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그리고 사회가 산다.
주석과 해석이, 시대적 요구에 따른 시대적 방편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포기 하지마라!”, 교회가 교회답게 만드는 방법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며 1960년대부터 보수 과정신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필립 클래이튼(Philip Clayton)이 2009년도에 펴낸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한글번역 : 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중심으로 필자의 생각과 함께 본문 말미에 싣는다. 신정시대(Theocracy) 혹은 왕정시대(Monarchy)의 신학관(神學觀), 거기에서 나온 주석과 해석을 21세기 오늘날의 시민주권국가 시대에 답습하는 것이 새로운 신학의 시대적 요구를 저해하는 가장 큰 장벽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필립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기에 그의 주장을 빌어 필자의 소견도 밝히고자 한다.
들어가며
필자는 몇년전 부터 시작한 신학 공부를 하기 전까지는 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사회가 살아나는 줄 전혀 몰랐다. 그저 예수님이나 하나님 그리고 성령을 볼모로 벌어지는 교회에 대한 목사와 그의 측근의 탐욕때문에 벌어지는 부와 권력의 원천 사수 혹은 쟁취를 위한 싸움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신학을 하고보니 시대는 시대시대마다 새로워지며 변천하는데 정작 처해있는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략 3천여년전 신정(神)시대나 적어도 5백여년전 교회(사제) 중심 권력의 왕정시대 상황에서 쓰이던 언어나 어휘, 그리고 문법 구조에서 생겨난 신학적 사고들이 21세기 시민주권 시대인 오늘날에도, 기록된 당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신학의 맹점임을 필자는 알게 되었다.
그런 신학관(神學觀)은 군주에 대한 충성의 맹세, 영광, 은혜, 감읍함 … 등의 군주시대의 용어가 당시 노예나 농노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던 계층적 신분적인 차별 구조가 행해지고 있었을 상황에서 습득된 지식에서 나온, 하나님을 왕으로 비유 혹은 대치하는 신학적 사고인 것이다. 그런 신학적 바탕을 두고 이룩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이면에 자리잡은 반지성적 무지와 편견, 그리고 물신숭배적 우상숭배와 더불어 차별의 원천인 왕정(王政,monarchy)의 하이라키(hierachy) 성향이 바로 사제들의 인생의 성공으로 나타나는 왕정시대에도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거짓과 교만과 부패로 나타나 지금도 눈앞에서 똑같은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의 리더쉽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필립의 견해를 빌어 신학도 무상(無常)함을 밝혀 본다.
필립은 기존의 신학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동안 내려오는 학문적인 신학이 사실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소위 전문 신학자들에 의해 종종 믿어야 하는 바를 믿도록 (그들과 그들에게서 배우는 자들 서로가 의도했건 하지 않했건 간에) 신자들을 훈련해오고 있는 그런 구습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필립 클레이튼 (Philip Clayton)은, 자신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쓰고 편집해 왔던 학문적 신학지식들이 사실 교회 혹은 신자를 돕는것이 아니였고 오히려 교회와 신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고백하며 <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를 시작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신학자나 목회자들만의 영역으로 여겨 온 <그저 기억하기만 해도 되는 신학>을 이제는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신학으로 일반인에게 돌려주어, 지금까지 삶과 묵상을 통하여 경험해 온 자신들이 이해하고 성숙시킨 신학적 사고를 자신의 사고에 따른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 할 수 있게끔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야 한다고 하며, 지금 기존에 익숙해 있고 공식화 되 있는 그동안의 신학적 저술들은 이제는 21세기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신학의 이성적 탐구와 그에 따른 논리가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경기(競技,Game)는, 구 시대의 신학에 익숙해 있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는 버거운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그런 사고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일이 된것은 다음의 두 신학자와의 만남 때문이었다고 한다. “ 예수라는 길과 그 길을 가기 위한 훈련의 목적은 우리를 더 종교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깨어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향해, 가족과 인간 사회를 향해, 깨어 있도록 ….” 그리고, “모든것은 변해야 하며, 지금이 전환(轉換: Transformation) 의 시대다” 라고 촉구해 오고 있는 브라이언(Brian McLaren)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라고 말하는 존 캅 (John B. Cobb, Jr)과 함께 한 생각의 교류에서다.
따라서 지금의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비극은 신학의 전문화 독점화로 자신들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옛것만을 전수만 했지 신학의 시대적 발전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리 보전에만 신경써 왔던 신학자들의 교수법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학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를 정리한 명제들에 불과하다면, 신학은 정말 가치없는 것이 되었다”라고 필립은 갈파(喝破)하고 있다.”(63) 필자가 보기에 필립의 말인즉슨, 학문의 창조적 성취를 이뤄내야할 대학이 아닌, 일반학원에서의 점수따기 위한 지식전수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와 같다. 신학이란 신학을 하는 주체와 그의 경험,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대와 문화 등등 모든 역사적 배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브라이언이 말한 것 처럼 <신학은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필립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첫째로, 신학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기독교 변증은 초기 기독교때 부터 Defence trauma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바울이 행했던 Defences나 성서의 해석을 초기 당시에는 케리그마로 영위하다가, 그 당시 예수를 따르던 다른 집단들(예: 영지주의자)의 논리있는 대항에 이른바 논리가 바탕이 된 카톨릭 신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만의 신학이 아닌,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기독교라는 종교적 확신에 있는 필립은, ‘시대와 지역, 민족과 국가, 문화와 문명등의 여건과 상황에 따라 신학 역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예수의 질문을 ‘ 오늘날 지금 이 시간에 그 질문에 접해있는 한사람 한사람들은, 각자가 처해있는 여건과 상황속에서 다르게 받아 드리고 있다.’ 고 합니다. 이것이 필립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입니다. 그에 말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한 각자나 혹은 집단의 논쟁으로 나타나는, 회의론자와 신자 사이의 더 이상 공개 토론이 아니라 많은 제자들의 가슴속에서 터지고 있는 내적 투쟁’임을 말하고 있는 트립 풀러(Tripp Fuler)와 ‘주류 기독교 신학을 포기하고, 지금 이 시간 오늘날의 대중의 호응을 받는 대중들에 지지를 받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토니 존스(Tony Jones)는 필립 클래이튼을 옹호하며 역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언어도 사상도 믿음의 체계등도 시대와 지역과 민족과 상황에 따라 패러다임 (Paradaim)이 다르고 변천해오고 또 변천해 가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교회의 건물, 예전, 전통등은 구 시대의 유산이고 더 이상 그 시대의 사고가 지배하지 않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구 시대의 신학적 사고에서 나온 학문인 신학의 세계를 21세기에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고통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서 탈피하라
▶ 관대한 정통(=A Generous Orthodox) ?????,,,
“모든것은 변해야 한다(Every thing Must change)”에서 브라이언(Brian McLaren)은 <21세기 전환의 시대>를 맞이한 교회 역시 대 전환의 과정을 열정적으로 밟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교회의 길 건너에’ (Church on the Other Side) 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최고의 예술가 혹은 과학자 같이 ‘진리’에 열정을 다해 연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제도, 서약, 재선(정년보장), 책 판매등에 관심을 갖는 정치가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아직도 서투른 목사이고, 진부한 신학자이지만 진리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가 내게는 중요하다.“ 라고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신앙과 교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래전 부터 내려 오고 있는 마치, 프로 스포츠 스타와 같이 전문성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는 목회, ‘신학의 전문화’(the professionalization of theology) 라고 존 캅(John Cobb)은 말하며, 신학과 교회 그리고 사회의 삶의 거리는 신정시대, 왕정시대는 물론 가까이로는 100년전의 근대 사회와도 비교할 수 없이 사회가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종교적 믿음의 체계는 진리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맹목적인 헌신을 요구해오고 있다.” 고 개리 거팅(Gary Gutting)은 말하며 “믿음체계, 그것은 진리라 하여 자체적으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토의와 평가위에 서있게 하는 것을 체념하거나 포기하고 있다.”고 한다(88). 그 결과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변천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왕정시대의 사고에서 나온 신학적 결과물들을 수용하고 신학의 시대발전에 기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학의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물론이고 시대적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된 목회자들이 시대에 서투른 신학의 성서적 이해와 대중 심리학과 ‘시대의 징조’를 섞어 설교를 하는 세대에 뒤 떨어진 가르침을 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 실재(reality)란 과정(process)이라고 보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같이, ‘고정 불변하는 실재(reality)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또는 안목)만으로 이해되는 우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니다’ 곧, 모든 일체 만물은 무상(無常,변화)하다는 것이다. 그의 신(神)에 대한 개념 설정과 같이, 21세기 오늘날에는 지난날의 고전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인 신학적 사고를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살아계신 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생물의 개념이다. 생물이라면 반드시 변화한다. 심지어 시간을 두고 무생물도 변화하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지난날의 고전주의적, 전근대적인 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신학자(사제) 들은 신(神)의 변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것이 변하는데 대한 상실감, 그래서 오는 무상(無常, 변해감) 에서 오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상(常, 불변)으로서의 변함이 없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에 의해 상정된 것이 바로 신(神)이고, 그 존재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입지조건에 대한 단단한 논리가 되는 여건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 인간과는 다른 무한한 힘의 존재 아래서 이루어지는 하이라키(Hierachy)가 성립이 된다. 그것이 성립되는 것은 정의, 사랑, 정치, 종교, 전쟁등등의 입지 조건에서 나오는 모든것들의 위에는 <이익>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별로 부터 나오는 이익… 바로 부와 권력과 명예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의 자녀가 과연 오늘날의 지금의 교회에 다녀야하는가?”
“그들이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말입니다. 필립은 3장에서 역시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리론(F.LeRon Schults)이 말한 기독교 내부의 원초적인 신학갈등 양상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이 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복음주의자 루터가 보기에 성만찬에 대해 그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쯔빙글리는 자유주의자가 아닌가 말이다. 이와같은 대립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으며, 다원적인 종교문화를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교회를 멀리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온다고 필립은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신학적 주장들은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하여 나온 것이며, 나름대로 교회와 사회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신학적 주장을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라고 주장하는데서 부터 문제가 발생하며 교회의 비극이 시작하게 된다. 서로 그렇게 주장하는 한, 신학은 교회와 사회를 죽인다는 것이다.
신학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필립이 깨달은대로 “신학함이라는 것은 옛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해 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신학은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해야합니다. 그것도 의심과 함께 말입니다.” 그래야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신학 전문가 계층에 맞대어 바로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사회가 세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깨닫고 있다. 예수 가르침으로 베드로가 배에서 튀어 나와 물위를 걸었듯이 말이다.
신학(Theology)과 교회는 낡은 사고에서 나와 갈릴리 바다위를 걸어야 한다.
“교회와 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 신학의 변혁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 ” 이라는 원 제목 처럼, “신학이 변해야, 교회는 물론 사회도 산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21세기를 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훨씬 달라진 세상에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를 통찰해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아직도 신학마저도 그리이스 신화에 매몰되어 있던 15-16세기를 통해, 지구를 한바퀴 돌아오던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세계가 한층 더 가까와지던 시대, 그때도 대서양 뒷편 낭떠러지로 떨어져 하데스 지하세계로 바다물이 들어 간다고 믿고 있던 루터와 같은 신학자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입문서의 신론 성령론등의 7가지 질문을 말하고 있는, (마치 자신 혼자서만 하나님의 말을, 천사들의 대화를 였들어 쓴것 같은 ….) 그와같은 신화적이며 봉건적이고 하이어라키적 신학적 사고들 뿐만 아니라 그런 신학의 틀에서 나온 물음 자체마저도 변해야 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필립은 교회를 포기하지마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행태들을 볼 때 필자는, “교회에 매몰되지 말고, 예수 가르침에 정진하면서 사회를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가르쳐도 당시까지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라는 배설물과 같은 구습의 지식(?)에 쩔어 도무지 예수-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외치던 예수 .... 사방이 트여있는 갈릴리 바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평(地坪)위에 떠있는 구습의 배설물로 가득찬 배 안에서 부터 신학(Theology)과 교회가 튀어나와 물위를 걸을 수 없다면, 다시 말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마9:17)’ 라는 예수 가르침에 따른 시대적 변화의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또 다르게 말하면, 2천년전의 다메섹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21세기 패러다임에 맞출 수 없다면 ....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의 비극은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역시 머잖아 ‘필립 클레이튼’ 도 동감할 것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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