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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② [고대 문명의 세계와 성서 - I ] 고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와 성서의 세계

Narin Pusil 2022. 2. 17. 12:21

 

 고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와 성서의 세계

     (주경식, 17 / 02 / 2022)

 

 

 

■인문학의 한 지류인 역사를 찾아서

 

로마의 지성 키케로(BC 106-43)는 기원전 5세기에 『역사』를 기록한

헤로도토스(BC 484-425?) 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집필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글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그리스인들과 비-그리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고대사회는 전쟁이 빈번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전쟁들은 전쟁에 참여한 개인을 넘어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만큼 고대사회의 전쟁은

일반 백성들의 삶 중심부에 들어와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들은 신화와 함께

백성 들의 종교 체계와 사상에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고대의 단순한 역사 기록이기보다는

일종의 역사서술(문학적 창작행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시대에 역사를 기록한 방법은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형식과 혹은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표현한 ‘신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단순한 연대기적 역사기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신화적 요소들을 차용한

신화도 아니다. 신화의 세계를 걷어내고 자신이 직접보고, 직접 들은 것을

자신의 서술로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양대 세력이

왜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실을 묻고 찾아 탐사하는 탐구자”의 자세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래서는 그는 당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가능한한 다 찾아 다녔다.

 

북으로는 스키타이, 동으로는 유프라테스를 내려가서 바벨론까지,

남으로는 이집트의 엘레판티네, 서쪽 으로는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까지 여행을 했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아프리카인, 카르타고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이탈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스키타이인등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들은

『역사』의 중요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가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와 유대의 역사

 

이탈리아의 저명한 고대 역사학자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o, 1908-1987)는

기원전 5 세기의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강력한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해왔던 것에 주목했다.

이러한 공동체의식이 잘 고양되고 구현한 것이

바로 "역사"를 서술한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유대역사라 할 수 있는

구약성서의 일부(‘여호수아서’ 부터 ‘열왕기 상, 하’까지)와

헤로도토스의 『역사』 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둘은 분명 고대 근동지역의 오랫동안 내려왔던 과거 기록의 형식들과 달랐다.

단순한 역사기록도 아니고 신화적 창작물도 아니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구약성서의 일부(역사서)는

모두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단순한 역사기록을 넘어 서사적(문예창작)요소가 많이 담긴,

역사기록이 아니라 역사 서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구약의 역사서와 헤로도토스의 『역사』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서 생성의 객관적 조건이 달랐다.

 

유대인은 민족의 땅(Israel)을 상실한 가운데,

야훼 신앙을 강화하는 종교개혁을 통해 유대 정체성 회복과

민족을 구원하려는 차원에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득권 타파및 남유다인 대동단결)  나머지는 . .화냥년, 기생충

 

ㅡ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전에, 바빌론에서 유대교는 만들어 졌습니다.

반면 『역사』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자긍심 속에서,

그리스인(Hellenes)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해 쓴 것이었다.

 

역사 서술의 형식과 내용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유대의 역사서들은 여러 저자들이 편집한 편찬 물이며,

야훼가 민족사를 주관하는 서사였다.

반면, 『역사』는 헤로도토스 개인이 탐구한 것이며,

신들이 퇴장한(신화적 요소가 사라진) 역사적 공간에 대한 서사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유대의 ‘역사서’는 형식과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역사 서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와 구약의 역사서(여호수아부터 열왕기서)는

당시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공통의 인명과 지명들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대 학자들에게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수메르문명의 몰락

 

수메르인들의 역사가 끝나는 시기부터 고대 근동의 역사는

고바빌로니아(BC 1895-1595),

→ 앗시리아(고-앗시리아BC 1392-934, 중-앗시리아 / BC 911-605 신-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BC 626-539), 페르시아(BC 550-330)등의 대제국들의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청

동기시대 (Bronze) 시대가 끝나가면서, 철기시대(Iron age)가 시작되었다.

철을 소재로 한 강력한 무기와 전차등의 보급으로

대군단의 이동이 수월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대한 제국들의 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대제국들의 시대가 구약성서에서 주로 언급되는 시대적 배경이 된다.

 

역사속에 의미 있는 정치사회집단으로서 유대인들의 활약이

나타나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수메르인들은 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 때까지

아직 사회적 집단으로 정체성이 남아있었고

미약하지만 정치적으로 재기를 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소멸되어 역사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하지만 수메르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문명과 문화의 유산들은

후대의 제국들에게 계승되어 다양하게 변형된 모습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제국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수메르 문명의 흔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사라졌으나, 오랜 세월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들과 부딪히며 함께 생활해온

셈족들이 대제국들을 건설하면서 종교, 문화등 비-정치적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수메르인 들의 유산이 전달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이방인들의 제국인 앗시리아와 신바빌론은

바로 이 셈족들이 건설한 대제국이었다.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빌론은 함무라비왕이 통치했던 고바빌로니아가 아니라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이다.

바빌로니아(Babylonia)는 바빌론(Babylon)을 수도로 한 제국의 이름이지만,

성서에는 바빌론이란 용어가 제국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바빌로니아와 신바빌로니아는 천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 제국들이고

지배민족도 다르지만,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수도로 하고 있고

같은 나라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두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신, 구(고)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앗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의 두제국과 후대의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시대를 지나면 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기록하였다.

 

 

 

 

고바빌로니아 제국(BC1895-1595)

 

 

▶라르사의 림신이 이신을 정복하고 세력을 키우고 있을 무렵,

북쪽으로 과거 아카드 왕국이 있던 자리에서는 새로운 셈족 계열인

아모리 부족(Amorites)의 왕이 나타나 역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수무아붐(Sumu-abum)이라는 왕은 BC 1894 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을 창건하였다.

이 왕국은 아카드 시절부터 존재한 도시 바빌론(Babylon)을 근거로 성립되어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세력이 미약하여 독립적인 왕국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함무라비 왕(BC1792-1750):

대제국과 함무라비 법전

 

고바빌로니아는 제 6 대 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시절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국으로 성장했고, 나아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함무라비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현대까지 전해져 오는

법전을 제정하여 고대 세계중 가장 유명한 제왕중의 한 명이 되었다.

 

함무라비는 림신의 라르사 왕조를 멸망시킨후

에쉬눈나(Eshnunna)와 마리(Mari) 등지에 남아있던 수메르의 도시국 가들과

엘람인을 차례로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다시 통일하였다.

 

함무라비는 유능한 행정가, 강력한 정복자로서

무려 42년을 재위하면서 바빌론이라는 도시와 제국을

찬란하게 발전시켜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왕이 되었다.

 

 

 

ㅡ태양신 샤마쉬가 함무라비왕에게 법전을 하사하는 장면
ㅡ▲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함무라비대왕 오벨리스크(법전)

 

 

 

 

 

구약성서의 창세기 14 장에 시날아므라벨(Amraphel)이

엘람왕 그돌라오멜(Chedorlaomer)등과 연합하여

소돔 및 고모라의 왕들과 시딤(Siddim) 골짜기에서 전투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

구약학자들 가운데 여기 나오는 아므라벨이 혹시 함무라비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하고 있다.

 

바빌로니아 왕조는 아카드어의 방언인 바빌론어를 사용하는 셈족이 지배한 나라였으며,

마르둑 (Marduk)을 주신으로 섬겼다. 마르둑은 이전의 세계에서는 미미한 지위였으나,

바빌론의 전성시대에 들어서 신들의 지위에서 막강한 위치에 있게 된다.

구약성서에는 이 마르둑신이 예레미야서(50:2)를 포함 많은 곳에서

므로닥(Merodach)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빌론 사람들은, 마르둑을 ‘주(主)’ 라는 뜻의 ‘발(Bal)’ 또는 ‘벨(Bel)’이라고 호칭했는데,

성서에서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바알(Baal)’신이 이 호칭과 관련이 있다.

 

비록 수메르 민족은 사라졌지만 수메르인들의 문화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수메르어는 종교의식속에 계속 사용되어 내려져 왔다.

 

 

 

앗시리아 제국의 출현

기원전 960년부터 350년(BC10 세기-BC 4 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메르· 아카드· 구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연속 발흥하여 세계사적 문명의 족적을 선명하게 남겼다.

 

그 중의 한 나라가 바로 앗시리아(Assyria)이다.

 

티그리스 강변의 ‘앗수르’, ‘카르나’, ‘니느웨’등(이들 도시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근처에 있었다)

을 중심으로 했던 앗시리아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던 무적의 정복자였다.

 

BC 2,500년 앗수르에 세워진 이 도시국가는 상비(常備) 시민군을 출범시키면서부터

그 세력을 공고하게 하더니 기원전 1200년에는

초강대국인 고 바빌로니아(구 바벨론)까지 정복했다.

 

앗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강력하고 규모가 컸다.

그 세력의 확장 지역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펼쳐졌다.

 

가장 강력했던 초군사제국 히타이트 제국 몰락과 함께

혜성과 같이 역사 전면에 전격 등장한 앗시리아는

강력한 군사력과 특유의 난폭함을 양날 삼아 무자비한 정복으로

순식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광대한 영토는 고도로 훈련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官僚群),

완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히 기병과 전차(戰車)를 구비한 군대와 무거운 세금(重稅)은 속국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1000 년경(BC11 세기)부터 앗시리아의 민병들은

철로 만든 무기와 전차, 갑옷들을 사용 했는데,

이것이 조그마한 도시국가 앗시리아가

당시 오리엔트 최강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었다.

 

 

앗시리아 제국의 태동과 부흥

 

ㅡ▲ 앗시리아는 강력한 철제문화의 기반하에 초호화군단의 위용으로 정복전쟁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했다.

 

19세기 중엽에 니네베(Nineve,니느웨), 코르사바드(Khorsabad)등의 발굴로

앗시리아의 제국 시대의 면모가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다.

앗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 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BC 2500 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된 앗시리아를 정치적으로 첫 통일한 사람은

BC 19 세기 말의 '아무르'인 출신인 ‘샤마시아다드 1세’(BC 1813~1781 재위)로서

그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지배했으나 그의 아들의 시대 때는

바빌론(고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에 의해 정복당한다.

 

이후 BC 15 세기에는 ‘미탄니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BC 14 세기 중엽 ‘아수르우발리트 1세’ (BC 1365~1330 재위)가 등장해서

히타이트 왕과 손잡고 미탄니를 공격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였다.

그는 '스마르투'라 불리던 앗시리아를 '앗수르의 땅'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며 이집트와 교섭에 있어 대등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BC1300 년경부터는 철제법(鐵製法)을 받아들여 더욱 힘을 키우는 가운데

‘투쿨티니누르타 1 세’ 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 세기 이전에는 ‘티글랏빌레셋 1 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 만(灣)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1000 여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가서 ‘카시트인’을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했다.

 

이후 침체기에 들어 제국이 다소 축소되었다가

앗수르 단 2세(BC 934~912 재위)하에서 아람인과 산악 민족을 진압하였으며,

아다드니라리 2세(BC 911~891 재위) 이후에는 정복사업이 재개 되었다.

 

그의 손자이며 대정복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바로

아수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Ⅱ, BC 883~859)이다.

다음 왕인 샬마네세르 3세(BC 858~824)는 영토를 더욱 확대했으나 그의 사후

무능한 왕들과 내전 등으로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수십 년 간 쇠퇴기에 들어가 북방영토의 일부

분과 시리아 지역을 잃게 된다

 

 

그러나 BC 8 ~ BC 7 세기에 이르자 티그랏빌레셀 3세 (Tiglathpileser III),

사르곤 2세(Sargon II), 센나케리브(Sennacherib, 산헤립),

에사르하돈(Esarhaddon), 아슈르바니팔(Ashurbani pal)등의 용감무쌍한 왕들이 속속 출현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부터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일찌기 없었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특히 군사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 오른 티글랏 빌레셀 3세(BC 744~727)는

쇠퇴기에 들어선 앗시리아 왕국을 극적으로 부흥시킨 인물이다.

티글랏 빌레셀 3세는 100년 가까이 지속된 앗시리아의 대혼란기에 종지부를 찍고,

앗시리아의 군제, 통치제도를 개혁(상비군을 두고, 대도시의 면세특권을 폐지)하여

신(新)아시리아 왕국 시대를 열었다.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3세)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 하였더라” (대하 28:20)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대상 5:26)

 

ㅡ서기관들이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취해진 전리품을 기록하고 있다.
ㅡ▲ 티글랏 빌레셀 III 세(Tiglah-Pileser III, BC.745~727 / 구약 성서에서는 '불'이라고도 표현했다.

 

 

티글랏 빌레셀 III 세는 북쪽으로는 우라루트,

서쪽으로는 다마스쿠스, 시리아, 실리시아, 페니키아, 유다를 공략하고

이집트 국경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북서쪽으로는 만나이인과 킴메리인을 정벌하고,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출격하여 메디아 일부를 장악하였고,

남쪽에서는 바빌로니아 왕을 겸하면서 명실 공히 오리엔트 최대 강국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였다.

 

이렇듯,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까지 조공국으로 만든 티글랏빌레셀 3세는

기원전 729 년 고-바빌로니아 정복을 완료해 바빌로니아의 왕까지 독식했다.

 

티글랏 빌레셀 3세 다음 왕인 샬마네세 5세(BC 726~722 재위)는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인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암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르곤 2세(BC 721~705 재위)부터 센나케리브(산헤립,BC 704~681 재위),

에사르하돈(BC 680~669 재위), 아수르바니팔(BC 668~627 재위)까지의 4대는

‘사르곤왕조’라고도 불리며 90 여년에 걸쳐 세계제국을 유지했다.

 

사르곤 2세와 구약성서 열왕기와 이사야에 ‘산헤립’이란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왕(王),

센나케리브 1세의 치세를 거친 앗시리아제국은 더욱 강성해졌고

티그리스강 상류에 거대한 신도시 니네베(니느웨)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원래 수도 아슈르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었다.

특히 BC 671 년, 에사르하돈 1세는 오리엔트의 최강국이던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함락시켜서 하(下)이집트지방을 점령했고,

아슈르바니팔 1 세때는 상(上)이집트의 수도 '테베'마저 함락 시키고 제국의 동쪽, 엘람을 멸망시켰다.

 

앗시리아의 영토확장 전쟁은 상상을 초월한 살육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아수르나시르팔 2세는 연이은 원정 전쟁에서 저항하는 도시는 완전히 파괴하고

남자들은 창에 꿰어 죽이고, 살갗을 벗기는등 잔혹하게 죽였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처분하는가 하면,

백기투항한 도시의 시민들은 이주시켜 아예 이들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시키고자 했다.

 

'앗시리아의 이리'라는 악명을 얻으면서 공포의 대상이 된 아수르나시르팔 2세

전차대와 보병 이외에 처음으로 기병대를 도입하고 전술상 군사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이루어

북방과 동방으로 정복지를 넓혔는데,

직접 정복 전쟁에 나서 시리아, 페니키아등 여러 도시를 복속 시켰다

 

 

 

 

앗시리아 제국, 북이스라엘의 멸망시키다.

 

기원전 732년, 북 이스라엘의 베가왕은 아람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남 유다의 예루살렘을 위협한다.

당시 유다 왕국의 왕이었던 아하즈는

앗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 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공물을 받은 티글랏-필레셀 3세는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아람을 병합한다.

이 때 길르앗에 거주하던 르우벤, 가드, 므낫세 지파 사람들도

아시리아에 끌려가 하부르강 유역에 정착한다.

이외에도 납 달리 지파의 전지역, 에브라임 지파의 야노아도 점령한다.

이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시리아로 끌려간다.

 

북이스라엘은 얼마 남지 않은 영토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720 년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고 남은 사람들도 모두 끌려간다.

앗시리아는 사마리아를 3 년간 포위하는 동안 샬마네세르 5세가 죽고

사르곤 2 세가 즉위하는데, 사르곤 2 세는 자기 자신을 사마리아의 정복자로 기록했다.

 

이 때 북이스라엘인 27,280 명이 앗시리아로 포로로 끌려 갔다.

이렇게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시리아의 하부르강 유역과 메디아 땅에 정착하여

엑바타나 등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토비트(구약 외경)는 이 때 니네베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ㅡ▲ 아시리아 티글랏 3세와 수행원을 그린 아시리아 왕궁 벽화 사본. 기원전 8세기 것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ㅡ아크메디(노랑줄)까지 이동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후손이 남아 있다고.....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이렇듯, 앗시리아는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철제무기로 무장을 한

강력한 군대와 전차를 포진하고서 오리엔트 통일을 위한 정복전쟁과

팽창 과정에서 피정복민 전체의 강제이주, 대학살, 약탈, 파괴 등

잔인한 군국주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앗시리아의 강압통치는 속주들의 반란을 부채질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같은 선진지역에서의 비인륜적 지배 강화는

과거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제국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북방과 북동부가 위태롭게 되면서

강력한 군사조직이 점점 피폐해졌다.

 

그 후, 이집트 제 26 왕조인 사이스 왕조를 시대를 알린 ‘프삼티크 1 세’가

앗시리아에 반기를 들 면서 앗시리아는 서서히 쇠락해갔다.

프삼티크 1 세는 곳곳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전 이집트를 독립시켰다.

 

아슈르바니팔사후 100 년도 못되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칼데아출신의 총독 ‘나보폴라사르 1 세(Nabopolassar)’가 이끄는 신(新)바빌로니아(New Babylonia)와

‘키아쿠살레스’가 이끄는 메디아(Media)의 연합군이 BC 612 년 수도 니네베를 포위하였다.

 

앗시리아는 이집트의 네코 2 세에게 필사적으로 구원군을 요청하자,

신바빌로니아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한 네코 2 세가 구원군을 전격 투입하였으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참패하여 네코 2세 또한 전사했다.

바벨로니아 칼데아인들은 니네베(Nineveh)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고,

그토록 잔인하게 굴던 앗시리아인들은 극심한 앙갚음을 당하였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니네베(니느웨)

 

기원전 700년 아시리아의 수도이자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로 에워싼 니네베는

그 무렵 가장 위대 한 도시로 떠올랐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대영웅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길가 메시'를

아카드어로 노래한 ‘길가메시 대서사시’의 가장 완벽한 판본이

니네베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은 새삼 거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세계사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깊은 수면에 빠진 니네베가 육중한 모습을 지상에 드러내게 된 데에는

1820 년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J. 리치와

1845~51 년 사이 세나체리브 궁을 발견한 A H. 레이야드의 혁혁한 공로에 기인한 것이다.

바로 이 니네베가 구약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와 물고기의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는 니느웨이다.

 

▲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궁전인 니네베가 발굴되어 그 웅장함에 놀라움을 감추질 못하게 한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선지자 요나는 아시리아의 대도시 니느웨로 가서 도덕적

으로 문란한 백성들에게 참회하지 않으면 대재앙이 있을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다. 당시 앗시리아의 왕은 아수르단 3 세(BC 771~754 재위)로 추정된다.

 

 

 

 

 

앗시리아(앗수르)와 구약성서

 

앗수르 제국은 내분으로 인해 약해진 시기를 지나고

강력한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BC 744-627).

디글랏 빌레셀 3 세는 다메섹을 함락시켰으며,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갔다(왕하 15:29-30).

 

므나헴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부유층들은 티글랏빌레셀에게 은 50 세겔씩을 바쳤다(왕하 15: 20).

유다의 아하스왕은 복종의 표시로 이방 신전을 건립했으며(왕하 16:10),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앗수르 제국에 매년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자,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 다(왕하 17:3-4).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르곤 2세는 무려 2만 7천명 이상을 사마리아로부터 강제 이주시켰다.

사르곤에 이어 왕이 된 산헤립의 통치때(BC 704-681) 앗수르 제국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애굽을 공격했으며, 유다의 히스기야에게 조공을 강요하였다(왕하 18: 14 이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지만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왕하 19:35).

유다 정복에 실패하고 돌아간 산헤립은 아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 다(왕하 19:37).

 

에살핫돈은 속국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과 조약을 맺어

앗수르 제국의 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토록 했으며

속국들 중에는 므낫세 치하의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21:1-9).

이후에 앗시리아는 급속히 쇠퇴해 갔다.

 

앗시리아가 내분으로 약화되자 주변 국가들은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BC 627-609).

유다의 요시야는 이러한 시기에 개혁을 단행했으며

갈대아인들(바벨론)이 일어나 앗수르를 몰아냈다.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던 애굽의 군대들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왕하 23:29-30).

나훔과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대로 니느웨가 함락당해 앗수르 제국은 무너지고

바벨론이 새로운 패권을 잡았다(나 1:1; 2:10; 습 2:13).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다.

초기에 ‘아시리아’라는 말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중에 아시리아는 바빌론처럼 나라의 이름이자 동시에 도시 이름으로,

그리고 사람 이름으로 자유롭게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은 지금의 이라크 모술 지역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아시리아인은 오랫동안 바빌로니아 세력 밑에서 지배를 받았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에 바빌론과 이집트를 정복해 근동 최초의 통일 제국이 됐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변의 지정학으로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어

남쪽과 서쪽에 방어벽을 구축해 도시를 방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리아는 점령지 주민의 강제 이주 등 가혹한 통치를 강행해 저항을 많이 받았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하였고,

이어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오늘날 이라크 내에 있는 성경 속 도시들은 거의 구약 시대와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시리아는 바빌론 다음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도시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산에 대한 이야기에 아시리아를 흐르는 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창세 2,14).

기원전 922년 솔로몬 왕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통치하는 남쪽의 유다 왕국과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됐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931년에 시작된 이 분열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망하고,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보다 나중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 멸망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부터 호세아 왕까지 모두 19명의 왕이 다스렸다.

19대 호세아 왕 때 아시리아 왕인 사르곤의 침공을 받아 사마리아가 함락됐다.

그리고 사마리아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고

사르곤은 다른 지방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

사마리아로 옮겨온 이방인들은 정착해 원주민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화됐다.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2열왕 17,24).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주해 올 때 이교 신앙도 함께 가지고 왔기에 사마리아에는 혼합 종교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쪽 유다의 요시아 왕은 아시리아를 도우려는 이집트군과 전투를 위해 출병했다가 전사했다.

 

“요시야 시대에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가

아시리아 임금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하여 올라갔다.

요시야 임금이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가자,

파라오 느코는 므기또에서 요시야를 보고 그를 죽여 버렸다”(2열왕 23,29).

바빌론 제국에 앞서 당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위의 세계를 지배하며 호령했던 아시리아 제국이지만,

오늘날 그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그 화려한 유적마저 많이 도굴당했다.

그 흔적과 기록마저도 보존이 잘 안 돼 있어 권력 무상을 느끼게 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