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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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성서고고학(핑켈스타인과 아브라함)

Narin Pusil 2023. 6. 23. 21:20


아브라함의 존재 확인은 실패

 

유대인·이스라엘, 그 발명된 신화들 1338호
성서가, 고고학 시험을 본다면 낙제점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 논쟁,

핑켈스타인은 성서는 ‘남유다 왕국 말기프로파간다’ 주장

정의길 수정 2020-11-15 11:15

2006년 8월 이스라엘 예루살렘 인근 고대 유적지에서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REUTERS


“발굴된 것들에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위대한 통일왕국에 대한 여하한 증거는 없다.

다윗왕의 예루살렘은 당시 빈촌에 불과했다.”

 


2000년 7월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역사로서의 성서, 새로운 고고학적 시험에서 낙제’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스라엘 메기도(성서의 아마겟돈)에서 고고학 발굴을 수행한

텔아비브대학 고고학연구소장인 이스라엘 핑켈스타인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기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공인됐던 성서 기록이 허구로 밝혀졌다는 고고학계 주장을 담았다.

성서를 역사서와 동일시하는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 신자에게는 충격이었다.

 

 


솔로몬 시대 왕궁터는, 북이스라엘 건물

 

고고학적 발굴로 성서 기록의 진위를 분석한

핑켈스타인의 저서 <발굴된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기존 가나안 부족에서 기원했다고 돼 있다.

 

성서에 기록된 모세의 엑소더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정복은 허구라고 그는 단언한다.

시나이반도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던

다윗과 솔로몬 왕의 이스라엘 통일왕국과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의 영화 역시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윗 왕국은 팔레스타인 남부 산악지대 조그만 부족국가의 군장 정도였고,

예루살렘은 빈한한 산촌이었다고 핑겔스타인은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한다.

앞선 고고학 발굴에서 솔로몬 시대 영화를 방증한다는 왕궁터 등은

몇백 년 뒤인 북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건물이라는 것이다.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핑켈스타인은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연구 결론이

“아주 강력한 부정적” 반응을 받았다고 했다.

“분노가 (단순히 우리를 무시하는) 엄격한 정통파 유대교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적 가치로 성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더 많은 세속적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이 성서의 ‘역사적 진실’에서

현대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찾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가고,

그 후손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가나안 땅을 약속받고,

후손인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탈출시키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건설해 솔로몬이 그 영화를 일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의 가르침을 어겨 바빌론 유수 등을 시작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 2천 년을 방랑했다는 것이 성서의 서사다.

 

그렇게 방랑했던 유대인이 이제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이스라엘을 다시 건국한 것은

애초 야훼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회복한 것이다.

이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구현되리라는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다.

 

 


근대 들어 이성과 합리주의가 신을 부정하자,

성서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성서의 무대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근대과학인 고고학을 적용해,

성서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성서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나온 배경이다.

성서고고학 탐사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미국 복음주의 교단과 그 목회자들이 주로 진행했다.

이들에게 고고학 탐사란 예단 없이 작업하고 나서 해석을 내리는 과정이 아니었다.

성서 기록을 실증하겠다는 목적 아래 발굴품을 예단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모든 발굴 성과는 성서 내용으로 수렴됐다.

 

 


맥시멀리스트 “가나안 전 지역을 파괴하고 정복”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 교수가 성서고고학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독실한 신자인 그는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에서 고고학 발굴을 하며 성서고고학 연대기를 확립했다.

그는 “성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옳고,

고고학은 이를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제자들인 조지 라이트, 존 브라이트 등은

성서고고학과 이스라엘 고대사의 주류 고전학파가 되고

성서 기록을 역사적 텍스트로 최대한 수용하는 ‘맥시멀리스트’를 형성한다.

존 브라이트의 저서 <이스라엘 역사>는

한국에서도 이스라엘 고대사의 표준 교과서로 여전히 원용된다.

 


대표적 주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설’이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간접적으로 실증하는 작업이었다.

올브라이트는 <석기시대에서 기독교까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은 채,

가나안 전 지역의 망을 파괴하고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무자비한 정복이

“앞으로 있을 유일신 사상 측면에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함으로써

유사한 두 집단의 결합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역겨운 신화로 가득한 가나안 사람들은 (…)

순결한 삶과 그 숭고한 유일신 신앙, 그리고 엄격한 윤리 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에 의해 대체돼야 마땅하다”고 이유를 들었다.

올브라이트는 대표 저서 <팔레스타인 고고학과 성서>에서

성서 기록 실증을 아브라함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시기를

기원전 20세기 혹은 19세기로 추정하고,

그의 손자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는

기원전 18세기 혹은 17세기로 손쉽게 비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조르에서 발굴된 고대 아치형 건조물과 마구간들은

솔로몬 왕위 때 것이라고 단언하며,

“솔로몬 시대는 확실히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물질문명이 가장 번성한 시기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역사성,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통일왕국을

‘실증’한 올브라이트의 성과는 195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건국 직후 현대 이스라엘에 더없는 건국 이데올로기의 황금밭이었다.

이스라엘은 올브라이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이스라엘 정복설, 솔로몬 통일왕국 등 거의 무력화

 

이를 수행한 사람이 건국 직후 참모총장을 지낸 이가엘 야딘이다.

고고학자 아버지를 둔 야딘은 퇴역한 뒤 고고학을 전공하고

벤구리온 정부의 국가적 차원 고고학 프로젝트를 맡았다.

1950년대와 60년대 그가 지휘한 고고학 발굴에서 나온

도기, 무기, 구조물, 예술품, 무덤은

모두 아브라함 등 ‘족장의 시대’ ‘엑소더스’ ‘가나안 정복’ ‘이스라엘 부족 영토 범위’ 등에 관한

틀림없는 증거로서 모두 제출됐다.

1964년 텔아비브대학 요하난 아하로니가 펴낸

<성서의 지도>는 이런 고고학적 성과의 대중적 결정판이었다.

모든 주요한 성서 인물들의 움직임과 사건을 고대 이스라엘 지도에 일목요연하게 그려놓았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유랑부터 솔로몬의 교역로까지 망라된 이 책은,

당시까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빼곡히 채워넣었다.

현대 이스라엘 건국은 과거 엑소더스에 이은 가나안 땅의 정복이 재현된 것으로 해석했다.

1960년 제작된 폴 뉴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엑소더스>가 그 결정체다.

이 영화는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땅으로 입성한

현대 이스라엘 건국자들(시오니스트)의 서사시를 담았다.

미국이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1967년 육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은

기대와 달리 주류 성서고고학계를 형해화하는 출발점이 됐다.

이때부터 등장한 2세대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등에서 고고학 탐사를 예단 없이 하려 했다.

그 결과는 성서고고학의 기존 주류 고전학파가 펼치는

대부분 주장과 학설이 붕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주류 고전학파가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열쇠였던 가나안 정복설은

이미 20세기 초기부터 독일 알트-노트 학파의 도전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알트와 제자 마르틴 노트는

이스라엘 기원은 평화적인 이주에 있다고 주장했다.

 

1979년 미국 뉴욕신학대학의 노먼 갓월드가 <야훼의 부족들>에서

이스라엘 기원은 내부 봉기에 있다는 내부 기원설을 내놓으면서,

주류 고전학파의 정복설은 무너졌다.

2000년 전후 핑켈스타인 등 고고학자들은

결국 주류 고전학파의 아브라함 역사성, 이스라엘 정복설, 솔로몬 통일왕국 등 기존 학설을 거의 무력화했다.

“1960년대까지 작성된 고고학적 근거는 벧엘, 라기스, 하솔과 같은 장소들이

기원전 13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있었던

가나안의 외부인 침략에 의한 대규모 전쟁 상황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여줬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학자들은) 성서를 유리하게 해석해왔다.”

 

(<이스라엘의 기원>, 삼인)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놓고

핑켈스타인과 논쟁을 벌인 윌리엄 데버 같은 주류 고전학파 역시 이를 인정한다.

 

 


“미래를 위해 고투하던 작고 세속적인 왕국”

 

결국 성서 논쟁으로 비화했다.

성서란 사료적 가치는 없고, 작성됐을 때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허구라고 주장하는

‘미니멀리스트’가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이미 19세기 말 독일 성서문헌학자들이 성서는

아브라함·모세·여호수아 등이 활약하던 때가

일러야 기원전 10세기 초반 처음 기록됐고,

수백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작성되고 편집됐다는 ‘문서 가설’을 주장했다.

19세기 말 독일 율리우스 벨하우젠이 체계화한 문서 가설은

성서는 작성됐던 시대 상황과 그 시대적 필요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핑켈스타인은 <발굴된 성서>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가 만들어진 세계는

위대한 도시들과 성스러운 영웅들의 신화적 영역이 아니라,

백성들이 전쟁·가난·불의·질병·기근·가뭄 등

모든 인간의 공포에 맞서 그들의 미래를 위해 고투하던 작고 세속적인 왕국이었다.”

 

그는 기원전 7세기 남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 왕 때

정치 프로파간다(선전) 작업으로 성서가 쓰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시리아에 이은 바빌로니아제국의 위협 앞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등 남유다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운명이었다.

야훼 일신교를 중심으로 개혁과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 차원에서 성서가 만들어졌다고 분석한다.

 

야훼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에 약속한 통일왕국과 영화를 다윗과 솔로몬이 이뤄냈고,

이들의 후손인 남유다 왕가가 이스라엘 정통성을 가졌다는 걸 보여줄 목적이었다.

국력에서 북이스라엘 왕국보다 훨씬 뒤처졌으나

간신히 살아남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 유민과 그 영역을 통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서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는 유대인과 유대교,

이스라엘을 둘러싼 신화와 오해를 푸는 시작점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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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에 관한 삶과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거 성서를 근거로 해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윌리엄 올브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에게 성서 고고학은

말 그대로 성서의 텍스트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고고학 발전을 통해서

서가 고고학적 증거와는 상반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는 성서학과 고고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근동 고고학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용어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에릭 H. 클라인, 성서 고고학, 류광현 역, CLC, 2013].

그리고 최근 수십 년간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의 발전과 더불어 변화를 겪어왔다.

최근의 성서 고고학(근동 고고학)은

인지과정고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고학적 해석에 있어서

성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논쟁이 학계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쇼셍크의 침입과 관련한 고고학적 자료의 연대결정,

블레셋의 단색토기와 2색토기에 관한 연대측정 등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 쟁점이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조와 관련된 유물의 연대결정과 같은 문제는

텔아비브 학파(이스라엘 핑켈슈타인 등)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윌리엄 데버와 로렌스 스태거 등)사이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논쟁이 지속되었다.

 

성서 고고학이 해결해야 할 앞으로의 과제는

비록 족장 시기 및 가나안 정복 이론이

성서학계와 고고학계에서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왕조와 분열왕국시대에 관한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가

어떤 식으로(통일왕조마저 회의적인 의견이 주류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모아지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릭 H.클라인, 성서 고고학, 류광현 역, CLC, 2013].

 


○ 성서 고고학이란?

 

성경의 내용을 기초로

팔레스타인 및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종교 고고학의 한 분야.

팔레스타인이 중심이 되기에 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고도 불린다.

 

기독교 유물의 진위여부와 유구와 유물에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밝혀내는것.

또한 이러한것을 토대로 성경에 나온 지리의 위치를 확정하는것이 주요 활동 내역이다.

과거 기독교에서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나,

현대에 와서는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나 역사를 검증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분야의 최대 업적은 사해문서를 발견한 것이다.

사해문서로 인해 고대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굴되었다.

 



– 성서고고학의 정의

성서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대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W.F.올브라이트는 이렇게 정의하였다.

“성서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


이 말은 성서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말이다.
성서고고학의 이러한 학문적인 성격은 지금까지의 성서고고학자들이

거의가 다 성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성서고고학 교수였던

G.E.라이트도 같은 입장에서 성서고고학을 성의하였다.

즉, “성서고고학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고고학적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성서고고학은 성서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고고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성서고고학이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지만,

목적은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증명’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의 목적은 성서기록의 ‘증명’이라기보다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 성서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폭넓은 고대 근동세계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내려왔다.

즉, 고대 근동세계의 문화와 역사는

직접 간접으로 성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고대 근동세계 전체는 성서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성서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되니 무대 및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고고학의 지리적 중심은 ‘성서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또는 Palestinian Archaeology)’이다.

 

 


○ 성서 고고학의 발생

 

성서 고고학의 발생은

기독교의 성경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바탕을 두고

실증사학의 길을 따르려고 하는 관점에서 유래하였다.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이 실제라는 생각에 탄생한 고고학의 한 분야이며,

이 분야를 전공하는 분들을 성서 고고학자라고 한다.

기독교 관련 신학자들의 필수 전공 학문이다.

초창기에는 홍해의 기적을 입증하려고 한다거나,

예수가 못박힌 골고다 언덕등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진짜로 밝혀진 사실도있고(베데스다 연못) 거짓으로 판명난것도 있다.

사실상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걸었던 고통의 길은

로마시대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종교를 통합하면서 지정했던 길 중 하나였고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과 같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 성서 고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고고학적 유물들을 발견하면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위여부를 밝히거나

새롭게 발견된 성서의 판본들을 해석하여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등의 일을 하며,

그에 따른 고대 팔레스타인의 문화나 역사등을 검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성서고고학의 발전 단계


성서고고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서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서고고학 준비단계(1798 -1890)


성서고고학의 출발은 고대 근동세계의 재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체로 19세기 이전까지는 찬란했던 고대 근동세계의 문명은 땅속에 파묻혀 완전히 잊혀진 문명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대 근동세계의 문명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은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에집트 원정의 장도에 오를 때 약 175명에 달하는 학자 예술가 과학자를 대동하였는데, 그들로 하여금 고대 에집트 문명의 유물과 유적을 면밀하게 조사 기록하게 하였다. 그 결과, 총24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에집트의 모습(Description de l’Egypte, 1809 – 28)’이 출판되어 유럽 지식인 사이에 선풍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유럽 사람들은 처음으로 찬란한 고대 에집트 문명에 접하게 되었고, 고고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 책의 출간 후, 특히 다음의 4가지 발견과 연구는 고대 근동세계의 고고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1)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의 발견과 상형문자의 해독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 때, 한 프랑스 병사가 나일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델타 지역인 로제타(현재 라시드)에서 현무암 석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로제타 석비이다. 위부분이 잘려진 이 석비는 3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는데, 맨 윗부분의 14줄은 고대 에집트의 필기체 문자의 일정인 데모틱(Demotic)체로 기록되었다. 밑부분의 54줄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 내용은 에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B.C.203 181)의 업적을 기린 것으로, B.C.195년에 세운 것이다.
1822년 프랑스의 천재적인 학자J.F.샹폴리옹(1790 1832)이 14년 동안의 연구 끝에 마침내 이 석비에 기록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형문자의 해독은 고대 에집트 문명의 신비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2) 베히스툰(Behistum) 암벽의 기록과 쐐기문자의 해독
1835년 영국군 장교 H.롤린슨이 이란 베히스툰 지역에서 깎아지른 듯한 100m 높이의 암벽에 새겨진 고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암벽에 매달려 일부를 탁본하고 필사하는 데 성고하였다. 이 기록은 3가지 종류의 고대어, 즉 고대 페르샤어,아람어,바빌론어로 쓴 것으로서, 사용한 문자는 모두 쐐기문자(설형문자)였다. 롤린슨은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고, 또 독일인 G.그로테펜트및 아일랜드의 신부 E.힝크스 등의 연구 결과, 1850년대에 마침내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개가를 올렸다. 쐐기문자의 해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 아시리아와 바빌론 제국의 문명 연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3)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발굴과 토판문서의 발견
1850년대초, 영국인 A.H.레이야드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발굴 하였다. 니느웨성은 고대 근동세계를 제패했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답게 성의 둘레가 13K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여기에서 레이야드는 산헤립왕(B.C.704 681) 의 궁전과 업적을 기록한 산헤립왕 업적비를 발견하였다. 또 1852 54년에는 H.라삼도 아슈르바니팔 대왕(B.C.668 627)의 거대한 왕궁과 방대한 규모의 왕실도서관을 발굴하였다. 아슈르바니팔 대왕이 세운 왕실도서관에서 발굴된 수많은 토판 문서들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그 후 1872~73년 G.스미스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니느웨 발굴의 토판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바빌론의 홍수설화(길가메시 서사시) 기록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당시 영구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몇 년 후인 1875년 스미스는 또 바빌론 지역의 창조신화 실화 기록을 발견하였다. 영국 사람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고, 런던의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바빌론의 홍수설화 기록의 나머지 부분이 토판문서를 발굴하기 위해서 스미스를 니느웨로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미스는 니느웨에 가서 그것을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 연구 결과는 고대 근동문화에 대한 관심과 고고학적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65년 영국에서는 팔레스티나 발굴기금(Palestine Exploration Fund)이라는 연구단체가 발족되어, 최초로 팔레스티나 지역이 지도를 만드는 등 성지 고고학 발전에 대단히 크게 공헌하였다.

2) 제1단계(1890~1914)
성지 이스라엘에서 과학적 방법으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90년의 일이다. 이 해에 영국의 고고학자 F.페트리(1853~1942)가 에글론(현재의 텔엘 헤시)을 발굴하였다. 페트리는 이 역사적 발굴에서 다음 2가지 공헌을 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학문으로서 성서고고학의 기초가 되었다.
첫째는 텔의 발견이었다. 페트리 이전에는 텔 (히브리어로는 Tel, 아랍어로는 Tell이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텔이란 고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오래 살게 됨으로써 지반이 점차 높아져서 형성된 ‘언덕’을 말한다. 즉, 고대에 한 주거지역이 전쟁이 나 화재로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는 과정에서 주거층 (stratum)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는 사이에 지반이 높아져서 자연히 텔이 형성된 것이다.
페트리는 에글론 발굴에서 가가 주거층을 한꺼풀씩 벗겨 나가는 식으로 발굴하는 주거층별 발굴방법(stratification)을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고고학 발굴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페트리의 추거층별 발굴방법은 미국 학자 G.라이스너와 C.피셔에 의해서 더욱 정밀하게 발전되었다.
둘째로, 페트리는 각 주거지층에서 출토된 토기 (pottery)로써 그 주거지층의 연대를 측정하는 토기 연대측정법(potter chronology)을 발전시켰다. 토기는 잘 깨지는 값싼 것이었으므로, 고대 사람들은 줄곧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토기는 어떤 주거지층에서나 풍부하게 발굴된다. 그런데, 페트리는 각 시대마다 독특한 모양 빛깔 무늬의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토기를 시대별로 체계화함으로써 토기가 발굴된 주거지층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트리가 개척한 토기 연대측정법은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서 고도로 정밀화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일은 1900년 예루살렘에 미국 학자들이 성지고고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를 설립한 것이다. 이 연구기관은 오늘날까지 성시고고학 연구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 제2단계(1918 – 48)
이 기간은 제1차세계대전 종결로부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로, 성서고고학의 ‘황금새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은 대표적 고고학자는 올브라이트이다. 그는 드빌(Debir, 현재의 텔베이트 미르심) 발굴에서 토기 연대측정법을 정밀하게 체계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고고학자일 뿐아니라 많은 고고학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영국 고고학자 휠러와 휠러-케년 발굴법을 고안하였다.
이 기간에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은 사해 두루마리의 발굴이었다.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는 구약성서 원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4) 제3단계(1948 70)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성지고고학의 주도권은 이스라엘 학자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자기 나라를 발굴한다는 유리한 입장에서 활발하게 고고학 연구를 추진해서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Y.야딘의 마사다와 하솔의 발굴은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대가로서의 위치를 확인 시켰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성지고고학 연구는 이스라엘 학자들만이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케년은 예리고가 B.C.7000년부터 이미 성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따라서 예리고는 역사상 최고의 성곽도시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 라이트의 세겜 발굴과, 드 보의 쿰란 발굴은 모두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업적들이다.

5) 제4단계(1970년 이후)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서고고학계에는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이 일어났다. 이 신고고학은 방법론적으로 여러 학문이 연계되어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즉, 신고고학은 지질학자,토양학자,뼈 전문가,인류학자,생태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신고고학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경험세계 전체, 즉 환경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문화현상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성서고고학의 시작

– 성서를 따라 탐사하다

1838년,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역사적 장소의 위치를 찾아내어 성경을 비판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185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탐사했다.
성서에 들어 있는 지리학 정보를 활용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현재 아랍 지명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로빈슨은 과거에 잊힌 성서의 지명들을 고대의 언덕 수십 개소에서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로빈슨과 그의 후계자들은 성서 속의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루살렘, 헤브론, 얍바, 벧스안, 므깃도, 하솔, 라기스 등 수십 개의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해 나갔다. 19세기 말 영국의 ‘왕립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고도로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서 지명 확인 작업을 추진하여 북쪽 요르단 강의 여러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의 네게브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의 세밀한 지형 지도를 작성했다. 이러한 지도를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지형 조건이 성경 기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 고고학의 발굴과 발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표준적인 연대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노력은 성서 본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성경 속에 기록된 인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에는 성서 이외의 자료도 필요했다.
18세기 말 유럽 학자들은 놀라운 기념 건축물과 귀중한 상형문자 명문이 방대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집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해서 기원전 1207년에 파라오 메르넵타가 세운 승전 기념비를 발굴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민족에게 거둔 대규모 승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서가 아닌 외부 자료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최초의 자료다. 그보다 조금 후대의 파라오인 시삭(왕상 14:25)은 22왕조의 셰숑크 1세로 확인되었으며 그는 예루살렘에 처들어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원전 945년부터 924년까지 왕위에 머물렀으며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이 원정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나중에 미국과 독일이 가세한 학술발굴단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궁전, 설형문자 등을 발굴해 냈다. 이 제국들의 미술가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 시대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리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왕들인 오므리, 아합, 예후와 남유다의 히스기야, 므낫세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서판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를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위 여러 나라의 통치 시대를 비교 분석한 결과 대단히 정확한 통치 연대가 작성되었다.

고대 요르단 왕국의 땅에서 19세기에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군대에 거둔 승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열왕기하 3장 4~27절까지 기록된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에 관한 성서 외적인 중요한 증언이 되었다.

– 올브라이트와 성서고고학

20세기 초반 20여 년 동안은 고고학의 황금 시기라 할 수 있다. 미국, 영국, 독일인들이 각각 팀을 만들어 사마리아, 게젤, 므깃도 등을 조사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인 학자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가 20세기 초에 개척한 성서고고학은 대형 언덕(텔, tell)의 발굴에 주력했다. ‘성서고고학’이라는 낱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32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였다.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올브라이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분석가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자입니다. 유럽 학자들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리 그는 성서와 고고학 자료들을 연결함으로써 성서를 더욱 역사적인 문서로 확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가 뒤이어 고고학을 발전시켜 1955~70년대에 성서고고학의 전성기를 만든다.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는 고고학을 성서학의 일부로 인식하여 성서 본문과 고대 근동학의 모든 측면을 연결했으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그 둘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자 많은 고고학자의 시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심지어 올브라이트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의 학설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올브라이트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열심에 치중한 나머지 고고학 결과물을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교한 고고학 접근 방법을 갖추지 못하였고 성경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발굴 조사의 결과 보고서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발굴과 조사가 더 진행되면서 고고학은 이스라엘 및 근동 전체에서 밝혀진 사실과 성서에 기록된 세계 사이에 물질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 방법의 발달과 함께 발굴과 조사가 진행되면서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 사이에 어긋나는 점이 더더욱 많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 속의 역사, 사건, 인물 등을 고고학의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으로서의 ‘성서고고학’이라는 말 자체가 논란이 있게 된다. 과거에는 성서를 ‘기준’으로 여러 고고학 유물과 자료를 ‘해석’해 왔지만, 이제는 더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서 자체가 고고학 증거와 여러 면에서 상충할 뿐만 아니라 성서 속의 사건들이 주변 나라들의 정치·경제 역학 관계와 맞물려서 벌어진 일이기에 단독으로 ‘오직 성서’만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Archaeology of Syro-Palestine)이라고 지칭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 또한 지리적 범위가 성서의 지역들을 모두 포괄할 수 없으므로 미국의 고고학계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근동고고학(Near Eastern Archae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성서 고고학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고고학으로 지칭하려고 한다.
또 한 가지 물음은 고고학이 과연 어느 학문 영역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사회과학의 틀 안에 있는 인류학과 연결이 된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 및 고대 근동에 관심이 있는 고고학은 문학적·언어학적 연구와 밀접해지면서 인문학의 한 분야에 놓이게 되며 고고학의 발굴과 해석은 자연과학의 응용법이 필요하다. 현대에는 생태학적인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대인은(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군사·정치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고학은 여러 학문을 종합하여 고대의 지표, 지리, 인구와 경제, 사회, 정치 구조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 성서와 고고학

성서 비평가들은 성서를 계속 해부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초기에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독립적인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성서 기록에 계속 의존해서, 성서를 기준으로 고고학 자료를 해석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새로운 사조가 성서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유물과 성서 원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게 된다. 성서의 땅에서 탐사 활동을 벌인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성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서 원본의 배경이 된 고대의 생활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고대 유적지를 발굴할 때 대상 유적지의 성경 관련 부분에만 역점을 두었던 관행은 사라졌다. 각종 동물의 뼈와 곡물의 씨앗, 토양 견본의 화학적인 분석, 세계의 수많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