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시드니 인문학

인문학의 목적 –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Narin Pusil 2022. 7. 25. 22:55

인문학(人文學, 영어: 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로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시드니 인문학교실 Repeat 홍길복의 첫번째 강의

: 인문학의 목적 –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04 / 08 / 2022

제 1 강 - 왜?  (Why?)(인문학의 목적: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자면서도 꿈과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1)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화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질주하다가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그 동안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곤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빨리 달리면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육신을 말 위에 싣고 빨리 달리다보면 정신은 저 만치 뒤쳐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몸만 너무 바쁘게 살아왔던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추수려 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 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은 자아를 둘러보는 ‘자기 성찰’입니다./

 

    명나라 문인 진유계(陳繼儒)의 글 입니다.

       ‘고요히 앉으니 평상시 내 마음이 얼마나 경박했는지 알겠구나.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니 지난 날 내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드러나는구나’

 

(2) 혜능대사(慧能大師)가 법성사에서 한 말 입니다.

어느날 법당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벌렸습니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분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한참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혜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건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는 것은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자기 주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고집 내려놓기’, ‘집착 내려 놓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아닌 동질성 찿기’ 같은 것들에 있습니다.

 

3) 元曉大師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여행 중 해가져서 어두운 산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밤 중에 너무 목이 말라 더둠거리다가 웬 바가지에 손이 닿아 그 안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 둘러보니 간 밤에 시원하게 마셨던 그 물이 어떤 사람의 해골 속에 담겨진 해골수 임을 알게 되어 토기가 일어났 습니다.  그때 원효가 말했습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로구나!  물은 그 물이 그 물인데 어찌하여 나는 꽥꽥거리는가?’  모든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일체의 진리와 비진리는 모두 다 이해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관점, 상황,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물 자체’ (Ding an sich /Thing itself)는 변하지 않습니다.

 

(4)황희 정승 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종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종이 나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은 틀렸고 자기가 옳다고 말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난 황희는 ‘네 말이 맞다’ 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얼마 후에 상대방 종이 또 정승을 찿아와서 오전에 나리를 찿아왔던 종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난 황희는 ‘듣고보니 네 말도 옳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종일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본 조카가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흐리멍텅합니다. 제가 들으니 아침에 와서 말한 종 아이 말이 맞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이렇게대답합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을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세상은 모두 다 일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습니다.

 

(5) 1920년 대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는 물리학에서 퍽 중요한 빛을 연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학 연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실험실에서, 동일한 시간,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같은 연구자가 실험을 하는데도 빛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알갱이, 즉 입자(cubic)로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waves)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빛은 입자다 ! 아니다 빛은 파동이다!’하는 두 가지 가설이 서로 충돌하고 큰 이론적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이론이 그 유명한 ‘불확정설’(The Theory of Uncertainty /The Uncertainty Principle) 입니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지만 또 파동일수도 있다. 꼭 한가지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세운 이 이론은 이후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라 철학, 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일체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전반에 걸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도 정답이 하나로 나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신학과 철학, 인문학과 사회학, 문화와 예술 같은 인문학이 한 가지 질문이나 하나의 개념에 대하여 오직 한개의 대답이나 결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게 아니다’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6) 점묘법 (點描法) – 점 하나 하나씩을 찍어서 커다란 형태를 이루는 미술 기법을 생각해 봅니다.

호주 원주민들의 그림입니다. 작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다보니까 어느새 큰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가는것과같습니다. 하루 하루 점을 찍어가다보니 일생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여럿이서 제각기 점을 하나씩찍다보니 그것이 우리 사회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 입니다.

 

(7) 모자이크(Mosaic)도 마찬가지 입니다.   전체주의적 발상

조각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많이 누리는 것 처럼 보여도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모두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인문학은 서로 협력하여 전체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보다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작은 사람들이라 하여 기죽을 필요 없고 큰 사람들이라 하여 잘난 척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인문학의 목표입니다.

 

(8) 실학의 거두, 다산은 정조가 죽은 다음 해, 1801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강진 읍내의 한 허름한 주막집 뒤간방에서 처음 4년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지금의 ‘다산초당’ (茶山草堂)으로 옮겼는데 그 때 다산은 4년 동안이나 이 폐족당한 선비를 돌보아 주었던 주모와 그의 딸을 위해 그 오두막에 당호(堂號)를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사의제’(四宜齊) 입니다. 이 집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가지를 익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늘 생각은 맑고 바르게 하거라.

   둘째, 말은 반드시 생각한 다음에 하고, 또한 적게하여라.

   셋째, 모든 행동은 무겁고 신중하게 해야한다.

   넷째, 용모와 의관은 항상 누가 보던 않보던 단정하게 해야한다.

 

이는 물론 유배 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추수리려던 자아성찰의 인문학적 자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의 한 주막집 주모에게 조차도 당호를 지어줌으로 사람을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아니하는 ‘牧民心書’의 태도요, 사람을 낮추어보지 아니하고 대등하게 대하는 인격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너와 나, 사람과 자연, 하느님과 사람, 어린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having group 과 havenothing group, 정상인과 비정상인, 내국인과 외국인, 원주민과 이민자, 먼저 온 이민자와 후발 이민자,일체의 모든 甲과 乙 사이에 그려진 빗금(슬레쉬 /)을 철폐하려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섭니다.

 

결국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지향하는 제 1차적 목표는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삶의 현장은 물질과 권력(정치권력,자본권력, 종교권력)을 사람보다 위에 두고 이것들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며 이를 추구하고 더 많이 획득하는 것에다 사람이 사는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는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동물화 되어가고 도구화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의 노예로 전락된지 오래되었 습니다. 나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나 자신이고 인간에 대한 최대의 적은 인간 자신입니다.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개인들과 우리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인간의 품격을 회복, 유지, 확장해 나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여 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사회를 꿈꾸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거나 반대로 사회 변혁적 방법들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나눔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고 공동체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이루어 보자는 하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栗谷 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선비가 학문을 하는 이유,

     즉 지식인이 글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목표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자연히 사람다운 삶도 살게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문학의 일차적 목표는‘사람됨’에다 둡니다. 동양에서의 인문교육이란 곧 인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전인’(全人Whole man)교육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양은 기술, 과학, 테크닉을 중심하여 합리성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왔지만 동양은 사람됨, 즉 인간의 품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 중국을 중심한 동북 아시아에서는 그의 신분과 직책이 무엇이든, 이를테면 왕이든 사대부이든, 상민이든 천민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그의 하는 일과 직책이 어떠하든 간에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게 될려면’ 四書三經을 읽고, 외우고, 거기에 따라서 일체의 삶을 영위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四書는 大學,論語, 孟子, 中庸이고 三經은 詩經, 書經, 易經(周易)입니다. 대학의 핵심 개념은 ‘徳’입니다. 이 ‘덕’을 기초와 기본으로 삼아, 논어는 그 위에다 ‘仁’을 더하고, 맹자는 ‘義’를 가르치고, 중용은 ‘禮智’를 보탭니다. 우리는 논어, 맹자, 중용이 가르치는 4가지 핵심 개념인 이 ‘仁義禮智’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것들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하나가 추가 됩니다. 곧 ‘중용(中庸)입니다. 아무리 인의예지가 중요한 사덕이요, 모든 것의 기초요, 또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만 옳고 자기만 바르고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아직도 덜된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동양의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 워드(key word)는 중용(中庸)입니다.

 

  ‘극단적으로 나가지 마라. 극단은 절대로 않된다. 극단을 피하라!’ 중용이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正道를 걷는 것 입니다. 이 경우 正道란 ‘옳바른 길’이지 ‘가운데 길’이 아닙니다. 中道나 中立이 正道는 아닙니다. 중용은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이 아니라 검은 검은 검다고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 둘을 아우루는 포용성을 말 합니다. 동양 인문학의 핵심인 ‘중용’을 영어로는 Harmony and Balance로 번역 합니다. 포용성이란 관용, 너그러움, 똘레랑스(Tolerance)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극단, 오직, Only, 영어에서 ‘나’‘I’는 아무리 문장의 중간에 와도 늘 대문자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그릇된 태도라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다른 생각을 갖거나 달리 말하거나 다른 스타일로 산다고해서 나만 옳고 그는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호주와 같이 180여 개나 되는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야하는‘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y 에서는 특정한 민족이나 그들의 문화, 언어, 종교, 전통만 주장하는 것은 더불어함께 살아가야하는 Living Together 우리의 삶과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십자군 전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중세 기독교, 근대 이후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선교라는 이름 아래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살인, 폭력, 수탈을 감행해 온 기독교 선교의 죄악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수 백만명이나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의식을 비롯하여 지금도 이어지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교회만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민족적 배타주의, 비관용적 인생 태도, 비타협적 인간 관계 등은 인문주의 정신을 그 밑바탕에서 부터 흔들어놓는 것들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四書三經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이 현실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실천적 덕목을 네 가지로 요약해 줍니다.

 

첫째는 측은지심 (惻隱之心 Sympathy)입니다. 사람은 신분과 직업, 성별과 나이, 사상과 언어를 초월하여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자연계와 동식물계 등 세상 삼라만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심, 사랑, 희생,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Goodness)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이웃,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해서 까지 잘못된 것이 드러나고 알게되었으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싸워야한다는 교훈 입니다.

 

셋째는 겸양지심 (謙讓之心 Tolerance)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과 양보 입니다. 겸손이란 그냥 공손하게 처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입니다. 양보란 말이나 행동이나 일이나 물건에 있어서 일체 타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나를 제일 뒤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시비지심 (是非之心 Justice)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릴줄 아는 지혜입니다.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그 악에 동조하는 것 입니다. 예수도‘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나 설법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는사람들, 한 시대의 지식인들과 지성인들, 교수들과 언론인들은 300여명도 더 되는 어린 학생들이 차거운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하고서도 2년 반이 넘도록 그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자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찌 말하지 않고 분노 할 줄을 모른다면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는 인간이랄 수가 없습니다.

 

⚫ 맺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위하여 듣고 읽고 말하고 나눌려고 하는가? 한 마디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서로 서로 좀 돕고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 책, 영화, 음악, 그림, 연극, 드라마, 기타 무엇이든지 사람이 되는데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소개해 주십시요. 그 다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답게 ‘살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인줄 뻔히압니다. 알기는 해도 실천하는 것은 아마 숨을 거두기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와하고 슬퍼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망의 빛이 비치리라고 기대하며 ‘행복했지만 괴로웠던 사나이’를 조금은 이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Comments and Questions    ➢ Sharing Time - 함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