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철학 이야기

[종교의 통섭] 종교, 인문으로 치료하다.

Narin Pusil 2022. 2. 6. 14:18




통섭(統攝,Consilience)
= 지식의 융합이 아니라,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는, 통섭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通涉)
사물에 널리 통하는 것.
서로 사귀어 내왕하는 것.


■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엮음
인물과사상사·1만4000원


▪︎‘통섭’의 오류를 밝히고 논쟁의 불을 댕기기 위해 필요한 글들을 한곳에 모았다.

인문학자들로 구성된 지은이들은

통섭이 지닌 과학 환원주의적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다.

▪︎통섭은 국내에서 융합이라는 뜻을 지닌 보편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 쓴 <컨실리언스> (consilience)를

최재천 교수가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을 빌려 ‘통섭’이라고 번역하면서 부터다.

 


▪︎지은이들은 윌슨의 통섭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물리적 법칙으로 단순화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지식의 대통합’이라 했지만

‘과학으로 모든 학문을 통치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원효의 화엄사상도 통합뿐 아니라 개별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윌슨의 통섭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강조한다.

▪︎경계 허물기가 유행하면서 통섭이 쓰이기 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경제의 핵심으로 꼽는 융합과 맞물려 더 많이 회자되고 있다.

통섭이 융합으로 오인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기획서지만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치진 않는다.

▪︎책의 앞부분을 1990년대 과학의 본질을 놓고

학자들이 토론을 벌였던 ‘과학 전쟁’의 도화선이 된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에 할애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서로 무관심한 국내 풍토에서

‘과학 전쟁’이 일어나기 쉽지 않지만 통섭으로 인해

발전적인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하는 엮은이의 바람이 읽힌다. (최유빈 기자)

 

통섭(에드워드 윌슨)

‘통섭(Consilience)’은 에드워드 윌슨이 

지식의 대통합 전망을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용어다. 

사실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영국의 과학철학자 

윌리엄 휴월이 처음 사용한 개념어로 

20세기에 들어와 학문의 분화가 뚜렷해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윌슨에 의해 21세기 지식혁명의 이정표로서 가치를 부여 받으며 부활한 특징을 보인다.

일찍이 휴월은 ‘귀납적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이라는 

자신의 저작에서 ‘Consilience’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 

라틴어로 ‘함께 넘나듦(jumping together)’이라는 뜻의 ‘Consiliere’에서 가져온 것으로, 

윌슨에 따르면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윌슨의 제자이자 ‘통섭’의 한국어판을 옮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윌슨과 휴월이 사용한 ‘Consilience’이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옮긴다. 

영어사전에서 찾기 힘든 단어를 

통일(統一) 통합(統合) 일치(一致) 합치(合致)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고심 끝에 국어사전에도 없는 ‘통섭(統攝)’이라는 

어려운 한자어로 번역한 데엔 스승의 이론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지가 자리한다.

최 교수가 쓴 ‘옮긴이 서문’에 따르면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의 ‘중문대사전’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의 ‘한화대사전’에서 살펴보면,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를 뜻한다. 

한편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사실 윌슨은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베리타스
 

 

 



■에드원드 윌슨의 <컨실리언스> (consilience)


《- '한국어판 서문'에서》

▪︎21세기의 학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양분되고

사회과학은 생물학과 인문학에 흡수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려는 인간 지성의 위대한 도전을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지식이 갖고 있는 본유의 통일성이다.

지식은 과연 본유의 통일성을 지니는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까 싶다.

나는 이것이 철학의 중심 논제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지식은 언제까지나 지금 현재 서양 문화가 인식하고 있는

세 갈래의 학문 분과들인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으로 나뉘어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영원히 각각의 진리 영역에만 예속되어 있을 것인가?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은 자연과학의 중요성과

그것의 사회과학과 인문학과의 통합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저 단순한 동반자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식 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통합 말이다.



●1장 '이오니아의 마법'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의 철학자 탈레스가 가졌던 세계는

질서정연하며 몇몇 자연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과학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이오니아의 마법’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이 서구 학문의 근본 정신으로 재조명한다.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에서는 ‘통섭’ 개념을 소개하며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난 통합된 학문이

파편화된 현대 학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한다.

3장 '계몽사상'에서는 계몽주의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지성들,

마르키 드 콩도르세,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의 삶과 학문을 살피고

그들이 사상이 현재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에 어떤 식으로 공헌하는지를 살핀다.

또한 계몽주의의 약화와 그에 따라 등장한 낭만주의,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계몽주의와 통섭 세계관의 “완벽한 상극인” 포스트모더니즘적

“몽매주의”의 대표자 자크 데리다를

“문명세계의 다른 곳에서 발전한 마음과 언어의 과학에 대해

마치 췌장의 위치도 모르는 심령치료사처럼 무지하다.”라고 비판한다.

4장 '자연과학'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을 추동해 온 힘”인

환원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에드워드 윌슨은 환원주의를 일종의 “강박증”, “환원적 과대망상증”으로 여기는

일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달리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를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높게 평가한다.

 

그는 환원주의를 기본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과학을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로 정의하며 그 과학의 정의를

진정한 의미에서 실행하고 있는 자연과학에서 지식의 대통합을 향한 기초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는

저자가 직접 연구한 개미의 의사소통, 신화와 꿈 등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기능하는 뱀에 대한 공포(혹은 혐오),

복잡계에 대한 연구 등의 예를 들어 가며

자연과학에서 인문?사회과학으로 들어가는 길,

인간 본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이 크레타 섬의 미로처럼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분자만 한 유전자 수준 미시 세계에서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를 다루는 거시 세계까지

통섭을 이뤄내는 생물학의 예를 들며 지적 미로를 빠져 나가게끔

도와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6장 '마음'에서는 인간 정신 과정의 물리적 실재를 연구하고 있는

뇌과학, 신경생리학, 인공 지능(AI)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며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인간 정신 연구에 통합적 과학 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에서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중요 성과들을 인용하며

유전자의 변화가 문화의 진보가 함께 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인간 및 영장류의 의사소통 연구, 문화의 기본 단위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유전자의 변화가 문화 발전을 자극하는 신체적 요소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발전한 문화가 다시 그러한 유전자의 변화를 조장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인류사를 발전시켜 온 진화 메커니즘임을 보여 준다.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에서는 7장의 논의를 발전시켜 ‘문화에 가장 널리 퍼진 형질들은 그것들을 있게끔 해 준 유전자들에게 진화적 이득을 안겨 준다.’라는 유전적 적응도 가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가족, 짝짓기, 양육, 사회적 지위, 사회적 계약, 근친상간 금기 등 인류학자에 의해 수집되기만 했을 뿐 원인이 구체적으로 탐구되지는 못했던 것들을 유전자?문화 공진화로 설명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9장 '사회과학'에서는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의 역사를 개괄하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연합 가능성을 모색한다. 윌슨은 이 장에서 분과 학문의 벽 안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 제분과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근거한 학문으로 사회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 그중 특히 생물학과의 연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10장 '예술과 그 해석'에서는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예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검토한다.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에 근거하여 예술에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조심스레 설명한다.

11장 '윤리와 종교'에서는 윤리의 근거를 초월론적 유신론 설명에 근거하지 않고 현대 생물학과 과학의 성과를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이 장에서 윌슨은 윤리의 기원이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기원에서 내려왔다는 초월론적 설명과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경험론적 설명을 대조하고, 종교가 진화심리학적 기원을 가진 부족주의(자신 부족의 번영을 최우선으로 하는)의 산물임을 논증한다.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인간의 지적 탐구가 통섭과 대통합을 이뤄 새로운 지적 혁명을 만들어 냈다고 했을 때 그것 속에서 “유황 냄새”가 나지 않는지, 오히려 인류의 터전인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한다. 생명 다양성을 파괴하는 환경 문제, 경제 양극화의 문제, 국제 관계의 악화 등을 검토하면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 인류만은, 우리 민족만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은, 우리 가족만은,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면제주의자적 관점을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