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2. 예수의 분노(憤怒), 핏줄 이기주의

12. 예수의 분노와 '새 술은 새 부대에 ..' 의 시대적 방편(方便)

Narin Pusil 2020. 11. 20. 16:35

예수는 이 땅에 평화로 오셨고,  또 평화를 위해 생명을 다 하셨다.  분열을 위해 오신것이 절대 아닌 것이다.   “포도원의 일꾼 비유”,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  “예수를 따르려면 가족을 버려라”,  또 “가족의 불화로 서로를 갈라놓겠다” .. 등의 예수의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대로 전시(戰時)와 같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나온,  시대적 고통 가운데 살아가던,  예수의 갈릴리 동포(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걱정이요, 아래와 같은 유대 상층부에 대한 깊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war. (도마복음16장)   예수께서 말씀하시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리라.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불과 검과 전쟁이라는 분쟁을 주러왔음을 모르도다."

 

 

길위에서 "삶의 평화"를 가르치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

 

 

   1. 앞서 언급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시대에, 천국과 지옥같은 단어들처럼 상징적인 혹은 비유적인 말들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른 분위기에서 나온, 시대적 방편에 따른 시대적 당위성의 산물들이다. <거룩>이란 말도 시대적 방편에서 나온 말이다. 70년만에 바빌론에서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에는 이미 <페르시아 문화>에 익숙해진 기득권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야훼를 '유일신'으로 내세우며   "거룩”이란 세상에는 없는,  천상 높은곳에 있다는 신화적인 <시대적 방편>을  슬로건으로 삼았고,    결국 <예루살렘 -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거룩사상” 또한 "선민의식", "칭의론"과 같은 차별성이 내포된 이론(理論)을 내세워,  당시에 예루살렘 토박이 기존의 세력을 누르고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그 논리(Logic)는, 에스라와 같은 소위 유대-엘리트 귀향인들의 <시대적 방편>이었던 것이다.

 

   2. 그와같이 복음서의 많은 예수의 말과 표현은AD 70년의 예루살렘 헤롯성전이 무너진후 실망과 고통과 비탄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 무력한 유대교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신흥종교 초기공동체를 이끌고 나가던 새로운 세력들에 의한,  <시대적 방편> 작가적 상상력들 <케리그마>에서 나온 것이다.

 

   3. 소위, 종교개혁, 그 당시 차별적 모순의 시대적 방편(方便, temporary fix)의 하나로, "우리는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의 권위'로 대체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말은 "오직성경"을 필두로, 16세기 초에 시작된 카톨릭(교황)에 대항하기 위하여 시작된 루터의 외침이다. 이는 지난날  BC6-5세기 팔레스타인 땅  신정국가 시대, 바빌론등 주변 강대국들에 시달리면서도 부패와 교만이 끊이지 않아 빈곤과 피폐해진 이스라엘을 보며 훗날에 구원해 주실것을 기대하던 하박국(2:4)이나,  로마제국시대, 유대 율법(할례)을 어겨가며 이방인도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면 된다고 했다가 돌 맞아 죽을뻔 했던 바울,  그리고 카톨릭제국의 왕정시대, "진리는 교황의 주인이다." 라며,  "오직성경"을 외치며 교황세력에 대항하던 루터 …. 각각의 3 사람은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을 각자가 처해있는 당시 상황에서 나온, 종교개혁적 시대적 방편(方便, temporary fix)을 제시했던 것이다.  소위 "칭의론(justification)"들이다.   하지만 그 개념은 자신들만이 의로운 사람이 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게된다는 차별적 모순을 담고있다.  그런고로 21세기 오늘날은 어찌 해석되어야 하고, 시민주권국가시대에  <시대적 방편> 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3.  1521년 파문당하면서도 Solar Sciptura 를 슬로건으로 당시 시대적 방편으로 삼은 루터…. 21세기 오늘날은 《오직평화 (Sola Pax, Pacem Tantum)》만이 21세기 시대적 요구요지구촌의 방편이고 구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에 평화가 있어 준다면, 톨스토이가 새삼 다시 마음의 평화를 거론하지 않아도, 지구촌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에 그렇다. 이는 이미 예수도 예견했다. Heaven(Peace : Shalom) is in your(our) Midst.(Luke17:21).    또한 《Dona Nobis Pacem 우리에게 평화를 ....》이 아니라, 우리 각자 스스로가 이뤄가야 한다. 이에 덧붙히면, 필자는 한때 방황하던 청년 루터의 롤-모델이었던, 당시 최고 권위의 신학자요, 문학가였던  <에라스무스> .... 그의 사상을 당시 어떤 소위 종교개혁가 라고 불려질 신학자들 보다 더 높이 삼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기 앞서, 자기 자신부터 존중해야 하라고 .....'고 했다.

 

      시대 시대마다의 방편(方便)

             ▪︎ 기독교제국, 신(God)의 최측근, 사제의 하이라키 아래 있을때 ... Dona Novis Pacem (평화를 주시 압소서 )

             ▪︎ 21세기 시민주권국가시대 모든 만민은 ... Faciamus pace! (평화를 이루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

...  떠돌이 랍비요, 설교자요, 길위의 신학자인 예수가 묻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者)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1. 예수는 당시 길위의 떠돌이 설교자들과 같은 모습의 생활을 했다. 그는 가정도, 고향도 떠났고, 가진것이라곤 전혀 없는 그야말로 ‘무소유자’였다. 따라서 가정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  예수의 분노로 나타나는 핏줄이기주의를 지적하는 또 하나의 가르침이다.  "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냐?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어야 내 형제다” (마가복음 3:31-35)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길위의 떠돌이 민중신학자인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종말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말이다.

 

   2. 이 말은 또한 앞에서 언급한 미가의 외침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 말은 하나도 억지나 극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의 속뜻은,  당시 로마제국과 속국 유대왕국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는 버러지들의 수탈과 착취에 고통받고 있었던 특히 갈릴리 동포들을 외면하고 <핏줄이기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였다.  화(火)나 짜증은 다른것들에 대한 것이지만, 분노는 정의롭지 못한일에 대한 표현행위이다.

     

   3. 소위 복음이라 불리우는 여러 복음서들 … 소유를 버리고, 집과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 다녔던 예수에게서 ... 그리고 그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았던 ‘떠돌이 설교자’들에 의해 전승된 그 말씀에 기초해서 형성된 것이다. 소위 공생애 1년 혹은 3년 동안 가정을 떠나 길위의 신학자로 팔레스타인을 떠돌아 다닐 수 있었던  예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몰라도 ... 가정을 지켜야 하는 사람에게는 위의 명제를 적용시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같은 모습은 이기적인 극치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분노한 예수의 나눔과 헌신의 차원으로 혹은 초기 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케리그마 신학적 차원으로 부각시키려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전쟁중에 예루살렘의 헤롯성전및 그곳에 지성소가 티투스 로마군단에 의해 그대로 파괴되는 모습을 본 당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4. 당시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서구의 개인주의가 아닌 동양적 가족-가문 중심이므로 .. 이 이야기는 적어도 결혼관, 가정의 규범을 확립한 아우구스티누스 (결혼관,가정관의 확립) 시대 이전에 세속을 떠나 ‘길위에 구도자적 삶을 살던’ 이전에 디다케를 따르던 그때, 신학적 드라마를 쓸 수 있는 작가들에 의해 종교적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가족중심의 집착에서 벗어나 너보다 못한 이웃과 함께하라!!!

 

   5. 수메르 제국의 지역전쟁에서, 땅의 모든것을 지배하던 신(神), 엔키를 섬기던 에리두(Eridu)에서... 달의 신, 난나(Nanna:이슈타르Isthar)를 섬기던 우르크(Uruk: אֶרֶךְ)로 바뀌었듯이, 또한 헬라사상도, 번영하던 그리이스 도시국가들속에서 파르메니데스를 이은 불변하는 진리로 이루어지는 이상국가와 그 시스템을 작동시킬 엘리트 권력투쟁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던 플라톤에서 .... 평등한 배분적 정의속에서 개인권리의 상호적 존중을 규정하는 법률적 정의를, 세계정복을 이루려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에게 가르치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케도니아가 그리이스 전지역과 전쟁을 벌이며 정복해 가던 시대에 개처럼 살던 튀르키에 북쪽 시노페에서 온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 ... 그의 스승이었던 안티스테네스(BC 445-365)는 인간은 덕(德)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 필요할 뿐 재산과 명성과 외모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 다시 알렉산드로3세 사후에 피튀기는 디아도코이들의 권력투쟁의 잔혹한 전쟁의 시대가 은둔의 에피쿠로스를 만들었듯이, 시대적 삶의 정황에 따라 그 시대의 방편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상적 사고가 형성된다.

 

6. 이미 야훼를 독점하던 성막도, 성소도, 사람들은 떠났고, 또한 인간의 삶들을 묶었던 성전에서도 떠났다. 이제는 예수를 독점하는 성당도, 교회도 떠나, 예수가 가던 그 길위에서 예수 가르침을 깨우쳐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16세기 왕정정치시대 혹은 3000년전 신정정치시대 사고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시민주권국가시대 오늘날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People already left from the tabernacle, the sanctuary and also the temple that monopolized <the LORD>, Yah-weh.  And now we have to leave from the church (or religion) that exclusively occupies <the KING>, Jesus. And on the way that Jesus had been teaching, let's live like a human being with humanity by enlightening the teachings of Jesus. Because in today 21 century, we are not living in the 16th century monarchy or in the theocracy (zion) era of 3,000 years ago.      - James Kang

 

  7.  예수님의 가르침은 맞았다.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무한 우주 아니 적어도 지구촌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 가치관이라는 것은 없다. 상대적 가치관에 의해 시대 시대마다의 시대적 상황과 삶의 정황에 따라 그 시대의 <시대적 방편>에 의한 새로운 지평이 제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神學, Theology)도 마찬가지다.  21세기 시민주권국가시대의 오늘날, 교회는 기독교만의 ‘핏줄이기주의’ 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만의 게토 GHETTO화 시키는 작업에서 이제 그만 눈을 뜨고, 정치(政治Politics)와 마찬가지로 그 낡은 사고에서 손을 떼고, 새 시대, 새 사고의 신학을 정립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