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강한 로마 제국이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더구나 또 다른 미스테리아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이며 유일한 참종교로 수용했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유대 국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로마가 결국에는 유대인 역사를 신성시하는 종교
---더구나 로마 총독이 살해했다는 유대인 선지자를 섬기는 종교--- 를
국교로 채택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에서는, 이교 신앙의 어둠에서 인간을 빛으로 이끈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이 가장 선호한 종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성공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2.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채택한 유일한 외래 미스테리아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17년 전인 304년에 힌 신인(神人)이 ‘제국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이 신인은 12월 25일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며, 신도들이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다.
이 신인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의 구원자 미트라스(Mithra)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적이자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미트라스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상 유대인의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는 AD 첫 세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절정에 이른 3세기에는 제국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흑해의 제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산맥까지, 사하라 사막의 접경 지대까지’---
미트라스를 섬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미트라스 신앙의 기념물을 살펴보면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까지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가 되었으며,
흔히 그런 노예가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트라스 신앙에서는 실제로 ‘나중에 된 자가 먼저’(마태복음 20:16) 되었다.
2세기 말에 코모두스황제(재위 18-192)도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황제의 입문은 로마 세계에서 엄청난 자극제가 되어 교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코모두스 이후의 여러 황제들은 미트라스 신앙을 제국의 종교로 삼으려고 했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미스테리아가 달랐고, 선호하는 정도도 달랐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가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고 했다.
점점 분열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 황제들은 ‘하나의 신앙’을 필요로 했다.
보편적인 종교, 곧 ‘가톨릭catholic’ 종교를 필요로 한 것이다(‘catholic은 ‘보편적’ 이라는 뜻).
황제들은 이러한 온갖 종교를 여러 시대에 걸쳐 제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3.
4세기 전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이상적인 후보였다.
민중들에게는 미스테리아 종교가 항상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미스테리아 종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자 이거나 철학자들이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하며 권위를 훼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골치 아픈 지성인들을 배제시킨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게다가 이미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이 종교는 권위를 지닌 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당국자들이 바라던 종교가 아닐 수 없었다. 신비주의자가 없는 종교,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없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의 종교,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321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황제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동기는 분명 영적인 게 아니라 정지적인 것이었지만,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개종이 신성한 계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전투 전야에는 그와 ‘모든 군대’가 자정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의 징표’를 보았는데,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도교인의 십자가가 아니라, 이교도의 상징인 키로(chi-rho)였다.
하늘에 나타난 그 상징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잠자리에 든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자정에 본 상징을 들고 있던 그리스도는 ‘적과의 교전 때 이것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 상징을 그려 넣었고,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의 말을 믿기로 한다면, ‘평화의 왕자’ 예수는 황제에게 마법 군대의 부적 하나를 건네 줌으로써
고대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제국을 손에 넣은 셈이다.
4.
키로chi-rho는 이교도의 파피루스 고문서에서 비롯한 것으로,
학자들은 예언적인 구절에 이것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키로가 그리스어로는 크레스톤Creston이며, ‘길조’를 뜻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키로는 그리스도를 가리기는 말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이교도에게는 길조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이중 의미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때에만 그리스도교를 강조했다.
그가 꿈에서 약속 받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을 때,
비문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로마 병사들이 이교도의 거룩한 수호자들로부터 신성한 도움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광장에 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육중한 석상 위에 자신의 두상을 얹어놓게 했고,
그의 모습을 헬리오스와 함께 동전에 새겨 넣게 했다.
그리고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이교도 세계의 최고 사제---라는 호칭을 여전히 사용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인 황제들도 382년까지 그런 호칭을 사용 했다.
5.
대부분의 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는 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골족과의 전쟁(306-312)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짓을 했다.
그가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을 수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을 때 이교도들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후에도 여전히 사악하고 무자비했다.
325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한 직후, 그는
자신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친아들 크리스푸스를 살해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받는 것을 고의로 연기했다.
계속 죄를 짓다가 마지막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내세를 보장 받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악명은 로마 교회조차도 차마 그를 성자로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로 만족해야 했다 : 저자주).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조금 더 먼저 교인이 된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의 계모 살해에 연루된 후 추방이 되었는데, 내친김에 성지 순례에 나섰다.
거기서 그녀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무덤이자 탄생지인 동굴을 발견했다.
골고다에서 예수와 두 도둑을 못 박은 십자가 3개도 함께 발견했다.
이것은 정말 별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가 못 박혔다는 날로부터 300년이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유대인이 수천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처럼 뜻밖에 발견한 성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곳은 오늘날까지도 성스러운 곳으로 기려지고 있다.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들은 제국의 도처에 보내졌고,
가톨릭 교회는 헬레나를 ‘진짜 십자가의 발견자, 성 헬레나’로 기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묘지로 여겨진 성소 부지에 거대한 공회당을 세웠는데,
이 공회당은 장차 로마 가톨릭 신앙의 발전소인 로마 교황청이 되었다.
6.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그저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로만 분열되어있는 게 아니라,
문자주의 공동체 자체도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작되자마자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교인들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황제의 무릎에 첩첩이 쌓아 올렸다고 한다!(황제는 그것을 모두 불태웠다 : 저자 주)
콘스탄티누스는 신학을 전혀 몰랐다. 사실 그는 이교에 가까운 연설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강제로 통합시켰다.
니케아에서는 하나의 신조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교회에서 그것을 되뇌고 있다.
신조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주교들은 황제가 직접 재판하여 범죄자로 몰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동의한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손님 자격으로 니케아에 초대 받아 황제즉위 20주년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주교들은 동의 서명을 한 후 후회를 했다. 훗날 어느 주교는 황제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우리는 그대가 두려워서 신성을 모독한 글에 서명함으로써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은 훨씬 더 무자비한 그리스도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다만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61-363)가 이교 신앙을 부흥시키려고 한 잠깐의 기간만이 예외였다.
율리아누스는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로 자처했는데, 미트라스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
그는 하나인 신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를 썼으며 겸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유대 그리스도교인 교회의 소망대로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이교 신앙이 잠깐 부흥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시 살아나서 훨씬 더 맹렬히 세력을 확대해 갔다.
7.
니케아 신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영구히 분열된 채 신약 논쟁으로 위장된 정지적 내부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권위적 분위기 속에서 패배자들은 파문 당했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다. 오늘의 ‘정통’이 내일의 ‘이단’ 일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말경에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는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썼다.
매년, 아니 매달 우리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하고 애매한 것을 묘사하는 새로운 신조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한 짓을 후회하고, 후회한자들을 옹호하며,
우리가 옹호했던 자들을 파문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남들의 교리를 저주하거나,
남들이 지닌 우리 자신의 교리를 저주하고,
서로 상대방의 교리를 갈가리 찢으며, 서로의 멸망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무렵 문자주의자 교인들조차도 로마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계획 완수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반그리스도’의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출처-antiyesu.org/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저, 승영조 역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년 출생, 제위 361 - 363년 6월 26일)
그는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쇠락하는 제국의 재부흥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고
이 때문에 후세의 기독교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평가되었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이 파괴한 그리스.로마 신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300년 전에 로마 제국이 파괴한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전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야기
https://namu.wiki/w/%EC%BD%98%EC%8A%A4%ED%83%84%ED%8B%B0%EB%88%84%EC%8A%A4%20%EC%99%95%EC%A1%B0
[1]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참극
AD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콘스탄티누스 일가에 대한 대학살극이 일어나는데,
할아버지 즉,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는
4명의 아들(삼촌)들이 있었는데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그중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부제의 칭호를 받은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후손들이 학살을 당한것이다.
이 대학살은 콘스탄티우스 2세 자신이 사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살해되지 않은 것은 당시 12살인 갈루스와 6살 이었던 율리아누스뿐이다.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사촌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자신의 확실한 권력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이로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은
거의 전부가 몰살을 당했는데 콘스틴티누스 왕가의 핏줄중에서 남은 사람은
딱 5명의 남자뿐이었다. 그 다섯사람은 콘스틴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와
율리아누스(당시 6살), 그리고 율리아누스의 사촌인 갈루스(당시 12살)였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에 의해 3등분 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 엄격한 아리우스 기독교 교육을 시키며 감시했다.
[2] 콘스탄티누스 제국의 분할
삼형제는 황제(augustus)가 되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국을 3분할했는데
(1)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 첫째 콘스탄티누스 2세
(2)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일리리쿰
- 셋째 콘스탄스
(3) 그리고 나머지 제국동부의 속주들 ...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지방,
그리스,아시아,이집트
- 둘째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했다.
[3] 콘스탄티누스 왕조. 삼형제의 영토와 종파에 대한 갈등
영토분쟁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스 (Flavius Julius Constans, 320년 - 350년)는
337년부터 350년까지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둘째부인 파우스타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다.
340년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영토를 요구하며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왔으나
막내 콘스탄스의 선봉 군대에게 패한 뒤 살해당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나이수스에 있었던 콘스탄스는 이 승리로 제국의 서쪽 지역을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341년 콘스탄스는프랑크족의 침입을 맞아 싸워서 갈리아를 방어하고 2년 후에는 브리타니아을 방문하기도 했다.
350년 휘하 장군인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스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는 피레네 산맥까지 도망갔으나 붙잡혀 무참히 살해당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잠시 황제가 되어 민족과 종교 갈등을 잘 다스려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351년 무르사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에 대패한후 갈리아로 도망쳤고
353년 결국 자살하였다.
종파갈등
다른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콘스탄스 역시 열렬한 니케아파 그리스도교도 였는데,
아리우스파인 형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것은 삼위일체를 신봉하고 반-아리우스주의자 동생 콘스탄스의 도움으로
아타나시우스는 풀어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돕기위해 공의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341년에는 이교적인 희생제를 금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4] 율리아누스의 성장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년 - 363년 6월 26일)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기개를 가진 철학자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361년부터 363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그는 최후의 이교도(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무너져가는 제국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때문에 후세의 기독교인으로 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를 아버지로 ,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번째 부인 바실리나를 어머니로 AD331년 비잔티움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고
그의 두번째부인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가 할머니가 된다.
처음에 율리아누스는 비사니아에서 외조모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7살에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아리우스주의자 유세비우스에게 교육을 받았고
마드니우스라는 고트족 출신 노예에게 길러졌는데
이 노예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정통하여 율리아누스에게 호메로스같은
그리스 고전을 많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5] 형제의 다툼과 율리아누스의 등장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동생 콘스탄스와 다투다가 죽었고 (23세)
이어 350년 콘스탄스도 마그넨티우스에게 죽었다.
350년 휘하 장군인 마그넨티우스가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는 피레네 산맥까지 도망갔으나 붙잡혀 무참히 살해당했다.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 대처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율리아누스의 형인 갈루스를 부제(Caesar)에 임명하고 동방을 통치하게 했다.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354년 부제 갈루스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해 버리고 혼자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다가오자 그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율리아누스를
밀라노로 불러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시키고 부제로 삼아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도록 했다.
처음 부제가 되어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임무는 제국을 침범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부제가 되었을때 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게르만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4차례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성공에 위기를 느낀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금지원을 거부하였다.
360년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야만족과 대처하고 있을때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메소포타미아를 침범해 아미다를 함락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의 병력을 차출해 동부 전선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율리아누스의 군대의 반감을 가져왔고
그의 군대는 율리아누스를 파리에서 황제(Augustus)로 추대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격노했다.
같은 해 6월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이제 두 황제의 부대사이에 내전이 불가피하게되었는데,
11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었다. 죽기 직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가 유일한 황제라는 유언을 남겼고 율리아누스는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아누스,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
[6] 율리아누스 치세
율리아누스는 집권과 동시에 콘스탄티우스의 치세동안의 악정을 단죄했다.
비대해진 황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모든 환관을 황궁에서 몰아내었다.
또한 황궁의 사치스러움을 제거하고 노예들과 경비병을 줄여서
황궁생활을 크게 간소화하고 그 비용을 줄였다.
그는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모범으로 삼아 철학인 황제로서 통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율리아누스와 종교
362년 2월 4일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이 포고령에서 모든 종교는 법앞에서 평등하며
모든 로마의 영토에서 로마 제국이 특정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로마가 가진 본래의 종교적 관용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학교에 관한 포고령에서 ... 기독교인 교사는
이교도적인 저작물(《일리아드》같은 비기독교 저술)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로서 기독교학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정적 타격을 주었다.
또한 관용에 관한 포고령 에서 비기독교 신전을 다시 열게 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한편,
교회의 분쟁으로 추방되었던 기독교사제, 주교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율리아누스의 시도는 이미 기독교로 기울어진 로마제국을 과거의 영광스러운
다신교전통으로 돌리는데 역부족이었고 기독교와 로마인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율리아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아폴로 신전이 불에 타는 일이 일어났다.
율리아누스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보고 안티옥키아의 가장 큰 교회를 폐쇄했다.
이러한 조치로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반발했고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렸다.
율리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였고
로마의 몰락의 원인이 관용없는 기독교와 그 제도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제국의 영향력을 이미 뛰어넘고 있었고
수많은 특권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제국의 힘을 좀먹고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이단의 논란으로 추방된 기독교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다시 짓게 하는등의 조치는
모두 기독교세력을 약화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철학자 율리아누스
초기에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심취하였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저술은 단편적으로 몇편이 전해져 내려온다.
* 〈미소포군〉(Misopogon) : 턱수염을 증오하는 자들
-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턱수염(그리스적인 외모를 빗댐)을 놀리는 주민들에게 맞서 저술함
* 〈갈릴레아인들에 반대하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
* 〈황제들〉: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를 비롯한 몇몇 로마황제들에 대한 우화적인 내용
이외에 그리스어로 쓰인 몇 편의 철학적 사변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난해한 저술이 있다.
전쟁과 죽음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번의 전투에서 승릭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다.
그러나 사산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퇴각의 행군중이던 6월 23일 사산 병력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히 찔렸다.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율리아누스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젊은 황제는 죽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황제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Vicisti, Galilaee"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번역하면 " 갈릴리 인이여, 당신이 이겼소! "라고 한다. (갈릴리인은 예수를 뜻함)
다시 기독교 제국으로 전락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의 사산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을 후임으로 기독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요비아누스의 짧은 치세에
기독교는 다시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었고, 라바룸은 다시 로마군단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종교적 관용 조치가 다시 폐기되었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역시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의 동생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 기독교적인 정책을 폐기되었고
로마는 다시 기독교의 제국으로 돌아갔다.
라바룸(라틴어: labarum)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그리스 문자로 쓴 것
(그리스어: ΧΡΙΣΤΟΣ 또는 그리스어: Χριστ??)의 처음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겹쳐놓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전날 꿈에
나타났다고 전해 내려온 문양
https://blog.daum.net/james_kang_2019/416
https://blog.daum.net/james_kang_2019/302
https://blog.daum.net/james_kang_2019/218
율리아누스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4956/1/phil_thought_v31_14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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