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음악 이야기

번지없는 주막

Narin Pusil 2023. 9. 9. 17:16

번지없는 주막

작사:처녀림(박영호)
작곡:이재호

 

https://youtu.be/0bllyX329s4?si=pi9C7np4uc3J32FL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구려

능수버들 채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묻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밑에 마주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였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애절고

못믿겠소 못믿겠소 울던 사람아

 

사나이 한 목숨을 바다에 걸고

오늘은 이 항구로 내일은 저 항구로

마도로스 파이프에 어리는 옛 추억

번지없는 그 주막을 언제 가보랴.....

 

 

https://youtu.be/Chnpl8vHEnw?si=XqQAI3UcuDY-uYIM 

 

1940년에 발표된 백년설의 노래이다. 옛 가요 중 대표적인 노래로 손꼽힌다. 이 노래는 1940년 처녀림이 가사로 엮고 이재호가 일제 음반 사전검열 제도의 틀 속에서 가락을 지어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백년설이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래 주었다고 한다.

 

https://youtu.be/3xzjD43UrIU?si=2cp_LXby2tJ1LtEd 

 

Another Carpe Diem


Enjoy this time today 

Let's drink more 

Refill your fiery passion 

Let's raise our wineglass high 

And, let’s go to the land of happiness. 

 

In the stolen field, until spring comes..... 

 

 

https://youtu.be/HTenq44dLPM?si=Ox-TqiaJNlz1g97Z 

 

빼앗긴 들에봄이 올때까지 .....

 

오늘 이 시간을 즐기라

보다 더 자주 잔을 기울이자

불같은 열정을 다시 채우고

잔을 높이 높이 들자꾸나

그리고 행복의 나라로 가자꾸나

 

 

ㅡ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에 우연한 기회로 첫 데뷔한 그는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수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곡이 많이 있다. 〈유랑극단〉과 관련된 그의 일화는 취입을 위해 이곡을 받아 처음으로 연습을 할 때 가사는 단지 1소절만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활용하여 즉석에서 그 노래의 작사를 완성하고 노래연습을 마쳐 취입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독보적인 가수의 행보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면서도 듣는이에게 절규하는 듯한 독창적인 호소력이 특징이다. 듣는이에게 친근한 한국의 얼을 담은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려 오랫동안 절대적인 인기를 유지했다. 1941년 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그대와 나〉 등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불러 친일파 논란이 일었다. 당대의 최고 가수였던 백년설은 남인수, 박향림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백년설을 남인수와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1]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2] 한 뒤, 평생 그가 추구하던 목적과 의미있는 삶의 일환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귀의, 이후 연예계 관련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국제 무역을 운영하다가 1979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함께 (아내와 심연옥과의 슬하 남매 5녀, 6남) 이민을 갔으며, 약 2년 후인 1980년에 미국에서 별세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건물로 대체되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의 전기로는 내무부장관과 건설부장관을 역임한 이상희가 저술한 <오늘도 걷는다마는>이 있으며, 그의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인 삶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