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철학 이야기

언어철학 - 2

Narin Pusil 2022. 3. 4. 16:41

 

  • 시드니 인문학교실 홍길복의 인문학강좌 (2022-35,36)
    제36, 37강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언어철학 이야기 -

 

 

 

 

들어가는 말    

 

시드니 인문학교실을 통해서 우리들이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 온 주제는 ‘인간’과 ‘자아’ 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찾아서,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성찰해 보기 위해서 지난 5년을 함께 해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주로 서구인들이 추구해온 문사철(文史哲),

특히 그 중에서도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하여 공부해 왔으나,

때로는 시서화(詩書畵)를 비롯하여 노래와 소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쳐 가까이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분야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간과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Pieta)나 그의 천정화 ‘천지창조’에는

르네상스시대의 문을 연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한 위대한 조각가요, 화가요, 건축가의 사상과 삶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나 수많은 자화상들 속에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그의 사상과 자신의 모습들이 온전히 담겨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로댕이라는 조각가의 생각과 삶이 묻어 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시대를 살아온 피카소의 생각과 철학과 삶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가 하면,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을 마주 할 때

우리는 소용돌이 치는 정신적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 시대의 한 천재 화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경자의 작품 속에서는 천경자의 생각과 삶을 보게 되고,

천옥영의 그림 속에서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은 천옥영의 생각과 삶의 다른 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석봉의 글체에는 한석봉이 나타나고,  김정희의 그림과 서예에는 추사의 삶과 사상이 그려져 있고,

최진의 서예속에는 최진의 생각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 우리는

450여년 전의 바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운명’ ‘영웅’ ‘합창’ 같은 교향곡들을 비롯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와 협주곡 들을 통하여

우리의 심금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베토벤 ! – 그의 음악세계에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직’ ‘터키 행진곡’ ‘’반짝 반짝 작은 별’ ‘’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40여개도 더 되는 교향곡들과 그와 버금가는 협주곡들, 그리고 무엇 보다

‘레퀴엠’을 비롯한 그 많은 미사곡들은 모차르트라는 한 신동이요 천재 음악가란 사람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정말 열거하기도 어렵게 많은 위대한 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단테의 ‘신곡’,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등등…

이 모든 작품들 속에는 그 작품을 쓴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그 시대의 생각과 역사가 고스라니 그려져 있습니다.    

 

주제는 하나지만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목표는 하나이지만 그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일 수 있습니다.

목표와 주제는 ‘인간과 자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과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방법에는 여러가지 갈레길들이 있습니다.

 

조각, 그림, 글씨, 음악, 시, 소설, 희곡, 수필, 연극, 드리마, 영화, 스포츠 등등…

그리고 이런 것들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고, 말하는 자기 자아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언어와 글)을 살펴보고 그것을 분석해 보고

그 의미를 찾아봄으로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란 어떤 존재인지’를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현대철학자들은 ‘분석철학’ 또는 ‘언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의 역활과 영역을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 러셀을 중심으로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웨일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철학자요, 역사가요, 사회 비평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엔 수학자로 출발했던 수리논리학자였습니다.

수리 논리학의 성립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써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러셀은 20세기 초 전통적 관념론을 반대하며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울 창시하는데 선두적 역활을 한 철학자중 한 사람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양심의 자유’와 ‘인본주의’를 주창한 참여적 사회활동가로 오히려 그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참전에 반대하고 병역거부운동을 펼치며 반전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베르사유조약에도 반대했고 히틀러와 나치에 항거했으며 당연히 스탈린정권에도 저항했습니다.

전체주의 체제를 반대해 온 그는 그 후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와 비판에 이어

반핵운동등을 꾸준히, 그리고 줄기차게 전개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촉구해 왔습니다.

이런 활동과 연계되어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자신이 귀족가문으로서 물러받은 재산과 노벨상금 등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참여하는 사회단체에 기부했고

노년에는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닐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집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일생을 통하여 3가지 열정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고픈 열정,

둘째는 알고 싶은 열정,

셋째는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려는 열정

 

– 그는 현대 프랑스 지식인들에 앞선 영국의 참여하는 지식인,

앙가주망(Engagement –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말과 행동으로 비판하며 항거하는 지식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의 분석철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1) 모든 사물은 제각기 하나의 성질로만 되어있지는 않다.

하나의 사물 속에도 여러가지 성질이 함께 있다.

 

2) 모든 사물들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 연계되어 있다.

 

3) 우리가 사실(facts)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복합적이다’

‘사실’이란 ‘단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여러 개의 사실들이 모여있는 ‘집합적 사실’이다.

 

4) 따라서 ‘사실’은 늘 ‘분석되어야만 한다’

‘사실은 복합적 사실’이기에 쪼개어 보고, 나누어 보고, 분석해 보아야, 비로소 그 실체가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난다.

 

5) 철학의 과제는 그 동안 우리가 사실이라고 말해왔던 것(명제, 이론, 관념, 주장, 사고 등)들을

하나 하나 쪼개보고, 분석해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은 구체적 사물과 명제를 분석함으로 보다 더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

 

– 그는 이것을 ‘분석철학’(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석철학이란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추구해 온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적 명제를 다루지 말자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새로운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석철학은 단지 철학하는 방법론을 달리 하자는 것입니다.

분석철학은 과거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기반으로해 온 전통과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해 나가는 방법론이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수학적’이고

보다 더 ‘과학적’이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러셀은 수학자로 출발해서 수학적, 과학적, 논리적 방법론으로 철학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 실증주의자인 러셀은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만이 의미있는 언어>라고 규정하고,

종래의 형이상학적 언어, 추상적 언어, 무호성 있는 언어들은 거부했습니다.    

러셀의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상관관계는 사물을 분석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사과는 빨갛고 달고 향기롭습니다>라고 할 경우 그는 이 명제를 3가지로 나누어서 분석합니다.

<첫째 사과는 빨 갛다. 둘째 사과는 달다. 셋째 사과는 향기롭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분석함에 있어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거나 더 이상 분석할 필요가 없을 경우,

그는 그것을 <원자적 사실, Atomic Facts> 혹은 <원자적 명제, Atomic Sentence>라고 이름했습니다.   

 

 /여기 홍길복(혹은 권태원, 전현구, 강성형, 김마리아, 박혜경, 김동숙…)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홍길복이란 사람의 이름 석자만 가지고서는 그를 제대로 알수가 없습니다.

그의 국적, 출생지, 성장과정, 신체적 상태, 정신적 영향, 가정, 사회, 종교, 정치환경 등등을

하나 하나 쪼개보고 분석해 보아야 비로소 홍길복 이란 사람이 조금은 더 명확해 집니다.

왜냐하면 홍길복이란 사람은, 하나의 사실이나 하나의 성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고,

여러 사물이나 환경 등과 연개되어 있는 <복합적 존재, Compound Being> 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 컴퓨터(모발 폰, 자동차, 책상, 의자, 책…)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이 역시도 ‘복합적 실체’입니다. 때문에 컴퓨터를 알기 위해서는 이물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여기 어떤 교회, 시드니인문학교실, 한인회, 언론사, 시민단체, 정치조직, 종교단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만 가지고, 또는 그 단체가 표명하는 대로

‘우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는 말만 가지고서는 그 교회를 판단하기가 퍽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숨겨진, 혹은 드러나지 않은 복합적 사실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러셀의 분석철학은 흔히 <fact 분석하기>혹은 좀 어려운 표현으로는

<논리적원자론,    Logical Atomism> 이라고 합니다.    

 

 

러셀의 대표적 저서들 중 한국어로 출판된 것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의미와 진리    에 관한 탐구 - 언어학과 철학(러셀의 저서에 노암 촘스키의 책을 첨부함), 박병수, 신일철 공역, 삼    성출판사, 1986 / 수리철학의 기초, 임정대옮김, 경문사, 2002 /철학이란 무엇인가, 황문수옮김, 철학사    상, 1977, 서상원옮김, 스마트북, 2012, / 철학이란 무엇인가 – 행복의 정복, 정광섭옮김, 동서문화사,    2017 / 서양철학사,(개정판), 서상복옮김, 을유문화사, 2020 /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옮김, 이학사, 2000    / 과학이란 무엇인가, 장석봉옮김, 사회평론, 2021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옮김, 사회평    론, 2005 / 행복의 정복, 이순희옮김, 사회평론, 2005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최혁순옮김, 문    예출판사, 2013    

 

 

 

⚫ 언어철학(Linguistic Philosophy, Philosophy of Language)    

 

 

1. 철학과 인문학의 목표와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인간인가?>에 두고 있습니다.

<언어철학>은 <인간들>과 <나>와 <인간들의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언어를 분석함으로

<인간과 나와 인간집단>을 알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철학과 인문학의 한 방법론입니다.  

 

2.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들은 언어철학의 역사를 아주 길게 보기도 합니다.

고대 인도의 베다경이나 힌두교의 철학으로 부터 제자백가(諸子百家)중 명가(名家)에서 다루었던 이름에 대한 논의,    

파르메니데스의 로고스론, 그리스철학시대 소피스트들이 사용했던 언어연구,

그리고 성서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의 기록 출처등을

언어철학의 시원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3. 그러나 19세기 이후 현대의 언어철학은 앞에서 잠간 살펴본대로

소쉬르,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등이 연구한 분석철학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론 언어철학은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수  많은 사물들 중에서 언어를 대상으로 합니다.

언어의 본질과 의미, 언어 사용자와 그 언어를 듣는자 사이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의 관계 같은 것들을 우선합니다.    

 

4. 언어철학은 무엇 보다도 <일상언어>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직업군(목사, 스님, 의사, 법조인들, 과학자들, 정치인들, 경제인들 등등)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아닌 일상의 <생활 언어> 를 분석함으로

그들의 사고와 언행의 배경과 구조, 성격과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일상언 어> 속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생각,

생각하는 방식으로 부터 삶의 태도와 방법과 목표가 다 들어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5. 우선 언어철학은 <인간 개개인>의 언어를 분석하는 일로 부터 시작합니다.

김, 이, 박은 물론,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서양 사람과 동양인은 모두 자신의 생각과 사고 방식 및 개성에 따라 말을 달리 표현합니다.

말의 내용은 물론, 표현의 방법과 그 말이 지닌 의미는 천차만별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존재다’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 ‘말로써 말 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 같은 말의 속내를 헤아릴 것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평생을 오직 말 가지고 밥 벌어 먹고 살아온 사람인지라

<지난 날 내가 했던 말이 진정 사람을 살렸던 말인가, 아니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는 없었던가?>

고통스런 자신을 되돌아 볼 때가 많습니다.    

 

 

6. 그 다음 언어철학은 <집단의 언어, 공동체의 언어>를 연구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와 연계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스페인, 아랍인, 이스라엘사람,

이탈리아사람들의 언어 속에는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물론,

그들 국민들의 성격과 특징,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인사말 하나만 보아도 거기에는 그들 국민들의 역사와 문화와 삶의 많은 것들이 담겨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Good Morning> <곤니찌와> <니 하오> <Bonjour> <Guten Tag>

<Buon Giorno, 부온 죠르노 - 이탈리아> <올라 올라 - 스페인> <씬 짜오> <샬롬>

마르하반 – 아랍> 그리고 호주의 <구 다이> 같은 인사말 중에는 모두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습니다.   

 

 또 같은 한국말이라 하더라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방에서 사용하는 방언들

역시 그 지방의 역사와 집단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겨?> <안녕하셨지    라?> <안녕하셔유?> <안녕하시구레이?> <안녕하우꽈?>에는

제각기 나름의 <언어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똑같은 단어나 문장도 그 말이 쓰이는 나라의 언어에 따라 느낌과 의미는 다를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사과> <바나나> <강아지> <다문화 사회> <민주주의> <사실> <진리> <사랑> <죽음> <사 람>을

영어로 <apple> <banana> <dog> <multicultural society> <democracy> <fact> <truth>  <love> <death> <human>

이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결코 그 의미가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을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언어는 표현되거나 나타난 현상보다 훨씬 깊고, 함축성을 지닌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계성>을 지닙니다.

한국어로 쓰는 말과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 관계성에는 제각기 다른 내용과 의미가 들어 가게 됩니다.

김동숙과 한국, Phoebe와 Australia, / 안인승과 한국, Henry와 Australia는

각각 다른 관계성을 지닌 언어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와 내용을 지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8. <이것은 사과입니다, This is an apple>이란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사실을 기술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만

그렇게 단순한 것 만은 아닐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참으로 사과>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 사과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비교의 의미를 줄 수도 있고,

<이 사과는 건강에 좋다>라는 광고의 뜻을 담을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재명입니다> <저 사람은 윤석열입니다> <그이는 이제 은퇴자입니다>에는

모두 여러가지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이란 설명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합니다>    

 

 

9.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를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말합니다.

<코로나와 팬덱믹이 제일 큰 위기다. 지구의 온난화와 기후 변화와 생태계가 가장 큰 위기다>로 부터 시작하여

경제적 위기, 양극화의 위기, 정치적 위기, 민주주의, 인권, 차별, 창조질서의 파괴… 등등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언어철학자들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위기도 그에 못지 않은 인류의 위기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온갖 헛소리와 거짓말과 개소리로 부터 시작하여 인간들은 언어의 오용과 남용에다

비루한 침묵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발명해 놓고 자기들이 만든 그 언어에 빠져 죽어가는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타락과 오염된 실상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오염되고 타락한 것이 <언어의 타락>과 <언어의 오염> 입니다.

 

무너져 가는 개인의 인격, 가정의 붕괴, 정치의 부패, 종교의 타락

–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타락과 오염으로 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다고 하는 문장입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말에 대해서 잘 알려진 속담이나 격언들을 다시 들추어 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이 씨가 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음식은 갈수록 줄고 말은 갈수록 는다>

<관 속에 들어가도 막 말은 하지 마라>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인간에게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라>

<기쁠 때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슬플 때 말이 많으면 예의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동서양의 사상가들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고를 했습니다.

시인 보들레르(Chares Pierre Baudelaire)는 말합니다.

<언어는 단 한마디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무기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말합니다.

<언어는 인간과 사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말합니다.

<언어란 모든 오해의 근원이다>

장자(莊子)는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말합니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관의 한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한다>

 

많은 종교에서는 침묵을 <묵언수행(默言修行)>이라고 하면서, 이를 가장 고통스러운 수행이라고 일러줍니다.     

 

 

10. 그러나 언어철학의 핵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가장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언어(말, 글, 이름)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책 ‘Poetry, Language, Thought’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 봅니다.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In its home man dwells. Those who think and those who create with words    are the guardians of this house. ….Man acts as though he were the shaper and master of    language, while in fact language remains the master of man.>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인간은    언어 속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언어의 창조자요 주인이 된 것 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11. 언어철학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위의 하이데거의 생각과 연계되는 것으로서,

소쉬르와 비 트겐슈타인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건을 만들고 창조해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먼저 존재하거나 생김으로,

거기에다 언어나 이름이 붙여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들 언어철학자들은 그것을 거꾸로 보았습니다.    

작고한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 나의 이 빛갈과 향기에 알 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2.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붙이면 존재가 되지만,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지우거나, 이름을 상실하면, 그 존재는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부르 기 전, 너는 실재로 ‘꽃’이라는 존재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이름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후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소쉬르가 <이 세계에는 언어에 의해서 표기된 것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나 사물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이름이 있어야만

마침내 ‘존재’ 혹은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는 것’ naming은 존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저의 경험 중 하나입니다. 제가 호주에 와서 목회를 시작한지 몇년이 않되었을 때, 저의 교회 신도중 한분이 안타갑게도 임신 후 7개월 만에 아이를 사산했습니다. 저는 RNS 병원에 입원 중인 그분    을 찾아 갔습니다. 간단한 예배와 위로를 드린 후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 병원의    social worker를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사회복지사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7달이나 된 아이는 이미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고 담당 의사에게서 Birth Certificate를 발부 받고 동시에 사    망 증명서에 서명도 받을 것입니다. 이름은 엄마와 상의를 했는데 Carol 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이후 캐롤의 장례식은 목사님의 책임입니다.> 그 후 저는 장의사를 정하고 기독교 예식서에 따라 장례 절차를 거친 후 어린 캐롤을 지금의 Macquarie Park 안에 있는 어린이 묘역에 안장했고 그 엄마와 상의해서 작은 묘비도 세웠습니다. 40여년 전에 겪었던 그 경험이 저에게는 퍽 의미 있는 것이어서 저는 그 후에도 가끔 Macquarie Park에 가게 되면 캐롤이 누워 있는 자리를 찾아보곤 합니다.  그것은 유산된 태아는 모체의 신체 일부로 취급되었고 태아를 죽이는 일은 살인죄로 보지 않았던 그때 까지의 저의 생각을 뒤집어놓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비로소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는 이름이 있거나 이름을 주어야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웠습니다. (생명의 지배영역, 로널드 워    드킨지음, 박경신, 김지미옮김, 이화대학 생명의료연구소, 2008 참고)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입니다.  그 자격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됨의 인정은 이름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줌으로 드디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사람으로 간주되는 데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에 올리고, 백일잔치나 돐잔치 같은 통과의례를 거쳐서 마침내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에 죽으면 태아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임신 부터 국가가 개입합니다.

물론 그것이 7주냐, 14주냐, 하는 논쟁은 있지만 말입니다…

로마시대의 노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예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노예와 군인들은 번호로 이름을 대신했습니다.

…이름 없이 번호를 부르는 것은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노예는 죽어도 사람으로서의 이름이 없었으므로 일정한 장례절차가 없이 그냥 내다 버렸습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강아지나 말 처럼 이름을 붙인 동물들은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존재를 인정해 주고 그런 이름이 붙여진 동물들의 고기는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죽는 경우에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장례의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지 않는 소나 돼지나 닭은 이름이 없으므로,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그런 비존재는 사람이 먹을 수도 있고, 또한 죽어도 아무런 의식을 치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이름이 붙여져 있는 존재인 개를 잡아 보신탕을 먹는 행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지음, 문학과 지성사,    2015 참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 이것이 언어철학의 성격을 나타내는 명제 중 하나입니다.    

이름과 존재에 대한 이해를 더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197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총회목사고시를 치루고 2년에 걸친 전도사 훈련 기간을 거친 다    음,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 서울 서노회 정기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제가 일하던 교회에 나가니 교인들이 한결같이 ‘목사님 목사님’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    음 저는 그 말이 실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 까지 ‘전도사님 전도사님’이라고 불리웠던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목사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라는 이름과 호칭이 저를 목사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름이 존재를 만든다>는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흔히 애기를 낳았을 때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아내가 애기를 낳았다고해서 즉시 ‘아빠의식’이 생겨나는 것    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애기가 집에서 엄마 한테 ‘아빠’라는 말    을 배워 그 남자를 ‘아빠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처럼 ‘아 내가 아빠로구나!’하는 아빠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호칭이 그의 존재를 만들어 준다는 언어 철학자들의 주장은 이런데 근거한 것입니다. / 물론 여기에는 잘못된 ‘이름 붙이기’나 잘못된 ‘호칭’ 의 실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데 사람들은 흔히 저를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저는 교수가 아닙니다. 저는 한번도 법적으로나 행정적 절차에 따라, 독일 처럼 교수 시험에 합격한 적도 없고, 한 학교의 이사회나 교수회의나 고등교육기관의 법적 절차를 따라 교수로 임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한국이나 호주의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좀 하다보니 학생들이나 다른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니까 내가 진짜로 교수가 된양 착각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수는 고사하고 전임강사나 조교수, 부교수 조차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교수라고 불러주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농담 같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만 자칫 ‘명예 사칭’이나 ‘호칭 도용’ 같은 범죄 행위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듯 교수가 아니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저항이나 수정 없이 그냥 반복적으로 ‘교수님’이라 부르고 또 듣는 것은 우리 집단의 그릇된 전통과 문화, 우월감과 열등감을 포함하는 계층화(hierarchal)된 의식과  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 친일파란 말도 글자 그대로 하면 ‘일본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나 집단’ 을 뜻합니다. 그러나 스시나 우동이나 후지산을 좋아한다고해서 친일파라고는 하지는 않습니다. ‘친일파’란 일제시대, 의도적으로 개인의 출세나 성공이나 영달을 목표로 해서 일본제국주의 정권에 가    담하거나 부역한 사람이나 그런 집단을 이르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친일파’ 개념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됨으로 언어의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친일파’ 와 ‘지난 날 일본제국주의 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좀 더 확실하게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고 보겠습니다.

 

 

/ <사람이나 사물은 이름이나 호칭 같은 언어행위에 의해서 그의 존재가 결정된다>는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흔히 아이들을 향하여 Good boy, good girl 이라고 반복적으로 불러주면 실제로 good boy나 good girl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똑똑한 아이를 향해서도 지속적으로  <바보, 바보>라고 부르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는 경험측과도 연계가 됩니다.    

 

 

 

핵심은 <언어는 사건을 만든다> <이름과 호칭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주고 존재의식을 갖게해 준다>

<사건이나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언어와 이름이 그 존재를 존재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 대표적 언어철학자들 – 여기서는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만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지난 시간에 본대로 소쉬르는 20세기 초, 제네바대학에서 구조주의 철학자, 학자로 출발하였습니다    

차츰 언어의 구조에 괸심을 갖고 연구하다가 일반 언어철학자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된 스위스의 언어철학자입니다.

소쉬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는 자기가, 자기의 의지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뒤에는 어떤 일정한 틀, 얼개, 시스템이 있어서, 그 구조에 따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구조언어학, Structural linguistics>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우리가 나타난 현상으로 개, dog, Hunt, 혹은 사람, 人間, human, Mensch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구조 속에서는 <이러 이렇게 생긴 것은 개, dog, Hund라고 부르기로하고,

또 이러 이렇게 생긴 것들은 사람, 人間, 혹은 human이나 Mensch라고

부르기로 합의 한 사회적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이 구조언어학은 프라하학파를 거쳐 현대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언어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가르키는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가 사물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물은 언어가 있기 전에는 <있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에 의해서 표기된 것만이 존재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체계와 규칙과 관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조언어학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의 의미, 성능, 기질, 가치란 본래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서의 관계나,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생각을 표현하고 그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는 존재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언어를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언어를 그냥 사용함으로서 기존의 이미 만들어진 세계관과 역사인식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정말 무서운 통찰력이었습니다.    

 

 

소쉬르는 개인이 어떤 상황 속에서 하는 말을 ‘파롤(Parole)이라 하고,

그런 개인들의 언어행위 뒤에 있는 구조적 언어는 ‘랑그(Langue)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는 개개인들이 하는 말과 그 의미, 즉 ‘파롤’은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파롤 뒤에 있어서 개인의 파롤을 지배하는 구조로서의 언어인 ‘랑그’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소쉬르에게 있어서 언어, 즉 ‘랑그’란 한 사회의 공통된 관심의 공통된 표현이고 그들 공동체의 집단적 언어입니다.

<언어는 공동체의 언어이기에 똑같은 말도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달리 이해해야한다>

예를 들면 <나 배고파>라는 말도, 미국의 부자집 아이가 하는 말과 아프칸 난민 아이가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추워> <더워> <정의> <진실> <인권> <민주주의> <자유> 등등의 말들도

그 사회의 정치나 경제나 민주주의나 인권 등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예: 오래전 북한 방문시 ‘자유’에 대하여 토론했던 경험)    

 

소쉬르의 예에 의하면 ‘결혼반지’ 하나만 보아도 똑같이 생긴 반지이지만

이는 그 시대와 사회, 문화와 전통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언어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약속>으로 만들어 진 것 임으로

이는 일종의 종교나 법률과 같은 구속력을 지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저술(한글로 번역된 것들 중에서) – 1) 일반언어학 노트, 김현권옮김, 인간사랑, 2007. 2) 일반    언어학학 강의, 김현권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년과 2013년 판. 3)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김    성도옮김, 민음사, 2017. 4) 일반 언어학 강의, 최승언옮김, 민음사, 2006. 5) 소쉬르의 제 1차 일반 언    어학 강의 : 1907, 김현권옮김, 그린비, 2021. 6) 소쉬르의 2차 일반 언어학 강의 : 1908-1909, 김현권    옮김, 그린비, 2021. 7) 소쉬르의 3차 일반 언어학 강의 : 1910-1911, 김현권옮김, 그린비, 2021    

 

 

 

 

2.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유대적 배경을 지닌 오스트리아 출생이면서 영국시민(Austrian-British)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분석철학의 선구자중 하나이며 언어철학자 가운데 영향력이 매우 큰 학자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거기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꼭 한권의 책만 남겼습니다.

불과 75쪽 정도인 작은 책으로 <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1921>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철학의 과제는 언어를 연구하고 언어를 다듬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구에서의 전통적 철학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부터 시작하여

존재론과 인식론 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진선미성(眞善美聖) 같은 가치철학과

양심과 도덕, 사고와 행위 등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왔는데, 그는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우주와 인간의 문제는 이제 철학자의 몫이 아니라

사실은 과학자들의 역할이고 그들의 역할이 되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요즘은 실제로 우리 교실의 양지연박사 같은 뇌과학자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주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꾸준히 글을 쓰시는 것을 보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KAIST 같은 자연과학을 다루는 대학과 연구소의 학자들이 계속해서 인간문제를 연구의 중심과제로를 다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이제 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언어를 연구하고,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 언어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다>

그는 철학의 목표를 언어와 논리의 문제로 규정 했습니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이 새롭게 주어진 철학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바탕을 검토, 분해, 분석하고 다시 성찰한 다음,

그 언어의 모호성을 고쳐나가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전회, Linguistic Turn>이라 했는데 이 개념은 그의 언어철학에서 핵심 단어입니다. 

   

철학은 종교에서 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거나 신비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정치인들이 하는 연설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의

애매 모호한 언어쓸 사용 할 것이 아니라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언어로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언어와 세계는 마치 빛과 그림자 같은 것이다>

언어란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아서 언어를 올바로 사용함으로 세계는 올바로 이해된다는 주장입니다.

 

<철학의 목표는 언어의 의미를 올바로 밝히고, 올바로 사용함으로 세계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철학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한다. 모르면 입을 닫고 조용히 있어라>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던진 유명한 말 중 하나입니다.

 

그는 아주 분명히 ‘당신은 왜 믿으십니까? 당신은 왜 사랑하십니까?’ 처럼

믿음과 불신의 문제나 사랑과 미움의 문제 같은 종교에서 취급하는 언어나,

전쟁과 평화의 문제나 평등과 차별의 문제 같은

정치에서 다루어야 할 언어들은 철학적 과제가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저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953>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합니다.

<언어는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언어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어 자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데 ‘Good Morning’ 이라는 말은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사용하는 인사입니다.

그러므로 ‘Good Morning’ 이라는 말은 문자대로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라는 뜻을 지닌 인사말은 아닙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군요’ 좋은 뜻일까요? 나쁜 뜻일까요?

이는 당연히 직업이나 그날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가 다르고, 해갈을 기다리는 농부와 소풍을 가려는 학생은 다른 뜻으로 이 말을 하게 됩니다. <모든 언어는 게임과 같이 어떤 규칙속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언어란 사물을 단순하게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한 상황 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는 그 말이 쓰여진 맥락 가운데서 이해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쓴 책들은 많이 있지만 그가 직접 저술한 책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두권이 있으며 그것들을 새롭게 편집한 것들이 몇권 있습니다. 1) 논리철학논고 – 비트겐슈타인 선집 1, 이영    철옮김, 책세상, 2020. / 2) 철학적 탐구 – 비트겐슈타인 선집 4, 이영철옮김, 책세상, 2019. / 3) 확실성    에 관하여 – 비트겐슈타인 선집 6, 이영철옮김, 책세상, 2020. / 4) 청색 책 갈색 책 –비트겐슈타인 선    집 3, 이영철옮김, 책세상, 2020. / 5) 문화와 가치 – 비트겐슈타인 선집 7, 이영철옮김, 2020. / 소품    집 –비트겐슈타인선집 2, 이영철옮김, 책세상, 2020.    ⚫ 언어철학과 관계되는 몇권의 책 소개    1. <언어 인간학> 김성도지음, 21세기북스, 2017 – 이 책은 고려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김성도교수(한국기호학회 회장 역임, 현 세계기호학회 부회장)가 인문 아카데미 건명원(서울 종로 북촌에서 인문사회과학 강좌를 이어가는 인문학교실 중 하나로 그 뜻은 ‘빛을 밝혀 시대의 반역자들을 길러내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에서 몇차례에 걸쳐 했던 강연을 묶은 것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인류의 역사는 언어의 본능, 언어의 창조, 언어의 진보로 이루어져 왔다.

언어의 진보가 인류의 문명과 발전에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2)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하게 된 가장 큰 힘은 언어다.

인류는 약 10 – 15만 년전 부터 언어를 통한 소통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언어 이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몸짓, 그 다음은 허밍, 그 다음은 으르렁댐 같은 것으로 출발하였으나,

약 5만년전 부터는 오늘날 같은 음성언어가 나타났고 그 다음에는 문자가 개발되었다.

 

그 순서는 대략 Homo Graphicus (호모 그라피쿠스, 이미지를 만드는 인간) – Homo Scriptor (호모 스크립토르, 문자를 쓰는 인간) –    Homo Loquens (호모 로쿠엔스, 말하는 인간) – Homo Digitalis (호모 디지탈리스, 디지탈을 만드는 인간)이다. 음성-몸짓-문자-시각-디지탈언어의 순서로 발전이 되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이 꼭 일정한 순서를 따라 발전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호모 그라피쿠스는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나 중세의 스테인드 그라스나

그 후 사진 예술을 거쳐 현재의 디지탈 영상으로 연결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오늘날 언어는 개인적이거나 주관적 기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집단적이고 공동체적 언어로 바뀌어 가고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식이다.   

 

 (4)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물론 몸짓언어, 촉각언어, 음성언어, 시각언어, 문자언어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그림언어>는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몸짓, 음성, 부딪침, 소리, 노래 등으로 소통을 하지만

그림을 통하여 소통하는 동식물은 없다.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한다.   

 

 (5) 언어는 권력이다. 언어와 문자는 지식권력(knowledge power)을 갖는다.

말하고 글쓰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주어진다. 문자와 언어를 소유한 인간은

그것이 없는 인간들을 억누룰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6) 말(글, 펜)은 칼 보다 무섭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날 말은 점점 권위와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아무리 험한 말을 해도 죽일 수 없고, 아무리 힘센 말을 해도 살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언어의 공적 힘(공신력)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 사이에 주고 받는 말 중에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만나서 식사나 한번 합시다> 라고 말한 사람이 5년, 10년이 되어도 감감 무소식일 경우도 많이 있다.

지키려는 의지도 없고, 지켜지리라는 확신도 없이 주고 받는 빈말과 체면치례나 덕담들이

이제는 성직자들과 대통령과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에게도 크게 확산되어 버렸다.    

 

(7)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하는 공공의 언어는 하나의 선포요, 법이요, 약속이며 다짐이다.

대통령의 취임사, 목사나 신부의 설교나 강론, 교수의 강의, 신호등이나 school zone도 모두 하나의 공공의 언어다.    

 

(8)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권위를 부여한다. 종교인, 정치인, 학자, 전문가들의 경우    에는 더욱 큰 권위와 힘이 부여된다. 목사나 신부가 <이제 부터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된 것을    선포합니다>하는 식의 성혼선언은 아무나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권위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권위가 있음을 암시한다.    

 

 

(9) 말(언어, 문자)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말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죽고 또 태어난다.    말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다. 옛 말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새로운 말들은 활기를 찾    이하려고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협력적 경쟁관계, Co-operation+    Competition>가 이어진다.   

 

 (10) 이하에서 요즈음 죽어버렸거나 죽어가는 말들의 예는 제가 찾아 본 것들입니다. / 공순이, 공    돌이, 식모, 사바사바, 솥뚜껑 운전사, 공갈, 군바리, 치마바람, 짱아찌, 향토장학금, 세모꼴, 네    모꼴, 안내양, 여울, 여울목, 순호박, 무허가 건축물, 핫바지, 삐삐, 토큰, 노고지리(종달새), 별똥 별(유성), 간호부(간호사) 등등은 사라지는 말들이고, 오빠는 남편을 부르는 말이되고, 사모님은 여자 고객을 부르는 말이 되고, 어르신은 남자 고객을 부르는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다음    은 새로 생겨나는 말들 (신조어)중에서 추려 본 것들입니다. / 낄끼 빠빠, 인조새(인생 조진 새    끼),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해라), 취존(취미존중), 핑프(Finger Princess) – 직역    하면 손가락 공주라는 말인데, 그 뜻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남 한테 물어보기만 하는 인간이라는 뜻, 솔까말(솔직히 까놀고 말해서), 즐(즐    거운 게임 혹은 꺼져, 닥쳐), 전일(전국 1위, 혹은 전세계 1위), 웃프다(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    어), 개취(개인의 취미), 작업(이성에게 접근하는 행위), 가즈아(도박이나 투자에서 긍정적 기대    를 표현하는 감탄사, 소망을 뜻하는 단어), 라떼는 말이야(기성시대가 신세대에게 ‘나 때는 말    이야’ 하는 말을 비꼬는 말), 벼락거지(문재인 정부 들어서 부동산으로 거지가 된 사람), 아무말    대잔치(생각 없이 내뱉는 말) 진지층(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항상 진지하게 나오는 사람), 짐승    남(거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하는 남자), 짱(최고), 치느님(치킨과 하느님의 합성어), 품절남, 품    절녀(인기는 많지만 이미 결혼한 사람),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 먹튀(먹고 튀다), 밀    당(밀고 당기다), 성진국(성문화 산업이 발달한 일본을 지칭하는 말), 꾸꾸꾸(꾸며도 꾸질 꾸질),    모태솔로(태어날 때 부터 솔로였다. 이성교제 한 번도 안했다), 열폭(열등감 폭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케바케(case by case), 애빼시(애교 빼면 시체    야), 점메추해(점심메뉴 추천해 줘), 완내스(완전 내 스타일), 갈비(갈수록 비호감), 싫존주의(싫    어하는 것도 존중해 줘라), 쉼포족(쉼을 포기한사람), 일취월장(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이 장난    아니야), 맥세권(맥도날드 배달 가능한 지역), 확찐자(살이 확 쪄버린 사람) – 고대 시날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생겨난 언어의 혼잡은 오늘날 모든 언어혼잡의 시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    구 70억 인구에게는 70억개의 모국어가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가장 가까운 부부나 식구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통역이 없이는 말을    이해 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 가고 있습니다.   

 

 

 2.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강원국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21 – 저자 강원국은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김우중, 김대중, 노무현의 스피치 라이터로 시작하여 주로 대기업 회장들과 대통령들의 연설문을 쓰고 다듬으면서 연설과 말과 글쓰기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하고 방송도 많이 해왔습니다. 이 책은 언어학에 대한 학술적 이론 서적은 아니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 말에 대하여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여러가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 동안 <글 쓰기와 말>의 현장에서 실제로 일해 온 저자의 언어철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1) 말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어야한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다. 그 사람의 말 속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거이 다 나타난다.   

(2) 말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속성의 문제다.    

(3) 말은 듣는 사람의 것이지,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말은 하지 않을 때 까지만 내것이고,    

일단 말을 하고 나면 그것은 내것이 아니다.    

(4) 말은 말하는 사람의 삶이고, 생각이고, 사상이다.   

 (5) 말은 칼이다. 그러나 그 칼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다. 말로 흥한자는 반드시 말로 망한다.    

(6) 내 아버지는 70평생을 존대말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7)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꿔서 말하는 사람이 되어라.    

(8) 말은 인간의 일생을 따라 함께 자라난다.    

(9) 언어의 한계, 말의 한계, 어휘의 한계가 곧 내 인생의 한계다.    

(10) 독서와 말하는 것은 한 몸이다.    

(11) 말은 소통의 기본이다. 말을 안 하면 소통이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말은 소통을 가로막기도 한다.

말은 이해와 타협, 사랑과 존중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해, 갈등, 대결, 미움을 일으키기도한다.    

(12) 말은 잘하면 존경받지만 잘못하면 멸시를 받게 한다.    

(13) <말>은 느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된다. <마알>은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기에 말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게 되고,    말이 바뀌면 마음과 생각도 바뀐다.    

(14) 말은 그냥 하니까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말도 평생 배우고, 연습    하고, 연구해야한다.    

(15) <말 재주가 있다> 혹은 <언변이 뛰어나다>는 말은 좋은 의미라기 보다는 <진실하지 못하다> 든가 <꼼수와 잔재주가 많다>는 뜻을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16) 공자는 말했다. <눌언(訥言)이 진언(眞言)이다> 박식하고 청산유수처럼 달변이 아니라도,

진심을 담아서 말해야 한다. 진심을 담은 말에는 숨김이 없고, 꾸밈이 없고, 가식이 없다.

<체> 하거나 <척>하는 것은 모두 거짓과 위선이 숨어있다.    

 

 

3. <개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지음, 이윤옮김, 필로    소픽, 2016 – 이 책의 저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과 명예교수로 언어분    석학이 그의 전공분야 입니다. 전문적 언어철학자가 이런 타이틀의 책을 썻다는 것은 사람들    을 많이 당혹하게 합니다. 저자는 우리 시대 타락된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    서도 <언어의 타락>이 가장 심각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진리에 대    하여, 사랑의 이유, 평등은 없다 등)과 마찬가지로 매우 작은 미니북으로써 불과 96쪽에 불과    합니다.(텔레비젼 프로 중 ‘책읽어 주는 나의 서재’에서 아주대학의 인지심리학자 김경일교수 가 2021년 6월 12일에 이 책 ‘개소리에 대하여’ 방송한 것을 참고했습니다.) 이하에서 그 책    의 내용 중 일부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1) 문명사회란 오랫동안 진실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기반으로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진실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현상을 숱하게 보아 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개소리    란 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거짓말 중 또 하나의 기형이다.    (2) 개소리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로써 조리도 없고 당치도 않는 말을    이르는 비속어’이다.    (3) ‘허풍’(humbug)은 잘못된 진술, mispresentation 이다. 과대 광고나 허위 광고, 허위 홍보,    허위 정치적 연설 등은 개소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냥 양념 섞인 거짓말로    취급된다. 거짓말(lie)은 진실을 가리는 말이지만 그것이 거짓임이 증명되면, 스스로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떳떳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개소리(bullshit)는 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개소리는 나중에 거짓임이 드러나도 그냥 그것은 개소리였다고 하면서 지니가고 책임을 지    지 않으려고 한다. 개소리는 도덕적 책임이나 민사 및 형사상 소송이 불가능하다. 예컨데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I.S.는 오바마가 창설했다. 사기꾼 힐러리는 I.S.의 공동 창설자이    다. I.S.는 힐러리에게 MVP상을 줄 것이다> 전광훈이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자들,    이슬람, 그리고 차별금지법은 사탄이다>    (4) 개소리는 진실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처음부터 아무 관심이 없다. 사태의 진상이나 사실 여    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이 그냥 내밷는 말이다.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비슷한 말    로는 ‘헛소리’ ‘아무 말 잔치’ 같은 것들이 있다. 이는 마치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과    비슷하다. 세심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개가 아무 데나 갈겨 싼 똥하고 비슷하다. 그러    니 shit 이다. 사실, 사태, 진상, 참, fact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던지는 말이기    에 개소리를 하는 ‘개소리쟁이’(bullshitter)들은 자신이 던진 말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도    시드니 인문학교실 홍길복의 인문학강좌 (2022-35,36)    제36, 37강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언어철학 이야기 -    덕적 죄책감이나 책임감이 전혀 없다. 거짓말쟁이와 정직한 사람은 서로 반대되지만, 공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가 <진실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두 사람을    구분한다. 거짓말쟁이들은 남을 속이기 위해서 자기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에다 약간의 부분적 진실을 섞어서 말한다. 그러나    개소리쟁이들은 근본적으로 진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 개소리쟁이들은 자기가 개소리    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5)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드러내려고한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숨기려한다.    그러나 개소리쟁이들은 진실을 외면(disregard)하려고 한다. 그래서 개소리는 useless 하고,    insignificant 하고, nonsense 하다.    (6) 오늘날 개소리가 점점 더 확산되는 것은 우리가 회의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에서는 우리가 객관적 실제에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회의주의는    사태의 진상을 알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인한다.    (7) 진실에 대한 무지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에 대한 무관심이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    말이 아니라 개소리다.    (8) 이 책은 개소리가 위험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 개소리를 하는 이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실이나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개소리는 진지하거나 정    성을 들여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 보다 훨씬 더 쉽고 편리하게 한다. 셋째, 거    짓말은 그 말이 거짓임이 밝혀지면 비난을 받게 되지만 개소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체    로 관용을 베푼다.    (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개소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개소리에 대해    서 무감각하기도 하고 따지려고 하지 않으며 무덤덤 하거나 심지어는 당연시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개소리는 비난받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    (10) 개소리는 일종의 게임처럼 되어 가고 있다. 오징어게임과 같이 개소리도 언어게임이다. 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다.    ⚫ 나가는 말 –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구조주의, 분석철학, 언어철학과 이 후에 공부해 보려는 <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두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 현대철학들입니다. 이들은 철학적 질문의 제 1    주제, 즉 <인간이라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서 차츰 그 질문에 접근해 가는 방법론    에 집중하면서 철학하는 방법론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문학의 과제는    여전히 그냥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말하는 동물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글쓰는    시드니 인문학교실 홍길복의 인문학강좌 (2022-35,36)    제36, 37강 존재와 사건이 언어를 만드는가? 언어가 존재와 사건을 만드는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의 세계- 언어철학 이야기 -    존재로서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 Questions, Comments & Sharing. 두번에 걸쳐 나누고 싶은 화두 (1)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타락된 언어들> <오염된 말들>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디에서 왔는지    를 생각해 봅시다. (2)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대로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세계를 올    바로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도 함께 성장해 왔다고    보는지요? 아니면 별 변화가 없다고 보는지요? (3)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별로 잘    못하는 편인가요? 그 이유는 각각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 내가 하는 말에서 고치거나 키워 나    가야 할 부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 기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