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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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헤럴드 S. 쿠쉬너의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양미희 #옥성호 서평

Narin Pusil 2020. 8. 12. 09:14

  

 

 

양미희 | 미국독성학 전문가이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약학대학(독성학 교실) 교수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박사과정(구약학) 중에 있다.

 

1,  헤럴드 쿠쉬너의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2006년 발행)는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지 10년이 넘는 책이고 또 서로 다른 역자가 번역하기도 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이,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을 계속 견지해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영향력 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2. 우선 이 책의 저자는 유대교 랍비이며 14살 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이다. 저자 자신이 일평생 하나님 말씀만 붙들고 산 사람으로서 자신이 겪은 고통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악의 공존에 대한 부조리에 대해 우리에게 대답(올바른 혹은 이성적 답변)을 제공하는 새로운 신정론((神正論, theodicy)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 책은 전통적인 신정론, 즉 하나님은 측량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연단을 통하여 심판하신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인간을 돌려놓으시려 하신다 등의 주장에 대하여 최근의 신정론들, 예를 들면 저항적 신정론(하나님에 대항함으로, 하나님의 편이 되도록 요구하는), 인격 형성적 신정론(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해방적 신정론, 과정적 신정론(아름다움과 비극이 함께 얽혀 있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들의 고난을 공유하신다) 중에 과정적 신정론에 가까운 전개를 보인다.

4. 이 책의 원제목은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인데, 저자가 그때 어떠해야 하는가에 주목하여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이성적인 위로의 방법과 지혜(논리)를 제공하려 했다면, 역자는 책 제목을 통해 왜? 라는 신학적 질문을 먼저 던지고 있다. 저자가 삶의 방법에 중점을 둔다면, 역자는 대응 방안은 파생되는 것이니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왜, 일어날까’를 강조하여 전통적 신정론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거쳐 이성적 신정론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5. 솔직히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한 번 더 시야를 넓혀주고 생각을 전환하게 하는 힘을 전해 준다. 그 힘은 늘 카운슬링(상담)의 기본인, 즉 ‘잘못된 생각으로 고난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쿠시너의 다른 책인 Conquering fear에서도 이 책과 같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난을 의도적으로 주시지 않았으나, 우리에게 고난을 이길 힘은 분명히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 쿠시너의 믿음이며 주장이다. 바로 거기에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위대함이 있지 않은가 싶다.

 

6.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욥의 위로자’라는 말은 이제 누군가를 도우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요구와 감정보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 잡혀서 결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마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 되어버렸다”는 대목에 주목하고 싶다. 어설픈 신학으로 하나님을 잘못 정의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목회자와 상담을 해 주는 사람, 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조언을 해줘야 하는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 모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7. 이 책은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과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해 과도하지 않게 다시 생각하게 함으로써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견지할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이 하나님은 초월자, 전능자라는 전통적 신정관에서 보면 다소 급진적인 사고로 보일 수도 있다. 저자의 생각으론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전보다 사랑의 손을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가 본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착한 사람에게 고난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은 어쩌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고난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럴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어려운 수술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위안을 얻는 것이지 그 수술 자체를 하나님이 어쩌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8. 이 책은 고난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는 못하시는 분(혹은 안 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하나님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구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제껏 전능하신 하나님, 초월자로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다소 도전적이다. 전능하지 않은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동안 고난을 통해 견지해온 신앙의 아름다움과 성숙함을 만날 수도 있다.


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책을 읽으면 이스라엘에서 위와 같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왜 나왔는지 이해하게 되며, 또 이 기도를 통해 앞으로도 고난의 문제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하나님은 고난도 주시고 기쁨도 주신다는 ‘주시고’의 신학을 넘어서서 욥의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과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기도와 외침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돕는다.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고난 앞에서도 인류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갔고, 고난과 내 신앙이 무슨 상관이냐는 배짱 있고 성숙한 하나님의 신앙을 견지해왔다. 그 신앙의 신비를 이제 쿠시너의 통찰을 통하여 힌트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즈」가 이 책을 ‘인류의 영혼을 빛내 준 책’이라 극찬한 모양이다.

 

이 책의 구성은 서문(이 책을 쓴 특별한 이유)을 시작으로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는가,     2. 한 사나이 이야기,    3.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4. 착한 사람이라고 예외는 없다,     5. 인간은 동물적이면서 신적인 존재다,     6. 누구나 자기 몫의 고뇌와 아픔을 지니고 있다,   7. 불행에 굴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은?     8. 삶의 불완전함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우선 서문이 독특하다.

  저자는 14년을 살고 간 아들을 위하여(기억하며) 이 책이 쓰였고, 사무엘하 12장 22-23절의 다윗이 밧세바 사이의 첫 아들을 잃었을 때 그가 어떻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지로 말문을 연다.  ‘나와 같은 곤경에 빠진 그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이 글을 쓰기로 했다’고,  ‘신앙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만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신앙을 지키거나 종교로부터 위안을 받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이 글의 목적도 분명히 제시한다.

 

  저자는 ‘무조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는 이런 고통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재차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하느님을 변호하거나 하느님에 대하여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저자는 삶으로부터 상처받은 한 종교인으로서 병마와 죽음, 부상이나 소외, 절망 등으로 상처받은 사람들과 이 세상의 정의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신정론을 펼치려 한다. 그의 통찰은 착한 사람이 당하는 고난, 이 아이러니하게 보이는 현실에 대해 과도하게 해석하지도 않고 일부러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각 장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① 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는가

 

  고통의 불공정한 분배를 문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부분은 네가 담당해야 하는 몫이야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나름의 합리화를 시작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라든지, 죄의 대가라든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세상을 보다 질서 정연하게 이해하고 권선징악적 교훈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종교가 있었다.

 

  저자는 ‘삶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나 종교는 그들을 위로하지 못하였다. 종교는 오히려 죄의식을 통하여 그들을 더 아프게 했다’(21쪽)고 문제제기를 한다. ‘교육적인 고난이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합리화는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것도 고통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불의를 외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핑계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성을 낭비하고 있다고 본다. 대신 저자는 이 세상을 최대한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 곳인 바로 여기에서 의미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 쾌락주의는 아니나 그때를 알맞게 살라는 전도서의 지혜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저자는 고통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어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② 한 사나이 이야기

  한 사나이의 이야기는, 예상하셨겠지만 고난의 대명사 욥의 이야기다. 적어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한 욥의 친구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욥은 자신의 비참함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였을까,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정의나 선악,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도 종종 나쁜 일을 당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심지어 하나님은 완벽히 전능하지는 않으나 선한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편다. 가끔씩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면 많은 것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맞선다는 생각 대신 우리가 가진 불의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도 똑같이 가지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다.

 


③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대신 재난을 당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도 없다.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사건을 통하여 우주의 혼돈, 그것은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고약한 것임을 알게 된다.

 

 

착한 사람이라고 예외는 없다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의로운 사람을 위험에서 건지려 자연의 법칙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본다. 자연은 도덕적으로 장님이며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진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사람들이 재건하는 용기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손길인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기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이 일에 대하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⑤ 인간은 동물적이면서 신적인 존재다

  선악과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 고난은 징벌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고 단순한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켰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가운데 진화하도록 했으며 그 진화는 되돌릴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자유를 빼앗으면서 우리 행동을 저지하지 않으신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이상 하나님도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의 글을 인용한다,

만약 누구든 하나님이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6백만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져야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생각을 뒤집어야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126쪽)

 


⑥ 누구나 자기 몫의 고뇌와 아픔을 지니고 있다

  6장은 저자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많은 예화를 통해 삶의 상처에서 나오는 분노, 죄의식, 질투에 대하여 다룬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기보다 잘 분출하고 다스리기를 권한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욥의 위로자로 나선 친구들의 어설픈 조언처럼 더 그들을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고뇌와 고통은 세상에 골고루 퍼지는 것이 아니라 널리 퍼져있다. 누구나 자기 몫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⑧ 불행에 굴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 단계, ‘세상의 비극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정성은 믿지만 항상 그것을 구현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삶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166쪽)라는 문제에 도전한다. “이것만 들어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이러한 기도는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서원에 대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은총은 팔고 사는 것이 아니다’라며 일침을 가한다. 대신 연대, 즉 관심 있는 공동체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 그 문제를 극복할 힘이 준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운명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 비극에서 살아남을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가 응답을 받는 한 예이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하여 우리의 성숙한 기도는 제대로 계속되어야 한다.

 

 

⑧ 삶의 불완전함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8장은 저자의 모든 주장이 압축된 결론의 부분이다.

7장에서 이미 그런 전조를 알려주고 있지만 마지막 8장에서는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한 사무엘하 12장 19-23절 말씀이 다시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오래전 내가 자랄 때나 신학생 시절에 믿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이제 그의 한계를 깨닫는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 품성의 진화와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통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다.’(193쪽)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초점을 두기를 원한다.

 

  저자는 『고난』의 저자 죌레의 글을 임용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를 ‘악마의 순교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의 증인’이 되게 그의 속죄와 영생은 우리에게 달렸다고 말하며, 우리가 이 비극에 대하여 어떻게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길 권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막아 주지는 못하나 그것을 극복할 힘과 인내를 주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창조하며 살기로 결정한 욥, 용서할 줄 아는 능력,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이 불완전한 삶을 용감하고 의미있게 또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이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종종 하는 고민, 아니 고민해야만 하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때도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 이웃, 그리고 기도가 있으니 우리는 ‘내일이 두렵지 않다.’

 

 

■아래 옥성호님의 글이 더 좋다.

 

1.  미국에서 큰 존경을 받는 원로 랍비인 해롤드 쿠쉬너가 1981년에 쓴 "왜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는 나온 지 40년이 되었는데도 미국에서 여전히 인기있는 책이다. 희귀병에 걸린 외아들로 인해 고통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쿠쉬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고통에 관해 얼마나 얄팍하고 위선에 찬 변명을 위로라고 부르는지 그 누구보다 일찍 꿰뚫어 보았고, 그런 그의 깊은 통찰은 아들을 잃은 후 몇 년이 지나서 나온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통에 대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신론이다.

 

2,  완벽하게 세상과 인간을 만든 하나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이 세상은 정의로 넘칠 수도 있고 또 끔찍한 고통으로도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 이신론이다.

 

3.  이에 반해 이신론과 정반대에 위치한 기독교의 주장,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의 역사를 24시간 내내 주관하고 있다는 믿음은 결코 현실과 조화할 수 없다.  "아니, 하나님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악한 자가 번성하고 도리어 선한 자가 고통을 받는다고?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억울함'이라고?"

이건 뭐 경찰이 많을수록 살인과 절도가 더 창궐한다는 소리와 하나 다를 게 없다.

 

4.  그럼에도 쿠쉬너가 내리는 '이신론'이라는 결론은 결코 환영받는 답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모든 일에 나름의 의미와 목적이 있기를 바라니까. 아무리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했다고 해도 저기 멀리서 한가하게 쉬고 있다는 신을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도리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5.  "뭐라고? 지금 이런 고통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는 거야? 아니, 내 친구의 그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라는 거야?"... 반문 정도가 아니라 분노를 느낄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들의 황당한 죽음에서 조차 의미를 찾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니까.  ... "별이 된 우리 아들 때문에 이제 밤하늘은 더 아름답게 빛날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 간증이 다 이런 수준이긴 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

“아니, 하나님은 무슨 비극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가족 전도를 못 하나? 왜 꼭 가족 중 누군가를 죽이거나 아니면 아버지 사업을 망하게 해야 하지? 그거 참 성격 한번 이상한 신이네.”

 

6.  아픈 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어령 씨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있다. 저자가 주는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커서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이다. 그래도 이어령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고통과 '기독교의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은 하지 않았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정작 그 책에서 얻은 것은 기독교 교리가 머리에 주입되는 순간 그 누구라도 ‘객관성 상실’이라는 심각한 손상을 뇌에 입는다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깨달음이다.

 

7.  별로 환영 받지 못하는 이신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쿠쉬너의 책이 사십 년 가까이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그래도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이유도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 안 되게 불공평한 세상이 진실이고 삶의 민낯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의미'니 '목적'이니 논하는 것은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8. 이런 식의 자기 기만을 극치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책이 하나 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필립 얀시가 쓴, '하나님께 실망했습니다'이다. 제목에서 부터 독자를 낚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욥기를 연구하다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아예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한 신학생을 만난 이야기로 전개되는 이 책의 초반은 나름 기대감을 갖게 한다.

 

"와, 기독교 작가가 이 정도로 진솔하게 현실을 직시한다고?"

그러나 그것도 잠깐.... 초반 전개는 말 그대로 떡밥에 불과했다. 애초에 회수할 생각도 없었던 무책임한 떡밥. 결국 '전지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라는 틀에 갇힌 얀시와 같은 사람이 이르는 결론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님, 실망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알 수 없어. 하지만 하나님이 너 보다 더 아파서 울고 계셔. 하나님도 외아들을 죽게하셨어. 그런 하나님 심정, 생각해봤어?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하나님 보다 더 잘 아는 분은 없어. 우리를 위해 외아들까지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를 찾고 힘을 내자."

그 외아들, 부활해서 지금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생략하자.

 

9.  자.... 그럼 왜 얀시와 같은 사람은 이런 결론에 밖에 이를 수 없을까?

결코 버릴 수 없는 전제, '전지전능하고 선한 하나님' 때문이다.

매일 밤 친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는 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딸의 머리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전제가 있다.

"아버지는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해."

이 전제가 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강간하는 아버지를 딸은 어떻게 이해할까?

"강간에는 내가 모르는 선한 뜻이 있을 거야...."

상식과 합리적 사고를 왜곡하는 그릇된 전제는 강간마저 사랑으로 둔갑시킨다.

믿었던 목사에게 강간 또는 성추행을 당하고 침묵하는, 도무지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딸과 뭐가 다를까? 그 피해자들의 머리에 박힌 전제가 무엇일까?

"저 분은 하나님의 종이야,,,,"

상식과 합리적 사고를 왜곡하는 그릇된 전제는 짐승마저 신의 종으로 둔갑시킨다.

종교의 무서운 힘이 여기에 숨어있다.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릇된 전제를 최대한 많이 많이 머리에 심는 것, 그것도 가능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진리'라는 이름으로 세뇌 작업을 하는 것...........(기독교 교육이 그러하다)

 

10.  쿠쉬너의 "왜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는 2천년 대 초 어느 목사가 번역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로 팔리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이라는 운명을 맞았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팔리지 않은 데에는 한국 기독교인에게 이신론은 이단 중의 이단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이 책이 다시 출간되어 필립-얀시 식의 고통 해석이 주는 피해를 줄이는 백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11. (다행히 e-book은 아직도 판매되고 있다)(중고책이 있다)

책 자체가 사라지고 있지만 좋은 책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처세술, 만화책, 입시 관련 그리고 연예인 사진이나 나오는 책이 아니면 아예 팔리지 않는 세상이 되어간다. 팔리지 않는 좋은 컨텐츠에 투자하는 출판사가 줄어드는 건, 손님이 줄어 신선한 생선으로 초밥을 못 만드는 일식집에 손님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과 똑같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럼에도 좋은 책, 나를 고민하게 하는 책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인간의 무력함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지금 같은 때에 신에 대해 고민과 더불어 고통을 직시하게 하는 숨겨진 책의 가치는 매일 값이 치솟는 금 보다 귀하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는 페친들 중에 비록 헌 책이라도 쿠쉬너의 책을 구해서 읽는 분이 많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