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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 다소(Tarsus), 길리기아 문(협곡)과 데린구유 그리고 히타이트

Narin Pusil 2021. 2. 25. 11:00

수리아 안디옥에서,

갈라디아 혹은 갑바도키아(데린구유)로 가는,

길리기아 문(협곡)

 

 

다소(Tarsus), 안디옥(Antioch, Antiochia)

 

길리기안 문(Cilician Gates)은, 고대 힛타이트 군대가 남과 북으로 이용했던 협곡으로 Adana에 가까운 Tarsus 가기전에 있는 Yenice부터 시작되사도 바울이 2차 3차여행때 넘었다던, 군사적인 관문(關門, gateway)도 있던 곳이다.

 

길리기아 관문 (Cilicia Gates)

 

 

길리기아 지방과 터키 내륙 갈라디아, 갑바도키아를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요지를 보여주는 표시다. 터키 내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험준한 이곳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이곳에 예부터 관문이 있다. 그 이름을 길리기아 관문이라고 부른다.

 

관문은 시리아. 유대 지역과 중앙 아나톨리아 내륙을 연결 시켜주는 타우루스 산맥을 관통하는 관문이다. 밤빌리아 평원 북쪽에 있는 비시디아(Pisidia)지방의 클라디우스(Claudius)황제의 기념도시 더베(Derbe, Θῆβαι, Thebes), 루스트라(Lystra), 이고니온(Iconium),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 Antioch)을 지나, 골로새(Colossae), 그리고 에베소(Ephesus)를 가게된다.

 

212년 카라칼라는 이 문을 확대하고 문의 동쪽으로 들어가는 관문에다 비문을 세우고 그 행사를 기념 하였다. 이 비문은 절벽에서 뛰어 나온 곳에는 지금은 이미 없지만 고속도로 밑에 강줄기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한 바위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비문은 마지막 두 단어를 제외하고는 라틴어다. 제국의 타이틀을 사용한 후 “카라칼라가 산을 절단하여 이 관문의 폭을 넓혔다”라고 쓰여졌다. 끝에 있는 두 개의 단어는 헬라어로 쓰여졌는데 “길리기아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현대의 관문

 

 

다소(Tarsus) 클레오파트라의 문(Cleopatra Gate)

  터키 남부의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타루수스(Tarsus, 다소)는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 다소에는 또 하나의 알려진 곳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Cleopatra's Gate)'이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 있는 허물어진 성문이 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역사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의 다소는 12m 간격으로 3개의 분리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혹은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해 있다.

 

데린구유(Derinkuyu),

 

1. 데린쿠유(Derinkuyu)는 터키 데린쿠유에 있는 개미굴처럼 지하 곳곳으로 파내려간 대규모 지하도시이다. 한때 아랍인들로부터 도피한 기독교인들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부 통로와 환기구가 지하 각층으로 연결돼 있고 교회와 학교, 그리고 침실, 부엌, 우물 등이 존재한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덩이를 통로마다 설치해 비상시 통로를 막았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외부에서 침입한 자는 길을 잃도록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다.

 

2.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의 카파도키아 평원 아래에 부드러운 화산암을 깎아 만든 200개가 넘는 지하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한 농부가 도망간 닭을 쫓아 들어갔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3. 최초의 터널들은 4천 년 전에 파인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으나, 지하 1층은 히타이트가 남쪽으로 내려오기전 완성해놓고 내려왔다고 한다.  기원전 1274년 카데시전투(Battle of Kadesh,Qadesh)전투에서 당시 최강대국 람세스-2세의 이집트 5개 군단을 격파하고 역사상 최초로 문서로 평화협정을 맺는다.  하지만 기원전 717년 아시리아에 완전히 멸망했다. 그때 히타이트의 남은 사람들이 데린구유에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4. 터키 문화부의 발표에 따르면 BC 8~7세기 프리기아인들이 착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동로마 제국 시대로 당시 무슬림 아랍인의 습격을 받은 기독교도들의 피신처로 이용했다. 14세기 티무르가 공격할 때는 기독교도 원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심지어 20세기까지도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피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그리스와 터키의 주민 교환으로 버려졌으며, 재발견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5. 데린쿠유의 규모는 2만 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였고 방과 방은 통로로 이어져 있으며, 총 11개의 층이 있고 지하 85미터 깊이까지 이어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데린쿠유의 시설인데, 곡물 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 심지어 농장과 가축농장은 물론 감옥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이런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였다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지하 도시의 입구에는 작은 규모의 지상 마을도 존재했는데, 이건 페이크 수준으로 겨우 수백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였다. 

   특히 놀라왔던 건 빛도 공기도 없는 지하동굴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는지였는데,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수직 환기구와 주위의 보조 환기구들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괴레메 계곡

 


6. 거대한 바위문을 이용해 도시를 성처럼 봉쇄할 수 있어서 티무르의 공격에도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미닫이문처럼 방과 방 사이에 작은 틈새가 있고 그 안에 돌덩이를 끼워서 적군이 들어오면 그 돌덩이를 통로 중간으로 굴려서 막아버리는 방식이었다. 심지어는 하나의 방 양쪽 출입구에 모두 바위문을 만들어서 적군을 아예 포위시킬 수 있는 방도 있었다. 그리고 현재 공개되어있는 데린쿠유 지하 도시의 입구 부분도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통로에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각개 격파하기 딱 좋은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걸로 입구부터 시작해 싹 날려버리거나 땅굴을 파지 않는 이상 재래식 방법으로는 침입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또한 가장 가까운 지하 도시인 카이막르(Kaymaklı)와도 길이 8km의 터널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카타콤이 연상되는 데린구유를 예수 가르침과 별개의 하나로 보면 안된다. 당시에는 그것이 그들의 최선이라 생각했겠지만, 2천년이 지난 21세기에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예수 가르침과는 다른 무지의 실천행위라 나는 생각한다. 예수도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유대주의자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

 

▪︎장군계곡 = 파샤바그라리Pasabaglari, 스머프 가가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 파묵칼레( pamukkale)


 

 

 

이오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