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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키루스(Cyrus)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Narin Pusil 2022. 9. 11. 20:48

시드니 인문학교실                    

고레스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15 / 09 / 2022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 
 
앗시리아와 이집트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한세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바빌로니아의 강력한 지도자 네브카드네자르 2 세(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다.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네브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의 왕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네브카드 네자르 2세 아들 아멜-마르둑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제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제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만에 죽게 되는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였다.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신바빌로니아의 역대군주 

 

역대               이름                      아카드어 발음                     재위 시기 
초대         나보폴라사르              나부-압라-우추르              BC 626 ~ 605       
              (Nabopolassar) 
제2대    네부카드네자르 2세        나부-쿠두리-우추르           BC 604  ~ 562
             (Nebuchadnezzar II) 
제3대       아멜-마르두크             아밀-마르두크                  BC 562 ~  560
             (Amel-Marduk) 
제4대   네르갈-샤레제르 우슬      네르갈-샤르-우추르           BC 560 ~  556 

제5대    라바시-마르둑                라바시-마르두크               BC    556
           (Labashi-Marduk) 
제6대     나보니두스                    나부-나이드                    BC 556 ~ 539
           (Nabonidus)                
제 7 대    벨샤자르                     벨-샤르-우추르                 BC 550 ~ 539
           (Belshazzar)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인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문제는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나보니두스는 종교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벨사르우슬(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통치권을 넘겨버렸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축제인 “아키투”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키루스 II 세(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신바벨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였다(성서에는 메대라고 표시).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바사)지역에 키루스 II세(고레스)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키루스 II 세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 아래 두기 시작했다. 
 
나보니두스는 키루스 2세(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와 동맹을 맺지만  

키루스 II 세(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키루스 II 세는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의 어느 나라 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 
  
키루스 2세(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는 고레스에게 투항한 뒤 고국에 칼을 들이밀었다.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B.C. 539 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기원전  8세기경 아케메네스가 창시한 안샨 왕국의  5대왕 키루스  II 세가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병합하면서 다민족 제국이 된 안샨 왕국의 명칭이다. 

 

                          

                                                                  


고레스대왕과 페르시아제국 
 
고레스는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그는  ‘키루스 대왕’  혹은  ‘키루스 2세’로 불리는데,  

영어로는 ‘Cyrus Ⅱ the Great’로 표기된다. 

히브리식으로는 코레쉬(Coresh)로 불리우고 성서에는 고레스로 나온다.

서양 고대사에서 이름 뒤에 ‘the great’가 붙는 왕은 알렉산더 대왕정도 뿐이다.

고레스왕은 업적이나 명성 면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비견될 만큼 위대했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는 알렉산더 대왕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태양’ 혹은 ‘태양처럼 빛나는 자’라는 뜻의 고레스가 왕 개인의 이름이었는지 또는 당시 부여 받

왕호였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선대에 동명의 왕이 있었던건 사실이다.

그는 페르시아 동부의 소국이자 메디아(메대) 제국의 속국이었던 안샨 왕국의 캄비세스 1 세와

메디아 제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553 년 자신의 외조부 아스티아게스를 몰아낸 고레스는 메디아를 페르시아(성서에는 바사)에 통합시킨다.

당시 메디아는 니네베(니느웨) 성의 몰락 후, 바벨론과 함께 앗시리아(앗수르) 영토를 분할하던 강대국이었다. 
 

 


고레스의 출생 

키루스 2세(고레스)는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 년경에  페르시아족  출신의  안산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국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키루스 2세(고레스)는 메디아 왕의 외손자로,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들이 없어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가 왕위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라 메디아 왕족 가운데서도 매우 귀한 왕손이었다. 
하지만, 정작 메디아 왕국 국왕 아스티아게스에게 심하게 박대를 받아 어린시절에는 목동 밑에서 
목동처럼 자라다가 10 세가 되어서야 간신히 친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를 두고 전설에 따르면, 메디아 왕인 아스티아게스가 자신의 외손자인 키루스가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는게 두려워해서 박대했다.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가 결혼하기전 꿈에서 소변을 
보다가  소변이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꿨고  이후  키루스를  임신했을때는  또  만다네가  자신의 
다리사이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꾸었다.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가  마고스(메디아의  사제)를  불러  이를  해몽해보자  만다네가  낳을 
외손자가  아스티아게스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는  해몽을  들었고,  이  해몽이  두려웠던  아스티 
아게스는  만다네의  출산이  임박하자  제사업무를  하던  하르파고스를  불러  외손자의  살해를 
지시한다. 이윽고 키루스가 태어나고 하르파고스는 왕의 지시에 따라 자기집에 몰래 데려왔지만, 
왕의  지시였다고  해도  어린아이를  직접  살해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혹시나  만다네가  왕위에 
오르게  될  경우 아들에 대한  만다네의 보복이  두려웠던  하르파고스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아스티아게스의 목동이었던 미트라다테스를 시켜 키루스를 산속에 버려 죽이라고 지시 
를  내린다.  그러나  미트라다테스도  어린아이를  죽이기가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아내 
스파코가 키루스를 살려줄 것을 울며 간청하자 마침 스파코가 사산했던 아이를 대신 산에 버리 
고 키루스는 목동의 아들로 숨겨 키우게 된다. 


그리고 목동의 아들로 자란 키루스가 10 세가 되던 해에 키루스는  친구들과 왕과 신하가 되는 
역할놀이를  하던  중  키루스가 왕으로 뽑혔는데 친구들 가운데에는 메디아의 귀족출신 아이가 
있었고 그 귀족아이는 자신은 놀이라도 목동인 키루스를 왕으로 섬길수 없다고 하자 키루스는 
귀족 아이와 싸우고 크게 때려버린다. 얻어 맞은 귀족아이는 아버지 아르템바레스에게 돌아가 
목동아들에게  얻어  맞은  것을  하소연하고,  아르템바레스는  목동들의  주인인  국왕  아스티 
아게스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아스티아게스는 귀족 아이를 때린 목동 아이 키루스와 그 (양)아버 
지 미트라다테스를 불러 추궁한다.  


그러나 키루스는 국왕 앞에서 당당히 항변했고 그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스티아게스는 그 
목동 아이가 10 년전에 죽은 줄로 알았던 외손자와 유사함을 느끼고는 목동 미트라다테스와 신하 
하르파고스를 심문했고 결국 아스티아게스는 그 목동 아이가 자기 외손자임을 알게 된다.  
심문후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을 속인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죽여 처벌한 뒤 이어 마고스(메디아 
사제)들을 불러 다시 키루스의 처분을 물었고 마고스들은 키루스가 놀이라도 왕이 되었으니 더 
이상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왕위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안심한 아스티 
아게스는 키루스를 친부모가 있던 페르시아로 보냈다고 한다. 

 


메디아의 정복 


키루스 2 세는  성년이  되자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준비한다.  키루스는  기원전 
554 년,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키루스는 
아스티아  게스에게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의  도움을  받은  끝에  기원전 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다. 키루스는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 
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인 셈이다. 

 


리디아의 정복 


메디아의 정복이후 리디아(현재 터키지역)의 왕 크로이수스와 전쟁이 벌어졌다. 리디아가 먼저 
페르시아의 도시를 공격했다. 키루스는 먼저 리디아 서쪽에 있는 이오니아 국가들에게 리디아에 
게 반기를 들라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리디아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기원전 547 년경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까지 진군했다.  


키루스는  하르파구스의  조언으로  낙타부대를  전면에  배치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로써 
낙타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리디아 기병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546 년 
리디아 왕 크로이수스는 대패 하였고 사르디스는 함락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키루스가 
크로이수스를  살려주고 계속  참모로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처형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었던 에게해 해안의 그리스계 이오니아 도시들 또한 키루스에게 복속되었 
는데 이 도시들의 성벽을 공격할 때 공성전에는 이때까지 그리스인들이 알지 못했던 토목공사를 
이용한 공격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략 기원전 542 년까지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에게 
복속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의 정복 


기원전 539 년 키루스의 군대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구바루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이 원정은 비교적 별다른 저항 없이 

같은 해 10 월 당시 고대 세계최대의 도시이자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의 함락으로 끝났다.

많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키루스의 정복은 신속하고 저항없이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 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다 왕국과 시리아 왕국등 많은 왕국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키루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성서에 따르면 신바빌로니아 최후의 왕 벨사자르(벨사살)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해오는 것도 모르

성대한 만찬을 흥청망청 즐기다 그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서외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도 그날 밤에 신바빌론 사람들이 아주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 
다고 기록하고 있고, 기원전 5세기 인물인 크세노폰의 기록 역시 이와 거의 유사하다.

 

20 세기에 출토된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이 제대로 된 시내 전투 한 번 없이 함락 당했 
다고 전해진다. 공식적인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자르는 부왕에 버금가는 왕권을 행사하고 
있던 공동 통치자 혹은 대리 섭정같은 존재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그의 저작 <아피온 반박문>에서 인용한 기원전 3 세기의 바빌론 사제 베 
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함락이 있기 전 나보니두스는 키루스에 맞서 출정했으나 패배하고 
제국 남쪽의 보르시파란 곳으로 달아났으며 바빌론 시가 함락당한 후 키루스에게 항복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키루스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의 사면의 왕"으로 칭했다. 
키루스는  그의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바빌론에  잡혀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신바벨론에게 무너졌던 유대인의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키루스 2 세)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시리아나  신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신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을 섬기는 제사에 참석해 바벨론인들로 부터도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고레스의 통치정책을 이렇게 묘사한다.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과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이 발전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복민이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게오르크 포어러도  “고레스의 정책은 굴복당한 이방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그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을 가졌고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 없으며, 회유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는 고레스의 정치적 성숙도에 좋게 평가하고 있다.  
 
고레스는 탁월한 지도력 외에도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 관대한 인격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는 자신의 신민들을 존중했으며, 마치 
자신의 자식들인 것처럼 그들을 돌보았다. 또한 신민들은 고레스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또한 
그의 관용정신은 흔히 ‘고레스의 원주’라고도 불리는 원통형 점토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평온한 가운데 바벨론에 입성해서 온 국민의 환호 속에 왕자들의 궁전에 거처를 정했다. 
      (중략) 나는 바벨론과 그 밖의 다른 도시들의 내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나는  바벨론  시민들을  옥죄고  있던  멍에를  풀어주었고  그들의  집을  수리해  주었으며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나, 고레스는 모든 이의 왕, 위대한 왕, 전능한 왕, 바벨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전 세계의 왕이다.”  
 
 
 
▴ 고레스 원통(고레스 실린더 / 영국 대영박물관) 
 
 
▴ 대영박물관에 있는 고레스실린더(원주)와 비문 
 
 
고레스는 각 나라의 독립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고레스의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레스 대왕과 포로귀환 
 
성서는  이사야서를 통해 고레스가  등장할  것이라  묘사하고  있다(사 45: 1 〜8).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렘 29: 4〜14).  

성서의 묘사대로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건축하도록 배려했다 (대하 36: 22〜23).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포로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 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 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 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 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

B.C  445 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은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신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었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동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

(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구약성서와 바벨론 유수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기인식 
 
수메르 문명과 성서시간에 살펴보았듯이, 구약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BC 587년 이후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보수주의, 진보신학자등 정통 기독교 성서학자들 모두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은 남유다마저 신바벨론에게  BC587 년 
멸망당한 후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 바벨론 땅에 살면서 
유대민족의 운명을 슬피 울며 자기성찰의 결과로 삼은 결과였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역사를 재서술하고 율법을 재구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동안 구전 
으로  내려오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승과 이야기들을 모아 회당  공동체를 설립하고 자손들을 
교육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이것이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승들이 토라(모세 5 경), 느비딤(선지서), 
케투빔(성문서)등 구약성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보수주의 성서학자 월터 브루그만도 구약성서는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이후 기록되었고 그러므로 
그런 배경하에서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토라(모세 5 경)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대한 반응으로 완성되었고, 선지서들과 성문서(시가서와 
지혜서)는  제 2 성전기 유대교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목적상 이들 문헌들은 
특정한 위기 상황에 대한 의도적이고도 일관성있는 반응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점이다.”  
 
신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핵심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창조(시작)로부터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관점으로 전하는 것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히브리 성서의 탄생은 바벨론 
유수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의 자기인식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느비딤  문서)서와  선지서에  예언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레스”대왕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묘사는 실제 그들이 ‘고레스’ 대왕의 호혜정책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기록되었다.

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레스”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은 6.25 때 한국을 도와준 미국과  맥아더 장군

이상으로 추앙받는 정서로 심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왕 ‘고레스’를 ‘메시야’ 다시말해

‘기름부음 받은자” ‘구원자’ ‘해방자’ 라고 서슴지 않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이란 지역에 있는 고레스 무덤 
 

 
             ▴ 시드니 올림픽 파크에 있는 고레스대왕 오벨리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