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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종교학의 아버지: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

Narin Pusil 2021. 8. 13. 23:07

종교학의 아버지: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
- 비교언어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ㅡ산스크리트어 학자이자 문헌학자로 베다 연구, 비교 철학, 비교 신화 및 비교 종교 분야의 선구자였습니다.


“오래 된 동전과도 같이 고대 종교는 수백 년이 지난 후 그 위의 녹을 털어내면

그것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순수함과 이전의 광채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나타나는 형상은 창조주, 즉 모든 인류의 아버지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 비문(碑文)을 읽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언어에서도 동일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계시될 수 있는 곳에서 드러나는,

즉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있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F. 막스 뮐러)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갑자기 종교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뮐러의 이야기를 한다 해놓고 독일 가곡의 한 소절을 읊조리는 까닭은?

혹시 이 노래와 뮐러 사이에 적잖은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 노래는 우리가 지금 추적하고자 하는 막스 뮐러라고 하는 언어학자와 무척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가곡의 노랫말을 쓴 이가 막스 뮐러의 아버지이기도 한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저명한 고전 문헌학자였고 또한 주옥같은 서정시를 발표한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의 많은 시들은 동시대 뛰어난 낭만파 작곡가인 슈베르트에 의해 아름다운 가곡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한번쯤은 접했음직한 독일 가곡들 중의 한 둘 이상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Die Schöne Müllerin), ‘겨울 나그네’(Die Winterreise) 등

이렇게 뛰어난 동시대의 두 예술가는 독일 가곡사에 길이 남겨질 노래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문에서 훗날 종교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는 한 학자가 나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프리이드리히 막스 뮐러이다.

 

 

 

 

뮐러는 1823년 12월 6일 독일 데싸우(Dessau)에서 출생하였다.

문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문화로부터 그의 창작에의 자양분을 제공받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아버지 뮐러의 깊은 관심과 애정은

<그리스 가곡> 전집을 펴내는 원동력이 될 정도였다.

 

뛰어난 예술가 옆에는 많은 동료들이 따르는 법.

아버지 뮐러 역시 자신의 집 거실에서 인근의 저명한 학자, 시인, 작곡가들과

자유로운 문화담론의 꽃을 피우는 것을 즐겨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별한 문화적 혜택을 아들 뮐러가 직접적으로 받았는지 장담하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 뮐러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뮐러가 세상을 뜬 것은 1827년 9월 30일, 당시 그의 나이 고작 33세였다.

그리고 아들 뮐러의 나이는 고작 4세.

아버지의 다양한 문학적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아들 뮐러 역시 너무도 어렸다.

 

하지만 재능은 유전되는가? 아들 뮐러는 아버지와 많은 세월을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서도, 또한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꽤 알려진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이 여전히 아들에게서도 흐르고 있었는가보다.

아버지가 요절한 후 뮐러는 곧바로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집에 수양아들로서 들어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후견인을 자청한 아버지의 친구 역시

인근 지역의 유력한 학인,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터라,

아마도 뮐러는 아버지의 친구 곁에서 아버지의 체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뮐러는 김나지움 교육까지 마치게 된다.

그 후 라이프치히로 옮겨가 그곳에서 문헌학을 전공하게 된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탓인가? 명석했던 뮐러는 1841년 그의 나이 18세에 이미

대학 인도어 강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뮐러의 뛰어난 언어능력은 계속적으로 그의 학문 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도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는 점차 인도의 다른 면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뮐러는 고대 인도의 정신이야 말로

인류의 본래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보고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즉 뮐러는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 속에는 신이 인간에게 주었음직한

본래적 계시가 손상 없이 남겨져 있다고 굳게 확신했던 것이다.

이후 그의 학문적 여정은 바로 이 인도의 신비를 캐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탄광을 찾아나서는 고독한 광부와도 같이

고대 인도라고 하는 거대한 산의 보고를 찾아 그의 전 생애를 투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고대 인도의 풍부한 영적 세계를 가급적 고스란히 체험하기 위해 고대 인도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점차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 정신문화의 전문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1843년에 뮐러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3권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학위를 마친 뮐러는 자신의 연구를 좀 더 탄탄하게 다지기 위해 베를린으로 대학을 옮긴다.

그곳에서 뮐러는 프란츠 보프(Franz Bopp)라는 학자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인도게르만 언어연구에 대한 학문적인 눈을 뜨게 된다.

계속해서 그곳 베를린에서 뮐러는 셸링과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대사상가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며

점점 더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그는 중대한 결심하나를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조국 독일을 떠나 이웃나라인 프랑스 파리로 자신의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었다.

그는 왜 파리로 이주해야만 했을까?

그만큼 파리에는 그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단 말인가? 바로 그랬다.

1845년 그가 파리로 향했을 때, 그곳에는 뷔르누프(Eugène Burnouf)라는 학자가

고대 인도의 경전인 <리그베다>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바로 뮐러가 원하던 강의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뮐러는 바야흐로 뷔르누프라는 자신의 고대 인도 여행에 있어서 결정적인 가이드를 만나게 된 셈이다.

뷔르누프의 강의에 큰 감동을 받은 뮐러는 <리그베다> 전체를 서구어로 번역하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그는 1846년, 1853년, 1856년 1862년에 각각 한권씩 총 4권의 <리그베다>의 독일어판을 펴내고 되고,

그의 이 결심은 계속 <동방성전>(The Sacred Books of the East)시리즈를 통해 이어가게 된다.

이 시리즈는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그리고 중국의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 31권까지가 인도의 경전이다.

 

 

 

뮐러는 이 거대한 번역 편찬사업을 1875년도부터 시작했는데,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도 여전히 계획했었던 세권의 책이 미처 출간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뮐러 사후에야 이 작업이 완결되었고, 마지막 책이기도 한 인덱스는

프라하의 인도학자인 윈터니츠(Moritz Winternitz)에 의해 출판되었다.

뮐러는 이 엄청난 번역 사업을 위해 다양한 언어학자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지만,

그 자신도 이 사업을 위해 베다 찬양 시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대승불교 경전과

그 밖의 다른 몇 개의 문헌들을 직접 번역하는 등 상당한 정도의 공과 정성을 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투철한 노력과 그것의 결실은

서구 사회에서의 학문적인 동양학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세우게 된다.

 

 


얼마나 뮐러가 이 사업에 몰두했고 전념했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뮐러는 자신의 이 원대한 번역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당시 그의 계획을 완수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서는 런던만한 데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이방세계에 대하여 많은 문헌과 사료들을 확보하고 있었던 런던에서

뮐러는 자신의 기나긴 여행의 끝장을 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결심과 다짐만으로 학문적인 작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야심찬 뮐러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지원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사나이 뮐러는 이러한 재정적인 고민을 그리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다.

당시 프로이센의 대사였던 분젠(Baron von Bunsen)의 도움으로

뮐러는, 동인도 회사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뮐러는 공적인 연구자금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후원까지 받을 수 있게 되어

말 그대로 학자들의 꿈인 아무 걱정 없이 연구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꿈같은 시기를 맛볼 수 있었다.

 

 

ㅡ기독교는 개종시키고, 진보하고, 공격적이며, 세상을 움켜 쥐려는 선교적 종교입니다. 선교가 없다면, 기독교는 죽음의 띠에 있습니다.


1848년 다시 뮐러는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50여년 이상을 살며 그의 마지막 시절을 보내게 된다.

옥스퍼드 시절의 뮐러는 본격적인 연구의 꽃을 피우며,

특히 비교 종교학, 비교 문헌학, 비교 신화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근대 학문들이 태동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유의미한 공헌을 남기게 된다.

대학 내에서도 그의 성공은 착실히 쌓여만 갔다.

1850년 그는 근대 유럽어를 위한 부교수에 임명된다. 1854년에는 정교수가 되고,

1857년에는 옥스퍼드로부터 명예학위를 수여받고,

그리고 올 소울즈 칼리지(All Souls College)에서는 그를 평생회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것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영국 땅에 살아야했던 뮐러는 적

잖은 어려움도 겪어야만 했다. 그중 그의 인생에 가장 쓰린 아픔으로 남게 되는 기억은 다음과 같다.

옥스퍼드 대학의 인도학의 설립자이기도 한 산스크리트어 전공 교수인 윌슨(Horace Hayman Wilson)이 사망하자

뮐러는 은근히 자신이 그 자리에 후임자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도 당연할 것이 이미 그는 <리그베다>를 번역했고 그 분야에서 상당한 정도의 업적을 쌓은 터라

그의 후임 자리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큰 무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자리는 뮐러가 아니라 또 다른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던

윌리암스(M. Monier-Williams)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뮐러는 동방의 종교 경전들을 번역하면서도 역시 자신의 조국 독일의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치는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시간을 내어 독일 정신세계의 중요한 책들을 영국에 소개하였다.

그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최초로 영역해냈다는 것이다.

1881년 뮐러는 칸트의 이 저명한 철학서를 영어로 번역한다.

많은 이들의 뮐러의 이 시도를 무모한 것이라 만류했지만, 뮐러는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뮐러에게 있어서 칸트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칸트의 물자체론으로부터 자신의 인식론적 방법틀을 빌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왕성한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뮐러는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

 

 


불변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뮐러의 사상과 학문적 업적을 추적하기 전에 짧게나마 그의 인생을 스케치해 보았다.

이것으로 뮐러가 보낸 전 생애의 세세한 모습이 모두를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살아왔던 삶의 발자취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학시절 막 학위를 마치고 교수로 임용된 선배 한분이 읊조리듯이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흘린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한국에는 제대로 된 학문적인 전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선배교수는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궤적부터 추적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우리들은 너무 화석화된 이념에만 몰두한다고 푸념 섞인 하소연을 학부생들을 붙잡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다.

 


“어느 사상이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드시 그 사상이 형성하게 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적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사상 공부는

정말 사상누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 화두를 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내 기억의 언저리에 생생하게

이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 선배 교수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반증이리라.

그 후 난 한 사상가의 이론이나 생각을 추적해 나갈 때면,

그보다 먼저 그가 살아온 삶의 자리와 흔적들을 추적하는 일을 선행시키곤 했다.

따라서 뮐러를 소개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삶의 과정을 먼저 소개했고

앞으로 다른 종교연구가들을 소개할 때도 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뮐러의 학문적 입장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뮐러가 고대 인도로부터 찾고 싶어 했던 것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뮐러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뮐러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대상 저 너머에 있는 ‘불변의 것’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불변의 것에 대한 경험과 인지가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이게 했다는 것이 뮐러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종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고대 인도의 종교사상이라고 뮐러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는 그는 끈질기게 고대 인도사상을 탐구하는 일에 최선을 경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고대의 인도사상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좀 더 철학화되고 사색적인

우파니샤드가 아닌 다신론적인 환경 하에 기술된 고대의 종교적 찬미시 리그베다에 그는 더 많은 집중을 기울인다.

 

뮐러의 관점을 따르자면, 리그베다에서 보이는 ‘자연종교’야 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종교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뮐러는 그후 수십년을 넘기는 세월 동안 고대인들의 심성 속에 숨어있는

‘종교의 기원’을 확인하고자 고대 동양의 경전들과 씨름하게 된다.

이것의 결정판이 앞서 언급한 <동방성전>(The Sacred Books of the East)이다.  

 


뮐러는 인간이 무엇을 알아가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을 인식하면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칸트의 인식과정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칸트 역시 결과로서 주어진 경험은

그 경험이 있도록 한 실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유한을 인식하지만 그 유한은 무한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Ding-an-sich)는 존재한다.

다만 인간의 유한한 감각기관으로는 물자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 인식의 영역은 단지 ‘현상계’로만 제한되어진다.

하지만 뮐러는 칸트의 선긋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보다 본질적인, 즉 사물의 뒤에서 불변하는 그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지각적 지식’(Aistheton)이다.

즉 뮐러는 이성이라고 하는 유한한 공간 안에서는 무한의 세계가 잡혀지지 않겠지만,

종교적 기능 안에서는 그것이 인식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인간은 종교적 세계 안에서 무한과 조우하고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뮐러는 우리가 유한한 것을 인식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그 배면의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 직접적인 대상물을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출발점’이라고 뮐러는 보았다.

 

 

ㅡMax Muller가 몇 년 전에 말한 것을 믿습니다. 즉, (그가 설명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한, (시대시대마다)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무한에 대한 인식 자체만으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뮐러는 거기에 인간이 지닌 도덕의식을 종교의 또 다른 요소로 첨가한다.

뮐러는 인간의 도덕의식이 무한, 즉 불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인식과 결합됨으로써

본격적인 종교가 탄생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뮐러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문장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이 폭풍이나 하늘 또는 해와 달 뒤에서 발견한

어떤 미지의 힘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거나,

또는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종교를 발판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뮐러는 무엇보다도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을 중시했다.

자연종교란 인류 전체가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온갖 발전된 형태의 종교들 역시 모두 이것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베다시대의 종교야 말로 이러한 본래적 자연종교의 모습을 자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뮐러의 이 같이 종교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려는 태도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특히 그리스도교에 속한 이들로부터 상대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지속적인 비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뮐러 자신은 종교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믿는 자의 신앙에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교 신앙인임을 감추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비교적인 연구 방법을 통하여 종교의 기원과 본질을 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다음과 같은 뮐러 자신의 언어는 이에 대한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비교적인 종교연구를 그리스도교를 낮추고

다른 종교들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높이기 위해 다른 모든 종교들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영받지 못하는 동맹꾼들이라고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문에서 당파적 놀이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종교라고 이해하고 있는 참다운 그리스도교는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이방인들의 종교들 안에 숨겨져 있는

진리의 보물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갈수록,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면 할수록

더욱더 높여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언어라는 창을 통해 바라 본 종교


뮐러는 평생 언어학자로 살았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배경은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언어학계에 접목되어 많은 효용성을 인정받고 있는 ‘비교’라는 방법을

종교에도 적용시켜 그가 찾고 싶은 본래의 종교,

즉 종교의 기원을 확인하는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뮐러가 1870년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행한 유명한 강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강연에서 그는 기존 언어학에서 나누는 어족의 구분에 따라

세계 종교들을 크게 세 개의 분류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즉, ①아리안족 계열과

②셈족계열의 종교가 있고,

또 세 번째로는

③우랄 알타이계 종교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리안족계열의 종교로는 베다의 브라만교와 아베스타의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삼장의 불교가 있다고 보았다.

셈족계열에는 구약의 유대교와 신약의 그리스도교, 그리고 꾸란의 이슬람교를 열거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랄 알타이계는 다시 남과 북으로 구분하였는데,

남(南)은 인도 실론섬에 사는 타밀족의 종교이고 북(北)으로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민족의 종교들이 속한다고 보았다.

지금 이런 식의 종교구분은 더 이상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뮐러의 이런 식의 종교 구분은 너무 언어학에 의존해서

종교를 파악하려는 무리한 시도라도 볼 수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연구태도를 두 개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비교신학’과 ‘이론신학’이다.

비교신학이란 종교의 역사적 결과물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론신학이란 종교들의 조건들에 대한 연구,

즉 종교들의 내적-외적 조건들에 대하여 분석하는 분야이다.

다시 말해 이론신학에서 하는 일이란 어떠한 믿음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분석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뮐러의 경우는 이 두 개의 종교연구방법들 중에서 비교신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 비교신학은 후에 비교 종교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언어학이라는 창을 통해 조망하고자 했던 뮐러식의 종교읽기는

역사의 현장 속에 있는 구체적인 종교라기보다는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단수로서의 종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되물어왔다.

결국 뮐러에게 있어서 종교란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명칭들과 변화하는 형식들 가운데에서 불변의 것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정신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감성과 오성으로부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성상 감성과 오성과 날카롭게 대립해 있기도 하다.

만약 인간에게 그러한 장치와 능력, 그러한 소질과 본능이 없었다면

가장 낮은 수준의 서물주의나 우상숭배 역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검증적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이 새로운 학문의 뜰 안까지는 진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영향과 그림자

뮐러는 자연종교의 중요성과 또 종교연구에 있어서

‘비교연구’의 효용성을 주장하면서 다양한 분과학문에 적잖은 영향을 전달한다.

우선 그의 영향은 자연신화 학파를 넘어 민속학, 인류학 그리고 종교사회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선 민속학의 분야에서 뮐러의 종교에 대한 개념은

에반스-프리챠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프리챠드 자신은 뮐러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뮐러는 그리스, 인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의 모습에서 인격화된 자연의 힘을 보고 있었다.

즉 자연종교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은 자연의 힘에 대한 인간 인식의 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힘들과 스스로를 관련지을 때 우선적으로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가 촉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뮐러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뮐러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란? 

당연히 언어적이고 문화적이다.

따라서 그는 아무런 갈등 없이 종교를 언어의 구분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였다.

 

프리챠드는 이런 식의 뮐러의 종교개념은 지극히 구성적인 것이라 보았다.

즉 “이름(nomina)이 신성(numina)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신성을, 다시 말해 종교를 추적한다는 것은

신성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매달리기 보다는,

치밀한 문헌학적이고 어원적인 연구를 통해

신성을 지칭하는 명칭들의 본래적 의미를 재구성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뮐러의 신성에 대한 자세는 지속적으로 민속학과 인류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뮐러의 영향은 종교사회학 분야에도 미치게 된다.

바로 초창기 종교사회학자인 뒤르켕이 뮐러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 뮐러의 종교학적 개념들은 그 분야에서조차 활발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의 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기원에 따라 종교를 구분한 것 등은 그가 아직은 제대로 된 종교학자로 자리 잡기에는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학문적 영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신론(單神論, Henotheism)이란 용어는

아직도 살아남아 그가 종교학이라는 근대 학문의 설립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객관적이고도 검증적인 종교연구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뮐러는 종교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뮐러는 그의 생애 내내 모든 종교들에 대한 공평하고도 과학적인 비교방법에 기초한 종교학의 도래를 기대했고

그러한 학문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기대는 괴테로부터 뮐러 자신이 직접 인용한

바로 다음과 같은 격언에 집중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를 알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On religions: He who knows one, knows none.


[기독교 사상 2005년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