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umanities)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로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1 시드니 인문학교실 Repeat 홍길복의 네번째 강의: 인문학의 출발점-생각하기 02 / 02 / 2023
제4강 인문학의 출발점 - 생각하기
⚫ 인문학의 출발점(생각하기)부분에서는 다음의 3권의 책을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1)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미셜 루트번스타인 공저, 박종성역, 에코의 서재, 2007.
(2)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이진원역, 김영사, 2012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김선욱역, 한길사, 2006
⚫ 지난 세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의 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문학을 하는 이유와 목표 설정
(2)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
(3)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인문학 각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1) 먼저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왔으며 동시에 이 ‘생각하는 존재로써의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왔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성적 동물이라고 확신하십니까?
2) 두번째 질문 입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곧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둘을 비교해 볼 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됩니까?
3)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 문제, 혹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판단(생각)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예컨데 지난 주일 당신네 교회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트럼프가 주장하는 America First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지난 주 헌법 재판소가 내린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나도 문신을 하겠다’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몇년 정도 살아보고 나서 결혼 할지 안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 흑인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당신 자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난 후에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까? 소위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일어나는 일 일까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갑작스런 일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낮섦’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에만 생각을 하시는 편입니까?)
⚫ ‘생각’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은 제 각기 달리 이해해 왔습니다. 서양은 긍정적, 적극적이고 동양은 소극적, 부정적입니다. 서양은 인문학적이고 기능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자연에 대해 서양은 정복의 대상이어서 삼단논법에 한계에 다다르면 종교성이 농후해지는데 반해, 동양은 자연을 벗삼아 자연에 동화되어 순응하며 살아가므로 외려 인문학적이 아닐까??)
‘생각하라’ - ‘생각하지 마라’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입장을 정리해 봅시다.
⚫ 생각하라 – 서양 인문학의 기본 틀 - ‘생각하기’
파스칼(Pascal)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마다 생각하고, 생각을 통하여 판단하고, 판단을 통하여 결정하고, 결정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는 존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861, 프랑스 철학자)의 말도 비슷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동안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존재가 멈추어지면 생각도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존재도 멈춘다’. 서양의 인문학은 생각Thinking, 사색 Speculation, 사유 Meditation를 인간만이 지닌 독특한 기능이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특징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하게 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 Reason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긴것은 사람 처럼 보이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로써 간주되거나 동물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 생각하지마라 – 동양사상의 최종적 목표 – ‘생각하지 않기’
채근담에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이 많으면 번민이 많고 염려가 많으면 고통도 많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지혜문학에도 이런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종교인들이나 성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슷합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無想)’을 ‘무상(無相)’과 동일시 했습니다. 무상(無相)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상(我相), 곧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뿌리인 고집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상(人相),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다름과 차이를 구별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생상(衆生相), 곧 인간성 속에 있는 자연스런 본능, 식욕, 성욕을 포함한 일체의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수자상(壽者相), 즉 살고 싶어 하는 생존의 요구를 포함하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도 생각지 말고 남도 의식하지 말고 욕망에 매이지 말고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 까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생각이라는 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앞선 고대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않된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유욕과 연결되는 범죄 행위와 속결된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렸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려야 그게 진정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무심(無心)이라 했습니다. 무심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 곧 집착(執着)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고의 이상적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1)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2) 지난 날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일 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기억해 보는 것
3) 어떤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거나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
4) 어떤 일이 앞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
5)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느낌이나 의견을 가지는 것
6)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머리를 써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7) 어떤 일에 대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것
(참고: 생각과 마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생각이나 마음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똑같이 인간의 느낌과 의지를 표현하는 본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말이나 글, 그림이나 춤 같은 동작으로 그 느낌이나 주장, 의지나 결심을 일정 부분 표현 할 수 있는데, 마음은 언어나 문장, 예술이나 동작으로는 그의 의견이나 결단을 충분히 표현 하기가 어렵습니다.)
⚫ 서양에서는 인간들이 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을까요?
1) 언제부터였나요? – 기원전 6세기 후반 부터 4세기 후반기에 일군의 사람들은 날마다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지?’ ‘이상한데?’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어!’ 이 것이 바로 자연 현상에 대해 ‘신화적 응답’만 해 왔던 사람들이 ‘합리적 대답’을 시도한 인류 최초의 변화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미신에서 이성으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첫 발자국은 이렇게 출발이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어디에 살던 사람들이었나요? – 지중해를 생각해 봅시다. 동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를 중심한 북 아프리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멀리 스페인을 지나 대서양으로 이어집니다. 북쪽에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그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부터 동편에 있는 에게해 바다를 건너 드넓은 소아시아와 특히 이오니아 땅이 펼쳐저 있고 그 북쪽으로는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 지금의 터키땅 서쪽에는 밀레토스(Miletus)라고하는 도시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하여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이오니아 학파’ 혹은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3) 그런데 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했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 부터 이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날씨와 거기에 따른 풍족한 삶이 뒷 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심는대로 열매를 맺었고 밀을 비롯한 각종 곡식들과 과일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했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앞마당 같은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곳으로 각종 해상 무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기원전 6 세기 이후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부와 여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1)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지게 되거나
(2) 각종 예술 - 음악과 미술, 문학 – 시와 연극을 비롯하여 스포츠가 발전 되거나
(3) 여러 가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서 학문이 발전하게 됩니다.
(4)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 그런데 그들이 이렇듯 자연의 변화 앞에서 무엇인가 의혹을 갖고 생각을 하게 된데는 몇 가지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경이감을 갖는 마음’ wonder 혹은 ‘호기심’ curiosity 입니다. 사람은 자연이든 사물이든 인간이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지 놀라워하고 경이로워하고 호기심의 발동되어야만 생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관심(concern)’혹은 ‘흥미(interesting)’라고 합니다. 둘째는 ‘의심(doubt)’하고 ‘질문(question)하는 단계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물어 볼 것이 없고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같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서라도 물어보는 사람이 말 되는 것을 가지고서 물어보지 않는 사람 보다는 훨씬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나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접근 합니다. 종교는 말없이 믿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인문학은 끝까지 의심함으로 진리에 가까이 간다고 말합니다. 목표가 동일하다면 싸우지 말고 서로 ‘당신은 그 길로 가고 나는 이 길로 갈테니까 우리 훗날 진리의 바다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 할 수는 없을까요?
만나지 못할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사상과 논리의 차이로 다시 만난 사람들은 드무니까요. 종교관의 대화도 그렇습니다. 통합된 절대적인 종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서로를 좁힐 수는 없으니까요.
5)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Thales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까지의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 Arche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이 주어지면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생각의 탄생’
– 이제는 오늘 소개해 드린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그의 부인 미셀 루트번스타인이 함께 쓴 ‘생각의 탄생: Spark of Genius(2001)’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로 촛점이 바뀌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창조적 생각하기’이며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입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이 책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르셀 뒤샹,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하기’를 살펴봅니다. 그들은 도대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은 어떻게 배웠는지를 기술합니다. 동시에 저자는 이들 역사상 소위 뛰어난 인물들만이 ‘창조적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기만 하면’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예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을 생각해 봅시다. – 실제로 그 그림은 파이프입니까, 아니면 파이프의 개념이라고 보십니까?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실재’(Reality)와 ‘이름-개념’(Name, Concept)을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루트 번스타인은 ‘생각과 대상’ ‘사고와 도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 단계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탄생된다’고 봅니다. 모든 ‘생각하기’는 반듯이 어떤 대상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주체자의 관찰로 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창조적 생각’의 단계입니다.
(1) 관찰하기 – 시각, 청각, 후각, 미 각등 모든 감각적 접근과 경험하기가 첫 단계입니다.
(2) 형상화하기 - 관찰에서 얻은 것들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형상화는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예컨데 장미꽃을 관찰한 후, 그 아름다움을 시각적인 그림이나 글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향기를 따서 향수를 만들어 후각적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아름다음을 음악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습니다.
(3) 추상화의 단계입니다. 관찰한 대상에서 일체의 껍대기들은 다 벗겨버리고 최종적인 본질만 보는 단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본질만 그렸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형상은 다 걷어버리고 사물의 핵심만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간단히 제목만 열거하겠습니다.
(4) 패턴 알기 단계 (5) 패턴 만들기의 단계 (6) 유추 단계 (7) 몸으로 생각하는 단계 (8) 감정 불어넣기 단계 (9) 차원을 바꾸어 보는 단계 (10) 모형을 만들어 보는 단계 (11) 놀이와 즐기는 단계 (12) 변형의 단계 (13) 통합의 단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유대인으로써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1963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내용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아이히만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1961년 부터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에 직접 참관한 재판기록 입니다. 원래 이 책의 처음 제목은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었습니다. Banality라는 단어의 뜻은 ‘너무나 흔하고 흔하여 아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고 번역해 왔습니다. 악의 일상성, 악의 진부함, 악의 흔함이라고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본 아이히만은 그렇게 수 많은 사람을 죽일 만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요, 그 개인적 성품을 놓고 보면 참으로 착하고 선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 합니다. 아이히만은 주장합니다. ‘나는 운이 없어서 나쁜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을 뿐이지 사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두가지를 지적 합니다.
첫째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입니다.
사실, ‘악’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요, 평범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찰입니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별 ‘생각없이’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악이란 특별한 사람이 특별히 악한 생각이나 악한 의도를 갖는데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지 그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히만은 독일 국민들에 의해서 정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공무원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책무에 성실하게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무원 수칙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히만은 말합니다. ‘그 일은 사실 내가 아니라 누가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만 했던 일입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했고 반항을 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그 어떠한 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악과 불의는 착하고 선한 사람도 넉넉히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두번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을 행한다’는 지적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은 개인적 악일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적시합니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집니다. 1962년 5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자신의 악과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는 성실했고 진실했지만 ‘생각하는 것’은 거부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투철한 준법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유죄인 이유는 오직 생각하지 않은 것이요, 생각하지 않고 복종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 그것이 미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악이고 죄입니다’ ‘나는 그져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입니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습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첫째,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고 일한 것이며 둘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것이며 셋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모든 전쟁과 오늘날도 계속되는 공무원들의 ‘영혼 없는 공직 수행’과 개별적 항거를 무시하고 자행되는 집단적 행동들은 인간에게서 ‘생각 할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자, 이제부터는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믿으시겠 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임하시겠습니까?’
(만약에 힛틀러의 나치가 승리헤서 유럽을 통치하게 됬더라면, 아이히만을 생각없는 인간으로 거침없이 부를 수 있었을까.... 한나 아렌트 에게 아이히만이 일을 완수한다면, 하이데커를 베를린 대학 총장을 맡기겠다고 한다면 .그녀는 어찌했을까? 그리고 한국전쟁때 소위 적화통일 됬더라면, 서북청년단은 어찌됐을까? 보도연맹으로 30만명이, 제주 4.3으로 3만여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이승만의 평범성은....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 했는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런지....)
⚫ 나가는 말 - 폴 부르제(Paul Bourget,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의 말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부탁입니다. 꼭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 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생각하는 태도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L. Adorno,1903 -1969 독일의 사화학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위르게 하버마스와 함께 비판이론을 주도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중 하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사회’를 미국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 것은 꼭 미국 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형태의 사회 구조를 지닌 나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나라들은 거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주어졌거나 정치가 조작해 낸 대중문화를 따라가도록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스포츠와 영화, 각종 게임과 향락을 따라 갑니다. ‘생각은 당신들이나 하시오 우리는 그냥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소’가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행태입니다. 트럼프는 선거유세때 드러내 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런 ‘사유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대중의 무지’가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서적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김기춘이나 조윤선만 잘못된 사람들인가? 물론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과 함께 국가로 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일한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들은 ‘영혼 없는 기계들 입니까? / 총회장이니 담임목사들, 혹은 총무원장이나 주지 스님만이 오늘의 종교계를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인가? 다른 평신도들과 불자들, 장로들과 보살들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말없이 순종만 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절대로 가만히 있으면 않된다’ 기성 세대의 정치인, 교수, 언론인, 목사, 신부, 스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죽습니다. 그들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떠들고 소리 지르고 반항하고 소란을 피워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세월호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 만이 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 무엇이 우리를 의심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까요? 그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해 내고 끝까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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