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2. 예수의 분노(憤怒), 핏줄 이기주의

4. 왕정시대(the Kingdom of God)기존 주석을, 21세기 오늘날에도 비평없이 수용하는 목회자들

Narin Pusil 2020. 9. 30. 08:46

(다음은 위의 성경구절에 대한, 페이스북에다 배경 설명과 함께 올린 필자의 글에 대한 K목사의 반론이다) 

2.   이게 맞습니까? …. 조금 열받아서 댓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필자가 올린 글] 

위 본문은 가족중심의 핏줄 이기주의 집착에서 벗어나 너보다 못한 이웃들 … 오클로스(ὄχλος )[5]과 함께 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씀 배경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는 내용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말씀, 그것은 당시 로마제국과 유대왕국의 압제와 수탈 그리고 그곳에 종사하는 거머리와 같은 탐관오리들의 착취행위로 고통속에 있는, 도와야 할 빈곤에 시들어 가는 동족들이 많음에도, 가족중심의 핏줄 이기주의에 집착하고 있던 특히 갈릴리(사마리아, 유대)지역의 참상을 외면하고 있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갈릴리 지역의 가진자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였다.  

 

     “ 그들은 주인(하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이였기에, 매를 많이 맞을 것이라는 것이다.  내(하늘 아버지)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田土)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늘 이 시간 굶주린 형제들과 동포들에 베푸는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칭찬과 위로를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영생(永生),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도 나온다. 불로불사(不老不死)를 말하는 것일까? ….  예수는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의 길 위에서 마음의 평화를 가르치시며 평화를 얻게하는 수련의 길을 민중과 제자들에게 인식시켜주시는 운동을 전개하던 예수가 말했다는 그 의미의 속뜻은,  “그런고로 여러분들은 가족 중심의 핏줄 이기주의에 집착말고 그런 세속적 가치에서 홀로서야 한다” 는 가르침의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 본문의 예수 가르침은,  21세기 오늘날까지도, 자본주의에 짙게 물들어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카톨릭교회는 물론, 종교개혁을 했다는 개신교회의 질 나쁘게 세속화 되는 것에도 적용된다.  21세기 오늘날의 교회목회는 표방하는 소위 복음주의를 굳건히 지켜가야 하고, 예수 가르침에 대한 실천행위는 복음주의와 상반된 기업자본주의가 모토화 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하라는 가르침으로 들리지 않는가?

 

 

 

필자의 글에, Moore Theological College에서 성경신학 (요한 계시록) 전공 Alphacrucis College에서 신약학 MTh (요한계시록 전공) 전공 Morling College에서 MA in Theology (성경신학) 전공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theology master of divinity를 전공했다는 K목사는, 위 본문은 줄곧 제자의 도(道)만을 말씀하신거라고 줄곧 주장한다.

 

 

K목사 : 참 문제가 많은 성경해석이네요...ㅠ 이런 내용을 수없이 공유해 가니 참 걱정됩니다... 예전에도 이분 공유된 내용보니 하나같이 성경을 뭔가 새로운 아주 그럴듯한 주장을 하시드만....

 

필자 :  맘에 들지 않는 해석이다 라고만 할게 아니라, 더우기 신학을 공부했다는 목사라면 문제가 많다는 그 근거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K목사 :  (…반말하지 말라하면서….) 요청하셨으니 저의 의견을 올립니다. 그 내용은 유대 사회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치를 댓가에 대한 '제자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39절을 한번 찬찬히 읽어 보시지요.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에 관한 말씀임을 너무나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사람들간에 분쟁하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으로 인하여 한 집안 식구들끼리 분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진리와 거짓이 함께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불의가 함께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따르면 일어날수 있는 상황의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구약 미가서 7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미7:6).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미움과 조롱을 당하고, 때로는 매맞고 집안에서 내어 쫓기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온갖 고통을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중동의 모슬렘 국가에 너무나 많습니다. 

 

K목사는, 기존주석을 되뇌이면서 제자의 () 자꾸 말하는데 .. Listen & Repert !! 전부일까?.... 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없고 .. 반복교육으로 끝나는 것이 신학일까??  … 제자도를 말하고 가르치셨던 것이 귀절만이라고 여기는 걸까 게다가 예수 가르침들중에, 제자도에 벗어나는 가르침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걸까?

 

위의  K목사의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당시의 분열 이야기도, 미가서 6:8절을 지켜가지 못하던, 기원전 8세기,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이사야와 함께 활동하던 당시[6], 특히 상층부의 부패한 사회상이 반영되었던 즉,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하늘의 은덕에 보답하는 일을 하면서 조심스레 하나님의 도(道)를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도 상층부의 부패가 일반 모두에게로 옮겨와 민심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고, 거기에다 전쟁으로 삶을 잃어버린 민중들을 살피며 가진것을 나누어 주는 생활종교적 삶으로, 하늘에 보답하는 정의로운 삶을 게을리했기에, 합심해도 어려운 판에 계층간의 괴리로 말미암아 사회가 분열되어 결국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처럼 망해버렸던 것이다. 

 

신정시대(Theocracy), 그때는 그렇게 망해버렸다고 하지만,  21세기 시민주권시대 오늘날, 특히 한국의 신학대학에서는 일반사회는 물론 종교사회의 하이라키 진입(Entering the religious Hireachy)을 위한 경쟁의 기능학원 (Functional training College)으로 신정및 왕정시대의 하이라키 추구와 동일한 패턴이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 상황속에서 왕정시대를 포함한 전통적인 구시대 학자들의 해석이나 논리에 그저 머물러만 있다면 ... 21세기 오늘날 시민주권시대에 신학이라는 학문에 무슨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겠습니까..?  역시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도 학문입니다. 모든 만물이 무상(無常)하듯이 신학도 시대적으로 변천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만, 예수 가르침을 따라가는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각자의 신앙의 진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헤르만 궁켈 (Hermann Gunkel, 1862년 ~ 1932년 ) 독일 개신교 구약학자 .... " Sitz im Leben" (삶의 정황 : setting in life)은 텍스트 또는 객체가 생성될때 제기된 맥락과 그 당시의 기능과 목적을 알아내어야 특정한 그 시대의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설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이래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시대 시대마다의 시대적 상황과 삶의 정황( Sitz im Leben)에 따라 그 시대의 <시대적 방편>으로 해석및 적용이 필요한 것은 합당하고 명확한 일인 것이다.  생각해 봅시다,  대략 BC15세기의 모세 시대와 BC8세기까지 유대-이스라엘의 남북조시대, 그리고 BC6세기 바빌론 귀향 이후시대 ..... 덧붙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는 하나님 중심의 ‘신명기역사서’이고,  반면에 역대기서, 에스라, 느헤미야는 공동체 중심의 ‘역대기역사서’다.  글을 쓰는 것도 시대별로 작가의 성향과 이에따른 작가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난다. 한국사도 그러하듯이 그 시대 시대마다 사회상이 각각 달라져 갔던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에따른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달라지는것 아닌가 말이다.  특히, 로마의 침략기 동안에는, 사회상의 변화는 물론이고, 감히 십계명의 제4계명의 안식일의 율법을 깨뜨리는 시대 파격적인 행동을 보이시며 가르치시다 유대인들에게 십자에 못박혀 돌아 가셨던  예수님 …

 

헤롯 안티파스 일당에 세례요한이 참혹하게 죽어간 그때 예수는 그 광란의 광풍이 부는 갈릴리로 하나님 나라 그 평화를 나누는 세상을 가르치기 위해 죽음의 현장으로 마치 겁없는듯 나아갔다. 그리고 헤롯과 성전세력에 수탈과 착취로 고통속에 있는 오클로스들 앞에 섰다. 당시 예수의 궁극적 목적은, 고통에 직면해 있는 갈릴리 동포들의 일용한 양식에 대한 걱정뿐이었다(마6:11, 주기도문).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4번째 십계명에 해당되는 목숨보다 중한 계명으로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일을 벌인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마가복음2장27절), 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유대종교지식층에 외친다. 그것은 교리는 물론 계명, 율법, 교회(성전)등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파격적인 통렬한 가르침이었다. 교리가 사람을 넘어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교리를, 계명을, 율법을, 성전을 위한 신앙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종교(유대교 율법)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소위 성전권력과 함께 유대인들은, 성전도 훼파하며 기득권에 대항하는 갈릴리사람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범접할 수 없는 유대교 전통의 할례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자신의 가르침대로 이방인의 입교를 위한 무할례도 인정하고 실행하다 돌맞아 죽을뻔 했던 바울이 나타나 감히 유대전통과 율법마저 깨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행17:1-10).  전통과 율법을 거스르는, "안식일 논쟁"의 <'예수의 파격'>과 그리고 "무할례"의 <'바울의 파격'>, 그것은 회개(repent) 만으로가 아닌,  시대 시대마다 무상(無常)한 삶의 생각과 방향의 전환의  "파격(破格)의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metanoia)"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바울이나 특히 예수의 그러한 《파격》을 목도하고도... 한국개신교는 물론 나라밖 신학계는 왜 그 모양인지..... 호주(미국)원주민의 전통적인 삶을 백인의 서구 기독교문화로 강제로 변환시키고자 했으나 결국 원주민의 삶만 무너뜨리고 말았던 꼴과 같은 처지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의 혼란 야기시킨 오늘날의 한국기독교가 아닐까 한다.  호주 혹은 미국에서 벌어진 서구 백인들이 그들의 교회와 함께  그들의 교권을 확립해 가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사람)부터 살려내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이라키(Hierachy)적 종교적 교권(교리)보다는 사람 하나하나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했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