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누가 신약을 발행했는가? / 다비드 트로비슈

Narin Pusil 2021. 10. 18. 22:35

 

 


누가 신약을 발행했는가? / 다비드 트로비슈

강경수 옮김


“Who Published the New Testament?”

by David Trobisch

ㅡ다비드 트로비슈(David Trobisch) : 현재 뱅거 신학대학원(미국 메인 주 소재)에서 신약 언어와 문헌을 가르친다. 이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미주리 주립대학, 예일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다. “The First Edition of the New Testament”(2000), “Paul's Collection of Letters : Exploring the Origins”(1994) 등 몇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Free Inquiry” 2007년 12월/2008년 1월호에 실린 기고문) :

http://www.trobisch.com/david/CV/Publications/20071226%20FreeInquiry%20Who%20Published%20Christian%20Bible%20BW.pdf






2000년 가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는

“신약의 초판”(The First Edition of the New Testament)을 발행했는데,

이건 나의 독일어 박사논문 주제를 영어로 펴낸 판본이다.

그 책에서 나는, 신약이 언제 처음으로 발행되었는지 판정하고자 했다.

나는 사본 전승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으며 Alfred Loisy(1891), Theodor Zahn(1888~1892), Adolf von Harnack(1914),

Hans von Campenhausen(1968) 등의 고전적 연구들에서 끌어낸 결론들과도 상당히 달랐다.


ㅡ누가 신약을 발행했는가? / 다비드 트로비슈




신약의 초기 사본들은 27편의 저작이 완결되게 선택되어, 똑같은 순서로 배열된데다

일관된 제목이 달려 있다(예외는 극히 드물다)는 특징을 보인다.

사본들은 제본된 책자 형태로 발행되었고, 신성한 용어들을 기록하는 데 독특한 방식을 쓰는데,

이른바 “신성한-이름들”(nomina sacra)이라는 방식이다.

이런 특징들은, 신약이 수세기 동안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주의깊게 편집된, 간행물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신약은 아주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편집하여 발행한 것이다.

 

그 최초의 독자들이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그리고 타티아노스 등의 교부들이었으므로 ― 이들 모두는 2세기 말~3세기 초에 집필했다 ―

신약은 틀림없이 CE 180년 이전에 발행되었을 것이다.

 


내 저서가 처음 출간된 이후 10년 동안, 독일에서는 수많은 서평이 쏟아져 나왔고,

많은 동료들이 내 이론을 검증해왔다. 이들은 내 이론을 좋아하기도 했고 싫어하기도 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어느 누구도 나의 증거 평가나 결론에 담긴 심각한 오류를 지적해내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론이 시간의 검증을 견뎌냈다고 추정한 후,

신약2세기의 간행물로 해석하는 다음 발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나는 또한 신약에 위작(僞作)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하려 하는데,

이건 역사비평 학자들의 다수가 동의하는 추정이다.

위작이란, 진짜 저자에 관해 거짓말하는 권위있는 문서이다.

위작으로 널리 인정되는 신약 저작들은 티모테오 전서, 티모테오 후서, 티토서, 베드로 후서 등이다.

이들 편지는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도가 집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집필했다.

누가 집필했든 간에, 이들 편지의 진짜 저자에 관해 독자들을 속이려 한 것이다.

 


신약위작들을 포함한 2세기의 발간물이다’

라는 점을 당신이 흔쾌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이 글의 고려사항들은 당신에게 맞지 않으리라.

반면, 만약 당신이 ‘신약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발행했다’는 발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

누가 신약의 초판을 발행했는가?
“The First Edition of the New Testament”(2000),

ㅡ누가 신약의 초판을 발행했는가?



■위작 사례들



발간된 위작들의 전형적인 특색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례를 고려해보라.

하나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스’(CE 35~107년경)의 편지들이고,

다른 하나는 9세기의 “위(僞) 이시도레 교령집”(Pseudo-Isidorian Decretals)으로서

한때 권위를 누렸던 문서집이다.

ㅡIgnatius of Antioch :  Fresco of St. Ignatius from Hosios Loukas Monastery, Boeotia, Greece


이냐시오스의 편지들은 몇몇 다른 판본으로 현재 전해진다.

현존 사본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자면, 가장 흔한 판본은 13편의 편지를 묶었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6편이 위작이고 나머지 7편은 원래 편지들을 확장시켰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6편의 의심쩍은 편지들은, 원래 편지들을 확장시킨 바로 그 인물이 집필했다.

 


최근 Dieter Hagedorn의 작업을 통해, 그 창의적인 인물은

4세기의 아리안파 크리스천으로 욥기 주석서도 쓴 바 있는 율리아누스로 밝혀졌다.

율리아누스는 훨씬 더 방대한 위작인 “사도 헌장”(Apostolic Constitutions)의 편찬자이기도 하다.

“사도 헌장”에서는, 베드로로부터 교마 주교직을 세 번째로 이어받은 전설적인 계승자,

로마의 클레멘스가 사도들의 말을 기록한다. 사도들은 1인칭으로 말한다.

율리아누스는 십중팔구 시리아에서 작업했을 것이고, CE 350~380년에 발행했을 것이다.

 

ㅡ위(僞) 이시도레 교령집Pseudo-Isidorian Decretals

 


“위(僞) 이시도레 교령집”은

진짜 문서와 의심쩍은 자료를 뒤섞어, 천 개 이상의 발췌물을 담고 있다.

이들 교령은 CE 9세기에 프랑스 북동부의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처음 알려졌다.

이 전집의 기능은, 주교들이 교황의 관할하에 있으며

현지 교회회의나 세속 당국에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위(僞) 이시도레 교령집”은 니케아 공의회 이래

이런저런 교회회의와 공의회에서 내놓은 규범들 외에도 교황의 편지들, 이른바 교령들도 담고 있다.

 

교령들은 ‘로마의 클레멘스’가 썼다고 하는 편지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레고리오 2세까지 쭉 이어지는데, 이 교황이 CE 721년에 쓴 조언으로 끝을 맺는다.

편찬자는 자신을 ‘이시도레 메르카토르’라고 소개하는데,

순진한 독자들에게 그 저자가 유명한 중세 주교이자 영향력있는 학자

‘세비야의 이시도레’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진짜 저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위작들이 포함된 간행물의 장소, 시간 및 역사적 상황을

때로는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두 가지 사례를 선택했다.

 

이제 ‘네 복음서 책’(Four-Gospel-Book, 신약)의 출처와 저자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고려사항이 특히 관련 정보를 드러내는 데 유망하다 :

(1) 편집자가 독자들에게하는 말
(2) 전집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
(3) 위작들에 담긴 지리 정보

 



①편집자가 독자들에게 하는 말


연구 학자들이 일단 율리아누스의 욥기 주석과, “사도 헌장” 및

이냐시오스의 첨가된 편지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내자,

저자의 신학적 입장 및 편집자의 관심사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구조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

요한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독자들에게 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21:20~24)

이 문장에서, 편집자들은 자신들의 자료를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이런 일은 신약에서 드물지 않다.

상당한 ‘편집자의 말들’을 루카 복음서, 사도행전, 요한 묵시록 등의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책이라면 이런 식일 것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가 집필한 사본을 사용했는데,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곁에 있었던 바로 그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보고가 참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독자들에게 하는 말’은 은연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 “이 이야기를 다르게 들려주는 책들도 주변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기록을 입수했다고 생각한다.”

 

정경 복음서들의 독자들은 요한 복음서와 맞닥뜨리기 전에 세 복음서를 읽어봤거나,

최소한 세 복음서가 앞에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왜 일부 이야기가 요한 복음서에서 사뭇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끝에 달린 ‘편집자의 말’은, 독자들이 제4 복음서를

앞의 세 권에 대한 권위있는 주석으로 읽도록 유도한다.

즉, 독자들에게 사건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격자의 시각에서 집필된 주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저자의 목소리는 1인칭 복수 “우리는 알고 있다”로부터

1인칭 단수 “나는생각한다”로 바뀐다.

그리고 이 문장은 다만 한 저자와 한 사본만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복수로 “책들”을 언급한다.

요한 복음서의 독자는 이제 막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네 번째 기록을 다 읽은 참이다.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을 현대식으로 옮기자면 이런 식일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신 일 전부를 기록해 놓자면

세상의 모든 책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네 권의 책자로도 충분하다!”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문장은 또한 요한 복음서만 가리키지 않고,

복음서 전집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마 ‘네 복음서 책’의 발행자가 쓴 문장일 것이다.
이런 독해가 정확하다고 치면, 그 발행자에 관한 몇몇 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다.

 


(1) 그 발행자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1인칭 단수를 사용했다는 점은 ‘네 복음서 책’이 익명으로 발간되지 않았으며,

최초의 독자들이 그 발행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만약 이 발행자가 그 당시의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 이름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겠다.

(2) 저 마지막 문장을 누가 썼든 간에, 그는 요한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들에 대한 증언으로 정경에 추가하는 데 자신의 권위를 활용했다.

 


(3) 제4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들 간의 한 가지 주요 불일치점은,

예수가 죽는 날짜이다.

공관 복음서들에서는 예수가 죽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눈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유월절 직전의 오후에 숨을 거둔다.

2세기에 소아시아는 요한 전승을 따라,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전날에 기렸다

(이 날이 무슨 요일이든 간에).

반면에 로마는 예수의 죽음을 항상 금요일에 기렸다.

이로 말미암아 단식 준수에 차이점이 생겨나

2세기에 갈등을 빚어냈는데, 이른바 ‘부활절 논쟁’이다.

 

발행자는 공관 복음서들과 함께 요한 복음서를 출간함으로써,

스스로도 그런 불일치를 알고 있지만 양 입장을 용인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대부분의 위작들은 처음 사용된 장소 근처에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위작날짜, 장소, 의도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약의 다른 책자들과 달리, 사도행전은 전집 전체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루카 저작의 두 번째 권이므로, ‘네 복음서 책’에 대한 연결고리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 전반부에서 일반 서신들의 저자들, 즉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를 소개한다.

후반부에서는 바울, 즉 신약의 다른 서한집의 저자를 소개한다.

게다가,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를 바울과 함께 여행한 의사로,

또한 마르코를 베드로와 바울과 친한 인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정경 의식”(canon consciousness)은, 사도행전이 흔히 추정되는 연대보다 더 뒷날에 씌어졌음을 암시한다.

 

이 가설은, 사도행전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 CE 180년 무렵에야 나온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사도행전을 처음으로 인용하고 명확히 언급한 필자는 이레나이우스인데,

그는 “모든 이단에 반대하여”의 제3권에서 이단적 신학자 마르키온(110~160년경)을 논박하기 위해

사도행전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

마르키온파 교회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야고보 일파의 지도력에 반대했다.

마르키온파 경전은 한 가지 복음서만 담고 있었는데, 이것은 정경의 루카 복음서에 가까웠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 복음서에 덧붙여 바울의 편지 10편도 담고 있었지만, 히브리서와 목회서신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레나이우스는, 루카 복음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라면

마땅히 그 두 번째 권인 사도행전의 권위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도행전을 활용한다.

 


위작들은 으레 최초의 사용자들에 아주 가까운 인근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오늘날 우리가 읽는 형태로는, 십중팔구 초기의 가톨릭 교회가

마르키온파 교회에 대항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 전체에도 해당되는 통찰이다.

 

신약에 실린 여덟 저자를 누가 선택했든 간에,

그는 예루살렘 지도층에 못지않게 바울에게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바울의 편지들은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유다의 편지 모음과 균형을 이룬다.

바울(루카)의 복음서는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와 상쇄된다.

마르코는 베드로(베드로 전서 5:13) 및 바울(콜로새 4:10)과 가까운 인물로 그려지는데,

독자들에게 하나의 역할모델 구실을 하여, 독자들이 베드로와 바울 중에서 굳이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음을 권한다.

 

 

 

②위작들에 담긴 지리 정보


신약 해석자들의 대다수는 티모테오 전서, 티모테오 후서, 티토서, 베드로 후서를 위작으로 추정한다.

티모테오 전서 및 후서는 둘 다 에페소에 보낸 것이고,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 전서와 같은 수신인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임을 표방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베드로 후서 3:1]).

 

이들 수신인은 소아시아 전역에 걸쳐 거주한다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베드로 전서 1:1]).

 

티모테오 전서는 불명의 장소에서 집필되었지만,

티모테오 후서(1:17 참조) 및 베드로 후서(베드로 전서 5:13에 암시됨

:“바빌론에 있는 자매 교회”)는 둘 다 로마에서 씌어졌다.

그리고 티토서에 크레타가 언급된(1:5) 점은 신약 독자에게 사도행전과의 연결고리를 암시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크레타를 경유하여 로마로 여행하는 것이다(사도행전 27장).

이들 네 편의 위작들은 로마와 소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고대 시절에 편지 모음은 으레 수신인들의 서고로부터 취합되었다.

티모테오 후서가 바울의 증언으로 그려지고

베드로 후서가 베드로의 증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 둘 다 로마에서 씌어져 소아시아로 보내졌다 ―

이들 편지의 권위는 소아시아의 교회 지도층이 그 편지들이 진본임을 확인해주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이들 위작이 로마보다는 소아시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셈이다.





신약의 발행자



편집자가 복음서 전집의 독자들에게 한 말(요한 21:25), 사도행전에 정경 의식이 드러난다는 점, 그리고 신약의 위작된 편지들이 소아시아와 로마에서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2세기 중엽에

 

 


처음 사용한 사람들


“위(僞) 이시도레 교령집”은 CE 9세기 후반에 프랑스 북동부에서 처음 출현했다.

이 교령집은 ‘주교들이 오직 교황에게만 답변해야 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성직자들에 관한 재판에서신약을 발행했을 만한 인물의 몇몇 특징이 분명해진다.


(1) 그는 그 당시의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2) 그는 로마와 소아시아의 가톨릭 교인들한테 권위를 지녔다.
(3) 그는 요한 복음서 및 신약의 다른 요한 저작들(요한 1서, 2서, 3서 및 요한 묵시록)에 신빙성을 더해줄 만한 인물이었다.
(4) 그는 부활절 논쟁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5) 그는 마르키온파 교회에 반대했다.
(6) 그는 출판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Polycarp of Smyrna)야말로 이 모든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는 이냐시오스에게서 한 편지를 받았을 무렵인 CE 110년 이전부터 주교였고,

CE 155~167년 사이의 언제인가 순교했다.

그는 그 당시의 유명 인사였음이 분명하고(1번),

소아시아의 가톨릭 교인들에게 권위를 누렸다(2번).

그는 이레나이우스가 요한의 제자로 묘사해 놨으며,

그의 존중받는 지위는 요한 문헌의 간행에 신빙성을 더해주었을 것이다(3번).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는 부활절 논쟁에서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그는 로마 주교 아니케투스와 협의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부활절을 용인하기로 합의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네 복음서 책에 대한 편집자의 말’(요한 21:25)에 묘사된 입장과 합치한다(4번).

 

더욱이, 폴리카르포스는 마르키온을 면전에서 논박했다고 이레나이우스가 기록해 놨는데,

마르키온을 가리켜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5번).

 

마지막으로, 폴리카르포스는 출판 경험이 있다.

그는 이냐시오스의 편지들의 초판을 수집하여 배포했던 것이다(6번).

시간대는 아니케투스가 로마 주교로 서임된 CE 156~157년부터

폴리카르포스의 추정 순교일 중에서 가장 늦은 연대 CE 168년 사이에 설정된다.

나는 이상의 고려사항들을 다음과 같은 과감한 결론으로 뭉뚱그리려 한다

: 신약은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가 CE 156~168년에 발행했다.





보강 증거


괴테

1774년, 한 팸플릿이 독일에서 “신들, 영웅들, 빌란트 : 한 어릿광대극”

(Goetter, Helden und Wieland : Eine Farc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책자에서 저자는 당시의 아주 유명한 시인,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를 풍자했다.

이 책자는 익명으로 출판되었긴 하지만, 저자는 제목 페이지에다 충분한 실마리를 남겨놓았다.

제목 페이지는 진짜 저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식자되었는데,

W. Goethe가 각 행의 첫 글자(들)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GOETter
HElden und
Wieland


 


티모테오 후서 4:9~20의 추신

 


괴테의 제목 페이지와 마찬가지로, 티모테오 후서 4:9~20도

이 편지의 발행자 및 위작자의 이름들을 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대목에는 13명의 이름이 나온다

 

: 데마스, 크레스켄스, 티토, 루카, 마르코, 티키코스, 카르포스,

알렉산드로스, 프리스카, 아퀼라, 오네시포로스, 에라스토스, 트로피모스.

 

이들 가운데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신약의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다.

위작들은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진짜 재료의 정보를 종종 되풀이한다.

해석자들은 모름지기 추가 재료에, “추신”에 집중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이 경우에는 두 이름, 카르포스와 크레스켄스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카르포스는 폴리카르포스 주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쉽사리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크레스켄스는 누구인가?

폴리카르포스가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져 온다.

이 편지는, 폴리카르포스의 이냐시오스 서한집에 붙이는 소개문 구실을 한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기 필사자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그 이름을 밝힌다

 

: “나는 크레스켄스의 도움을 받아, 이상의 일들을 여러분에게 써 보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를 추천한 바 있으며, 또다시 여러분에게 그를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가운데서 흠없이 행동해왔으며,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렇게 행동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 논거는 입증력이 아주 강하지는 않겠지만, 보강 증거의 한 가지 멋진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