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3.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비교

1. 들어가며 (자라온 풍토의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품성)

Narin Pusil 2020. 12. 31. 20:37

자라온 풍토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에라스무스와  루터, 그들의 품성과 사고             

 

1. 12세기부터 소위 이단이라 불리우는 여러 단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유럽 곳곳에 있던 소규모의 단위 작업장들로 뭉친 이들은 연대하면서 정치-종교의 봉건체제는 물론 각종 제도에 대하여 총체적인 저항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2. 중세서구 봉건 사회는 로마카톨릭 교황을 정점으로 강력한 정신적 공동체로 묶여져 내려왔으나, 징기스칸 군대의 칩입, 추악한 십자군 원정의 실패, 백년전쟁, 흑사병이라는 재앙의 도래,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비잔틴 동로마제국의 멸망등으로  교황의 위치는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로마 약탈(1527)은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진행 중이던 1527년 5월 6일에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거에 있었던 그 어떤 로마약탈(사코 디 로마)사건 보다 처참하고 컸으며

    클레멘스7세의 로마는 도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교황은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산탄젤로 성에서 7개월간 자진하여 유폐 생활을 하였다. (위키)

 

3. 더구나 그리이스 고전들이 연구되던 시대에 그래서 최초로 헬라어를 습득했던 보카치오등에 의해 교황청과 사제들의 타락들은 이미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지고 있었다. (종교개혁 전야에 대한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 결과와 아주 동떨어진, 과거의 피상적인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중세 말 서방교회의 상황을 권위있는 교과서를 통하여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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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마카톨릭이 정립되는 시기부터 로마교회의 하이라키적이고, 헤게모니적이고, 차별적인 운영정책에 저항하는 루터는 물론이고 에라스무스, 얀후스 등등의 소수세력들에게 외면을 받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앞서 언급한대로, 시대가 처한 여러여건들에 의해 교황권은 추락하고 있었고 절정에 다다른 로마카톨릭의 부패가 르네상스-문예부흥으로 인문주의가 조성한 시대적 여건으로 그들만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시대적으로 많은 지식인 작가들에 의해 카톨릭 교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는 세력, 루터나 에라스무스등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 여건이 그들을 낳게 했다는 것이다.

5.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정도로 취급 받고 있었다.  쉴레이만 1 세의 오스만투르크와 카를 5 세의 신성로마제국간에 벌어지는 전쟁 와중에도 네덜란드는, 카를5세가 즉위하자 프랑스령에서 신성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어 후에 여러면에서 독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통하여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때까지도 독일지역은 교황청아래 선제후들에게서 뽑히는 황제는 교황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카톨릭 수도회등에 의해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4C 부터 15세기 중반까지는 전반적으로 경제 쇠퇴의 시기였다.  한때 중세시대에 피어나던 장밋빛 비젼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이 계속되던 교회개혁의 열망으로 이뤄지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해서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종교개혁을 병행하던 소위 이단파들이 대개 경제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인 계급 출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7. 15-16 세기는 정치-경제면 만의 변혁기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문예부흥 운동과 그것에 힘을 입은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근대 유럽사회의 정신적 두 지주가 되었고 근대적 국민국가가 탄생하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이와함께 자연과학(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과 항해술의 발달은 1492년 콜룸부스를 필두로 “지리상의 발견”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유럽 세력을 세계에 확산시키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동서간의 교통이 개통됨에 따라 유럽 각국은 “식민지 획득”을 위한 쟁탈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해서 동서양이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된것도 바로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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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이 단락의 내용이 에세이의 논지와 무슨 관계인가?

 (답)

1) 천여년간 신학의 독단성에 사고의 편협을 불러 왔으나 문예부흥과 더불어 여러 학문들의 발달과 함께 도시와 예술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카톨릭적 우주관의 사고마저 새롭게 전환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종이 인쇄술 나침반의 발명으로, 유대적-중세적 사고로부터 세계(관)에 대한 생각은 변화하고 있었다. 

 

2) 그러나 종교의 가르침과 전쟁과 학살의 아이러니한 현실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종교계에는 문예가 부흥함에 따라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를 새로이 연구하고 성경주해의 역사적 문법적 연구를 시작했고 교황과 교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신과 환경적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결과적으로 문예부흥은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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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포르투갈어: Era dos Descobrimentos,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또는 대발견 시대(大發見時代, 영어: Age of Disco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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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포르투갈어: Era dos Descobrimentos,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또는 대발견 시대(大發見時代, 영어: Age of Discovery, Age of Exploration)는 15세기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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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 The Age of Discov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