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 정조 시기에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에도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화성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을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정조 18)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각루(角樓), 군사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교류를 보여주고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화성 → 수원 화성)으로 명칭변경 (2011.07.28 고시)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이 숙명이었나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정조(正祖), 1752~1800〕의 지극한 효심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 축성된 성곽도시가 수원화성이다. 왕위에 오른 직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고,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다.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기슭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 영우원을 조선 최대 길지(吉地)로 알려진 옛 수원 화산(花山, 현재 화성시 태안읍)으로 이장(移葬)했다. 일찍이 실학의 선구자 반계 유형원(磻溪柳馨遠)이 수원(水原)은 땅의 국세(國勢)가 크게 트여 가히 큰 고을을 조성하는 데 마땅한 곳이라 했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북쪽 20리 수원 팔달산(八達山, 146m) 기슭 아래로 화산의 백성들을 이주했다. 조선시대는 왕이나 세자의 묘소가 들어서면 그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 10리 이내의 민가를 철거하는 법이 있었다.
정조는 이주해온 백성들에게 구실(세금이나 공과금) 대신으로 부담시키던 강제 노역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만 1년이 되었을 때 원주민 63호, 구읍(舊邑) 221호, 인근지역 294호,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 타관 141호 모두 719호의 민가가 들어섰다. 이러한 혜택이 큰 도시로 변모돼 갔다. 여기에 여론이 성곽 축성에 힘이 모아졌으며, 행궁의 수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안이었다.
정조는 홍문관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에게 화성 성제(城制) 구상을 지시하였다. 조선과 중국의 성제를 연구한 ‘성설(城說)’을 화성 축성 1년 전에 정조에게 올렸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복권을 통해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화성은 삼도(三道,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이요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요새지였다.
수원 팔달산의 옛 이름은 탑산이었다. 사계절 따라 색동옷으로 바꿔가며 주민들을 안아주는 산. 역사가 있고 생명을 주는 어머니의 품속 구실을 한 산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대사성 집현전 제학을 지낸 이고(李皐, 1338~1420)가 은퇴 뒤 탑산 아래로 은거하여 날마다 탑산 오르기를 즐기며 살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이고에게 벼슬(경기우도 안염사)을 내렸으나, 탑산이 떠나기 싫어 벼슬을 마다했다. 그 산이 어떤 산인지 이성계(태조 2년, 1394년)가 화공에게 탑산을 그려오게 하여 그린 산을 보고 ‘산을 떠나기 싫어 할 만 하구나’하며 ‘사통팔달로 막힘이 없이 아름다우니 팔달산이라 하여라’고 조선 태조의 명명으로 부르게 됐다.
정조는 화성에 내려와 팔달산을 중심으로 둥글게 성곽 축성 위치를 선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꿈에 어린동자가 나타나 성 쌓는 놀이가 산을 의지하여 산은 한쪽 편에 두고 성을 쌓고 있었다. 이어서 땅에 하얀 분가루로 성 모양을 그렸다. 잠에서 깨어난 정조는 선명한 꿈이어서 급히 화성으로 내려왔다. 하얀 서리가 놀랍게도 꿈에서 본대로 성터 자리에 내려있지 않은가. 서리가 내린 자리에 성곽을 축성하도록 명하여 쌓았다는 일화이다.
성곽 축조는 정조 18년인 1794년 2월부터 시작돼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그 둘레는 5,744m로 성곽은 돌과 벽돌을 섞어서 축조된 점이 특이하다. 축조 뒤 400여 년이 지나온 동안 시설물이 무너지고,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이 많았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의 자료로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 사랑이 특출한 정조는 행차할 때마다 화성과 인근 주민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시험인 ‘별시’를 실시했다. 이는 다른 지역민이 얼마나 부러워하였을까. 또한 상공업 중심의 경제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화성의 주민에게 요역을 면제해 주고 상인이나 장인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도시 주변에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확보했으며,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건 조성이 4년 뒤 1,347호에 5,000여 주민이 팔달산 기슭 아래로 보금자리를 잡았다.
팔달산 동쪽 중간 기슭에 정조 기념 동상 조형물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화성 성곽을 축조하고 효를 몸소 실천하며 끝없는 개혁과 백성사랑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정조대왕. 동상 주위 석물에 새긴 발자취는 후세에게 영원한 산교육의 광장이 되리라. 1997년 12월 4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보물을 안겨주었다. 그 보은에 수원 시민의 뜻에 전 국민의 뜻도 모아 2003년 6월 기념 동상을 준공했으리라 되새겨 본다. (황광현 대기자)
수원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수원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행궁’ 입니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습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었습니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습니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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