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음악 이야기

로베르토 슈만

Narin Pusil 2022. 7. 29. 21:13
음악과 음악가 : 낭만시대의 한가운데서

로베르트 슈만 / 포노 PHONO / 2016.3.10

– ‘낭만주의’ 그 자체였던 작곡가 슈만이 본 낭만시대의 현장

“여러분, 모자를 벗으세요. 천재예요.”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이다. 21살의 슈만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갑내기 폴란드 청년 쇼팽을 당시 세계 음악계의 중심 독일에 이렇게 소개한다.

어려서 문학에 심취하여 일찌감치 굵직한 문학 작품들을 섭렵했던 슈만은 홀로 남은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지만, 결국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피아노를 공부하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며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피아니스트로서 궤도에 오르던 무렵에 찾아온 오른손 부상으로 인한 좌절,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로서의 빛나는 활동,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와의 불같은 사랑과 결혼, 정신 분열로 잇단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서 46살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낭만주의’ 그 자체였다.

슈만은 낭만주의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주요 작품들이 클래식 음악의 정전에 올라 있지만, 그가 세계 최초의 전문 음악 평론지 가운데 하나인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창간하여 10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글을 쓰고 다양한 음악 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프리데리크 쇼팽 등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음악계의 주류에 소개했고, 동료 펠릭스 멘델스존과 함께 그 업적과 중요성에 비해 묻혀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재조명했으며, 요절한 프란츠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교향곡 C장조』 초연을 성사시킨 역량 있는 음악 평론가이자 기획자였다.

그가 죽기 3년 전, 자신이 이끌었던 잡지를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펜을 들어 사랑하는 후배 요하네스 브람스를 “새로운 음악의 기운, 반드시 와야 할 그 사람”으로 음악계에 천거하는 글은 감동적이다. 그는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어느 시대든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은밀히 동맹을 맺는 법이다. 예술의 진리가 점점 밝게 빛나고 기쁨과 축복이 사방에 퍼질 수 있도록 동맹원들은 더 굳건히 뭉쳐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말이다.

이 책은 슈만이 『음악신보 : Neue Zeitschrift fur Musik』에 연재했던 글을 중심으로 직접 주석을 추가하여 1854년 출간한 총4권 분량의 평론집 『음악과 음악가에 관한 논집 : Gesammelte Schriften uber Musik und Musiker』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1810 ~ 1856)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음악평론가. 1810년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에서 저술가 겸 서적상 아버지와 교양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심취했고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결국 당대의 명피아니스트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832년 오른손 부상으로 연주자의 꿈을 접은 이후 작곡과 저술에 집중했으며, 1834년 동료들과 함께 최초의 음악잡지 가운데 하나인 《음악신보》를 창간, 10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리데리크 쇼팽 등 새로운 음악가들을 소개했다. 펠릭스 멘델스존과 함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재조명하고 사후 묻혀있던 프란츠 슈베르트의 걸작들을 알리는 데도 크게 공헌한다. 1840년 스승 비크의 딸 클라라와 결혼하여 짧은 기간 동안 숱한 가곡들을 썼다. 슈만, 클라라, 브람스, 이 세 음악가의 만남은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가장 아름다운 인연 중 하나로 기억된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우울증이 심해져 잇단 자살 시도와 2년간의 투병 끝에 1856년 본 교외의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4편의 교향곡 외에 피아노 협주곡, 첼로 협주곡, 피아노곡 『나비』 『사육제』 『교향적 연습곡』 『어린이 정경』 『크라이슬레리아나』 『후모레스케』, 가곡 『리더크라이스』 『시인의 사랑』 등 작품들을 남겼다.

– 역자 : 이기숙

연세대학교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독일의 인문사회과학서와 예술서 그리고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율리아와 동네 기사단》 《알렉산더》 《별을 타는 아이》 《소비사회 탈출기》 《나의 인생》 《인간과 공간》 《공간적 전회》 《푸르트벵글러》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비춰주는 이 평론집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대의 조류에 묻혀버린 예술 현상에 눈길을 돌리게 한다면 이 책의 목적은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끝으로, 평론들을 연대순으로 편집한 이유는 나날이 발전하고 성장해가던 당시 음악계의 모습을 독자의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p.11

“여러분, 모자를 벗으세요. 천재예요.” 오이제비우스는 이렇게 말하며 악보 하나를 펼쳐놓았다. … 우리는 깜짝 놀라 외쳤다. “작품 2라니.” 엄청나게 놀라는 바람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이건 뭔가 제대로 된 작품인데. 쇼팽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야. 누굴까. 어쨌거나 천재야.” — p.15

진정한 대가는 학생들이 아니라 다른 대가들을 매혹한다. 나는 모차르트처럼 위대하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이들의 작품을 언제나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 왔다. — p.20

클라라 비크는 ‘독일’ 최초의 여성 예술가다. _ 플로레스탄 — p.36

천재보다 착실하고 끈기 있게 공부하는데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수재에게 내려진 저주다. 천재는 벌써 오래전에 이상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웃는 얼굴로 위를 쳐다보고 있다! — p.37

예술가의 비범함이 항상 그 순간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것이다. _ 라로 — p.38

베토벤은 임종을 앞두고 “나는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섰다고 생각해”라고 말했으며, 장 파울은 “아직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한 느낌이야”라고 했다. 그대들, 예술 도둑들이여, 이 말을 듣고 전율이 느껴지지 않는가. _ 플로레스탄 — p.44

수재는 일하고, 천재는 창조한다. _ 플로레스탄 — p.44

평론지는 그저 현재만 반영해서는 안 된다. 저무는 현재보다 앞서 나아가 미래로부터 현재를 빼앗아 와야 한다. _ 플로레스탄 — p.49

“베토벤. 얼마나 대단한 이름인가! 그 음절들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부터가 영원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아. 이 이름에 굳이 다른 글자는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어.” “오이제비우스” 제가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자네도 베토벤을 칭찬할 셈이야? 만일 그렇다면 아마 베토벤은 자네 앞에서 사자처럼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물을 거야.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누구냐 너희는?’ — p.61

2급 재능을 가진 음악가는 기존의 상투적인 형식을 구사해도 상관없다. 1급 재능의 음악가라면 우리는 그가 기존의 형식을 확장하기를 요구한다. 자유롭게 창작해도 좋은 사람은 오직 천재뿐이다. — p.64

옛날에 나는 슈베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이야기를 한다면 오직 밤하늘의 별과 나무에게만 들려주고 싶었다. 한번쯤 무언가에 미쳐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당시 나도 이 새로운 정신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찬란한 재능이 무한한 것 같아 그를 불리하게 만드는 모든 증거에 귀를 막고 슈베르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 p.146

참배를 마친 뒤 나는 하다못해 생전 그들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 그중에서도 이왕이면 형제라도 한 사람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전의 슈베르트가 몹시 존경했다던 그의 형 페르디난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당장 그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다행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 아직 그의 손에 남아 있던 소중한 보물을 보여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 작품들을 보던 나는 그만 기쁨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고 어디에서 끝내야 한단 말인가! — p.178

리스트의 음악은 듣지만 말고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절대로 무대 뒤에서 연주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위대한 한 편의 시가 사라져버린다. — p.191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빛을 들여보내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소명이다! — p.233

아무도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을 할 수는 없다. 아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알 수는 없다. — p.233

수준 낮은 작품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들어서도 안 된다. — p.238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에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10년만이다. … 이 선택된 사람들의 길을 열심히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뒤를 이어 이 시대를 최고의 이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소명을 띤 사람이 불쑥 나타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 단계적 발전을 거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미네르바처럼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을 하고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어렸을 적 우아의 여신과 영웅들이 요람을 지켜준 젊은이였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 — p.247

어느 시대든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은밀히 동맹을 맺는 법이다. 예술의 진리가 점점 밝게 빛나고 기쁨과 축복이 사방에 퍼질 수 있도록 동맹원들은 더 굳건히 뭉쳐야 한다. — p.249
어려서 문학에 심취하여 일찌감치 굵직한 문학 작품들을 섭렵했던 슈만은 홀로 남은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지만, 결국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피아노를 공부하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며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피아니스트로서 궤도에 오르던 무렵에 찾아온 오른손 부상으로 인한 좌절,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로서의 빛나는 활동,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와의 불같은 사랑과 결혼, 정신 분열로 잇단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서 46살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낭만주의’ 그 자체였다.

슈만은 낭만주의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주요 작품들이 클래식 음악의 정전에 올라 있지만, 그가 세계 최초의 전문 음악 평론지 가운데 하나인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창간하여 10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글을 쓰고 다양한 음악 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프리데리크 쇼팽 등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음악계의 주류에 소개했고, 동료 펠릭스 멘델스존과 함께 그 업적과 중요성에 비해 묻혀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재조명했으며, 요절한 프란츠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교향곡 C장조』 초연을 성사시킨 역량 있는 음악 평론가이자 기획자였다.

○ 독자의 평 2

현대 사회에서 클덕이 되기로 선택하기란 ‘무용한 것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요즘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음악샘과 “서양음악사”를 함께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음악회를 보러 가고 있다. 공부하며 듣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고 특히 낭만주의 음악가들에게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도산공원 근처 퀸마마마켓 내 책방 ‘파크’에 갔다가 예술 서적이 모여 있는 코너에서 꽤 다양한 음악 관련 서적을 접하고 감동에 휩싸였다. 그때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을 기억했다가 입수해 읽었다.

슈만이 편집장으로 있던 클래식 음악 잡지 <음악신보>에 실은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는 음악 좋아하는 전형적인 문과 남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면 유전이든 환경이든 부모님께 영향을 받은 지점이 엿보일 때 새삼 놀라곤 하는데 슈만 역시 서적상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전에는 피아노를 쳤지만 오른손 부상으로 연주자 생활을 접고 작곡과 잡지 편집을 하게 되었다.

슈만이 편집한 <음악신보>는 잘은 몰라도 당대 음악 ‘비평’ 신세계를 열었지 않았을까 싶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클래식계 셀럽들 사이에서 오간 최신 음악에 관한 전문성 있는 앞담화와 뒷담화를 가감 없이 실은 잡지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신랄한 비평을 읽고 있노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솔직한 자세 때문에 ‘이거 너무 센 거 아니야??’ 싶으면서도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또한 기고자들의 해박한 음악 이론 지식과 당대 음악에 대한 관심 덕분에 공감 가는 지점도 많다. 요즘 “서양음악사”를 읽으면서 클래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교회 음악과 라틴어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특유 음악과 자국 언어에 집중하게 되는지 과정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지점이 엿보여서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다. 슈만은 ‘독일’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특히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에 대한 사랑!! 실제로 슈만은 슈베르트의 형과 교류하며 유작들을 발굴해 출판시키는데 힘썼던 모양이다. 당대에 유행하기 시작했을 듯한 ‘국민성’에 대한 믿음과 지역 문화(‘민요에 관심을 가질 것’ 등)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자연스럽게 근처 프랑스, 이탈리아 음악들을 깎아내리곤 한다(역사적으로 ‘바바리안’이라며 게르만 문화가 무시당했던 역사에 대한 반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을 때 오늘 있을 부천필 공연을 예매해둔 상태여서 눈에 더 잘 들어왔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에 대한 비평은 신랄하고도 신랄하다. 슈만은 그 유명한 베를리오즈 자신이 쓴 이 곡의 해설을 실은 후, 프랑스 음악가의 음악을 비평하면서 음악을 향유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까지도 비판하고 있다.

“이상이 베를리오즈의 해설이다. 독일에서는 이런 식의 이정표가 왠지 품위가 없고 뭔가 사이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5개의 큰 제목만으로도 충분할 뻔했다. 자세한 상황들은 교향곡의 내용을 직접 체험한 작곡자 그 인물 때문에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그건 얼마든지 사람들 입을 통해 전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의 내밀한 면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민감한 독일인들은 자신의 생각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종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전원 교향곡>에서도 듣는 이가 작품의 성격을 추측하도록 맡겨두지 않고 베토벤이 개입한 것이 독일인에게는 모욕적인 일이었다. 인간은 천재의 작업실을 보지 않으려는 나름의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의 근원과 도구와 비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자연이 흙으로 뿌리를 덮어주어 세심함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모든 작품이 탄생한 근원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무엇보다 프랑스인들을 위해 작곡했다. 프랑스인들은 우아한 겸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해설 책자를 손에 들고 읽으면서 같은 나라 사람인 베를리오즈가 모든 걸 훌륭하게 해냈다며 박수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 하나 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음악은 작곡자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가 그려내고 싶었던 모습을 비슷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이 교향곡을 듣기 전에 해설 책자를 읽어버린 나로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시선이 어느 지점에 가서 한 번 꽂히면 귀는 더 이상 독자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 85-86쪽.

그 비판이 공감을 살 지점이 없는 의미 없는 내용이었다면 당대 사람들로부터도 무시 당했을 텐데, 지금 읽어도 슈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 듯하다. 일단 독일 클래식 음악을 선호하는 나는 공감이 간다. 크게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시적 아름다움과 상상력을 음악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옛 음악과 화성학에 뿌리를 둔 질서 있는 음악, 뚜렷하게 아름다운 선율을 모티프 삼은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논하면서 영혼과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슈만의 아래와 같은 진술을 보면 마치 칸트, “판단력 비판”을 읽는 기분이 든다. 미학 관심자로서는 슈만이 그런 쪽에 토대를 두고 음악을 만들거나 들었다는 사실이 몹시 반갑다.

“도덕의 법칙은 예술의 법칙과 똑같다.” 245쪽.

결국 슈만이 비판했던 건 설익은 청년 작곡가나 연주자들의 근본 없는 신곡이나 연주였다. 이 잡지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음악 이론 잘 아는 자들이 가진 자부심이 엿보인다. 책 곳곳에 들어 있는 청년 음악가들을 위한 금언들은 지금 읽고 실천해도 유효할 만하다. 그 와중에 그들은 축복받은 시대에 튀어나왔던 천재들- 쇼팽, 멘델스존, 리스트를 발굴하고 전파하는데 공을 세웠다. 책은 소오름 돋게도 청년 작곡가 브람스의 클래식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를 찬양하며 논의를 마무리한다. 좋은 음악을 알아보는 그들의 촉이 놀라운 한편, 그들이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 음악가들의 음악이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남아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 독자의 평 3

독일 작곡가이자 평론가 로베르트 슈만의 평론을 묶은 이 책은 1990년대 삼호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가 오랫동안 절판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최근 포노를 통해서 예쁜 분홍옷을 입고 새로 출간되었지요.

약간 과장을 곁들여서 말씀 드리면 ‘이처럼 훌륭한 책이 그토록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과장이지만 진심에 가깝습니다.)

흔히 슈만을 평론과 작곡 두 분야에서 모두 명성을 떨쳤던 음악가로 기억하는데 책에는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슈만이 발굴하고 조명했던 쇼팽과 베를리오즈, 브람스와 멘델스존은 훗날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지요.

세속적으로 말하면 ‘그가 진가를 알아보았던 작곡가들은 대부분 스타가 되었던 셈’입니다.

슈만의 평론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꼽으라고 한다면 분명하고 뚜렷한 소신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호불호가 뚜렷하지요.

책의 마지막에는 슈만의 좌우명이 실려 있는데 읽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솔직하고 감동적입니다.

“항상 거장이 네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연주하라.”

“훌륭한 작곡가의 작품에서 무언가를 고치고 빼고, 심지어 새로 유행하는 장식을 덧붙이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238쪽)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한 음악인이었는지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다시 느낄 수 있지요.

성남아트센터 격월간 ‘아트뷰’의 서평 코너에도 그 감동을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 ​음악과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 지음 / 이기숙 옮김 / 포노 / 260쪽

이미 걸작으로 공인 받은 작품을 칭찬하거나, 거꾸로 범작(凡作)으로 낙인 찍힌 작품을 비판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진정 힘들고 까다로운 건, 동시대 작품들에 대해서 분명하고 단호한 자세를 보여주는 일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였던 로베르트 슈만이 해냈던 업적이 바로 그것이다.

​1834년 ‘음악 신보’를 창간했던 그는 10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베를리오즈와 쇼팽,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의 작품을 재조명하기 위해 앞장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주의 시대의 숱한 걸작들을 가장 먼저 발굴하고 높이 평가했던 평론가가 슈만이었던 것이다.

​슈만이 직접 썼던 평론들을 모은 이 책은 그가 얼마나 빼어난 감식안의 소유자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언집과도 같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때에도 슈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을 합쳐도 이 곡에는 범접하지 못한다”고.

멘델스존의 초기작이나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 대해서도 슈만은 똑부러지게 자신의 주관을 밝힌다.

“멘델스존의 찬란한 미래는 충분히 예견된 것”이며 “​슈베르트가 작곡한 곡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 일일이 설명하려면 몇 권의 책을 써야 할 터”라고.

‘낭만시대의 한가운데서’라는 우리말 부제처럼 당시 음악계를 지근거리에서 묘사한 풍경화에 가깝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사는 사실상 슈만이 정초(定礎)한 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은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 ‘다비드 동맹 무곡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