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시드니 인문학

홍길복의 여덟번째 강의: 나의 철학 만들기 07/09/2023

Narin Pusil 2023. 9. 6. 20:04

 제8강 나의 철학 만들기, 혹은 나의 철학 고치기


⚫ <시드니인문학교실> 이번에 추천 교재 :

(1)서양철학사, 스털링 램프레히트, 김태길역, 을유문화사, 2008

(2)서양철학사, 버트란드 럿셀, 서상복역, 을유문화사, 2009

(3)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정영목역, 봄날의 책, 2013

(4)희랍철학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 C. 거스리, 박종현역, 서광사

(5)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재홍외, 아카넷


⚫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을 미실 때는 그 원천을 생각하라’  ‘어딘가 샘이 있기에 지금 여기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과일을 먹을 때는 그 나무 또한 기억해야 한다는 말로 ‘락기실자사기수’(落其實者思其樹)라는 고사성어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느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깊고 긴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개인과 우리 공동체가 이런 생각, 저런 판단,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는 모두 다 긴 역사적 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양적 전통과 더불어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민족적 물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의 역사적 기원 역시 크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저는 마땅히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사상적 물줄기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는 이에 대한 지식적 기반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나 저는 그리스 신화나 성서에 나오는 창조 스토리는 비교적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단군 신화나 이에 대하여 해석한 작품들은 거의 읽지 못하고 자라났습니다. 물론 이는 저 개인의 소양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지난날 우리의 교육이 그리스 신화는 꼭 알아야 할 지식이지만 단군 신화는 몰라도 되는 것처럼 지나온 무지와 식민지 교육의 영향이 컷다고 봅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연고대에서 추천한 ‘인문 도서 100선’ 중에는 그 앞부분에 거의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고전은 없습니다. 올림프스, 아테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비너스에 대해서는 아주 친숙한데 태백산, 신단수, 신시,환웅, 웅녀, 곰, 호랑이, 쑥, 마늘에 대해서는 거의 생소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지금 ‘그리스 도착증(Hellenophilia)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친미도착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 조차도 잊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번 학기 우리는 먼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순전히 제 능력의 한계입니다. 언젠가는 김교신이나 함석헌 같이 ‘성서 조선’을 외치는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면서도, 내 것을 알기 위해서 남의 것 부터 공부하는 과정을 밟으려고 합니다. 서양역사에서는 어느 무렵부터,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까요? 서양 고대 철학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발전되어 왔는지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헬레니즘의 뿌리를 찿아가는 인문학 제2의 여행입니다.


⚫ 우리는 지난 3월 ‘시드니 인문학 교실’ 네번째 시간 ‘인문학의 출발’ – ‘생각을 생각해본다’ –에서 이 문제를 잠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를 다듬어보겠습니다.

 

⚫ 언제부터 사람들은 자연계의 변화와 인간들이 사는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시작했을까요? 기원 전 6세기 후반 경부터 4세기 후반기에 지중해 북쪽에서 살던 일군의 사람들은 날마다 혹은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놀라워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아하게’ 여기면서 ‘왜 그럴까’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이롭게 여기는 마음(wonder)’은 무엇에 대한 ‘관심’(concern)입니다. 관심은 ‘흥미’(interesting)를 유발시키고 ‘호기심(curiosity)’과 함께 ‘의구심(doubt)’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질문’이 역사의 진보와 인간이성의 계몽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의 첫 단추입니다. 물론 그런 자연계의 변화와 이상은 그 이전에도 늘 있었던 현상이었지만 이 때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런 일들은 모두 ‘하늘’ 혹은 ‘하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만
믿어왔습니다. 

 

    샤만(Shaman, 자연에 대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관)들은 그런 일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경한 일이고 하늘님의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게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갖고 기도와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늘 좀 삐딱하거나 의심이 많거나 심술궂은 장난꾸러기들도 있게 마련 입니다. 그들은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어!’ ‘이상하잖아? 생각해 봐!’ 하면서 사람들을 선동(각성시키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릴 지브란이 지은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는 예수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동자로 본다. 누가복음서 23:1-3절 참고) ‘왜 그렇지?’ ‘정말 이상해?’하는 의구심, 의심하게 만들기는 마침내 질문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신화적 순종’으로만 길들여 온 사람들이 마침내 ‘합리적 의심’과 ‘정당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함으로 드디어 인간들은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적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화적 응답’의 단계를 벗어나 ‘합리적 대답’과 ‘이성적 탐구’를 시도한 것은 기원전 약 6세기를 전후한 무렵 지중해를 낀 고대 중동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 자연법의 규정이며 불변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제한했던 전통이나 역사로 부터 벗어나는 길, 종교적 권위주의와 배타주의에서 비롯되는 맹종이나 온갖 미신으로 부터 벗어나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는 길,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수탈에서 발생하는 비인간화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이성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여 참된 인간으로서 서나가는 과정에는 어떤 공통점들이 있을까요? 억압된 인간이성의 ‘어두움’으로 부터 벗어나는 첫 출발에는 두개의 공통된 과정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의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까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드렸던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무조건’ 의심하는 것이 해방, 자유, 진보, 보다 나은 선택, 희망, 정의, 사랑, 그리고 진리로 다가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데카르트식의 방법론적 회의를 포함한 수학, 물리적 법칙, 당연시했던 상식과 전통, 종교적 교훈와 신앙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일단은 한번 의심해 보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의심과 회의는 잘못된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경제, 사회. 과학, 문화, 종교등  인류의 제반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심과 회의에서 부터 발전되어 왔습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기만 했던 ‘예스 시대(Yes era)’는 암흑의 시대였고 흑암의 역사였습니다. ‘저 분은 왜 말씀이 없을까?’
 ‘저 분은 왜 항상 뒤에 앉으실까?’ 의구심을 갖는 것이 생각하는 첫 출발이 됩니다. 

 

두번째는 ‘질문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좋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리적 상태의 한계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일단 한번 그 무엇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의혹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말로 하든, 글로 쓰든, 그림을 그리든, 노래를 부르든지, 몸으로 표현하든지, 일단은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질문을 던지는 단계’입니다. 의심하고(doubt), 질문하는(Question)하는 것은 연속적 행동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물어볼 것이 없고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알수가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같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라도 물어보는 사람이 말되는 것을 가지고서도 물어보지 않는 사람 보다는 훨씬 더 사실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인문학 교실에 오십니까?’  ‘당신은 왜 아침 마다 출근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당신은 왜 그리도 바쁘게 길을 걸으십니까?’ 이렇게 소소하게 시작되는 질문이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도대체 진리란 있기나 한 것인가?’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모든 가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른 것인가?’로 이어 집니다.


소크라테스는 훗날 이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정리하여 ‘질문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애지학으로 출발했던 철학을 질문학을 거쳐 마침내 보편학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사실 종교나 철학이 지향하고 추구해 나기는 방향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종교는 ‘의심하지 마라, 질문하지마라, 생각하지 마라, 침묵해라, 말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영원과 진리를 찿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철학은 ‘의심하라, 질문을 던지라, 생각해 보라, 계속해서 말하고 떠들고 대들라’고 부추깁니다.

 

철학은 그것이 인간의 바른 자세이고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나는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이 철학자나 인문학자들을 향하여 자꾸만 인본주의니 세속주의니 하면서 싸움을 걸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들 보다도 오늘날 자본주의에 물든 종교인들이 더 세속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정치, 자본, 종교 이 셋은 이미 카르텔을 형성한 권력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원수처럼 싸울 것이 아니라 피차 진리를 찾아가는 다른 방법을 인정해 주고 ‘당신은 그 길로 가고 나는 이 길로 갈테니까 우리 먼 훗날 진리의 바다에서 함께 만납시다’라고 말 할 수는 없을까요?).

 


⚫ 철학은 의심과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철학은 모두가 다 알고있는 상식에 대해서조차 반론을제기합니다. 철학은 결코 우리의 상식을 그냥 그대로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철학은 절대로 다수결의 원칙을 그냥 무조건 따르지 않습니다. 철학은 상식과 다수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장을 던집니다. 심지어 모두들 보편적 진리라고 믿어온 것들에 대해서조차 호락호락하지 않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 않고 진리를 가르친다고 큰 소리치는 종교인들에게도 항거합니다. 철학은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사람들은 동물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질문도 못하게하는 종교인들이나 독재자들은 한 묶음으로 사악한 무리라고 규정합니다.

 

‘절대로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하에서 진리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의 다양성을 부르짖으며 모든 정치인들과 재벌들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않습니다.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적 제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일으킵니다. 철학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만 절대화하는 것이나, 다른 인종이나 다른 나라의 문화, 전통, 예술, 역사, 삶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참지 못합니다.

 


⚫ 기원 전 6세기경 ‘회의’와 ‘질문’을 통하여 드디어 이성의 시대, 철학의 시대를 연 사람들이 살았

     지중해 지역에 대해서 살펴 봅시다. 눈을 감고 머리 속으로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산맥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중심한 북아프리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멀리 스페인을 지나 대서양으로 이어집니다. 북쪽에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그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부터 동편에 있는 에게바다를 건너면 소아시아와 이오니아 땅이 펼쳐지고 그 북쪽으로는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가 지금의 터키 땅입니다. 기원전 6세기 거기에는 밀레토스(Miletus)라는 도시국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처음으로 ‘신화적 대답’만 복창하던 때, 드디어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이성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특별히 이 지역에 살던 이들이 이렇듯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된 데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먹고 살만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부터 이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수 있었던 이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날씨와 거기에 따른 풍족한 삶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심는대로 열매를 맺었고 밀을 비롯한 각종 곡식과 과일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부유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앞마당 같은 지중해는 풍성한 해산물들을 제공해 주었고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함께 만나 각종 해상 무역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듯 기원전 6세기경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흔히 부와 여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1)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지게 되거나 (2) 각종 스포츠나 예술 – 음악, 미술, 문학, 시, 연극등 –이 발전되거나 (3) 여러가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서 학문이 발전하게 됩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의식주에 매이게 되고 따라서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을 하려는 사람은 좋은 환경으로 인한 삶의 여유가 있든지 아니면 의식주로 부터 초월한 스스로의 여유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철학은 일상의 굴레로 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유 없이 사는 현대인들과 바쁘게 사는 것을 마치 미덕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은 느리게 살고 천천히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속도에서 깊이로, 윌리엄 파워스, 임현경역, 21세기 북스, 2010을 추천합니다).

 


⚫ 여기까지의 요약입니다. 철학의 출발점은 첫째로 경이, 놀람, 이상하게 생각함, 호기심입니다. 둘
째는 의심, 질문, 그리고 생각함입니다. 셋째는 여유, 안정, 한가함, 그리고 느리게 사는 삶 같은 것들입니다.

 


⚫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최대 문제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단 한 사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확하고 결정적인’ –clearly and distinctly – 대답을 못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철학은 처음부터 대답이 불가능한 것을 대상으로하는 학문입니다. 모든 형이하학적 질문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등은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풀 수없는 문제를 향한 끝없는 지적 순례입니다. 전통적으로 1+1=2 라고 하는 수학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언제나 정답이 하나입니다. 사과1+사과1=사과2 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의 대답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1은 2나 3이나 심지어는 0이될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은 다양성과 개방성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의 서 있는 자리(立場)에 따라 보는것(觀點)과 해석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철학은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든 다른 것들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데서 출발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을 할 때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스타디움에서 뛰는 선수가 있었고 둘째는 관중석에 앉아서 그 선수들의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관객이 있었고 셋째는 스타디움을 떠나 올림프스의 높은 언덕에 올라서서 선수와 관객을 함께 내려다보는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철학은 數(number)자체를 문제삼습니다. 수란 무엇인가? 사과란 무엇인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센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누가 세는가? 이런 것을 묻습니다. 디시 말씀드리면 철학은 보통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근본적으로 다시 묻고 문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홍길복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목사, 선생, 아저씨, 아빠, 할아버지, 여보등으로 불립니다. 167cm, 72kg, 79세 짜리 남자, 홍길복에게서 그의 이름과 호칭을 벗겨내면 그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허명, 가짜, 껍데기를 벗겨내면 홍길복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철학은 어떻게 정의(定義:definition)할 수 있을까요? 모든 학문은 그 학문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시작이고 마침입니다. 사람이란? 남자란? 여자란? 정치란? 정의란? 진리란? 종교란? 설교란? 정치학은 정치를 연구하고 경제학은 경제를 연구하고 신학은 신을 연구하고 인문학은 인간을 공부합니다. 그렇다면 철학(哲學)은 당연히 철(哲)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됩니다. 그러나 밝을 철(哲)자 철(哲)은 학문의 방법론은 될수 있겠지만 그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아마도 대학(大學)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 ‘대학지도 재명명덕(大學之道 在明明德)’이 여기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 말에서 철학은 “philos”, 곧 ”사랑, 애정”이라는 말과 “Sophia”, 곧 지혜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개념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 곧 ‘애지학(愛智學)’이 철학입니다.


⚫ 철학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요? 

그리스 시대에는 모든 학문이 다 철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모든 학문은 개별 과학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천문학, 기하학, 물리학,수학, 미학, 신학이 독립을 하기 시작했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교육학과 심리학까지 다 분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개별 학문 속에 들어가 모든 개별 과학의 본질에 대해 질문합니다. 정치철학, 법철학, 경제철학, 경영철학, 사회철학, 미술철학, 예술철학, 스포츠철학, 생활철학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가게에서는 20불 이하는 크레딧카드(credit card)를 받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의 ‘비지니스(business)철학입니다’라고 까지 말 합니다.

Crows Nest에는 ‘coffeeology’라는 카페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에서는 college mission을 다녀오지 않으면 졸업
을 못합니다. 이건 우리 학교의 철학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청하지 않으면 심방을 하지 않습니다. 이건 제 목회 철학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철학이 무엇인지를 아주 애매하게 만들어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에 대하여, 모든 것의 의미를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철학은 의미와 가치를 질문하지 않는 학문이나 인생은 존재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각도에서 철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영역을 포함합니다.


첫째는 존재론 (存在論, Ontology)이고 

둘째는 가치론(價値論, Axiology, The Theory of value)이고
셋째는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존재론을 살펴봅니다.

 여기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란 무엇인가? 사과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이 경우 존재론적으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 사과는 붉은 껍질(혹은 파란 껍질)을 갖고 있다. (2)사과는 달콤한 속살(혹은 세콤한 속살)을 가지고 있다. (3)사과 속에는 딱딱한 씨(들)가 들어 있다는 식의 사과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 다음 가치론에서는 사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사과는 건강과 미용에 좋고 비타민이 풍부하다. (2) 사과는 마치 연인의 볼과 같이 보기에 참 아름답다. (3) 사과는 과수원을 만들고 잘 재배하면 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 사과란 건강과 경제를 포함하여 문학적으로까지 매우 가치있고 유익한 과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식론에서는 ‘이 물체를 사과라고 인식하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를 묻습니다. 즉 사과를 사과로 인식하는 인간 인식의 능력과 한계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사과를 바라보고, 이것이 사과라고 알아보고 그 후 그것이 ‘가치있는 물체’라고 판단하는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디시 말씀드립니다. 존재론에서는 사과의 진정한 존재(存在), 즉 사과의 실체(實體)는 무엇인가를 문제삼습니다. 우주와 생물, 동물과 식물, 인간과 신의 존재 자체와 그 실체를 묻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본질과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즉 사과라는 존재의 조건, 카테고리(category, 범주,範疇)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치론은 사과의 가치와 유익함을 묻습니다. 왜 우리는 사과를 가치있는 실과라고 판단하는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참된 가치를 가질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하는가?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서 그것의 가치 유무를 평가하는가? 이런 식의 가치론은 윤리학과 미학과 깊은 연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과가 있다, 붉다, 맛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과는 건강과 미용과 경제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인식의 근거를 질문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1) 선험적 인식 (본능적 인식) (2) 직관적 인식 (3) 경험적 인식 (4) 교육적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론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인식한 그 사과’와 ‘사과 그 자체’가 동일한 것이냐하는 문제입니다. 인식된 사물과 사물 그 자체 – Ding an sich (Thing itself)사이에 생겨나는 간격은 무엇인가? 내가 인식한 사과에 대해서 사과자신도 동의하느냐? 즉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동일한 인식을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또한 사과 하나 하나에 대한 개별적 인식과 사과라고 하는 보편적 과일 사이에는 어떤 동질성과 차이점이 있는가를 문제화하는 것이 철학적 인식론입니다.


⚫ 맺는 말입니다.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철학이 없으면 ‘내 철학을 만드는 일’이고 내 철학이 잘못되었거나 흡족하지 못하면 다시 ‘고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철학’을 세워가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의 철학이 있습니다. 작게는 옷을 입는데도, 밥을 먹는 데도,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사업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종교 생활을 하거나, 친구를 사귀거나, 독서를 하가나, 선거에 나가 투표를 하거나 등등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데에는 모두다 소박한 그의 인생 철학들’이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당신의 인생철학이 있습니까?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시겠으면 찾아 보아야하고, 혹시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면 재조정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철학은 배우고 공부하는 데만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으로 살아가자는 데 철학의 목표가 있습니다. 독일말로는 ‘philosophien’ 입니다. 영어로는 ‘doing philosophy’ 입니다. 철학을 하는(doing philosophy) 것은 모든 나타난, 혹은 보이는 현상들 뒤에 있는, 나타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근본 원리와 본질을 찾아가는 자유와 사랑의 여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 생활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인생의 여행길에서 우리는 3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앞서 간 사람들의 생각과 고뇌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이 남겨놓은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독서와 관찰, 감상과 직관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둘째는 허리를 펴고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가 다시 내쉬면서 생각하는 겁니다. 생각을 통하여 그들의 것을 나의 것, 우리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거기에서 얻은 결론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쉬임없이 고민하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고뇌와 질문이 이어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왜 인간 세상에는 비극과 고통이 있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아니 의미란 것이 꼭 있어야 하는가? (물론 이런 질문들 속에는 오늘의 질문들도 포함됩니다. 종교, 기독교, 세월호, 탄핵, 새정부등등, 참 많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는 시대 속에서 철학함이란 끊임없이 의미와 참된 가치를 묻습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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