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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알렉산더 대왕과 사후 분열된 헬라제국

Narin Pusil 2023. 2. 11. 22:00

아케메네스 제국의 세 번째 샤한샤, 다리우스 1세는,

지방 총독인 사트라프를 파견하여 지방정부인 23개의 사트라피(Satrapies)를 통치했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사트라프 지방통치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인도를 떠나기 전부터 착수했던 상층 관리들을 교체하고 

태만한 총독들을 처단하는 정책을 이제 더 한층 밀고나갔다. 

 

 
 

BC 326~324년에 사트라프 1/3 이상이 교체되고 

페르시스와 수시아나, 카르마니아, 파라이타케네 등지의 페르시아인 사트라프를 비롯한 6인이 처형되었으며 

코이노스(그는 약간 앞서 죽었음)의 동생 클레안드로스를 비롯한 메디아의 장군 3인이 

금품강요죄로 고발당해 카르마니아로 소환되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후로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휘하의 총독들에 대해 보인 엄격한 태도는 

어디까지가 자기 부재중에 저질러진 엄청난 실정에 대한 본보기로 처벌했다.

 

 

 

 

그리이스 도시국가 번영시대의 플라톤에서, 알렉산더 정복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드로3세 사후에 피튀기는 디아도코이들의 권력투쟁의 잔혹한 전쟁의 시대가 은둔의 에피쿠로스를 만들었듯이,

대적 삶의 정황에 따라 그 시대의 방편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 정상적 사고가 형성되었다.

 

        

알렉산더  대왕과  사후  분열된  헬라제국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  테베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마케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해  전쟁의  천재라고  불린  필립포스 2세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자신의  발  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의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의  지도자로  등극한  약관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다.   

 

                    이탈리아  폼페이  카사델  파우노  유적벽면에  묘사된  이소스  전투의  알렉산드로스와  말  부케팔로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돈(Sidon)과  비블로스(Byblus),  아라두스(Aradus)는  알렉산더에게  사절단을  보내  항복선언을  하고  황금왕관을  바쳤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발목을  두로(티루스)가  잡았다.  

 

육지에서  불과  8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두로는  알렉산더가  항복을  요구하며  보낸  사절단을  모두 죽여  바다에  던져  버렸다.  사실  두로(티루스)는  과거에  앗시리아의  산헤립(Sennacherib,  센나케립)이  공격해  왔을  때도  5년간이나  버텼었고,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NebukadnessarII,  네부카드네자르II세)의  포위  공격에도  13년간(BC  630-562)이나  버텼던  경력이  있었고,  두로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가  곧  원정군을  보내줄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에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던  알렉산더는  육지에서부터  두로(티루스)섬까지  방파제를  쌓고,  두로의  가장 취약한  남쪽  항구를  공격해서  마침내  BC 332년 8월에  두로를  함락한다.   테베에게  잔인하게  응징을  가했던  알렉산더는  두로에서도  동일하게  잔인한  방법으로  도륙한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알렉산더가  두로  백성  8천명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3만명  이상되는  두로  사람들을  노예로  팔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노예무역으로  큰  부를  누리고,  교만했던  두로(티루스)는  마침내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하고   처참하게  멸망당하게  되었다.   이후  블레셋의  가사(Gaza)  또한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지  않고  2개월동안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정복을  당한다.  가사의  남자들은  살육당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두로와  마찬가지로 노예로  팔려  나갔다.  생각지도  않게  두로에서  6개월,  가사에서  2개월을  지체했던  알렉산더는  이후  시리아와  유대와  이집트를  단숨에  점령하고,  이어서  페르시아  제국을  단숨에  차지했다. 

 

페르시아의  마지막왕  다리오 3세는  계속해서  도망  다니다가  자기  부하의  손에  암살당했다.  페르시아를  점령했던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은  페르시아의  화려함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알렉산더는  엘람의  수도인  수사(Susa)에서  막대한  보물을  노획하였고,  바벨론과  수사에서 무려  6천만  달러에  달하는  금과  은을  거두어  들였다.   

 

르세폴리스(Persepolis)는  BC518년  다리우스  1세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세운  도시이다     

그리고  페르세  폴리스(Persepolis)에서는  1억달러에  해당하는  보물들을  노략했다.  이처럼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고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알렉산더는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대  제국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더는  이  후  70개 이상의  지역에  자기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면서  평소  자신이  존중했던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페르시아의  문화와  융합하여  “헬레니즘(Hellenism)”을  만들어  퍼트렸다.  알렉산더가  퍼뜨린  문화와  사상을  ‘헬레니즘”이라고  하는데,  ‘헬레니즘’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리스의  헬라  이름이  바로  ‘헬라스(Hellas)’이고,  헬라인들은  그들을  “헬레네스(Hellenes)” 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다.  알렉산더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하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혼인하게  하여  헬라제국  백성의  범위를  넓혀간다.  이것은  앗시리아  제국의  혼혈정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앗시리아는  자기백성의  혈통은  순수하게  보존하고,  식민지  민족들의  혈통을  섞은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유럽출신인  자신  먼저  동방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동서양의  융합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헬라제국은  그동안의  앗시리아의  혼혈정책,  바빌로니아의  교육  이데올로기  정책,  페르시아의  지방분권  정책을  통한 세금확보와는  다른  정책을  펼쳤다.  알렉산더는  헬라제국  전체에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인위적으로  퍼트리려고  노력했고, ‘헬라어’라는  공용어를  사용하게  하여  언어를  통일하여  세계동포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인이었지만,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시켰다.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  등을  많이  사용했지만,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나중에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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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레니즘의 전반(全般) - 1. 그리스(헬라)풍 세계문화

- 1.그리스(헬라)풍 세계문화시대1) 과거에 식민지역에 페니키아인들이 그랬듯이 정복지의 고유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그리이스풍 문화’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헬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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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 

 

테베,  두로(티루스)와  가사,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등을  정복하고  헬라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는  잔인한  정복자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존중하고  전파하려  했던  철학자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만들고,  거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것  일반적인  정복자와는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리고  알렉산더는  정복전쟁중에도  밤마다  늘  독서를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알렉산더의  베개  밑에는  그가  매일 밤  자기전에  읽었던  ‘일리아드’와  그의  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렉산더가  보여준  전쟁중에도  독서를 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  것은  후에  나폴레옹이  따라할  정도였다.   알렉산더는  왜  다른  제국의  왕들과는 다르게  전쟁중에도  독서를  하고,  도서관을  세우고,  언어를  통일해,  헬라문화를  전파하려고  노력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때문이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에게는  7명의  아내가  있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필립포스 2세의  다섯번째  부인이었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다른  부인들은  모두  딸만 출산하였는데  올림피아스가  아들을  출산하였고,  오직  하나뿐인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필립포스  2세에게는  알렉산더가  각별했다.  필립포스  2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그리스에서  가정교사를  초빙해 왔다. 그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필립포스  2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로  모셔오기  위해  이미  파괴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기라시를  모두  복원해  주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가르침을  준  곳을  ‘선녀의  성역’으로  지정해  놓아  귀한  곳이  되게  했다.  마케도니아로  초빙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립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에게  도덕이나  철학뿐만  아니라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가르침들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청소년기의  알렉산더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존중하게  되었고,  매우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다른  제국의  통치자들과  다르게  매우  철학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있었던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알렉산더가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해가고  있던  어느  날,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가르침들을  책으로  만들어  출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즉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와  답장이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크  영웅전> 에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께.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친히  구전으로  가르치셔야  할  이론들을  책으로  발표한  것은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운  지식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해버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권력이나  영토로 써가  아니라,   지식으로 뛰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장     “그  지식들은  발표되었다고  말할  수  없소.     왜냐하면  형이상학에  대한  이  책은 내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오.”         

 

 

 

 프톨레마이오스와  유대인     

 

이집트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손에  넣은  알렉산더는  헬레니즘을  확산시키며  인도의   갠지스강까지  원정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인도까지  도착한  알렉산더의  부하들이  더  이상의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할  수  없이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오던  알렉산더는  BC  323년  다이시우스달(약  4월경)  30일에  32세의  젊은  나이에 원인모를  병으로  죽게  된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을  밝혀지지  않지만,  말라리아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차가운  물에  목욕하고  난  후  열병에  의한  죽음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독살에  의해서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최근에  와서는  뉴질랜드  캐서린  홀(Katherine  Hall)박사는  세균  감염후  길랭-바레  증후군에  의한  죽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알렉산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헬라  제국의  큰  변동을  가져왔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 놓지  않은  탓에  왕국은  혼란에  빠지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어  놓은  왕국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  아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록산나와  아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  부하  장수들은  각축을  벌이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류쿠스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를  뒤이어  통치자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결국  헬라제국을  나누어  각각의  왕조를  세우고  다스리게  되었다.       

 

프톨레미오스는  이집트,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  통에  도시들은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고  전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분열된  헬라  제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된  유대인     

 

먼저  마케도니아의  장군  라소스(Lagus)의  아들  프톨레미오스가  지리적으로는  접근하기  어 렵지만  부유한  땅  이집트를  차지했다.  BC  322년  11월  프톨레미오스는  44세의  나이에  이집트에  도착해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시리아로부터  알렉산더의  시신을  이집트로  가져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프톨레미  소테르(Prolem Soter, BC323-283)라  칭했다.  프톨레미오스는  자신의  왕조를  열어  클레오파트라  여왕때까지  장장  300년간을  지속시켰다.  지리적으로 이집트와  가까웠던  유대땅의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톨레미(편집자주: 프톨레마이오스)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처럼  가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하였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지만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이집트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테두리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하였지만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밝힌다.     

 

프톨레미오스  왕조는  BC  319년부터  BC198년까지  122년간  유대를  지배했다.  프톨레미오스 왕조의  유대통치는  비교적  온화한  통치자들이  등장함으로  유대는  평화  안정을  누렸으며,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  계속  자리를  보존했다.  이  당시  유대의  ‘대제사장’은  바벨론  포로기  70년  이후  새로  주목받는  주요  인물이었다.  바벨론  포로기  전까지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과  대  제사장,  제사중심의  체제였지만,  포로기간  70년간은  회당과  서기관과  율법(경전)중심의  생활로  바뀌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간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  대  제사장은  다시  유대의  핵심으로  복귀되었다.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치하를  받기까지  약 120년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디아도코이(그리스어: Διάδοχοι, 라틴어: Diadochi)

‘계승자’ 또는 ‘후계자’ 라는 뜻의 일반 명사이지만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계승자들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에피고노이(그리스어: Επίγονοι, "후손들"이란 뜻)이라고도 한다.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대 제국을 건설하자마자 바로 죽었기 때문에 제국의 계승권을 놓고 후계자들 간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를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부른다. 이들의 경쟁 시기가 그리스 외의 민족과 나라들에게 헬레니즘이 전파되는 시기이다. 즉, 디아도코이 전쟁은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디아도코이(그리스어: Διάδοχοι, 라틴어: Diadochi)

디아도코이(그리스어: Διάδοχοι, 라틴어: Diadochi) ‘계승자’ 또는 ‘후계자’ 라는 뜻의 일반 명사이지만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계승자들을 가리킨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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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X  의  탄생   

 

이집트에서  프톨레미오스  왕조를  세운  프톨레미  소테르는  40년을  통치했고,  그의  뒤를  이은  프톨레미  필라델포스(Prolemy Philadelphus BC 283~246)  역시  40년간  통치했다.    특히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     LXX)’  번역을  지시함으로  역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인구와  비슷한  1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세계적인  도시였고,  문화와  패션의  중심지였다.  스트라보는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를  일컬어  “인간세계의  가장  거대한  백화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히브리어를  읽거나  쓸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인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헬레니즘  세계  전체의  공용어가  되었고,  유대인  이민자  자손들은  히브리어를  점차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이곳에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세계  최대의  도서관에는  당시  20만권의  장서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학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더욱 발전시키길  원했고,  특히  도서관에  더  많은  좋은 책들을  소장시키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도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유대인의  율법서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하고자  했다.  다행히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이었던  데메트리우스  파레리우스(Demetrius  Phalerius)는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수집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당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는  책을  50만권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셉튜아진트(Septuagint) 70인역  성경     

 

이렇게  프톨레미오스  필라텔포스와  데메트리우스  파레리우스의  만남이  70인역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톨레미오스  필라델포스가  그의  도서관장에게  남긴  어록이  지금  남아있다.     “내  도서관에  꼭  있어야  할  책들  가운데  탐구해볼  만한  유대인의  율법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  책들은  유대인의  방언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어로  번역하기에  매우  힘이  든다고  했소.  그  문자는  수리아의  고유문자와  비슷하며  발음도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다고들  하오.  그러나  우리가  그  책들을  번역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  책들이  우리  도서관에도  있으니  필요한  것은  다  갖추지  않았소?”     70인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을  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  불리기도  한다.       70인역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  문화권에서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때문에 1세기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70인역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