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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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내외적 평가

Narin Pusil 2022. 1. 19. 15:23
 

황제폐하,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을 명나라로! - 완도신문

중국의 쟝웨이린 교수.그는 1989년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소위 동북공정을 맡는 핵심 책임자였다. 하지만 1995년 고구려의 역사를 편입하는 과정에서 돌연 손을 떼며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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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통틀어 수많은 명장이 있지만,

모든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고

단 한번의 패배는 커녕 단 1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이순신 외에는 없다.

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손꼽히는 신화를 가진 명장은 드물다. 

 

비교해 보자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달마티아, 북아프리카 등 서로마 제국의 거의 대부분을 수복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사막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베두인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쫒아내

중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시켰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중국 대륙에서 유럽까지 누비면서 총 65번의 회전을 경험하고

32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준사구(四駿四狗)의 일원 수부타이,  

ㅡ수부타이

※ 이 명칭은 몽골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원조비사》에 의하면,

4마리의 준마와 4마리의 충견을 말한다.

4준은 주로 보좌를 하거나 전쟁에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을 담당하는 인물들이었으며,

4구는 전쟁에 나서서 용맹을 떨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준(四駿, 전략가형)        

잘라이르 무칼리        

후신 보로클        

아를라트 보오르추        

술두스 티라운    

 

사구(四狗, 맹장형)        

우량카이 젤메        

우량카이 수부타이(젤메의 동생이었다.)        

베수드 제베(본명은 지르고가타이)        

바를라스 쿠빌라이

(그의 동생인 카라차르 노얀의 현손이 바를라스 티무르였다.)

 

 

   ▷그리고 영국 해군의 영웅으로,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할 때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무찌르고 전사한 명장  「넬슨」제독,

그런데 그가 자살을 했다는것이다. 그것은 이순신과는 달리「넬슨」제독은,

영웅적인 최후를 마침으로써 영국정부가 불륜이라고 하던 그의 사랑하는 정부「헤밀턴」부인(Emma)과 그자녀들에게

상당한 연금을 지불하라는 자기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게될 것을 그가 바랐었다는 것이다.

「듀랜트」전사에 의하면 만일 「넬슨」제독이 이해전에서 살아남아 보잘 것 없는 여생을 보냈더라면

그가 정식아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헤밀턴」부인과 자녀들의 부양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

 

▷카르타고 한니발, 자마전투의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

 

ㅡBattle of Santa Cruz de Tenerife (1797)테네리페 전투에서 스페인에게 패하고 오른팔도 잃었던 넬슨

 

 

이순신은 자신의 뛰어난 군사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했으며,

패전으로 기울어진 전장의 판도를 완벽히 뒤집고 조선을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러한 '전장의 신화'를 가진 사람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신화를 이룩한 이들은 전부 만전의 태세를 갖춘 정복군이었기에

제대로 된 준비조차 하지 못 한채 수비하는 처지였던 조선군과 확실히 다르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입었지만

당시 이순신은 지지는커녕 물자가 부족해 자급자족 해야 했으며,

선조에게 심한 견제를 받고 조정대신들에게 온갖 트집을 잡혔다.

일평생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장에 나섰으나

조정에게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한 마디 불평 없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싸워 승리를 얻은 만큼,

이순신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현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명장이자 구국영웅을 넘어선 성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ㅡ“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전(傳) 충무공 이순신 상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생일  1545년 4월 28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건천동

사망일  1598년 12월 16일(53세)

사망지  조선 경상우도 노량해협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자: 여해(汝諧), 호(號): 기계(器溪), 덕암(德巖)시호  충무공(忠武公)

부모  아버지: 이정(李貞)  어머니: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草溪卞氏)

배우자  방진(方震)의 딸 상주 방씨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부안댁

자녀  정실 부인 상주 방씨 소생, 장남: 이회(李薈), 차남: 이열, 삼남: 이면(李葂), 장녀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소생 서자: 이훈(李薰), 서자: 이신(李藎), 서녀

복무  조선군, 복무 기간  1576년~1598년

주요 참전  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정유재란

서훈 내역 :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 ....사당  현충사

 

 

 

▶今臣戰船 尙有十二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난중일기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임진왜란후 평가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 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원균元均의 참패의)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전라도와 충청도)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해당 부분은 졸기라는 것으로 죽은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실록을 편집할 때 수 많은 사초에서 사관들이 쓴 졸기 중 의미있는 인물의 것만 추려

그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이고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표로 등재한다.

즉 해당 내용은 조선 왕조의 가장 공식적인 평가인 셈.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보통 흠이 한두개는 들어가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찬사가 가득한 졸기는 보기 힘들다.

심지어 왕이나 왕후의 사망 기사에도 부정적 평가를 써 놓는 경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이순신의 찬양은 그렇다 쳐도 칠천량의 대패를 원균을 쓴 조정,

즉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책임으로 대놓고 명시해버리며 까버렸다.

 

ㅡ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상께서 말씀하셨다. "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부적당하다 하여 바꿈)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오리 이원익은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정탁, 권율 등과 같이 이순신을 구명했었다.

 

 

 

이항복, 《충민사기》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이순신은)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후략)

 

 

 

 

 

《달천몽유록》,

수군 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 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

 

    1600년경 쓰여진 소설.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거북선은 2달전 원균의 칠천량 해전 참패로 괴멸 강했다. 판옥선으로만 이긴 전투다.)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숙종 《현충사 제문》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정조, 《홍재전서》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ㅡ 정약용, 《경세유표》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

   仗社稷威靈 粗立薄效 寵榮超躐 有踰涯分 身居將閫 功無補於涓埃 口誦敎書 面有慚於軍旅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ㅡ이순신 서명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무장을 조상으로 둔 죄로 

소질과 적성 모두 무시된 채 반강제로 무과에 응시해야 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무려 이순신 아래로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 그것도 1875년 고종때에 배출했다.

 

장남 이회 계열에서 114명, 차남 이열 계열에서 151명,

여기에 후사를 이어가지 못한 서자 이훈과 이신까지 267명으로

특이하게도 선조~경종때까진 몇명 안되다가 영조 시기부터 급등해

고종 시기에만 9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 조카 이분, 이완, 이봉은

임진왜란때 아버지와 숙부 곁에서 의병 신분으로 종군했다.

이완은 정묘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자 이훈은 이괄의 난때 전사, 서자 이신은 종제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 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북한의 평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인민대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다른 전근대 위인들처럼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여담으로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남한에서 제작된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으로 전해지고 주민들에게 유포되었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북한내 최고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에 간 남측 기자들의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북측 관계자가 '우리민족을 구한 영웅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②일본에서의 평가

 

 

1.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鷄林)의 으뜸이었다.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 사발을 그냥 고려 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

그리고 우리도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왜라고 불렀다.

 

 

 

2.   古来ノ戦将ニシテ奇正分合ノ妙用ヲ尽シタルモノ必ズシモ一二ニ止ラズ。「ナポレオン」が「全ヲ以テ其ノ分ヲ撃テ」ト云ヒタルモコノ意義ニ外ナラナヌノデアル。サリナガラ海軍将官トシテ之ヲ看レバ、先東洋ニアッテハ韓将李舜臣、西洋ニ在テハ英将「ネルソン」ヲ推サナケレバナラヌ。李舜臣ハ実ニ蓋世ノ海将デアル、不幸ニシテ生ヲ朝鮮ニ享ケタレバコソ、勇名モ智名モ西洋ニハ伝ラヌノデアルガ、不完全ナガラモ征韓ニ関スル紀伝ヲ看レバ実ニ立派ナル海将デアル。西洋ニ於テ之レガ匹敵者ヲ求ムレバ聢カニ蘭将「デロリラル」以上ト謂ハナケレバナラヌ。「ネルソン」の如キハ其ノ人格ニ於テ到底比肩スルコトガ出来ヌ。此ノ李将軍ハ実ニ裝甲艦ノ創造者デアル、三百年以前ニ於テ既ニ立派ナル海軍戦術ヲ以テ戦ヒタル戦将デアル。    

 

    Throughout history there have been few generals accomplished at the tactics of frontal attack, sudden attack, concentration and dilation. Napoleon, who mastered the art of conquering the part with the whole, can be held to have been such a general, and among admirals, two further tactical geniuses may be named: in the East, Yi Sun-sin of Korea, and in the West, Horatio Nelson of England. Undoubtedly, Yi is a supreme naval commander even on the basis of the limited literature of the Seven-Year War, and despite the fact that his bravery and brilliance are not known to the West, since he had the misfortune to be born in Joseon Dynasty. Anyone who can be compared to Yi should be better than Michiel de Ruyter from Netherlands. Nelson is far behind Yi in terms of personal character and integrity. Yi was the inventor of the covered warship known as the turtle ship. He was a truly great commander and a master of the naval tactics of three hundred years ago.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힐 더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A Military History of the Empire (Japanese: 帝國國防史論), p. 399,

by Admiral Tetsutaro Sato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3.  1929년 해군소좌 출신 작가 가와타 이사오(川田功)는 그의 소설 <포탄을 뚫고서(砲弾を潜りて)>에서

주인공인 한 해군 병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당연히 세계 제1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솔능력, 그의 모계(謀計), 그의 용기,

하나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김준배 2018, 104에서 재인용)

 

 

4.  1891년 강경한 확장주의자 가와사키 시잔이 쓴 위인전 <일본백걸전(日本百傑傳)>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정운(鄭運)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 (중략)…

옛날 나폴레옹 1세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짚어엎을 세력을 갖고도 영국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넬슨의 해군에게 제압 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쇠약함과 영국의 부강함은,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

(김준배 2017, 243. 재인용 및 일부 편집.)

 

 

5.  또한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진상된 뒤 전국 중학교로 배포되었던

<제국해군사론(帝国海軍史論, 1898)>을 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의 글 중에서 언급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진왜란 같은 것을 사실대로 씀(直筆)으로 그 진면목을 기술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으나,

만일 해상권력을 쥐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실패한 사적(事蹟)을 들어 은감(殷鑑, 거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히데요시(秀吉)는 동양에 둘도 없는 영걸(英傑)로서 부하 장수도 모두 천군만마 중 뛰어난 인물들이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평양에서 북진할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은 우리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해전 전술에 졸렬(拙劣)하여

순신 때문에 시종 해상권력을 장악당한 죄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도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됨은

만세불변의 원리로서 또한 성공의 기초이다" (김준배 2018, 94-96 재인용. 필자 강조)

 

 

     5. 오가사와라의 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순신 연구를 추가한

<제국국방사론((帝国国防史論, 1907)>을 쓴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의 글 중

다음 대목은, 지금도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본인은 현재 일본의) 제국 국방의 방침이 과연 국가가 어려울 때 이에 응할 방법인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어 조선의 명장(名將) 이순신의 사적을 조사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가) 우리 수군을 격파한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나의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공세적 국방의 의의(意義)에 관해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드 로이터(Michiel de Ruyter)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사토 데쓰타로(일본어: 佐藤 鐡太郎, 1866년 8월 22일 ~ 1942년 3월 4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이다. 

일본 귀족원 의원, 가쿠슈인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쇼나이번사 히라무키 유지로의 아들이지만 자라면서 사토 야스유키의 양자로 들어갔다. 

해군병학교를 14기로 졸업하고 제국 해군에 임관하였다. 

청일 전쟁 당시 포함 아카기 항해장으로 참전했는데, 

이 때 함장 사카모토 하치로타(坂元八郎太)가 전사하자 대신 아카기를 지휘했다. 

그 후 해군 대학교 교관 등을 거쳐 러일 전쟁 때는 가미무라 히코노조가 이끄는 제2함대의 선임 참모로 참전했다. 

 

전쟁 후 해군대학교 교관을 다시 맡았으며, 

군령부 차장, 해군대학교 교장, 마이즈루 진수부 사령장관 등을 지냈지만, 

당시 총리였던 가토 도모사부로와 군비 감축을 두고 다투다 결국 1923년 퇴역했다.

퇴역 후 가쿠슈인 교수를 맡아 쇼와 천황을 가르쳤으며, 1934년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만년에는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인 도조 히데노리 등처럼 전쟁사를 연구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육군이 주, 해군이 종(陸主海従)인 국방 방침을

해군이 주, 육군이 종(海主陸従)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그 일환으로 1899년에 사토 데쓰타로를 1년반 동안 영국에 파견한데 이어

미국에 8개월간 주재 근무를 하게 했다.

사토는 귀국후 해군대학의 교관이 되어 자신의 강의를 정리한 <제국국방론>을 냈고,

당시 육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이 책을 메이지 천황에게 바쳤다.

또 <제국국방사론> 등을 패내, 해군 예산의 획득이나 제도적으로

해군을 육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와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 두 사람 모두

훗날 전시총리까지 올라가는 스즈키 간타로의 동기들이다.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군 해군 사관 생도들이 방문했는데,

한 후보생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장군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

하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로,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사적(私的)으로 도고 역시도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 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 수상이자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게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인에게도 엄청나게 존경 받는 인물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 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 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

 

 

 이순신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팽창의 정당화를 꾀하던 당시 일본 해군의 노력에 관해, 

후대의 문필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 일본해군이었다. 

(중략) 

1904, 5년경의 일본 해군사관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김준배 2018 재인용)

 

 

중국

  ―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 하의 일을 조직적으로 잘 계획하여 다스림)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 “하늘과 땅을 경영하는 재능이 있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켜 깨끗게한 공로가 있음)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중국에서도 장웨이린 교수 등의 일부 인물들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그는 제갈량, 항우, 손자, 관우 같은 인물들이 서양과 일본에 패한 말기의 청나라에 있었어도

청나라는 역사 속의 그 결과를 피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다르다고 언급했다. 

 

 

영국에서

 

■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pp. 66-67.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순신 장군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 수군의 전법은 근접전보다 적선의 접근거부 & 포격전에 가깝다,

몽고메리가 아시아의 전반적인 해군 수준을 몰랐거나 하등한 수준으로 본 것이며,

한반도에선 이미 고려 말부터 해전에서 화포가 사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한 브리핑에서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중에서.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

 

"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

(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