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4, 신앙과 신학, 그리고 과정신학( Process theology

설교 포인트

Narin Pusil 2021. 2. 22. 09:05

(퍼옴)

■하나님의 뜻에 의한 힘있는 설교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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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케치는
     1. 대상 분석
      2. 상황분석
        3. 조건분석으로  시작합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성욱 교수는, "설교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인간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이다."라며  "원포인트의 드라마틱한 강해설교는 "성경적이고 효과적이며, 성경 본문의 핵심인 원포인트로 흘러가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설교"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창 22장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대부분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이런 단편적인 제목으로 설교를 많이 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방정식'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더니, 성도들의 반응이 한 주 전부터 설교의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갖고 듣게 되더라"면서 "아무리 효과적인 설교를 해도 본문을 제외하고 할 수는 없다. 본문에 충실하면서 어떻게 하면 귀에 들리는 설교를 할 것인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본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한 가지의 핵심 포인트를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지난 11월 2-3일까지 한일장신대에서 열린 제 6차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서울신학대 정인교 교수가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이라는 주제의 발제중 끝부분이다.

 설교 성역화의 잔치는 끝났다. 원래부터 없었어야 하는 울타리가 철옹성처럼 쌓여져 그 끝 갈 길을 몰랐는데 어찌 보면 아주 생각하지 않은, 그래서 조금은 어이없는(?) 방식으로 그 벽이 허물어졌다. 비평은 완전하지 않음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이제 설교자는 자신이 메고 온 사이비 완전성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인 설교자에게 완전한 복음이 맡겨졌고 따라서 설교 역시 불완전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노출됨으로 소극적으로는 설교자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지게 되었다. 나아가 설교비평작업은 설교자들로 보다 철저하고 완성도 높은 설교를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는 적극적인 기능을 할 것이다.

원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함을 들어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기에 부족한 설교자를 쓰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준비를 철저하게 촉진하는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강단의 건강함이 한국교회의 튼실함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런 기대가 비단 설교자에게만 국한되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독재자이시지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민주주의의 산실이다. 하지만 교회의 언로는 동맥경화상태에 빠진지 오래이고 길을 잃은 말들은 무성한 뒷말이 되어 교회를 얽어맨다. 특히 설교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불문율은 다른 곳에서 분화구가 되어 갈등과 불만의 용암들을 쏟아내 왔다. 설교비평이 막혔던 교회 내 언로의 물꼬를 트는 기능으로 작용한다면 이것 역시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복음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설교학자들에게는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설교비평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당장 시급한 과제이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완성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치열한 분발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설교비평의 주체가 교회라면 성숙한 비평을 위한 성도의 철저한 훈련과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영화나 미술, 문학 등 다른 분야의 비평이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반해 설교비평은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분야처럼 인식되는 것도 곤혹스런 과제이다. 적어도 설교에 대한 전반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와 학습은 설교비평의 전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우려는 설교비평이 설교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고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폐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손에 들어간 것치고 이런 훼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설교비평이 피할 수 없는 당위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즐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설교비평이 그리 만만치 않은 난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