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교회 상업자본주의 역사

Narin Pusil 2023. 8. 21. 21:57

상업자본주의  교회사업에 의한 희생물들 ..


    (박충구)
1970년대를 지나며 경제적 풍요가 주어지자,

교회는 자본주의 경제와 제국주의의 힘 앞에서

성서를 왜곡 해석하기 시작했다.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신자에게 욕망 충족의 길을 열어주었다.

자유, 정의, 평등, 평화는 강단에서 사라지고

복종, 침묵, 우월성, 호전성을 가르치는 집단 이기적인 교회로 변종 진화했고,

여기저기 진지구축형 대형교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제임스강)
교회의 상업행위가 시작된 것이,

한참 수출한국의 위용을 들어내던

그래서 서울로 밀려들던 1970년도 한국교회 부터가 아니라,

적어도 3세기 이후부터 교회는,

가진자(종교권력)의 먹거리터가 되어 있었지요.

교회사가 증명해줍니다.

 

 

(Ex.) 당시 북아프리카의 전체를 망라한 민중종교운동세력,

**도나투스파교회에 반하는 반란으로 규정,

군대를 동원해, 잔혹하게 진압시킨, 가진자의 어거스틴(Augustinus)의 로마종교권력


       "예수 가르침은 세세토록 전해져 지켜 가야겠지만,
        종교권력의 먹거리터, 예수를 볼모로,
        거룩한(?) 것들을 브랜드로 삼아
        상업행위를 하는 교회는 없어져야 한다."

 

 

     (박충구)
정확히 말하면,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150~215) 시절부터라고 봐야하고,

더 들어가면 계약법전 이후 제의화된 종교가 그랬어요.

종교가 돈과 권력 맛을 좋아하면 다 타락했지요.


    (제임스강)
헬라철학과 종교철학을 2세기 당시 연구했던,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 ..

그때 그나마 그의 사상이 북아프리카, 시리아 등지에서 잘 지켜졌더라면 ...

   (클레멘트의 사상 .. 21세기가 아닌, AD 2세기 형편을 보면,

      당시에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Donatists' Beliefs

 

 ㅡ가톨릭 교회의 초기 역사는 격동의 역사였습니다. 

    종교 내의 다양한 운동이 두드러졌다가 

    교회가 자신의 신념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무너졌습니다. 

 

    도나티즘은 그러한 운동 중 하나였으며 결국 4세기에 카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Donatists의 믿음은 교회에서 사제의 역할과 사제가 집행하는 성사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도나투스 신앙은 4세기 로마 기독교의 맥락에서 생겨났습니다. 

 

    303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군대에 모든 기독교 교회와 경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 신을 기리는 향을 피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절했고 순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포기하고 경전 사본을 포기했으며

심지어 카르타고의 주교인 Caecilian을 포함하여 다른 기독교인들을 로마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가 죽은 후 Aelius Donatus는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다음과 같은 Donatist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ㅡCharles-André van Loo's 18th-century Augustine arguing with Donatists

 

성례전 무효화(Invalidating the Sacraments)

도나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믿음에서 벗어난 기독교인들을 반대하고 경전이 파괴되거나 다른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도록 허용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과실을 범한 사제와 주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사를 집행할 권리나 능력이 없다고 도나투스는 주장했습니다. Donatists의 관점에서 타락한 주교 나 사제로부터 성사를받은 기독교인은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재세례(
Rebaptism)

타락한 성사 중 하나는 세례 또는 가톨릭 입문 의식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Donatists에 따르면 죽은 사제 나 주교에게 세례를받은 기독교인은 실제로 세례를받지 않았기 때문에 개종자들에게 다시 세례를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Caecilian의 주교 봉헌이 유효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Donatists는 Caecilian의 주교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모든 활동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신념실천(beliefs and practices)

Donatists는 주류 가톨릭 예배와 구별되는 자체 예배를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예언을 특징으로 합니다. 때로는 회중의 구성원들로 부터도 말입니다. 고백은 교구민과 사제만 참여하는 사적인 가톨릭 고백과 달리 회개하는 죄인이 전체 Donatist 회중 앞에서 매우 자세하게 죄를 고백하는 공개 의식이되었습니다. 도나티스트들은 일단 사람들이 믿음에서 멀어지면 회복될 수 없다고 믿었고, 주류 가톨릭은 신이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317년부터 321년까지의 박해는 실패했고, 321년 5월 콘스탄틴은 마지못해 도나투스파를 관용했다. 이 운동은 몇 년 동안 힘을 얻었지만 347년 8월 콘스탄스 황제는 도나투스와 다른 지도자들을 갈리아로 추방했고, 도나투스는 355년경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ㅡ튀니지 있는자들의 횡포에 더해 그들 교리에 반대하여 시작된 도나티스트-운동은 북아프리카를 뒤 덮었다

 

 

End of Donatism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줄어들면서 도나티스트와 주류 가톨릭 사이의 분열도 사라졌다. 그러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로서 도나투스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정통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과 교회에 따르면, 성례전의 타당성은 개인의 성격과 무관한 교회신권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도나티즘이 널리 시행되고 있는 북아프리카에서 어거스틴(Augustinus)이 가톨릭의 회복 교리를 옹호하는 글을 썼을 때 도나티즘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의 입장을 조장했습니다. 박해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마치 '루터'처럼 가진자들 편에 있었던 어거스틴의 견해가, 마치 '독일 농노들'의 없는자 도나투스파의 믿음을 이겼고, 그런 까닭에 박해 기간 동안 배신자였던 사제와 주교들의 성찬과 영적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다음 세기에 남아있던 도나투스 분파 모든 신도들이  우마이야 왕조의 칩입과 함께 이슬람 물결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