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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③ [고대 문명의 세계와 성서 II] 앗시리아, 신 바빌로니아

Narin Pusil 2022. 3. 16. 17:19

 고대 문명의 세계와 성서 II                        

    17 / 03 / 2022                       

 

 

신바빌로니아 문명과 성서의 세계   

 

문자의 발명

 

앞서 수메르 문명을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문자의 초기 등장은 인류가 농경문화를 시작하며,

잉여 생산물들이 생겨나고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

물건의 종류와 양을 기록하며, 상거래를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물건의 기록과 상거래의 계약 등을 위해 부드러운 진흙으로 빚은

점토판(타블렛)에  숫자와  그림  부호를  그려  넣었다.  

이것이  마침내  발전하여 음절을 표시하는 상징적 기호가 생겨났고,

기록된 문자의 힘과 융통성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초기의 설형문자나 상형문자의 문자체계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웠다.

너무나도 복잡했던 문자 체계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전문 서기관만이 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 서기관들이나 왕들 만이 글을 사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이유로 문자는 왕권을 강화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던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문자와 국가

 

고대사회에서 문자가 만들어지고 보편화 되는데는

국가와 제국 등의 설립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

국가의 지원 없이는 고대의 어느 국가도 글쓰기가 활성화될 수 없었다.

 

 

문자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과 이집트 등의 고대 근동국가들이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큰 몫을 감당했다.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서기관 계층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문자는 행정과 고급문화가 발전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의 글이 들어간 공공의 기념물들은 사람들이 읽으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왕실의 힘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가장 힘이 미약한 국가의 왕이라 할지라도 개인 서기관을 거느리려고 했다.

이처럼 고대 근동에서는 국가라 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문자의 융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파벳(페니키아)의 발명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문자를 보편화 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물론 알파벳은 사실상 기원전(BC) 1000년대 초반에 이미 발명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세계에서 문자문화가 바로 퍼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

고대 문명 사회에서 문자의 번성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국가의 지원과 적절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필요했다.

 

 

 

앗시리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문자

 

앗시리아 제국은 정치,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외국의 문자체계인 알파벳과 당시 고대 근동에 널리 사용되었던 외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앗시리아는 ‘다양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단일한 말’만 사용하도록 했다.

앗시리아인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실용적인 언어정책을 추구한 것이다.

 

당시 아람어

BC 500 년 부터 AD 600 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국제적인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00 년 전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전지역에 침투하여 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아람어는 그에 따라 활동범위를 넓혀 가서

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등의 대제국에서도

아람어가 국제적인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앗시리아인들의  탁월성 중 하나는,

자신들의  언어인  어려운  아카드어로 제국의  언어를 통일시키려  하지 않은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아카드어 대신  나날이 커져가는 제국의 행정업무에 편리하도록,

서기관들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알파벳으로 된 아람어를 사용한 것이다.  

 

 

  기원전 2000년대 수메르 족과 아카드 족의 여러 도시들이 한창 이전투구를 벌이던 시절, 

이들과 다른 셈 족의 일파인 아모리 족은 바빌론을 세우고 

조용히 발전시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상업의 최대 중심지로 점차 만들었다. 

 

아모리 족은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국가 바빌론이 영역 국가 바빌로니아로 확장되어 갔다.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함무라비(Hammurabi) 시대에 

이신, 우루크, 라르사 등의 수메르 도시국가와 마리 왕국 및 엘람까지 무너뜨렸다. 

마침내 전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닿는 대국이 되었다. 

 

이후 명군들의 치세가 계속되면서 바빌론은 거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수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古)바빌로니아 시대로 분류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마르두크(Marduk) 신의 대행자로 믿었고 

모든 왕들은 '신성한 도시'인 바빌론에서 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계를 갖추었다. 

 

신성화된 도시 바빌론의 이미지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문화 쪽에서도 후대에 영향을 끼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엘람 인을 추방한 후 왕국을 안정시킨 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법전을 만든 것이다. 

이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불리며 체계적인 성문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삼수일루나(Samsu-iluna) 시대부터 점차 분열이 시작되어 엘람 등지가 떨어져 나갔다. 

결정적으로 BC 1531년 삼수디타나(Samsu-ditāna) 왕 때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아모리 인의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아모리 왕조는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바빌로니아는 부활해서 

카시트인, 엘람 인들의 왕조가 이어지다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앗시리아와 세계화

 

메소포타미아 뿐 아니라 시리아-유다-팔레스타인,

더 나아가 서구 문명 전체에 미친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앗시리아는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라 할 수 있다.

앗시리아의 끝없는 영토확장 정책 덕분에 디글랏빌레셀 3 세(BC 745-727)때에는

앗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병합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소아시아와  우랄투  왕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제국을 확장시켰다.

 

이후 앗시리아 왕들은

시리아-팔레스타인, 북이스라엘 전역을 정복했고 잠시나마 이집트까지 손에 넣었다.

그 후 앗시리아 제국은 황혼기에 접어들어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했지만,

앗시리아 제국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더 나아가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문명에까지 앗시리아제국의 문명이 이어졌다.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을 세계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단일한 정치체제와 경제 그리고 단일 한 언어체제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또한 앗시리아인들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제도를 구비했다.

제국의 행정에서 문자는 날로 중요해져 갔다.

기원전 8 세기 문자의 확산은 앗시리아 뿐만 아니라 앗시리아에 병합되지 않은

유다와 고대 근동 전역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경향이었다.

 

히스기야와 성서 기록의 시작 성서의 기록에 대해 일반적으로 일치된 학자들의 견해는

BC 587 년 남유다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많은 숫자가 포로로 끌려간 후

민족 정체성의 확립과 민족의 중흥을 위하여 BC 587년 이후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견해이다.

 

(학문과 예술등의 문화  최선진국 바빌론에서 부터,  귀환후

본격적으로 ....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이에 반해 윌리엄 슈니더윈드(어떻게 성경은 책이 되었는가?,  박정연옮김, 에코리브르, 2006)는

그보다 한 세기정도 이른 시기에 성서가 수집되고 기록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물론 이때도 구약성서가 다 기록된 것은 아니라 구전과 전승으로 내려오던

성서의 일부 내용이 수집되고 기록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윌리엄 슈니더윈드는 BC 8 세기 후반,

예언자 이사야와 유다왕 히스기야의 시기에 이르러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하고  

많은 북이스라엘인이 앗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중 남은 숫자 가운데 일부는 남유다로 피난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때 위기를 느낀 남유다의 히스기야왕과 지도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힘이 결집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승을 수집하여 종교개혁 및 민족적 결집을 추구하였다(대하 31:1-21).

 

남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을

성서의 수집과 역사서술의 중심지로 볼 수 있다. (?)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전승들을 수집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것은 분명 왕실 기관과 성전이었다.  

 

BC 722 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후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주민의 행렬을 대면하고

한편으로는 남유다의 위기를 직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 인구증가로 인한

공공건축과 조세와 공급체계를 정비했다.

이러한 때 히스기야 서기관들의 전승수집과 편집

그리고 역사서술이 문서로 남겨지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히스기야 서기관들은 전해 내려오던 여러 지혜의 말들을

솔로몬왕이 지었다고 생각하며 한 곳에 모았다.

왕실 서기관들은 또한 북왕국 몰락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전승과 신명기적 역사서도 편집 했다.

당대의 사건인 북왕국 사람들의 이주와 다윗 자손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문헌을 기록하게 만든 시대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의 기록연대를 기원전 6 세기에서 기원전 2 세기까지 산정한다.

흔히 토라(모세 5경)로 불리우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한사람(모세)에 의해 짧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다니엘서도 기원전 2 세기경 기록되었다.

이는 민족주의를 앙양하려는 목적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로 한

하스몬 왕가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앗시리아제국의 멸망

 

 

앗시리아 제국시대에는 지속적으로 대외관계에 있어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의 속국이었던

바빌로니아를 제대로 통제 아래에 묶어두지 못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민족이 선진문화를 앗시리아로 수출한 문명국이기도 하고,

군사적인 위협이 되지 않아서 느슨한 통제를 해오던 것이 예기치 않게

이 바빌로니아에 상시적인 도전과 독립투쟁에의 여지를 제공한 것이었다.  

 

BC745 년에 디글랏빌레셀 3 세(Tiglathpileser III)에서부터  앗시리아는

다양한 정책적 변화를 통해 이지역을 통제하려고 했었다.

처음엔 앗시리아왕이 바빌로니아 도시국가의 왕위를 겸하는

‘personal union’ (왕위겸직) 방식을 도입해서 다스렸다.

그리고 이후에는 현지의 믿을 만한 측근을 세우는 가신왕을 통한 지배도 실험해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되지 않자 센나케리브(Sennacherib 산헤립)의 치세에는

그의 아들을 현지에 보내어 바빌로니아 왕이 되게 하기도 했지만,

내내 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 지배에 저항하고

엘람등의 주변국가와 협력하여 반앗시리아 노선을 걸었다.

 

결국은 앗시리아는 이후 아슈르바니 팔(Ashurbanipal) 치세에 전쟁을 통해

바빌로니아를 재차 패권아래 묶어버리고 바빌로니아에 협조한 엘람을 무참히 파괴하고 정복해버렸다.  

이로써  근동의  주변에서는 엘람 이외의  다른  강대세력인  메디아가  동쪽에서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었고,

앗시리아가 내분으로 혼란하던 틈을 타서

바빌로니아와 이 메디아 세력의 연합작전 으로 앗시리아를 정복하게 된다.  

 

종래의 지배국인 앗시리아가 지배했던 전지역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그 반발에 직면한 틈을 타 BC626 년에 나보폴라샤르가 옛 바빌론 지역에 다시 세운 것이 신바빌로니아다.  

결국 앗시리아는 붕괴하고 신바빌로니아-이집트-메디아 세나라가 3분하여

앗시리아가 정복했던 옛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신바빌로니아는 그 종주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본래의 국명은 구 바빌로니아를 계승하여 그냥 바빌리(바빌로니아)지만 구

분의 편의를 위해 학계에서는 신바빌로니아로 통칭한다. 

 

 

 바빌로니아의 뜻

 

바빌론(Babylon) - 그 명칭의 유래는 대략 다음과 같다.

고대 아카드어로 “문(Gate)”을 뜻하는 바브(Bab)와  “신(God)”을 뜻하는  “엘(El)”이  결합해  

보통  “바벨(Babel: 신의  문)”로  불리다가 이것이  그리스에  전해져

명사형  접미사인  -on 이 붙어  “바빌론”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보통 메소포타미아의 해발고도 500m 의 선을 경계로

상류 지방을 앗시리아, 그 하류 지방을 바빌로니 아라고 부른다.

한글역 성서에는 "바벨론"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세계사적으로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 및 쿠웨이트 등에 있던

셈계 칼데아 부족이 세운 나라라서 칼데아(Chaldea)나 칼데아 바빌로니아라고도 한다.

칼데아는 고대 그리스어 칼다이아 (Χαλδαία) 에서  유래했다.  

칼데아인  스스로는  아카드어로  칼두(Kaldu), 아람어로  칼도(Kaldo,  ܘܕܠܟ)라 불렀다.

 

개역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갈대아는 칼다이아를 음역한 것이며(갈대아 우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카시딤 (Kashdim,  םידשכ)으로 지칭하고 있다.

기원전 2000 년경(BC 2000), 수메르가 아모리인들에 무너지고

이들이 수도 바빌론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던 국가가, 구-바빌로니아 제국이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등극 호시탐탐 독립의 꿈을 꾸던 바빌로니아는

칼데아(Chaldea) 출신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를 왕으로 추대하고

지금의 이란의 서쪽에 위치했던 강대한 제국인 메디아(Media)와 손을 잡고

BC 612 년경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Nineveh)를 침략하여 초토화시켰다.  

 

나보폴라사르 왕은 강대한 제국인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되찾은

바빌로니아의 영토를 중심으로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나보폴라사르 왕이 죽고, 바빌로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네부카드네자르 2 세(Nebuchadnezzar, BC 630 년경~562)이다.

성서에서는 느부갓네살로 나온다.  

 

신바빌로니아는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이자 2대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때 전성기 를 맞이했다.

정복 군주이기도 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는 맹렬한 정복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정복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다 왕국이 멸망하여(BC 587 년)

유대인들은 조국을 상실한 채 끌려와 바빌로니아의 폭압적 통치를 받았다.

수도 바빌론은 당시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까지 회자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Hang in Garden)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외에도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의하면  

신바빌로니아의 위대한 건축물은  네대의  말이 끄는 전차가 회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성벽과

마르둑을 섬기는 높이 넓이 90m 의 지구라트 신전이다.         

 

 

▴ 바빌론에 세워진 성벽과 긴 성벽을 두르고 있는 해자(인공 연못)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령으로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세워진

마르둑신의  지구라트 신전은 높이와 넓이가 무려 90m 에 달했다.

현대의 건축물로서도 거대한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지구라트의 건축목적도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왕이나 제사장들이 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이것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바빌론 유수시기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내용은 바빌론의 장대한 지구라트에 압도된

유대인들이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바벨탑 이야기를 역사서술(문예창작)한 것이다.  

이후 성서에서는 “바벨론”은 모든 악한 것과 나쁜 것의 상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이 본

높이와 넓이가 무려 90m를 넘는 거대한 마르둑의 신전 지구라트

 

하지만 새로운 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 불과 수십 년 만인

BC 539 년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제국으로 이끈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내내 동방의 중심지였고 메디아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한 페르시아는

변방에 불과했으므로 신바빌로니아가 당장 국력에서 밀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을 점령하고 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고,

신바빌로니아 역시 페르시아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성서에 따르면 신바빌로니아 최후의 왕 벨사자르(벨사살)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해오는 것도 모르고 성대한 만찬을 흥청망청 즐기다

그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복원한 이슈타르의 문

 

성서외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도

'그날 밤에 바빌론 사람들이 아주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기원전 5 세기 인물인 크세노폰의 기록 역시 이와 거의 유사하다.

 

20 세기에 출 토된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이 제대로 된 시내 전투 한 번 없이 함락당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공식적인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자르는

부왕에 버금가는 왕권을 행사하고 있던 공동 통치자 혹은 대리 섭정같은 존재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그의 저작 <아피온 반박문>에서 인용한

기원전 3 세기의 바빌론 사제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함락이  있기  전  나보니두스는  키루스(고레스)에  맞서  출정했으나 패배하고

제국 남쪽의 보르시파란 곳으로 달아났으며 바빌론시가 함락당한 후 키루스에게 항복 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에 벨사자르는 가공 인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설형문자 유물들이 계속 출토가 되면서 그가 실존했음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그가 바빌론이 함락될 당시에 그 도시에서

나보니두스에 비견되는 왕권을 휘두르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보니두스는 재위 초기부터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 관심을 가져 '데마'라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후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영구 복귀하기보단 데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따라서 왕이 부재하게 된 바빌론 시는

애초 원정 당시 왕권을 대리했던 벨사자르가 계속해서 대리 통치했 다는 것이다.

기록에도 분명 데마로의 원정 직전, 맏아들에게 왕권(대리)을 맡기고

바빌론 제국 각지의 군대에게 그를 따르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때 바빌로니아의 유명한 건축물인 지구라 트와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키루스 2 세의 명으로 파괴되었다.

그렇게 신바빌로니아는 아주  허망하게 완전하게 멸망하고 마는데, 

 이후 나보니두스의  또다른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칭  '네부카드네자르  3 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바빌론은 계속 페르시아의 최대 도시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 세기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3 세(알렉산더 대왕)가

다시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 후

셀레코스 제국을 세운 셀레코 스 1 세가

바빌론의 인근에 '셀레우키아'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바빌론은 쇠퇴했다.  

 

 

 

신바빌로니아(신바벨론)제국과 구약성서

 

 

바벨론은 유대인들에게는  2,5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장본국이기에

셀레코스제국, 로마제국, 나치독일과 더불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하는 국가이다.

구약 성서에 바빌론 유수, 네부카드네자르 2 세(느부갓네살)왕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유대인들의 나라인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주민의 상당수를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고가 포로생활을 시켰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결코 좋을 리 없다.

또한 당시 바빌로니아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한 나라였던 반면,

유대인들의 나라인 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변방이었다.

 

시골 변방에서 살다 온 유대인들의 눈에 호화 찬란한 영화를 누리고 있던 바빌로니아는

그야말로 쾌락이 가득했던 별천지였다.

따라서 유대인 들은 바빌론을 악의 도시, 탐욕과 쾌락에 빠진 도시로 성서에 기록하고 있다.

 

성서 다니엘서의 내용에 따르면, 금속으로 비유할 때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황금이요, 이후에 나타나는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은 각각 은, 놋쇠, 강철로

다 바빌 로니아의 위대함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바벨론 유수(Babylon captivity)

 

 

남유다왕, 요시아가 때 아니게 일찍 죽었을 때에,

신바빌로니아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 2 세(느부갓네살, BC 604~562 년 재위)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주인으로 등장했다.

그 뒤로 20 년 동안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가나안 지역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했다.   

 

유다의 왕은 불안하게 두 강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한쪽을 택했다가 곧이어 다른 쪽에 보호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에 맞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유다가 바빌로니아 통치 에 저항할 때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막강한 군대를 끌고 유다 왕국으로 내려와 이 지역을 정복했다.  

 

기원전 587 년  7 월 29 일,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이  이끄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이닥쳤다.

구약 성서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유다 왕 시드기야 제9년 열째 달에 도성을 포위한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시드기야왕 11년  넷째달  9일에  마침내  성벽을  뚫었다 (예레미야서 39 장 1 절).  

 

18 개월 동안 공성전에 지쳤던 느부갓네살은 분노를 내뿜었다.

10 년 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으로 세운 시드기야 왕이 연거푸 배반하며

이집트와 내통한 데 대한 응징 차원에서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느부갓네살은 2만여명의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고 예루살렘의 성전과 모든 집을 불태웠다.

제사장들은 느부갓네살 앞에서 살해당했다.

그나마 죽은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보다 나을 만큼 극심한 학대와 고통, 기아가 찾아왔다.

찬란하고 웅장했던(?그렇다면 남겨 놓았을것임) 솔로몬의 성전은

약탈자들이 금가루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헤집는 통에 흙 밖에 남지 않았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대포로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평화’를 주장했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눈물로 눈이 상하고 창자가 들끓 으며,  간이  땅에  쏟아진다’며  슬픈  노래(예레미야  애가)를  불렀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의 배경이 바로 이즈음이다.  

이런 야만적인 원정이 세 번이나 있었다.

 

기원전 597 년 유다 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항복하여,

백성 8 천 명과 함께 자기 땅에서 추방당했다.

여기에는 왕족, 귀족, 군인, 뛰어난 장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력자 7 천 명과 은장이, 대장장이 천 명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는데

그들은 모두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용사들이었다." (왕하 24:16)  

 

네부카드네자르 2 세는 유다의 심장부를 파헤쳤지만,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서 임명한

시드기야 (시드기야, 여호야긴의 삼촌)을 왕위에 앉히고 10 년을 더 버텼다.   

기원전 587년 시드기야가 반란을 꾀하자, 네부카드네자르 2 세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을 부수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눈이 뽑혔고,

5 천 명의 포로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이제 천민들과 바빌로니아를 피해 황폐한 땅으로 달아난 사람들만 남았다.

유다는 제국의 행정 구조에 통합되었으며,

기원전 581 년에는 세 번째 집단이 또 끌려갔다 (예레미야 52:28-30).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바빌론 유수가 사실은 그렇게 큰 충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기도 하다.

약 75 퍼센트의 주민이 유다에 남았고,

그들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계속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도 바빌로니아에서 보살핌을 받았다.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 여 세를 거두고, 사업을 하고, 운하를 관리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일부는 봉토를 소유하기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 예루살렘, 유다 전체에 몰아 부친

신바빌로니아의 공격은 앗시리아의 공격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나라는 암흑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로 꼽을 만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황량한 폐허가 되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텅 빈 광장, 무너진 담, 부서진 문을 묘사한다.

번영을 이루던 혼잡한 도시는 이제 자칼이 사는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어머니는  아기를 죽여  삶아  먹었으며,  

잘생긴  청년들은  시커먼 얼굴에 앙상한 몸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배회했다(예레미야 애가 1:8-9).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들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바벨론포로의 시대에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로 가운데 일부는 신바빌로니아의 평안을 구하기는 커녕

그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바위에 메어치고 싶어했다.  

추방은 단지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혼란이다.

 

난민은 문화와 정체성의 뿌리가 단절되면서 표류한다는 느낌,

방향을 상실했다는 느낌, 하찮은 존재로 시들어 간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대인 포로는 신바빌로니아에서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살지는 않았다.  

반면, 기원전 597 년에 자신의 의지로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항복한 여호야긴 왕은

가택 연금을 당했지만, 바빌로니아의 남쪽 성채에서 연금을 받으며 수행원들과 함께 비교적 안락하게 살았다.

 

포로 가운데  일부는 수도에 살았지만, 일부는 새로판 운하 근처 미개발 지역에서 살았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꼈다.

난민 가운데 일부는 이제 야훼를 섬길 수가 없었다.

야훼가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에게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다신을 섬김) 

 

 

그러나 주목할 대목은 바빌론 유수가 오히려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점.

유대인들은 역사를 재서술하고 율법을 재구성하는 데 힘을 쏟은 점등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틀림없다.

 

‘예루살렘 전기’를 쓴 유대계 영국인 전기작가 사이먼 몬트피 오리에 따르면

‘유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다인들은 점점 유대인들이 되어 갔다.’고 기술 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고

많은 엘리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오는 바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신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유대인들은 회당을 짓고 거기서 유대인의 종교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회당 (Synagogue)이 바로 유대인의 공동체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공동체의 크고 작은 행사등 교육과 종교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BC587 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유대교는 성전중심의 제사종교에서  

회당중심의 경전종교로 변모되어 갔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유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대인들은 점점 유대인들이  되어갔다”는‘몬트피오리’의 지적대로

자신들의 실패와 고난을 통해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추구해 나갔고,

그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구전으로 내려오던 자기 민족의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성서작업을 해 나간 것이다.

이제 유대종교는 제물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성전중심의 종교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교육과 공동체중심의 경전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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