 들고가서 읽었을 것이라는 것은 넌센스다.

(물론 바울서신 가운데 짧은 편지들은 그러 한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3. 사복음서도 저자 한사람이 한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한번에 기록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단과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성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설교를 무차별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뇌에서는 무비판적으로 위와 같은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왔다. 하지만 여러가지 실예들을 통하여 그것이 정확한 사실보도가 아님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오늘은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하여 성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들을 교정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실례 :

 

4.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바울서신중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이신칭의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담고 있는 교리 서신으로 이해되고 있다.   갈라디아서(AD 48? ~50? 경, 기록장소는 안디옥? 또는 에베소?)는 데살로니가서와 함께 바울 서신중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중 하나로 간주된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생각할 때 그 편지가 쓰여진 시점에서조차 고려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있다.  우선  당시 갈라디아는  교회가 하나만 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갈라디아는  바울이 여러 교회를 설립한 지역의 이름으로,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에 있는 지방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그 편지의 수신인은 여러 교회 가운데 어느 한 교회였을까?  아니면,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였을까?  가정해 볼때, 어느 한 특정 교회나 지역을 지목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이 편지가 갈라디아 지방에 사는 모든 교인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은 한통의 편지를 여러부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한통의 편지만 쓴 후, 그 편지가 이 지방의 여러 교회에 회람되기를 원했을까? 정확히는 알수 없다.  

 

5. 그가 여러 부의 사본들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방법으로 여러 부의 편지를 만들었을까? 우선 이 편지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비서격인 누군가에게 불러 주어서 받아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필체로 직접 추신을 덧붙임으로써, 수신자들에게 그 편지가 바울의 것임을 알렸다. 이와 같은 관행은 고대 사회에서 편지를 쓰는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내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개역개정 / (갈 6:11) 

             “보십시오. 내가 직접 여러분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써 보냅니다” – 공동번역 / (갈 6:11)

 

    다시 말하자면, 외관상으로도 바울의 필체는 그 편지를 받아쓴 사람의 필체보다 더 컸을 뿐만 아니라 전문 필사가들의 특징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은 바울이 그 편지를 말로 불러 주면서 받아쓰게 했다면, 단어를 한자씩 불러 주었을까?  아니면 기본 골자를 자세히 설명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받아쓴 사람에게 맡겼을까?  두가지  방법  모두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편지를 쓰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두번째 방법에 따라, 편지를 받아쓴 사람이 나머지 부분을 알아서 채워 넣었다면, 그 사람은 바울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채워 넣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본문은 바울의 편지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무명인의 글일까?

 

6. 이번에는 바울이 글자 하나하나를 낱낱이 받아 적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에도 글을 받아쓴 사람이 바울이 불러준 것을 잘못적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 가 현재 있지도 않지만, ‘원본문’이라 할 수 있는 편지의 자필원고에도 이미 오류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베낀 모든 후속 사본들은 바울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편지를 받아쓴 사람이 실수를 저지른 부분에서는 말이다. 얼마나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받아쓴 사람이 100% 완벽하고 정확하게 바울의 모든 말을 기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편지 원본을 베낀 모든 필사본들 역시 100% 정 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보는 앞에서 베꼈다고 하더라도, 이 사본이나 저 사본 여기저기서 본문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런데 여러 필사본 가운데 오직 하나의 사본만 후대의 모든 사본들의 기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1 세기에 이렇게 필사되었던 것이, 2 세기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3 세기로 이어진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역사적 process 가 사실이라면 이 편지의 모든 사본들의 출발점이 되는 가장 오래된 사본 역시 바울이 쓰고자 했던, 또는 받아쓰고자 했던 그 본문은 아닐 것이다.  


7.  일단  바울의  편지가  회람되면,  다시  말해  일단  그  편지가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도시 가운데 어느 한 공동체에 도착하면, 전령 또는 낭독자에 의해 낭송된 후에,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들은 필사자들을 통해 그 편지를 베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러 이문들이 생겨 났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필자자들은 때로는 우발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단어 나, 문장들을 변개시켰을 수 있고, 또는 고의적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이문들을 가진 필사본들이 다음번에는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필사자들은 이러한 오류투성이의 사본을 베꼈고, 또다른 필사자들은 새로운 사본을 베꼈을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필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디에선가  결국  원본문은 유실되거나 닳아 없어지거나 파손되었다.  즉 필사 전승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필사본을 원본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아무리 훌륭하고 기막힌 방법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필사본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 가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은 전혀 없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바울의 편지 원본이 아니다. 바울이 직접 만들게 한 첫 단계의 필 사본들  가운데  하나도 아니며,  편지의  수신처가  되는  갈라디아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만든  필사본도  아니다.  그런  필사본을  베낀  필사본도  아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나마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최초의 갈라디아서 사본은 파피루스 사본 46 번(P46) 이다.

 

8. 파피루스 사본가운데 마흔여섯  번째로 공식적인 사본 목록에  등록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본도  단편이다.  그나마  갈라디아서  본문을 상당량 포함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 사본은 주후 200 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때라면 바울이  편지를 쓴 때로부터 대략  150 년  후이다.  바울의  편지 원본은  150 년동안이나  회람되면서  필사되고  또 필사되었다. 정확하게 필사되기도 했고, 부정확하게 필사되기도 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사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파피루스 46 번이 보고 베낀 사본(대본)을 현재 재구성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사본의 대본이 되는 사본은 정확하게 필사된 사본 이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정확했을까? 틀림없이 그 사본에도 이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본의 대본이 되는 사본에도 이문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의 대본이 되는 사본에도 이문이 있었을 것이며, 대본의 대본의 대본도, 또 그것의 대본도 사정은 같았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는  ‘원본문’이  없다.

 

갈라디아서 ‘원본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필사 전승의  초기  단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들을  토대로  필사  전승의  초기단계의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후에는, 이 재구성된 본문이 바울이 쓴 것, 또는 바울이 받아쓰도록 불러준 것을 어는 정도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요한복음의 예  

 

두번째 실례로  요한복음서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다른  세복음서와  아주 다르다. 세 복음서와는 매우 다른 이야기들을 보도하고 있으며, 그 문체 또한 세 복음서의 문체와도 상당히 다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은 간결하지도 않고 직접적이지 않으며, 주로 긴  설교체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다른 세복음서에서와 달리  요한복음의  예수는 전혀 비유를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비유가 없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만 보도되는 사건들이 꽤있다.

예를  들면,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3 장),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4 장),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2 장),  죽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10 장)등이 요한복음에만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  또한  사뭇  다르다.  다른  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길게 설명한다. 즉, 자신을 하늘에서 온자로 분명히 설명한다.  또  자신에  대해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표적’을  많이 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상을  볼  때,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복음의  기자는  자신이  쓴  복음서의  토대가  되는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가 행한 여러가지 표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료가 있었을  것이고,  예수의  설교를  보도하는  자료도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자료들을 한데 엮어 예수의 생애와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물론 요한복음 저자가 요한복음의 이본 몇 가지를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면,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요한복음 21 장이 후대에 첨가된 부분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Marcus J. Borg,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Taking the Bible Seriously But Not Litera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