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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페르시아제국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헬라(그리스)제국

Narin Pusil 2022. 10. 18. 22:08

    시드니  인문학교실  주경식     20 / 10 / 2022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     

 

1.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페르시아의 부흥을 가져왔던  키루스 II세(고레스  대왕)가 죽고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남 캄비세스 II 세(Cambyses II)는 페르시아의 두번째 왕으로  등장했다.  

고레스대왕의 남은 목표는 옛 앗시리아의 영토중 정복하지 못한 이집트 정벌뿐이었다.     

캄비세스 II 세는 자신의 아버지 고레스대왕의 이집트 정벌을 이어받아 즉위한지  4년만인 

BC525 년에  대규모 원정군을 소집하여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로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하게 되었고,  페르시아는 오리엔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이집트인이 다스리는 왕조는 끝이 났다. 이집트 왕조는 페르시아 왕조가 다스리게 되었고,  

  이로부터  2 세기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알렉산더'가 죽게 되자,

  알렉산더의 장군중 한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파라오에 오르게 됨으로 32 왕조가 시작된다.  

  그때부터는 그리스인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고,  클레오파트라 시기에 이르게 되면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정복되어  로마화가  되게  된다)                 

 

 

ㅡ캄비세스의 재판 ㅡ 브뤼히시 당국이 재판관 사무실(그 당시 부시장실)에 걸어둘 그림을 네덜란드 화가 '제라드 다비드'에게 요청해 그린 그림(1487-1488 년)

 

 

 2. 그러나  캄비세스 II세는 왕위에 오른지 7 년 5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자  캄비세스 II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 1 세(Darius  I,  다리오)가  다른 제후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는 왕이 되기전에 총독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의 피를 이어받지 못한 연고로 

왕족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부인이  있음에도,  캄비세스 II세의  여동생,  고레스대왕의  딸  아토사(Atossa)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새로 들인 왕비인 아토사와 다리우스  1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크세르크세스 I세((Xerxes,  아하수에로)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왕이 되기전부터  아버지 다리우스  I 세를 보좌하며 왕의 꿈을 키워갔다.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와  다리우스  I 세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I세(BC 550 - 486 년)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뛰어난 책략가 였던  다리우스 I 세는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정복전쟁을  일으켜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다리우스  I 세는  두번에  걸친  그리스  정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리우스 I 세가  정교한  통치체제를  갖추고  여러  공공사업을  일으켜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I 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도로망이었다.  다리우스  I 세는  수도 파사르가다  남쪽에  페르세폴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해  수도를  옮기고,  그보다  서쪽에  '수사'성을  건설하고  제 2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제국  서쪽의  경제도시  사르디스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왕의  길’이라  불리우는  이 도로의  총길이는  약  2400km 에  이르렀다.  

 

페르시아  제국은  ‘왕의  길’을  통해  지방에서  걷은  세금을  중앙 정부로  신속히  옮기고  반란이  일어난  지방이나  국경지대에  더빨리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다리우스 I 세는  역참제도를  갖추어  ‘왕의  길’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  도로를  따라  여관과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100 여개나 설치하고 우편물도  역참을 통해  전달하게  되었다.  

왕의  지시를  지닌  전령들은  역참을  통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지방곳곳에  다리우스  I 세의  명령을 전했다. 지방 총독을  감시하는  비밀경찰도  ‘왕의  길’과  역참을  통해  지방곳곳을  옮겨  다니며  총독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다리우스  I 세에게  신속히  보고했다.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  문화에  대한  관용과  정치.  경제적  안정이  어우러지면서  번영을  누렸다.  

 

다리우스  I 세는  페르세폴리스에  여름궁전  그리고  수사에  겨울궁전을  짓고  새해가 되면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는  귀족과  관료,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무역  상인과  외교사절등  1만 5천여명이  며칠동안  쉬지  않고  수만  마리의  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이렇듯,     다리우스  I 세때  페르시아제국은  번성을  누렸다.                 

 

 

ㅡ다리우스 I 세 부조(BC550-486)

 

ㅡ Naqsh-e Rostam 있는, 다리우스 무덤

     

ㅡ낙쉐 로스탐(Naqsh-e Rostam) 왕들의 무덤

 

 

 

다리우스 I 세는  일종의  쿠테타로  왕위에  올랐다.  그  반동으로  인해  페르시아  제국내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통치는  불안했다.  하지만  다리우스 I 세는  끈기와 인내로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제국을  완성시키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페르시아  제국이  완성되자  다리우스  I 세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지  국가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  자신이  페르시아  종교의  유일신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고레스대왕의  관용정책을  이어  이집트의   ‘라몬신’  유대인의  ‘야훼신’등  다양한  종교의  자유와  고유의  언어를  인정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페르시아인,  피정복민의  구별없이  평등한  세상에서  제국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기원전  2500 년전  전제군주하에서  피정복민들에게  종교 문화 재산형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내  제국에서  노예는  없다”라는  선언을  통해  관용과 자유의  리더십을  발휘한  다리우스 I세는  현재 이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실패          

 

 

이러한  다리우스 I 세도  오점을  남겼다.  바로  그리스와의  두번의  전쟁이다.  

BC510 년까지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그리스와  대부분의  그리스의  섬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복종하였다.   그들은   다리우스 I 세가  임명한  참주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타고라스가  이오니아  지방에서  페르시아제국에   반하여  반란을  꾀했다.  이때  그리스는  이오니아를  돕기 위해  함대를  지원하여  페르시아를  자극하였다.           

 

 BC492 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리우스  I 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일단의  함대를  보내  그리스를  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엽을  건너가다  엄청난  폭풍을  만나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약  300 척의  함선이  폭풍  때문에  부서졌다고  전해진다.               

 

 

ㅡ헬레스폰토스 해엽(Hellespontos), '헬레의 바다'라는 뜻으로 현대 튀르키에의 ''다르다넬스' 해엽이다.

 

 

마라톤  전투

: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2차 전쟁  이후  다리우스 I 세는  BC491 년  다시  사절단을  그리스  각지에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는 요구를 한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은  이에  복종했지만,  아테네  도시국가는  이들  사절단을  우물에  던져버려  죽이고  저항의사를  표현했다.  이에  진노한  다리우스 I 세는  재차  원정군을  보내  이오니아  반란때  반란군을  도운  에우보이아(Euboea)섬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응징하고자  원정군을  다시  파견한다.  

 

두번째  전쟁은  2년 후인  BC492 년에  벌어졌다.  이  원정군은  로도스(Rhodes),  사모스(Samos),  낙소스(Naxos)를  거쳐  에우보이아섬에  상륙  7 일만에  에테트리아를  점령하고  9월  1일  마라톤 지역에  상륙한다.   이때  아테네는 스파르타 도시국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지만 스파르타는  축제를  핑계로  15 일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어쩔수  없이  아테네  연합군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때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전술을  통해  누구도  아테네가  승리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 한다.  페르시아의  제 2 차  침공을  막아낸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다.  이로  인해  근대  올림픽에서  마라톤이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현대에도  마라톤  종목이 금지되고  있다.                 

 

ㅡ마라톤 전투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마라톤  해변에  세워진  밀티아데스  동상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리우스  I 세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징벌하기  위한   또  다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나고,  이집트  정벌을  마친  다리우스 I 세는  병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BC 486년  10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75 세로, 황제로  37 년간이나 재위한  후 였다.      다리우스 I 세  황제가  죽자,  다리우스  I 세와  아토사  왕비와의  장자였던  크세르크세스(아하수     에로)는  왕위를  이어받아  크세르크세스 I 세로  즉위하였다.          

 

 

ㅡ크세르크세스 I 세 (아하수에로왕)

        

 

 

 

살라미스  해전 :  페르시아와  그리스와의  3 차  전쟁          

그리스  정벌을  위해  4 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크세르크세스는  원정준비  5 년째인  BC480 년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원정군을  이끌고  출발한다.  페르시아군에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앗시리아,  파르티아,  아라비아,  인도,  리비아,  에디오피아,  페니키아,  이집트군이  모병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트라키아에서  열린  페르시아  열병식때  참가한  보병이  170 만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역사학자들은  20 만명으로  추산한다).  해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함선이  1300  여척,  화물선이  3000 여척이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반도  북쪽에서부터  육상과  해상  양방향으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영화  300’에서  나오듯이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스파르타  정예군을  비롯한  8000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막아섰다가  전멸당했다.  페르시아군의  압도적  군사력에  전의를  상실한  상당수의  그리스  도시국가는  페르시아군에  투항하고  합세했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의  최종  병력  수가  528 만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36 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아테네의  인구  전체가  15만 명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승상이 없었다.  불탈     것”이라고  하면서도  “제우스께서는  ‘나무  성채’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하게  해  너희를  구     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ㅡ페르시아와 그리스 전쟁 지도

       

 

 

페르시아군의  재침공을  대비해  3년  전부터  해군을  건설해  온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채’가  해군  함선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는  아테네  주민들을  함선에  태우고  세  곳으로  나누어  피신시켰다.  그중  10 여만  명이  피신한  곳이  아테네  남쪽  살라미스섬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섬에서  페르시아군에  의해  불타는  아테네를  지켜보면서  치욕의  눈물을  흘렸다.  육상에서  대패한  그리스 연합군은 해상에서의  승리가  절실했다.  그런데  해상전을  어디서 치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었다.  스파르타와  고린도  도시국가는  살라미스  섬 보다  더  서쪽으로  후퇴해  고린도  해협에서  해전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상  살라미스섬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ㅡ 아테네 옆에 있는 조그만 섬, 살라미스

그렇게  되면  페르시아군이  살라미스섬에  있는  아테네인을  도륙할것이  뻔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결전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  함대가  열린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맞붙어서는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인들이  도망간  살라미스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출발했다.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  직전에  엄청난  폭풍으로  400 척의  함선을  잃었다.  그래도  페르시아  함대는   800 척  정도가  남아  그리스  연합함대(380 척)에  비해  두배  가까운  규모  였다.           

 

 7 시간 동안  진행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겨우 46 척을  잃은 반면,  페르시아 함대는  200여 척이  침몰하고  병사  4 만  명이  수장당했다.  그리스  시인  아이스코로스는  그 날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이스코로스는  그리스인의  시각이  아니라  크세르 크세스왕이  모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바다  위에는 부서진  아군 선박의  잔해와  시체들이  둥둥 떠  있었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우리  수군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리스  군인들은  마치  어부들이  참치를  잡을  때처럼  아군  수군들을  두들겨  팼다.  새벽에  일어난  이  혼란은  하루  종일  계속되다가  비명과  신음 속에  날이  저물어  겨우  잠잠해졌다.  나는  이날의  참상을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네는  지중해와  에게해  전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해양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훗날  헤겔은  그의  역사  철학’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편에는  한  명의 군주  아래  결집된  동방의  전제  체제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규모는  작지만  자유로운  개성이    넘치는  독립국가들이  전투  대형으로  맞섰다.  역사상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그토록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국가의  내전               

  세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그리스는  그  대가로  완벽한  지중해의  패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하  한편으론  전쟁의  후유증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월등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민주정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과두정치를  중심으로 한  스파트타가  마침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었다.  

 

B.C.  431 년,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27 년간  진행되었다.  이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 년의  전쟁은  실상  그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점으로   급격하게  쇠락했다.         

 

 

 문화가  동방에서  서방으로  넘어간  이유     

 

문명을  구성하는  필요조건들이  있다.  그  두가지는  문자와  도시다.  ‘문자’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유전자인  기억을  표시하는  기호이자,  그  문명을  공유하는  집단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한  도구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200 년,  지금  이라크  지역  남부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수메르어다.  수메르어는  그림문자로  시작하여  점점  음절문자로  발전해  후에  이곳에  들어와  거주한  아카드인의  문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인  ‘도시’는  공동의  기억을  향유하는  집단이  문자를  기반으로  행정 기반을  구축한  곳이다.  도시는  그들의  공공의  기호인  문자가  사용되는  공간이다.     

 

인류는  기원전  1 만 2000 년경  농업을  발견하여  수렵  채집경제에서  농업정착경제로  급격히  재편되었다.  맨  처음  농업이  발견되어  실행된  장소는  서쪽으로는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  이라크를  거쳐  동쪽으로  이란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학자들은  이  지역이  초승달처럼  생겨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두  오리엔트문명인  수메르문명은  기원전  3200 년부터,  이집트문명은  기원전  3100 년 부터  등장하였다.  두  문명은  기원전  6 세기경  몰락하고  그  유산을  그리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아테네 문명으로  넘어간다.  인류  문명의  중심지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오리엔트문명이  그리스로  넘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신과  종교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동방문화가   인간과  예술을  기반으로  구축될  서양으로  이전하는  과정에  등장한  것이  바로  제국이다.  기원전  6 세기,  오늘날  이란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다.  페르시아제국은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가교문명이자  인류가  최초로  이룬  대 제국이다.   동쪽으로는  인도와  간다라,  북쪽으로  스키타이,  서쪽으로는  터키와  이오니아,  마케도니아,  남쪽으론  이집트와  누비아까지,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테베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마케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해  전쟁의  천재라고  불린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 세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자신의  발  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 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ㅡ필립포스 II 세

         

ㅡ베르기나 고분에서 발견된 두개골 유골 토대로 복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의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 년, 필립포스 2 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의  지도자로    등극한  약관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다. 

 

ㅡ이탈리아 폼페이 '카사델 파우노' 유적 벽면에 묘사된 '이소스' 전투의 알렉산드로스'와 말부케팔로스
ㅡ이소스 전투 (Battle of Issus)는 기원전 333년 남부 아나톨리아 의 이소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마케도니아 왕국 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 페르시아 제국 으로 침입해 약 4: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왕조 의 다리우스 3세 를 물리친 전투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III 세(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III 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III 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는 7 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성에  대한  공략은 7 개월이  걸려  BC 332 년 8 월에  함락되었고, 이  때  두로인 8 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 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냐인이었지만,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 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킨다.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 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  등을  많이  사용했지만,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유대인          

 

정복자  알렉산더의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 년, 그는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왕국은  혼란에  빠지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어  놓은  왕국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     은  록산나와  아들을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류쿠스  장군들은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를  뒤이어  통치자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오스는  이집트,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왕위를  잡았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  통에  도시들은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고  전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된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톨레미(편집자주: 프톨레마이오스)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처럼  가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하였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지만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약 10 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테두리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하였지만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밝힌다.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치하를  받기까지  약 120 년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70 인역의  탄생         

 70 인역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70 인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2 세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70 인역은  이스라엘 12 지파에서 6 명씩  선정된 72 명의  번역자가 작업을 했다.     70 을  의미하는  라틴어  때문에  ‘셉투아진트’로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     불리기도  한다.               

 

ㅡEphesus School

 

 

70 인역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  문화권에서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때문에 1 세기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70 인역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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