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다윗(king david)과 솔로몬(king solomon)이야기

성서속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Narin Pusil 2023. 2. 12. 20:28

 

'경천애인' 이라는 말이 있읍니다.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을 인격으로 대하고 사랑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앞서 엣세이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이스라엘 선지자들 역시 다른민족 다른나라와 다르지 않은 선각자로서 또한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대부분이 피지배층인 하층민들에 대한 궁휼함의 마음이 사라진 왕과 지배층들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도'를 리마인드 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으로 또한 이익집단으로의 욕망의 포로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을 보고 위협적인 미래에 대한 선각의 예언을 이스라엘에 선포하게 됩니다. 그 후도 계속 그렇지만, 르호보함의 남유다는 여로보함의 북이스라엘보다 경제와 내치에 있어 형편 없었읍니다. 또한 르호보함이 여로보함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을게 없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압니다.

그렇지만 남 유다 왕들은 좋고, 이스라엘 왕과 민중들이 나빳다고 기록된 것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160년후쯤 멸망당한 남유다의 지식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포로당시부터 정리하며 귀환후에 바이블을 편집한 남유다계통의 학사(역사가)들에 의해 편집되어 북이스라엘에 대해 좋지않은 편견이 담겨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남유다는 다윗을 시조로 삼는것을 왕조의 정통성으로 삼는 반면에 (지난번 솔로몬 재판결과에서 저자가 강조했듯이 여러 학자들은) 북이스라엘은 사울왕을 시조로 삼는것을 왕조의 정통성으로 삼습니다. 사무엘, 열왕기를 비롯한 모든 기록이 포로에서 돌아온 학자들 (그들은 남유다 엘리트지요, 북이스라엘측의 기록자는 단 한명도 없었읍니다.) 에 의해 만들어 진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북이스라엘이 150여년전에 먼저 멸망한 까닭이기도 하고 남왕조가 다윗왕조를 높이기 위해 북의 사울의 계승에 폄하를 하여야만 했던 것이라 사료됩니다.

 


위의 열왕기 기록에서도 보이듯 그들은 남유다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 냈읍니다. ... 유다의 아사왕 몇년에 북이스라엘 OO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것만 보아도 이스라엘 역사 문화 통치 학문 등등은 모두가 남유다 중심적인 기록으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읍니다. (열왕기상 22:29~40)

(1)북이스라엘 아합군과 남유다 여호사밧군은 서로 동맹하여 아람군에 맞서기로 했읍니다.

(2) 전쟁중에 아람의 병거 전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어떤 왕을 자세히 보니 남군의 여호사밧이라 .. 그래서 그를 살려 주고 다시 북의 아합을 찾아 다른 전쟁터로 떠나는 장면이 있읍니다.

(3) 전쟁터에서 적인 동맹군의 수장을 누군 살려주고 누군 죽인다는 것은, 암만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하지만 수많은 전쟁사를 보면, 골라서 전쟁 터에서 적장을 골라서 죽이는 예는 없지요. 포로로 만들면 모를까 ... (적어도 열왕기상만큼은 남유다에 이롭게 쓴 역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굳혀 지는군요..)

(4) 유다인이 사마리아인들을 폄하하는 까닭도 앗시리아의 디아스포라 정책에 따른 혼혈 (메대,파사를 제외하면 비슷한 인종들인데..^^)의 결과라 하지만 ... 위에 언급한것 같이 다윗 정통성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요인 아닐까 합니다.


국가의 존망의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두아들과 함께 장열히 전사한 이스라엘 왕 사울, 그런지경에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사울왕국을 벗어나 국경부근에서 블레셋과 공조하며 지내다 사울이 죽고난후 사울왕가의 풍지박산을 기화로 왕이 된 다윗의 밑으로 간 사울의 충성하던 신하들은 과연 몇명이나 되었을런지 ... 아브넬과와 같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없었을런지...

장열히 전사한 요나단과의 약속인 다윗이 먼저 왕이되고 그후에 요나단이 되기로 했는데 .. 다윗은 이스보셋등 사울의 자손 대신에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