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BC 8세기(BC800~701) Middle East 세계, 그리고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관점

Narin Pusil 2021. 6. 2. 12:39

BC 8세기(BC800~701) Middle East 세계

그리고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관점 

작성자 : 제임스강 Y1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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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 가면서
[2] 앗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배경
[3] 선지자란 무엇인가?
[4]  B.C 8세기 앗수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던 선지자들 
[5]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6]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
[7] 나가면서 : 결론

 

 

기원전 8 세기(BC 800 ~ 701)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문명에게 큰 변화의 시기입니다.

Abu Simbel Temple of Ramesses II

[1] 들어 가면서



■ 주변상황

기원전 8 세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문명에게 큰 변화의시기입니다. 

리비아 출신의 파라오들이 다스리던 제3중간기의 23, 24왕조는 기원전 9세기 초부터 하이집트의 22왕조로부터 사실상 독립되어, 레온토폴리스를 비롯한 나일강 하류 삼각지의 중부에서부터 테베를 비롯한 상이집트 지역을 100년가량 다스렸다. 쿠시왕국(수단지역, 에티오피아 왕국 전신 ~ AD350)의 누비아 인들의 25 왕조 통치로 이어집니다.

 

신 아시리아 제국은 이스라엘 왕국과 인근 국가를 정복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해상 패권에 있어 페니키아 보다 우위에 있던 그리스는 지중해와 흑해의 다른 지역을 식민지화합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설립되었으며 에트루리아 문명은 이탈리아에서 확장되었습니다. 기원전 8 세기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776 년에 최초의 올림피아드가 시작되고 기원전 750 년에서 650 년 사이에 호머의 서사시가있는 고전 고대의 시작으로 간주됩니다.

중국은 주왕조 춘추시대였고, 철기 시대 인도는 후기 베다 시대로 접어 듭니다. 베다 의식은 브라마나 주석서의 많은 사제 학교에 주석이 달려 있으며, 최초의 우파니샤드는 베단타 철학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기원전 720년대


            BC 728 년 : 쿠시왕국의 피예(Piye)왕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멤피스를 정복하고 
                나일강 삼각주의 통치자들의 항복을 받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25 번째 왕조를 세웠습니다.


            BC 727 년 : 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합니다.
            BC 724 년 : 아시리아 인들은 4 년 동안 티레(Tyre)를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BC 722 년 : 중국 역사의 봄과 가을 기간은 저우 왕조의 저우 핑 왕이 이름으로 만 통치하면서 시작됩니다.
              : 아시리아 왕 사르곤 2 세가 이스라엘을 정복 함.
            BC 720 년 : 아시리아의 티레 포위, 종식.

 

■내부상황

BC 8세기 팔레스타인 땅, 그곳에서 격렬한 어조로 특히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심판(구원)예언을 선포하게 된 선지자들 .... 당대의 세계질서 및 두 왕국의 시대적 여건 속에서 솔로몬 시대 이후로 사회적으로 경제배분의 불공평에 따른  정의, 자비, 신의는 물론 사회적 엘리트들도 사라진 나라의 백성들에게 궁휼함이 없는 정치가, 왕조의 종말을 맞이 할때까지 진행된 정황과 그 불공정한 사회를 해소시키기 위한 선지자들의 활약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주변 강대국과 결혼동맹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다윗왕조가 들어서고 그의 아들 솔로몬 사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두동당 나고, 북쪽은 7번 쿠데타를 통해 19명이 번갈아 왕권을 차지하다 BC 722년에 앗시리아에 먼저 멸망 당했고, 남쪽은 다윗 혈통으로 20명의 왕이 세워졌으나 바빌론에게 BC 587년에 멸망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중 북쪽의 19명의 왕 모두가 하나같이 시내산 언약을 어기는 정치로 악평을 했으나, 남쪽의 왕들 중에는 가끔씩 선지자의 예언에 따르는 그래서 최선(最善)의 왕까지 등장했읍니다. 바이블 기록이 북이스라엘 망한지 대략 160년후에 멸망한 그리고 바빌론의 학문과 예술, 역사등을 공부한 남유다 학사(역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먼저 망한 북 이스라엘(사마리아)에 대해 아마도 좋지않은 기록을 남겼으리라 보여집니다.



[2] 앗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배경


BC 10세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해상왕국 페니키아, 이집트등과의 결혼동맹으로 주변국들이 감히 다윗왕국을 넘보지 못하고 있을 때 북방은 바빌론, 앗시리아등의 여러 도시국가들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  BC 9세기에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제국의 면모를 갖춘 앗시리아의 살만아셀3세(BC 855-824)는 수리아, 다메섹과 연합한 북 이스라엘의 아합의 군대를 격퇴하고 조공을 받았다. 앗시리아 내부문제로 잠시 멈추었으나 다시 BC 734–732년에 북 이스라엘을 침공한 티글랏 빌레셋 3세(불: BC 745-727)는 아라랏과 수리아의 동맹군을 물리치고 북수리아, 블레셋, 다메섹등을 병합하고 북방을 통일하였다. 그후 다시 살만네셀 5세(BC 726-722)는 반기를 든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사마리아 성을 BC 724년부터 3년간 포위하고 있을 때 왕위를 찬탈한 사르곤2세가 BC 722년 분지에 우뚝선 포위된 철옹의 사마리아성을 공성전으로 파괴하고 함락시켜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흡사 ZEUS의 번개(아스트라페 αστραπή/여성형, 케라우노스κεραυνός/남성형)를 연상시킨다. 

      [3] 선지자란 무엇인가?

 

선지자는 신성한 존재와 접촉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 존재를 대신하여 말하며 초자연적 근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 나 가르침을 전달함으로써 일반인은 알지도 알 수도 없는 신성한 존재와 사람간의 중개자 역할을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예언이라고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선지자(예언자)는 당대의 작가적 상상력을 지닌 시대적 인물로 본다.


1) 신과의 계약, 

즉 율법의 시대에서 분열왕국에 들어와 본격적인 선지자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선지자"란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신의 뜻을 사람에게 해석하는 신의 대변인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구약에는 출애굽기7:1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대변하여 말하는자’ 라는 선지자를 일컫는 용어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 (왕상17:18,24),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왕하 4:9)이나,  "선지자"(왕상 13:11)나, "신에 감동하는 자"(호 9:7)나,  "선견자"(삼상 9:9-11; '지금 선지자라 하는자를 예전엔 선견자라 했다') 등이 있다.  "선견자"란 말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자를 암시한다. 

신명기 18장에 이스라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대하고 있고, 그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첫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지자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 '나비(nƗbî')')은  분명 "부르다"란 뜻의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셈족게열의  아카드어 (lišānum akkadītum)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nƗbî') 수동태로 쓰여질 때는 "부름 받은 사람"이란 뜻이 되고 능동태로 쓰여질 때는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다.

 

2) 그렇다고 선지자라 불리웠던 사람 모두가 위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니었다. 이믈라의 아들 선지자 '미가'같은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닥치는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왕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던 또 다른 선지자의 무리들에 정면으로 맞섰다 (왕상 22:1-29; 대하 18:2-27). 이 이야기에서 '미가'가 진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략 400명에 이르는 다른 선지자의 무리들은 거짓을 말했다고 보아야 한다. 곧 선지자의 무리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로만 예언(先覺)의 진실이 꼭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3)  BC 8세기, 그리스에서는 BC 776년에 첫 번째 올림픽이 열렸고 훗날의 알렉산더 대왕이 즐겨 읽었다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태동되던 시기다. 이시기 중반에 이스라엘 예언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 현상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게 된 앗수르 제국의 부상과 동시에 나타났다. 그것은 최초로 선지자의 메시지가 책으로 보존되게 된 것이다 (ex.대선지서+소선지서).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초기 선지자들과 분열왕국 시대의 선지자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문서 예언자’, ‘고전적 선지자’, ‘정경적인 예언자’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선지자들은 더 이상 특정 왕이나 그 밖의 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만 선포하지 않았다. 대신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를 상대로 선포하였다. 이 점에서도 그들은 초기 선지자들과 구별된다. 


4) 그들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그들이 왕이건, 귀족이건, 제사장이건, 다른 선지자이건, 일반 백성이건 간에 하나님께서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위협적인 예언을 선포하였다. 초기에 등장했던 선지자들처럼 그들도 왕조를 비난하고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초기 선지자들 처럼 왕조에 맞서는 어떤 정치적인 행동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때때로 왕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호 1:4; 7:3-7). 일부 선지자들은 둘 중 하나나 두 왕국 모두가 멸망할 것을 선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기도 하였다. 


5)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선지자)의 존재양식은 야훼의 백성이 권력의 부당한 인권유린으로 야기된 민중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야훼로부터 소명을 받아 민중을 지도하며 야훼와 민중사이의 종교적 관계를 수립하며 민중에게 야훼의 법을 부여함과 동시에 민중 사이의 분쟁을 조정을 수행하는 인물들이었다.  즉, 지도자들과 시민들에게 한 가지 중심되는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보호했으며,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특권에는 책임이 따랐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야 하였다.  

그러던 선지자의 정의가 다윗왕국을 지나 분열왕국에 들어 오면서 바뀌게 되었다.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윌터 브르그만은 “솔로몬 이후 종교 또한 그들의 체제안에 굳어 지면서 통제되어 생동적에서 정적인 종교로 확립되었다. 즉, 하나님은 더 이상 모세시절의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늘 ‘대기상태’로 존재하면서 더구나 왕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하면서 “풍요로운 경제는 계급화된 사회에서 하충민의 수고를 대가로 했다. 그러나 풍요는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불공평하게 분배 되었고 그런 체제는 너무 굳건하여 의로움과 궁휼의 정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민중보다는 왕권과 지배층의 잘못에 대한 질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6) 선지자들이 지적한 문제는 여러 가지이다. 예배, 사회정의, 말과 행동의 진실,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선지자들이 선포하였던 특별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던 주된 관심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내산에서 모세와 함께 맺었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라고 촉구하는데 있었다. 그와같이 자신을 부르고 계시한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지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메시지를 선포한 구약 선지자들의 정체성(출신,사역지역과 내역,선포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시리아 북쪽으로 끌려간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  ▶바빌론으로 끌려간 남유다 사람들



[4]  B.C 8세기 앗수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던 선지자들:  


북 이스라엘의 요아스-여로보암2세-스가랴왕때 요나와 유다출신의 아모스(BC 750년경)와 호세아(BC 740년경) 그리고 남 유대의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때 예루살렘의 이사야(BC 742-689)와 예루살렘 근처 모레셋의 미가(BC 715년경). 그들 중에서 요나외 4명은 그 활동 시기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언약적이고 우주적인 죄를 당시 왕들에게 묻는다.   요나(BC 760년경)는 주로 8세기 전반에 사역했지만, 나머지 예언자들은 모두 주전 760년 이후에 사역했으며, 특별히 호세아와 이사야와 미가는 BC 740년 이후에 활동했다. 이들 4명의 예언자들 중에서 2명은 예루살렘을 향해 예언했고, 2명은 사마리아를 향해 예언했다. 이들은 또한 주전 8세기 중엽 및 후기에 활동했다.



1. 북 이스라엘, 아모스와 호세아


1)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를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귀족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에 보물을 쌓고 자기의 쾌락과 번영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해 사회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쳤으며, 경제적으로 연약한 자들은 압제를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셨다. 


2) BC 767년(웃시야가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해)과 735년(여로보암이 죽은 해) 사이에 활동했던 두 선지자,  야훼와의 언약이 깨어졌으니 신명기적 전승을 지키기 위해서도 모세에게로 되돌아가라 외쳤던 호세아는  BC 715년까지 그의 사역은 계속되었다. 마틴루터킹 2세가 인용했고 몽고메리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적혀있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5:24)라고 외친 아모스 스스로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암 1:1아모스 9:7에서 출애급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들인 시리아와 블레셋을 위해서도 수많은 출애급을 행하실 것이라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배타주의’는 멸시됨을 강하게 선포했다(Brueggemann 1998). 


3)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세에 의해 확립되고 엘리야에 의해 제정된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이 두 선지자에 의해 북쪽은 사회적 정의가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된다. 당시에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들은 사회 정의를 요구 하였지만,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회 정치 구조에 만족하고 있었다. 

4) 신흥 강대국 앗시리아는 아람을 점령했다. 그리고 여로보암 2세는 앗시리아의 정책에 순응해 가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앗시리아와 아람, 그리고 이집트와 번갈아 가면서 동맹을 맺었다. 이때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러한 여로보암 2세의 현실 정치를 비판했다.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패역한 나라가 되었는지를 지적하였다. 


5) 그럼에도 지배층들과 그들처럼 처신하는 백성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수없이 연단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교와 완악함을 계속적으로 꾸짖고,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영하는 현실로 인해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2. 남유다, 

이사야와 미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유다에도 이사야와 미가라는 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 

1) 남유다 왕실과 중요한 관계를 가졌던 예루살렘 고위층으로 사회 중심인물이었던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등이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왕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달리 유다만을 위해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웃시샤 왕이 죽던 해인 BC 740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전승되어오던 메시아 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왕으로 종으로 기름부은 승리자로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을 했던 이사야 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때는 앗시리아 제국이 내부사정으로 잠잠히 있던 기간을 끝내고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BC 745~727 재위)의 뛰어난 지도력을 앞세워 서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던 때와 대략 일치한다. 예언자들은 당시의 사건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전승에 의존했으며 아모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고 아모스처럼 그 징조들을 읽었던 것 같다. 

 

ZEUS 번개 (아스트라페αστραπή /여성형, 케라우노스κεραυνός /남성형) 


3) 이사야는 앗시리아가 하느님의 진노의 도구라는 사실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나의 분노의 지팡이요, 나의 징벌의 몽둥이였던 너 앗시리아, 배신한 민족을 치라고 너희를 보냈고……"(10:5~6).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애굽의 멸망을 예언하였지만 애굽이라는 강대국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보다 컸기 때문에 남유다는 애굽의 멸망을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그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사 37:38), 이 일은 BC 681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기간은 약 60년 정도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매우 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는 야훼의 심판과 언약백성으로서의 다시 예루살렘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재건을 선포하는데 야훼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을 동시에 선포하는 그의 이중적 전승은 세계안에서 체험된 역사적 사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4) 연약한자들을 착취해서 공동체 내의 경제적 공의에 대한 야훼의 의지를 위반하는 토지 소유자들, 즉 경제적 폭력을 할 수 있었던 유리한 위치에 있던 자들에게 죄에대한 무서운 위협을 그들에게 선포(6:9-12)했던  미가는 남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때에 활동을 했다. 그는 이사야가 사역을 시작한 얼마 후에 사역을 시작해서, 이사야가 사역을 마치기 이전에 마쳤다. 요담의 통치는 BC 731년에 끝났고, 히스기야는 BC 715년에 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는 이 기간 중에 활동한 셈이 된다. 

5) 이사야와 미가 역시 북 이스라엘의 권력과 자만, 그리고 그들의 실용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멸망을 하게 되자, 그들은 남 유다에도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사야와 미가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멸망의 전조가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니느웨의 요나



3. 유일하고 독특하게 설화형식으로 기록을 남긴 요나는 자신이 예언했던 때를 말하지 않고 있다

 

※아미때(아밋대/아미타이)의 아들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하였다는 예언자. 또한 그 이름을 제목으로 한 구약성경 중의 한 권이다. 다만 이 예언자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끝까지 객기를 부리는 것이 이 책의 키포인트. 요나는 쿠란에도 '유누스'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이슬람에서도 알라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권 이름 중에 남자 이름 유누스와 여자 이름 유니스가 여기서 유래된 이름.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위해 예언하지 않고, 이방 나라인 앗수르의 니느웨 성을 향해 예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설화의 인물은 이스라엘 열왕기의 역사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요나서가 예언적으로 평가 될 수 있는 것은 기록 자체가 요나라는 인물이 아니라 설화 전달자를 통하여 ‘예언의 멧세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요나서가 기록된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연도는 아모스가 사역을 하던 시기인 BC 760년이다. 열왕기하 14:2절을 보면 요나가 여로보암 2세에게 예언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는 8세기 전반기였다. 또한 그가 니느웨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였음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여로보암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홍해 바다까지 회복될 것을 그가 예언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5]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사야와 미가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히스기야의 통치아래 예루살렘의 정치가 부침하는 기간(BC 729-686년)에 사역을 했다. 두 선지자 모두 유다와 그 지도자들에게 현실정책이 주는 만족을 거부하고, 야훼가 바라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행하도록 권고했다. 

그러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낙관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활태도를 백성들에게 장려하였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다와 함께 행하신다는 약속을 환영하면서 이사야와 미가의 신탁, 즉 여호와께 복종을 요구하는 선지자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에 유익한 것만을 선택하여 들었다. 

또한 왕국과 백성들은 왕궁과 성전이 결코 침해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과 예루살렘의 불가침성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 다윗언약의 영원성(:시온신학)에 사로잡혀 있었고 결국 BC 586년에 신바빌론 느부갓네살왕에 멸망당한다.




[6]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


1. 솔로몬시대 이후 국가의 부가 바르게 배분되지 않고 국가의 부(富)가 욕망의 포로가 된 지배 계층들에게 독점됨에 따라 사회계층의 양극화 현상이 시작되었고, 이미 북의 이스라엘은 BC 9세기에 도시화 현상과 더불어 이집트-가나안 관료제를 도입하여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강화 하였다. 그리하여 BC8세기에는 도시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권력과 부의 집중은 소수 정치엘리트들에게 독점되고 농민들의 막대한 토지가 그들의 사유지가 되어 농민들 역시 그들의 먹이사슬 속으로 들어가 채무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평등주의와 지파간의 형제애를 상실하고 “가나안-페니키아적” 사회원리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목도한  BC 8세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 지배층들을 깨우쳐 야훼의 주권과 법과 공의에 입각한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힘쓴 사람들이었다. 지배계급들의 착취행위에 통분했던 선지자들, 그것은 시내산언약의 야훼앞에서 행하고 있는 범죄행위라고 선포하고 위협적이고 심판적으로 고발하였던 것이다.  

2. 그렇게 이스라엘이 정의도, 자비의 궁휼함도, 언약에 대한 신의도 사라지자 차라리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지배를 받고 회개하는 것이 낫다고 요나는 고발하기까지에 이른다.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그 부의 독점자들은 야훼에게 종교적, 제의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고 외치며 그 모습을 Remind시키는 호세아,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아모스, 그리고 부의 집중에 대해 분노하는 이사야(66:1-2)와 미가(6:6-9)는 야훼를 대신해서 고발하고 있읍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정치엘리트들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離反)’이다.” 라고 말한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이스라엘 집권층에 대한 하층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분노와 함께 폭발하여 민족의식은 떠나가고 분열과 함께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멸망했던 것이다.

 

북이스라엘 북방에 접해 있는 비단길, 이집트쪽으로 내려간다.

[7]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1. 이스라엘 주변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 티레, 시돈과 같은 페니키아 계열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이들 모두는 페니키아어(히브리어)를 구어체로 썼고,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이들을 쉽게 합병시켜 단시간 내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북쪽으로는 시리아 남부까지 남쪽으로는 요르단 강 동편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다.

 

2. 또한 페니키아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운송기술은 이스라엘을 지중해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다르싯(또는 다시스, 타르테소스로 추정)과 심지어 홍해로 나아가는 에시욘게벨 항을 통해 인도 반도와도 교역을 할 수 있게끔 도왔는데 그 덕분에 통합이스라엘은 중동 국가 중 어느 국가보다도 부유한 상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3.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솔로몬 치세 말기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는데, 다윗의 무자비한 정복 전쟁의 결과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이 싹튼 북동쪽의 아람과 남쪽의 에돔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며, 동쪽의 모압과 암몬에 가해지는 영향력도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의 무역을 돕던 북쪽의 페니키아계 왕국들마저 독립하게 되어 이스라엘과의 무역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4.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10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여로보암은 이들 10지파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성공, 북이스라엘의 국왕이 되었다. 유다 지파와 소수가 된 벤야민 지파만이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남부에 유다 왕국이 건국됨으로써 히브리 민족의 국가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5. 국력은 북쪽에 레반트 지역에 걸쳐있어 그곳으로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북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 왕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였다. 물론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아래 논문에서와 같이 토지수탈로 상층부만 배가 부른 사회체제였다. 특히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제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시집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먼저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들은 살해당하거나 아시리아 본국으로 끌려갔다. 이에 반해 유다 왕국은 히스기야를 이은 므낫세의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쳐서 아시리아로부터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10부족이 돌아가며 왕위찬탈행위가 반복되던 북이스라엘의 정정(政廷)이 불안했으나, 유다 1부족의 단일체제에 의한 왕위세습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보유한 남유다가 정치적으로 북이스라엘 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18]


[8] 나가면서 


모세의 하나님과 맺은 맹약을 감히 위반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중의 삶을 돌보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욕망의 끝을 달리던 이스라엘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지배 엘리트들에게 선지자들은 위협적인 현실 비판과 예언을 선포합니다.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버린 민중의 삶에 대한 궁휼함의 측은지심이 민중의 삶을 살리고자 하는 Passion으로 승화되어 선지자들로 나서게 된 행동의 발로였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민중의 상록수’요 ‘선각자(先覺者)’였던 선지자들... 그들의 맥은 율법 공동체를 만들어 유태교를 재건하고 야훼를 이스라엘을 넘어 초월적 존재로 부각시키고  그가 선택한 유일한 선민의식을 고취시켜 민족의 대동단결에 노력했던 에스라등의 학사(역사가)들과 느헤미야 같은 리더쉽으로 이어집니다.

Robert Dick Wilson(1856 ~ 1930)


결론

    : 미국의 언어학자요 구약학자인 '로버트 윌슨(Robert Dick Wilson)' 덕분에 우리는 예언자들이 외로이 기존 체제에 대항해 외쳤던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관련된 중요한 이해 집단을 대신하여 그들의 생각을 사회적으로 공표한 대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의 편중과 경제적 착취는 그 당시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동서고금은 물론 대한민국의 일반사회및 종교사회로 연결되는 것이다. 미국 교회를 보더라도 세속화의 강력한 물결에 휩쓸리고 교회의 신앙과 실천이 쉽사리 소비자 상품이 되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어떤 방법에 대한 비판보다는 "예언자(작가)적 의식"이 가장 긴급한 일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대적 선각자인 5분의 선지자들의 외침은 바로 사회가, 나라가, 교회가 허황됨과 비리와 부패로 썩어간다면 미래는 물론 나라에, 사회에 진정한 엘리트나 롤-모델은 사라지고 불신과 거짓이 팽배해지고 결국 그 나라와 백성들은 대동단결을 할 힘을 잃어 버리게 되어 정치적 사회적 분란이 끊이질 않고 결국 망해가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상황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 참고서적

1. 김호남, 새로운 구약이해 (경기도,북코리아,2013)
2. 윌터 부르그만, 구약개론, 김은호-권대영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2007)
3. 윌터 부르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김기철역 (서울,복있는사람, 2009)
4. 임상국, [논문] 주전 8세기 예언의 사회학적 이해(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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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호남, “새로운 구약이해” (경기도,북코리아,2013),681-682.

[2] Ibid. ,650.

[3] 임상국,”주전 8세기 예언의 사회학적 이해”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논문) 40. ’아브라함 헤셀의 “예언자 이해” 재인용.

[4] 윌터 부르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김기철역 (서울,복있는사람, 2009),86.

[5] 김호남, 655

[6] 윌터 부르그만, “구약개론”, 김은호-권대영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2007),317.

[7] Ipid., 320.

[8] Ibid., 340.

[9] 월터 브루그만, 244. & 김호남, 355.

[10] 김호남, 370.

[11] 월터 브루그만, 266.

[12] Ibid, 349.

[13] Ibid, 344.

[14] 임상국, “주전 8세기 예언의 사회학적 이해”(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논문) 44,48

[15] 임상국, [논문] 주전 8세기 예언의 사회학적 이해(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논문) 48,49.

[16] 윌터 부르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김기철역 (서울,복있는사람, 2009) 머리글.

[17] Ibid

[18] 임상국,”주전 8세기 예언의 사회학적 이해”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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