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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바트 어만'의 "Did Jesus Exist?"에 대한, '토마스 브로디'의 반박

Narin Pusil 2021. 12. 30. 07:03

바트 어만의 에 대한 토마스 브로디의 반박
자유로운 목사
2021. 5. 24. 00:23


원문 https://science-infuse.tistory.com/m/1205



소개글

본 글은 신약학자 토마스 L. 브로디(Thomas L. Brodie)의 책,

Beyond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의 부록에 실려 있는

Epilogue: Bart D. Ehrman's Did Jesus Exist

- The Historical Argument for Jesus of Nazareth(March 2012)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두 개의 긴 각주가 있지만 없어도 본문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므로 번역에서는 제외했다.



바트 어만의 2012년의 책, "Did Jesus Exist?"는

당시 예수의 실존에 대한 광범위한 문학적 질문을 불러일으키던

다양한 그룹에 대한 응답서였다. 해당 서적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1) 예수의 실존에 대한 증거. (2) 반대 논증들. (3) 예수는 누구였는가?

이 에필로그는 바트 어만의 연구의 핵심, 특히 (1)을 요약하고 그것에 대해 논박한다.

 

 


①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 요약

 

정경이든 비정경이든 복음서들은 모두 어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말하며,

비록 어느 것 하나가 다른 것 하나로부터(예를 들면 마가복음으로부터)

차용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너무 다르며,

각각은 또한 예수에 대한 독립된 증언이라 할 수 있는 너무도 다른 재료를 갖고 있다.

 

복음서들에 대한 검토는,

그것들이 여러 다양한 기록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는 소실되긴 했으나 어쩌면 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러한 상실된 자료들에는 Q, M, L뿐만 아니라

표적 자료, 담화 자료, 도마복음 자료 등이 있다.

이 많은 자료들은 복음서의 기록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예수를 역사적으로 말한다.

 

그것들의 독립성은 너무 강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복음서들을 하나의 연결된 자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예수가 존재했다는 견해는 다양한 독립 자료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그것들은 현재 살아남은 복음서가 생성되기도 전

이미 수십년 동안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회람되었던 것들이다."(82쪽)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된 자료들은 상당히 오랜 것이다.

"다수의 훌륭한 학자들은 Q를 50년대로 그 연대를 지정한다."(81쪽)

 

 

우리가 비정경 복음서들, 예를 들면 베드로복음이나 도마복음이

기록 자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절대적 확신을 갖지는 못하지만,

 

"두 경우에 있어서 몇몇 학자들은 격렬하게 논증을 했는데,

그들은...[최근 2006년의 연구에 의하면]...

도마복음의 핵심 내용은 50년대에 이전에 회람되던

어떤 하나의 복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강한...문학적...논증을 한다."(82)

 


이러한 다양한 기록 증언들에 대한 강조는 구전들에 놓여있다.

: "예수에 관한...구전들은 매우 초기부터 지중해 주요 도시 지역들에 널리 퍼져서 돌아다녔다."(86)

 

 

 

구전들에 대한 증거는 다음을 포괄한다.

-비평으로부터의 개정.

비록 실제로 "슈미트, 디벨리우스, 불트만과 같은

비평가들로부터의 구성에는 동의는 없다 할지라도...

그들의 접근의 이면에 놓인 가장 골격이 되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널리 공유된다.

즉 복음서들이 있기 전에...그리고 그것들이 자료로 기록되기 전에

예수에 관한 구전은 떠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예수에 관한 모든 기록 자료들은...

전적으로나 혹은 부분적으로 구전들에 기초한다."(85)


-구전들이 없었다면, "모든 기록 자료들이 바로

그 1세기 중반 및 말엽으로 부터 생겨난 것을 설명할 수 없다."(86)
-아람어의 흔적들, 특히 몇몇 복음서에 있는 그러한 것들은 아람어로 시작한

몇몇 구전의 배경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87~92)

 



이러한 구전들은 오래되었다.

"만약 학자들이 두 가지 예를 들어 Q나 도마복음의 핵심 내용들이

50년대로 연대를 책정하고, 그것들이 이미 오랫동안 퍼져있던

그러한 구전들이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이 맞다면,

이러한 전승들은 얼마나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예수가 실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즉 아마 29년이나 30년 정도. 예수가 실존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30년대나 40년대에 있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만약 기독교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바울과 같은 사람은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예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겠는가?(85)"

 



현재 우리가 가진 예수에 관한 모든 기록된 자료들의 기초가 되는

이러한 구전의 역할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예수가 실제로 살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우리의 조사에 주요한 함의를 갖는다."(85)

 



다른 신약 자료들(비바울 서신이나 바울 자신)도 복음서들이나 혹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도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충분히 많은 말을 한다.

따라서 그것들도 다른 독립된 구전으로부터 그것을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바울은 빈번하게 예수를 역사적으로 말하며,

예수의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친밀했던 제자들 중 두 사람과의 만남을 언급한다.

바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만난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이다(갈 1:18~20; 2:11~14).

바울도 가장 오랜 구전들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도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 자료들(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 1서)도 모두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복음서들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볼수는 없으므로,

궁극적으로 오랜 구전으로 이끌린다. 예를 들어 안디옥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그나티우스(110년 경)은 베드로와 바울등이 안디옥에서의 극적인 만남을 들었을 것이고,

가장 오랜 구전들에 속하는 독립된 정보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반문화적인 것이어서, 역사적 사건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제자들은 십자가가 처형당한 누군가를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살펴 볼 때, 증거들은 가장 오랜 전승들에

독립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모든 독립적인 자료들의 하나의 긴 노선을 보여주며,

서로 다른 길이지만 모두가 일치를 한다는 그 사실은 예수가 역사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증거는 너무도 확실하다.

 



②'반대 논증들' 요약


예수가 신화라고 주장하는 작가들은 예수와 신화들간의 유사성을 과장한다.

로버트 프라이스와 토마스 톰슨은 복음서들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패러프레이즈라고 하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미약하고 적절치 않은'(Weak and Irrelevant) 것으로 분류되어야만 한다.

 

구약의 프레임워크를 사용한다는 것이

곧 묘사되는 사건이 결코 일어났을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을 보면서

소설의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니 프랑스 혁명은 일어났을리가 없다고 말하는 꼴이다.

 



③ '예수의 생애' 요약


유대인 목수(테크톤)인 예수는 묵시적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에세네파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그들과 닮았고,

그는 새로운 종류의 하나님의 임박한 나라에 관하여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는 오해를 입었고,

그것은 어떤 점에서 로마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반박》

 

 

얼핏 보면 이 이론이 그럴싸해 보인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보는 것은 오래된 인식 방법이며,

<구전 → 수용 복음서 기록>이라는 세 단계의 그림은 지난 세기,

즉 첫 비평 이후 1960년대에 때로는 교회의 글들에서 발전된 그림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본질적인 약점이 있다.

구전에 귀속되는 핵심 역할에 상응하는 그러한 구전 모델은 없다는 것이고,

구전에 대한 최근의 우려도 언급하지 않는다(책 12장 참고).

Q나 도마복음 핵심과 같은 두 개의 가설 문서에 의존하여

50년대로 다리를 놓으려는 행위는 살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같다.

 

어만의 작품은 도마복음의 핵심의 연대를 50년대 이전으로 두려는

그러한 최근의 출판된 '강한 논증'을 언급하지만,

그 논증의 논리를 요약해주지는 않는다.

인용된 저자에게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논리를 추적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그 저자의 더 이른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한 시도는 필요치 않다.

구전은 신약의 책들을 설명하는데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예수에 관한 역사적 닮은 꼴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1970년부터 신약 및 그와 관련된 텍스트들에 대한 대안 설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신약 텍스트들이 구전에 의존하지 않고,

더 오래된 문학작품들(특히 더 오래된 경전)에 의존하여 설명하는 더 나은 길들을 인식하고 있다.

신약의 책들은 변화된 상황에 말을 거는 새로이 형성된 경전이다.

그것들은 또한 다른 것들도 재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자료가 무엇이건, 각각의 텍스트는 어떤 특색을 갖고서 탄생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독립적이라 할 수 있다.

복음서가 구약이나 혹은 어떤 다른 텍스트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그 어느 구전에 의존한다는 그러한 주장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심지어 검증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는 내용(눅 9:57~62)은

엘리야가 제자를 부르는 내용(왕상 19장)과 비교할만하다.

그 자료들은 단순히 프레임워크만이 아니라 후기의 텍스트들을 지배하는 주요 내용들도 지원한다.

 


구약, 특별히 헬라어 70인역은 새로운 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표현을 찾고 있다.

톰 라이트는(2005: 7) 최근 바울 연구를 두고 "현대 문학 연구로 인해

그 눈으로 새롭게 열린 세계 속에서 ...  바울에 관한 모든 면이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구약의 스토리라인들에 대해 검토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에 관한 것만큼이나 복음서에 관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만의 연구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양한 문서들의 문학적 속성을 식별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역사적 조사의 '규칙 1'(Rule One)을 깨트린다.

그의 연구는 1950년대에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면서 발전시킨 기준은 요약하지만,

문학적 의존성을 감지하는 1980년대 이후로 발전된 기준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프라이스와 톰슨을 적절하게 다룰 수도 없었고,

그들의 의견이 무엇이건, 그들의 작품들이 성서학의 새로운 영역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자각도 없다.

그러한 연구들은 신약의 많은 요소들을 대안적으로 해설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첫째, 간혹 이루어지는 아람어 사용은 archaism에 속하는 '문학적 기법'이며

아람어를 히브리어로 삽입하는 '성서 문학 전승'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에스라-느헤미야라거나 다니엘 등을 보라. Wesselius 2001, 특히 299~303).

둘째, 더 오랜 자료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것을 수중에 갖고 있다는

그러한 과정에 대한 언급(예를 들어 눅 1:1~4; 고전 11:2, 23; 15:1~5)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문학적 전승'을 전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J.N. Collins 2010).

 

 

셋째, 신약 텍스트들이 독립적이라는 의미는

각각이 고유한 자료들을 혼용하는 기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넷째, 엘리야-엘리사 내러티브는 복음서의 근본적인 문학적 모델을 제공하며

(Brown 1971; Winn 2010),

그 내용은 다른 텍스트들과 더불어 재형성되거나 엮여있다.

다섯째, 가설 복음서 자료들로 여겨지는 재료들, Q, M, L, 표적 자료 등과 같은 것은

현존하는 텍스트들의 재구성으로 서서히 인식되고 있다.

여섯째, 바울 서신들은 독자와 적대자들과 같은 요소들을 구성하며,

바울의 전기적인 텍스트들(예를 들면 갈 1~2장)은 신뢰할만한 역사가 아니라

그와 같은 '구성물'로, 비록 바울 스스로의 명백한 자기 주장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만난 그림은 역사로 소환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그나티우스의 예수에 관한 정보의 기원을 설명하는데에도 사용될 수 없다.

 


일곱째, 만약 이그나티우스가 예수에 관한 자신의 정보를

바울의 방문에 관한 보고들에서 얻지 못했다면,

그는 복음서들에 의존했을 확률이 높다.

어느 경우든지, 클레멘트(90년), 이그나티우스(110년), 파피아스(125년)가

직간접적으로 정경복음서로부터 들은 것이 없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무리수다(high-risk history).


십자가에 처형당한 메시아의 이미지는 실로 반문화적이지만,

어떻게 성서 저자들이 서로 다른 것에 반대하는 긴 내러티브를 설정하고

더 오래된 경전들읠 재구성했는지 살펴본다면, 고난과 하나님의 소망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구약/칠십인역 텍스트들(예를 들면 사 52:13~53:12. 참고 행 8:30~35; 눅 24:25~27)의

다양한 본문들을 새로이 종합해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성 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메시아에 관하여 특별히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과 고통, 소망과 절망, 메시아와 십자가라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의 결합일 뿐만 아니라,

그 대립이 로마의 십자가 처형으로 묘사되는 강렬한 이미지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용/적응(adaptation) 과정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누가가 나봇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스데반의 죽음을 묘사히기 위해 차용했을 때,

그는 옛 제도인 군주와 신하라는 그림을 1세기의 유대 제도인 회당과 산헤드린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누가가 또한 외국인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모범에 관한 이야기를 사용할 때도,

그는 시리아인이라는 국적을 로마인 (로마 백부장) 국적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하나님에 근거한 소망과 삶 속에서 불가피한 고통이라는

고대의 모순 내지는 역설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 고통은 반드시 동시대의 이미지인 로마의 십자가 처형으로 표현하는 것을 적절했다.

극적인 효과와 생생함(enargeia)를 추구했던 수사학의 세계라는 맥락에서

그것은 두 배로 적절했다(Walsh 1 96 1 : 1 88).

역사적 배경이라는 추가적인 문제는 다른 논의에 속한다.

 

 



결론

 


어만의 책은 잘못된 딜레마를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역사적 예수를 계속해서 주장하면 예수를 잃어버리거나,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잃는다고. 하지만 다른 길도 있다.

예수를 고통받는 인류의 가장 깊은 힘과 소망에 관하여

성경에 기초한 새로운 표현으로 재발견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어만의 책은 훌륭하다. 역사에 대한 잘못된 내용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존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도움이 되기도 하며,

또한 신앙과 종교의 본질에 관한 사안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가져오는데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