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지성은 그리스보다 못하고 체력은 켈트나 게르만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보다 뒤떨어진"
로마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특유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대제국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격변과 합종연횡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나온 속담이 바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멸망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로마가 망하기까지는 복합적이고 지루한 사건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로마 멸망의 이유를 분석한 이론이나 저작은 무수하게 많다.
지금도 수많은 역사학자가 이 주제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나온 로마 멸망에 관한 그 어떤 저작도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만큼 '로마제국 쇠망사'는 유려하고 방대하다.
옥스퍼드대학을 중퇴하고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에드워드 기번은
군에서 나와 류럽을 여행하던 1764년,
노을이 지는 로마 유적을 바라보며 로마 멸망에 관한 책을 쓰리라 마음먹는다.
그로부터 12년이 흘러 기번은 6권짜리 '로마제국 쇠망사'를 세상에 내놓는다.
기원후 2세기부터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1400년의 로마사를 다룬 이 책은
뛰어난 역사서이자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가 다룬 서술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황제들의 이야기는 물론,
그리스도교의 확립,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슬람의 침략, 몽골군의 서방원정,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서구역사의 전반을 종횡으로 누빈다.
여기에 역사학자로서의 통찰과 준수한 문장까지 보태져
'로마제국 쇠망사'는 흔들리지 않는 명저의 자리를 차지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래의 피를 섞지 않고
시민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려는 편협한 정책 때문에 더 이상 번영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는 공허한 자존심 대신 야망을 택했다.
로마는 노예나 이방인, 적이나 야만족 모두의 장점과 미덕을 취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사려 깊고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현실적 개방성으로 로마는 제국이 됐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서서히 멸망해갔다.
개방성은 제국을 가능하게도 했지만 제국을 멸망하게도 했다.
이것이 역사의 순환이다.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거론한 로마 멸망의 원인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근본은 하나다.
결국 규모와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관계속에서 멸망한 것이다.
로마라는 거대한 골조가 그 규모와 연결고리의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는
그곳에 로마를 이식하기보다는 오히려 동화될 수밖에 없었고,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 이민족과 융화된 로마군단들은 오히려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권좌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황제들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미봉책으로 일관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로마정신은 서서히 훼손되어 갔다.
기번은 가라앉기 시작하던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 그리스도교의 대두였다고 본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비관에 빠진 사람들은
내세지향적인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점점 현실을 체념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결국 로마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현실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시각이다.
사실, 기번은 이 부분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불경스럽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가 탐구한 건
제국을 흥하고 망하게 하는 사회심리적 현상이었지,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
"로마의 쇠퇴는 제국의 거대함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번영이 쇠퇴의 원리를 무르익게 한 것이다.
정복지역이 확대되면서 파멸의 원인도 증가했다."
기번은 역사라는 거대한 숙명적 순환고리를 가장 정확하게 간파한 선구자였다.
[허연 기자]
《로마 제국 쇠망사》(로마帝國衰亡史)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역사책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6황제 시대▶5현제와 콤모두스)부터 로마 제국 멸망까지를 담고 있다.
모두 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 권은 1776년, 제2권과 3권이 1781년,
제4, 5, 6권이 1788년과 1789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일생은 로마 역사를 쓰기 위해 만들어진 세월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고대 역사와 철학, 문화를 섭렵하기 시작하였으며
어릴적 건강이 좋지 못했던 환경은 기번으로 하여금 더욱더 역사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고대 역사 연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 멸망이라는 무려 1200년간이 넘는 기간이 서술되어 있다.
이 긴 시간을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부침을 거듭하며 몰락해 가기 시작했는가 서술하고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그의 장편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서문에서
그 작품의 집필 동기를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해 저술했다.
제1기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의 야만족 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다.
제2기는 동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부터
아랍인의 소아시아 및 아프리카 정복과 800년의 서로마제국 부활, 즉 샤를마뉴의 등극까지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서로마제국의 부활로부터 터키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략
그리고 로마 황제 계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의 약 6세기 반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기간 동안 등장하는 십자군의 역사를 포함해 다룬다.
한마디로 1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서유럽의 역사와 서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역사를 총괄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의 장구한 역사를 당대의 시대상과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서술했다.
기번은 엄청난 사료와 자신이 신봉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신의 존재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른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했는데,
이에 따라 시종일관 종교적 불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베리 박사는 기번의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하고 편집하며
그를 시대를 초월한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기번의 장점으로 내세운 것은 과감하고 정확한 평가 기준, 바른 안목과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기지, 문제점 있는 내용은 유보하고 의구심을 표명하는 적절한 판단력,
자신의 독특한 표현 방법에 대해 시종일관하는 집중력 등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술과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번의 평가나 작업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이 현재에도 ≪로마제국 쇠망사≫가 세계인들이 선호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이 책은 이후에도 역사학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황금 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사실로,
서로마 멸망과 한반도 신라·가야와의 연계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떠오른다.
즉, 로마제국의 멸망의 요인으로 게르만, 훈, 흉노 등 야만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들은 근래의 연구에 의해 한민족과도 깊게 연계되고 있어 더욱 중요성을 부여받고 있다.
다만 실수나 억측이 없는 건 아니다.
콤모두스가 하렘을 거느렸다느니 같은 억측을 하는가 하면
3세기 인물인 성 제오르지오(게오르기우스)를 4세기의 아리우스파 신도로
소아시아에서 온갖 패악질을 한 게오르기우스와 착각해서,
패악질 부리다 죽은 사람이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고 비꼬기도 하는 등의 오류가 종종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로마제국 쇠망사》의 내용보다는 기번의 훌륭한 문장에 더 집중하라고 조언할 정도(...).
사실 오류도 오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 출간된 책은 10년만 지나도 매우 낡은 것으로 간주된다.
연구사 정리할 때나 참고하는 정도.
그런데 300년이나 된 기번의 책을 원사료가 없는것도 아니고
로마사를 공부하는 사료로 쓴다는 자료로 쓰기에 무리가 많다.
게다가 기번의 책은 심지어 근대 역사학 연구방법론이 정립되기도 한참 이전에 쓰인 책이다.
한국으로 치면 동사강목이나 연려실기술, 발해고와 비슷한 연배의 역사책인데
이 세 서적 모두 역사학적으로 의의가 있지만 고고학이 발달되기 이전,
혹은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번역되기 이전인지라 그대로 써먹기에 무리가 있는 서적인걸 생각하면 된다.
기번의 책은 문학적 가치로 인정받는 고전이지, 로마사의 사료로서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유독 이상하게 기번의 책을 읽고 로마사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을 뿐.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과정을 실증적이면서도 유장한 문체로 다룬다.
서기 2세기인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황제 시대에서 시작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로마 제국 창건, 신성로마 제국 건국,
투르크의 침입에 의한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멸망(1453년)까지, 약 1400년간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리스도교의 확립, 게르만 민족의 이동, 이슬람의 침략, 몽골족의 서정(西征), 십자군 원정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사건을 다루어 고대와 근세를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하며,
시공간적으로 방대한 스케일을 지닌다.
1776년에서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여섯 권으로 간행되었다.
○ 목차
[1권]
해제
에드워드 기번의 서문
일러두기
1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범위와 군사력,서기 98 ~ 180년
2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통일과 내부적 번영·예술·사람들
3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
4 콤모두스의 잔인성,우행,살육·페르티낙스의 즉위·그의 개혁 시도·근위대에 의한 암살·분노
5 근위대,제위를 공매에 부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팔다·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시리아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를 선언하다·내전과 세베루스의 승리·군기의 해이·새로운 원칙들
6 세베루스 황제의 사망·카라칼라 황제의 학정·마크리누스 황제의 찬탈·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우행·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의 미덕·군대의 방종·로마 재정의 전반적인 상태
7 막시미누스 황제의 즉위와 폭정·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의 반란과 원로원의 권위·내전과 폭동·막시미누스 황제 부자,막시무스 황제와 발비누스 황제,고르디아누스 3대 황제의 횡사·필리푸스 황제의 찬탈과 100년제
8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의한 군주정 복고 후의 페르시아 정세·그의 성격과 원칙
9 야만족의 침입이 시작될 때까지의 게르마니아 정세,데키우스 황제시대·서기 248년
10 데키우스 황제,갈루스 황제,아이밀리아누스 황제,발레리아누스 황제 및 갈리에누스 황제·야만족의 대규모 침입·30인의 참주들·19인의 실존 참주들
1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치세·고트족의 패배·아우렐리아누스의 승리,개선,사망·제노비아의 성격
12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사후 군대와 원로원의 동향·타키투스 황제,프로부스 황제 및 카루스 황제 부자의 치세
13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세 명의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갈레리우스,콘스탄티우스의 통치·질서와 평온의 전면적인 회복·페르시아 전쟁과 승리 및 개선·새로운 통치 방식·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퇴위
14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위 후의 혼란·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사망·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막센티우스 황제의 즉위·여섯 황제의 동시재위·막시미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 황제의 사망·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콘스탄티누스 치하의 제국 통일·법률·전면적인 평화
15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사상,풍습,신도 수도 및 상황·각종 의식,학예,축전
16 네로 황제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까지의 로마 정부의 그리스도교 정책·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후기
[2권]
17 콘스탄티노플의 창건·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후계자들의 정치 체제·군율·궁정·재정·일반 조세·자발적 기부금
18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품성·고트 전쟁·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세 아들에 대한 제국 분할·페르시아 전쟁·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황제의 비극적인 죽음·마그넨티우스의 찬탈·내전·이탈리아의 정복·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승리
19 독재자 콘스탄티우스 황제·갈루스의 즉위와 죽음·율리아누스의 고난과 즉위·사르마티아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갈리아에서의 율리 아누스의 승리
2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동기 및 그 진행과 결과·그리스도교 또는 가톨릭 교회의 공인과 조직·성직자
21 이단에 대한 박해·도나투스파의 분립·아리우스파 논쟁·아타나시우스·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 치하에서의 교회와 제국의 혼란·그리스도교 분파 개괄·이교에 대한 관용
22 율리아누스가 갈리아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다·진군과 승리·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율리아누스의 민정·그의 훌륭한 품성
23 율리아누스의 종교·모든 종교의 자유·이교 숭배의 부활과 개혁의 시도·예루살렘의 신전의 재건·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교묘한 박해·양 파의 광신과 부정
24 율리아누스의 안티오크 체류·성공적인 페르시아 원정·티그리스 강 도하·율리아누스의 퇴각과 사망·요비아누스의 추대·굴욕적인 강화 조약으로 로마군을 구하다
25 요비아누스의 통치와 사망·발렌티니아누스의 선출,동생 발렌스를 공동 통치제로 선택하여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을 최종 분할하다·프로코피우스의 반란·민정과 교회 행정·게르마니아·브리타니아·아프리카·동방·도나우 강·발렌티니아누스의 사망·그의 두 아들,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을 계승하다·동로마 황제의 무력함
26 유목 민족들의 풍습·중국에서 유럽으로의 훈족의 이동·고트족의 패주·고트족이 도나우 강을 넘다·고트 전쟁·발렌스의 패배와 사망·그라티아누스가 테오도시우스에게 동로마 제국을 맡기다·그의 인품과 승리·고트족의 평화와 정착·아타나리크의 죽음과 장례
[3권]
일러두기
27 그라티아누스의 죽음?아리우스파의 몰락·성 암브로시우스·막시무스와의 1차 내전·테오도시우스의 인품, 통치, 참회·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에우게니우스와의 2차 내전?테오도시우스의 죽음·시대의 타락·해이해진 보병 부대
28 이교의 최종적인 몰락·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도입된 성자와 성(聖)유품 숭배
29 테오도시우스의 아들들 간에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최종 분할·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치세·루피누스와 스틸리코의 통치?아프리카에서의 길도의 반란과 패배·원로원에 의한 단죄
30 고트족의 반란·고트족의 그리스 약탈·두 차례에 걸친 알라리크와 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스틸리코, 그들을 격퇴하다·게르만족의 갈리아 침략?콘스탄티누스의 서로마 제위 찬탈·스틸리코의 치욕과 죽음·손상된 그의 명성·클라우디아누스
31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침략·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의 태도?로마가 세 차례 포위된 끝에 고트족에게 약탈당하다·알라리크의 죽음·고트족의 이탈리아 철수·콘스탄티누스의 몰락·야만족의 갈리아와 에스파냐 점령·브리타니아의 자유
32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에우트로피우스의 통치와 치욕·가이나스의 반란·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에 대한 박해·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그의 누이 풀케리아·그의 아내 에우도키아?페르시아 전쟁과 아르메니아 분할·쇠퇴기의 광휘
33 호노리우스의 죽음·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그의 모후 플라키디아의 통치·아이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반달족의 아프리카 정복
34 훈족의 왕 아틸라의 성격, 정복, 그의 궁정·테오도시우스 2세의 죽음·풀케리아가 마르키아누스를 동로마 제국의 제위에 앉히다
35 아틸라의 갈리아 침공·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에 의해 격퇴되다·아틸라의 이탈리아 침략과 철수·아틸라, 아이티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로마의 몰락의 징후들
36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의 로마 약탈·그의 해상 약탈·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들, 막시무스,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올리브리우스, 글리케리우스, 네포스, 아우구스툴루스·서로마 제국의 멸망·이탈리아 최초의 야만족 왕 오도아케르의 치세와 인품
37 수도원 생활의 기원, 그 발전과 영향·야만족들의 그리스도교와 아리우스파로의 개종·아프리카에서의 반달족의 박해·야만족들 사이에서의 아리우스파의 몰락·에스파냐의 유대인들
38 클로비스의 통치와 개종·알레만니족, 부르군트족, 서고트족에 대한 그의 승리·갈리아에서의 프랑크 왕국 건설·야만족들의 법률·로마인들의 상황·에스파냐의 서고트족·색슨족의 브리타니아 정복·아서 왕의 명성
[4권]
일러두기
39 동로마 황제 제논과 아나스타시우스·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의 출생과 교육, 초기 업적들·그의 이탈리아 침략과 정복·이탈리아의 고트 왕국·서방 세계의 상황·군사 정권과 시민 정권·원로원 의원 보이티우스·심마쿠스의 죽음·테오도리크의 회한과 죽음
40 유스티누스 1세의 등극·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 1. 황후 테오도라·2. 원형경기장에 모인 분파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소요·3. 비단의 교역과 생산·4. 재정과 조세·5.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운 건축물·성 소피아 성당·동로마 제국의 요새와 변경 지대·유스티니아누스의 아테네 학교와 로마 집정관직 폐지
41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방 정복·벨리사리우스의 성품과 최초의 출정·벨리사리우스의 아프리카 반달 왕국 침공과 정복·벨리사리우스의 승리·고트 전쟁·시칠리아, 나폴리, 로마 수복·고트족의 로마 포위 공격·고트족의 퇴각과 패배·라벤나의 항복·벨리사리우스의 영광·그의 가정의 수치와 불행·그의 아내 안토니나
42 야만 세계의 정세·롬바르드족의 도나우 강 연안 정착·슬라브 종족과 침략·투르크족의 기원, 제국, 외교 사절·아바르족의 패주·페르시아 왕 호스로우 1세(누시르반)·그의 치세와 대(對)로마전·콜키스 또는 라지카 전쟁·에티오피아족
43 아프리카의 반란·토틸라에 의한 고트족 왕국의 부활·로마의 함락과 탈환·나르세스의 이탈리아 최종 정복·동고트족의 멸망·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패배·벨리사리우스의 최후의 승리, 불명예, 죽음·유스티니아누스의 죽음과 그의 품성·혜성, 지진, 역병
44 로마 법학의 개념·왕정기의 법·10인위원회의 12표법·민중의 법·원로원의 포고·정무관의 고시와 황제의 칙령·로마 법학자의 권위·유스티니아누스의 칙법휘찬, 학설휘찬, 신칙법, 법학제요: 1. 개인권·2. 물권·3. 위법행위와 소송·4. 범죄와 형벌
45 유스티누스 2세의 치세·아바르족의 사절·그들의 도나우 강 연안 정착·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정복·티베리우스의 즉위와 치세·마우리키우스의 즉위와 치세·롬바르드족과 라벤나 총독 지배하의 이탈리아 정세·로마의 고난·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성품과 정책·로마의 구원자
46 호스로우(누시르반) 사후의 페르시아 혁명·그의 아들 압제자 호르모우즈의 폐위·바흐람의 찬탈·호스로우 2세의 도주와 복위·로마에 대한 그의 사의(謝意)·아바르족의 왕·마우리키우스 황제에 대한 군사 반란·그의 죽음·포카스의 전제 정치·헤라클리우스의 즉위·페르시아 전쟁·호스로우의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정복·페르시아와 아바르족의 콘스탄티노플 포위·헤라클리우스의 승리와 개선
47 성육신 교리의 신학사·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의 대립·성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에우티케스의 이단·제4차 칼케돈 공의회·민정과 교권의 불화·유스티니아누스의 편협함·3장 논쟁·단의론 논쟁·동방 종파의 상황·1. 네스토리우스파·2. 야고보파·3. 마론파·4. 아르메니아파·5. 콥트파
[5권]
48 마지막 두 권에 대한 계획.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황제들의 계보와 성격, 헤라클리우스 시대부터 라틴의 정복까지
49 성상(聖像)의 도입, 숭배, 박해.이탈리아와 로마의 반란.교황의 세속적 지배권.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성상의 확립.샤를마뉴 대제의 인품과 대관식.서로마 제국의 수복과 쇠퇴.이탈리아의 독립.독일 연합의 구성.독일 황제 카를 4세
50 아라비아와 그 주민.마호메트의 탄생, 품성 및 교의.메카에서의 설교.메디나로의 피신.무력에 의한 선교.아랍인들의 자발적 또는 마지못한 복종.마호메트의 죽음과 후계자들.알리와 그 후손들의 권리와 운명.마호메트의 성공
51 아랍 또는 사라센인들의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정복.칼리프, 즉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의 제국.그 지배하의 그리스도교도 등의 상황.그리스도교의 쇠퇴와 몰락
52 아랍군이 두 차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함.아랍군의 프랑스 침공,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함.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사이의 내전.아랍인들의 학문.칼리프들의 사치.크레타, 시칠리아, 로마로의 해상 모험.칼리프 제국의 쇠퇴와 분열.비잔티움 황제들의 패배와 승리.니케포루스 포카스, 치미스케스
53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상황.확장과 분할.부와 세입.콘스탄티노플 궁전.칭호와 관직.황제의 자부심과 권한.비잔티움, 아랍, 프랑크족의 전술.라틴어의 소실.비잔티움인들의 고립
54 바울파의 기원과 교의.비잔티움 황제들의 박해.아르메니아의 반란.트라키아로의 이주.서방 세계에서의 전파.개혁의 원인과 결과
55 불가리아인.헝가리인의 기원, 이주, 정착.헝가리인의 동로마와 서로마 침략.러시아 대공국.지리와 교역.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러시아인의 전쟁.야만족들의 개종.블라디미르의 세례
56 이탈리아의 사라센인, 프랑크인, 비잔티움인.노르만인의 최초의 모험과 정착.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의 성격과 정복.동생 루지에로의 시칠리아 해방.동로마와 서로마 황제에 대한 로베르의 승리.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아프리카와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다.마누엘 콤네누스 황제.비잔티움과 노르만인의 전쟁.하인리히 6세.노르만인의 전멸
57 셀주크 가(家)의 투르크족.힌두스탄 정복자 마흐무드에 대한 그들의 반란.토그룰이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칼리프를 보호하다.알프 아르슬란에게 패하고 포로가 된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말리크 샤의 권력과 위엄.소아시아와 시리아 정복.예루살렘의 상태와 압제.성지 순례
[6권]
일러두기
58 1차 십자군의 기원과 규모ㆍ라틴 군주들의 성격ㆍ그들의 콘스탄티노플 진군ㆍ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의 정책ㆍ프랑크족의 니케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정복ㆍ성묘 구원ㆍ예루살렘 초대 왕 부용의 고드프루아ㆍ프랑스 또는 라틴 왕국
59 비잔티움 제국의 상태ㆍ2차,3차 십자군의 규모, 행로 그리고 결과ㆍ성 베르나르ㆍ살라딘의 이집트와 시리아 통치ㆍ그의 예루살렘 정복ㆍ해상 십자군ㆍ영국의 리처드1세ㆍ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 4차, 5차 십자군ㆍ황제 프리드리히2세ㆍ프랑스의 루이 9세와 마지막 두 십자군ㆍ마말루크 왕조의 프랑크인 축출
60 비잔티움 교회와 라틴 교회의 분열ㆍ콘스탄티노플의 상황ㆍ불가리아인의 반란ㆍ이사키우스 안겔루스가 동생 알렉시우스에 의해 폐위당하다ㆍ4차 십자군의 기원ㆍ프랑스인과 베네치아인이 이사키우스의 아들과 동맹을 맺다ㆍ그들의 콘스탄티노플 해상 원정ㆍ라틴인의 두 차례 포위 공격과 최종 정복ㆍ신성 모독, 조소, 파괴
61 프랑스인과 베네치아인 들의 제국 분할ㆍ플랑드르와 쿠르트네 가의 라틴 황제 다섯 명ㆍ그들의 불가리아인 및 비잔티움인과의 전쟁ㆍ라틴 제국의 무력함과 곤궁ㆍ비잔티움인들의 콘스탄티노플 수복ㆍ십자군의 전반적인 결과ㆍ쿠르트네 가
62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황제들ㆍ미카엘 팔라이올로구스의 즉위와 통치ㆍ교황 및 라틴 교회와의 그의 거짓 통합ㆍ앙주 공 샤를의 적대적인 의도ㆍ시칠리아의 반란ㆍ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카탈로니아인의 전쟁ㆍ아테네의 혁명과 현황ㆍ아테네 사람들 독재에서 벗어나다
63 내전과 비잔티움 제국의 파멸ㆍ연로 안드로니쿠스와 연소 아드로니쿠스, 요하네스 팔라이올로구스의 치세ㆍ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의 섭정, 반란, 통치, 퇴위ㆍ페라, 즉 갈라타에 거류지를 세운 제노바인들ㆍ제국과 콘스탄티노플 시에 대한 제노바인들의 전쟁ㆍ베네치아에 대한 제노바인들의 승리
64 칭기즈칸과 몽골군의 중국에서 폴란드까지의 정복ㆍ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티움 사람들의 탈출ㆍ비티니아에서의 오스만 투르크의 기원ㆍ오스만,오르한,무라드1세, 바야지트1세의 치세와 승리ㆍ아시아와 유럽에서의 투르크 왕국의 창건과 발전ㆍ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ㆍ요하네스 팔라이올로구스
65 티무르의 사마르칸트 제위 등극ㆍ티무르의 페르시아, 그루지야, 타타르, 러시아, 인도, 시리아, 아나톨리아 정벌ㆍ티무르의 대투르크전ㆍ바야지트의 패배와 생포ㆍ티무르의 죽음ㆍ바야지트의 아들들의 내란ㆍ마호메트 1세에 의한 투르크 왕국의 재건ㆍ무라드2세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
66 교황에게 간청하는 동방의 황제들ㆍ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요하네스1세, 마누엘, 요하네스 2세의 서방 방문ㆍ바젤 공의회에 의해 추진된 비잔티움 교회와 라틴 교회의 통합, 페라라와 피렌체 공의회의 결의ㆍ콘스탄티노플의 문예 상태ㆍ비잔티움 망명자들에 의한 이탈리아의 문예 부흥ㆍ라틴인들의 호기심과 경쟁심
67 비잔티움 교회와 라틴 교회의 분리ㆍ무라드 2세의 치세와 인품ㆍ헝가리 왕 라디슬라우스의 십자군ㆍ라디슬라우스의 패배와 죽음ㆍ야노슈 후냐데ㆍ스칸데르베그ㆍ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ㆍ프란차의 사절들ㆍ비잔티움 궁정
68 마호메트 2세의 치세와 성격ㆍ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 및 최종 정복ㆍ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의 죽음ㆍ비잔티움의 예속ㆍ동로마 제국의 멸망ㆍ유럽의 경악ㆍ마호메트2세의 정복과 죽음
69 12세기 이후의 로마의 상황ㆍ교황의 세속 지배ㆍ도시의 소요ㆍ브레스키아의 아르놀드의 정치적 이단ㆍ공화제의 부활ㆍ원로원의 의원들ㆍ로마 시민들의 자부심ㆍ그들의 전쟁ㆍ로마 시민들의 교화 선거권 상실과 교황의 존재 및 아비뇽 유폐ㆍ성년ㆍ로마의 귀족 가문ㆍ콜론나 가와 우르시니 가의 불화
70 페트라르카의 인품과 대관식ㆍ호민관 리엔치에 의한 로마의 자유와 통치 체제의 부활ㆍ리엔치의 미덕과 악덕, 축출과 죽음ㆍ교황의 아비뇽에서 로마로의 귀환ㆍ서방 교회의 대분열ㆍ라틴 교회의 재통합ㆍ로마의 자유를 위한 마지막 투쟁ㆍ로마법ㆍ교황령 국가의 최종 수립
71 15세기 로마의 폐허를 조망하며ㆍ쇠락과 파괴의 네 가지 원인ㆍ원형경기장의 예ㆍ로마인들의 무지와 미개ㆍ도시의 쇄신ㆍ맺는 말
402년부터 서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중심으로 오레스테스는
군대의 힘을 이용해 아들 로물루스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섭정을 받은 로물루스는 황제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기념비를 세울만한 통치 활동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로마, 밀라노, 라벤나 등지에서 발행됐다.
그의 치세는 10개월 정도로 짧았기에 기록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다.
Timeline of the Roman and Byzantine Emperor
○ 책 속으로
원인에 따른 결과로 자연스럽게 발생해야 할 일들이 성급하게 일어나는 잦은 변화로 번번이 깨지고,
이런 상황들이 조금씩 누적되면서 먼 역사의 효용과장식을 활용할 수 있는 통찰력이 가지는 효과와 장점은 깨지고 만다. 4:2
고대의 자유민들은 고매한 열정을담아
˝포로는 노예가 되는 첫째 날 바로 남성적 능력의 절반을 박탈당하는 도다.˝ 라며
호메로스의 시 구절을 읊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공복(公僕)이 되거나 개인적인 노예가 되는 경우만을 보았을 뿐,
신념을 꺾고 납작 엎드린 자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속박하는 영적, 심적 압제로
나머지 절반의 남성성도 전멸된다는 사실은 예언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리스인들은 이중의 멍에로 헤라클리우스 후계자들에게 억압당했다.
폭군은 자신이 다스리는 신민들이 저지르는 악덕 한 행위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이 영원한 정의의 법칙이다. 4:3
○ 저자소개 :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1737~ 1794)
1737년 런던 인근의 서리 주 퍼트니(현재는 런던의 완즈워스 자치구로 윔블던 테니스장 인근)에서 부유한 지방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52년 15세 때 귀족에게 허용되는 특별 자비생 자격으로 옥스퍼드대학교의 매그덜린칼리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종교 논쟁에 연루된다. 이신론에 입각한 종교 비판서들을 읽고 로만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비공개로 영세(領洗)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1754년 다시 성공회로 복귀해 말썽의 요지였던 종교 문제를 결말짓는다. 그의 개종을 둘러싼 문제는 여러 종교 서적을 읽은 영향과 당시 학교의 종교적 분위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훗날 그는 “옥스퍼드의 수도사들에 대해 종교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기번은 1758년까지 스위스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중 라틴어, 고전, 시, 웅변 및 철학 등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을 형성했다. 또한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를 능란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습득했다. 기번은 20세 때 크라시에 사는 칼뱅파 목사의 딸로, 동년배로 알려진 쉬잔 퀴르쇼와 사랑에 빠진다. 기번은 그녀와 약혼한 후 아버지의 승낙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귀국했다. 아버지는 당시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재혼한 상태였는데, 쉬잔이 재산이 없으며 전쟁 중에는 외국인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며 그에게 파혼을 요구했다. 파혼 이후 그는 오로지 독서에만 전념했고 저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1764년 10월 15일 이탈리아 여행 중 폐허가 된 로마의 카피톨에서 로마제국의 쇠망에 관한 작품을 쓸 영감을 받았고, 1770년 부친이 죽고 비로소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자산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이주해 ≪로마제국 쇠망사≫의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1776년 전 6권 중 제1권을 출판하는데, 이 책은 대단한 호평을 받아 1년 내에 3판까지 발간되었다. 그는 ≪로마제국 쇠망사≫ 한 권으로 거의 데이비드 흄, 윌리엄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과 더불어 당대 영국 3대 사학자로 부각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 역자 : 송은주
이화여대 강사, 번역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인문과학원 HK 연구교수를 거쳐 2020년 현재 성균관대, 이화여대, 건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2018년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하는 인문학 대중화 사업의 일환으로 ‘인간 이후의 인간: SF로 읽는 포스트휴먼’을 진행했고, 지은 책으로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가 있다.
○ 출판사 서평
‘세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는 과정을 아주 실증적이면서도 유장한 문체로 다루고 있는 역사책이다. 1776년에서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여섯 권으로 간행된 <로마 제국 쇠망사>는 수없이 많은 로마사 책들 중에서 대표적 작품이며, 영문학사상의 명저로도 꼽힌다. 서기 2세기인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황제 시대에서 시작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로마 제국 창건, 신성로마 제국 건국, 투르크의 침입에 의한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멸망(1453년)까지, 약 1400년간의 역사를 기술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를 최초로 개관한 역사서로 평가받았다. 그리스도교의 확립, 게르만 민족의 이동, 이슬람의 침략, 몽골족의 서정(西征), 십자군 원정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사건을 다루어 고대와 근세를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하는 저서로서, 시공간적으로 방대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서양 세계의 기원인 로마 역사에 대한 기본 중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역사서로서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는 영원한 고전
기번은 제일급 역사가이자 큰 문장가로 불린다. 그 자신 일급 역사가였던 토인비는 “기번의 정신은 모든 저명한 서구 역사가들 중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하고 눈부시다.”라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엔터테이너이다.”라고 쓴다. 이 모두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고 붙인 평들이다.
다음은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의 말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서술된 독특한 역사서다.1400년에 걸쳐 서서히 멸망해 가는 대제국의 역사를 치밀한 묘사와 탁월한 해석으로 하나하나 짚어 간 이 웅편거작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악덕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펼쳐진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권력욕과 성욕, 뒤틀린 심성과 모자라는 지성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제위 찬탈, 골육상잔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기번은 이토록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무릅쓰고 쌓아올린 인류사 최대의 영광으로 로마사를 조망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역사서이면서도 단순한 역사 서술을 뛰어넘는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는 불후의 고전이다.”
그리스•로마는 서양 문명의 원형이다. 흔히 말하듯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려면, 오히려 현대 서양 문명의 원형인 그리스?로마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광활한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 역사의 덩치에 비해 전혀 작지 않은 그리스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에.) 기번은 이 책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였고, 또 이미 많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인이면서 키케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한동안 두었다가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여 그 결과를 원문과 대조해 가며 학습하는 등의 언어 능력은 로마의 역사를 다루기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자질이었다. 그는 이 언어로 말하고 저 언어로 글을 썼던 것이다. (그리스어, 스페인어, 히브리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연구 성과가 아닌 원사료를 읽어 낼 수 있었던 그는 역사가로서 가졌던 신념에 따라 많은 준비를 하였다. 역사가로서의 그의 신념은 성실성이었다. 기번은 역사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다양한 작품들을 능숙하게 이용했는데, 자신의 역사를 풍부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우선 1차 사료와 2차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그 외의 각종 자료들을 섭렵하여 책의 곳곳에서 풀어내 놓는다. 기번을 읽는 재미가 아마 여기에서도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사료에 대한 객관적, 비판적 분석이 종종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기번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되도록 정확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다양한 지식과 견해, 정보를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본문에 육박하는 수많은 각주가 잘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기번은 입수 가능한 자료에 대한 철저한 탐구, 상세한 고증,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집필 과정을 성실하게 이루어나갔으며, 그 결실인 <로마 제국 쇠망사>는 영국의 역사 서술에 주요한 발전을 이룩해 낸 저서로도 평가받는다. 영문학사상으로도 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 책이 역사가로서의 기번의 이러한 성실성이 없었다면 그 유려하다는 문체만 자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로마 제국 쇠망사’ : 수많은 로마사 관련 책들을 파생시킨 모태
<로마 제국 쇠망사>와 관련하여 항상 언급되는 것이 그 서술의 규모다. 로마는 조그마한 도시국가였다. 이 조그마한 도시국가가 불멸의 성공을 거듭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다가 스러져가기까지의 과정의 서술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어서, 제1권이 출간된 1776년부터 마지막 제6권이 나올 때까지 1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준비 과정, 집필 기간 등을 포함하면 모두 20여 년의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서기 98년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지나 그 후 1000년 동안 더 존속한 동로마 제국, 제국과 접하고 있던 모든 문명국 및 이른바 ‘야만국’과 그 구성원들, 이슬람교의 대두, 신성 로마 제국, 십자군 운동 등 요컨대 서기 100년경부터 1400여 년에 이르는 서방의 역사, 그리고 서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역사(기번은 당시 영어로 번역된 동양사 관련 서적을 모두 섭렵했다.)를 망라한다. 그 긴 세월과 광범위한 지역의 역사가 오랫동안 가다듬어진 기번의 통찰력과 균형 잡힌 시각 속에서 서로 연관을 이루며 잘 결합되어 방대한 규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사실 주지하듯이 기번의 주된 관심은 서로마 제국의 역사였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제3권까지 집필한 다음, 다소 망설인 끝에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서술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제1권에서 4권까지로 구성된 첫 부분은 서기 2세기부터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641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1~47장), 나머지 두 권은 7세기에서 15세기까지를 다루고 있다.(48~71장) 그 결과 처음 네 권에서는 약 500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반면 마지막 두 권은 거의 100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루는 불균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연구 풍토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서로마에 비해 훨씬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개관하고, 이슬람에 대해 불편부당한 서술을 하고 있는 것 자체로 벌써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흔히들 로마 제국은 서기 476년의 서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그 생명을 다했다고 본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로마의 몰락’이라는 급격한 변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476년의 서로마 제국 멸망에 역사적 의의를 크게 두지 않으며,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은 수세기에 걸친 과도기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동로마 제국 존속의 의의를 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어느 순간 흥하고 망하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연속’의 역사가 중요시되는 것이다.
– 국내 최초 영한 대역 완역본 출간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은 다른 역사서들과 차별화된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 주는데 우선 그 문체가 많이 언급된다. 기번 자신이 스스로 밝힌 대로 제1장은 세 번, 제2장은 두 번을 썼다고 할 정도로 이 책에 맞는 표현과 서술 방식을 찾기 위해 상당히 고심하였다. 평소에 그의 집필 방식은 “긴 단락을 하나의 문장에 넣어 귀로 음미해 보고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가, 마지막 손질을 하고 나서 펜을 움직이는” 식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기번의 문장은 소리 내어 읽지 않더라도 그 낭랑한 음률이 귀에 들리는 듯한데 영어의 가장 큰 강점인 구어체를 잘 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영국에서의 역사 서술의 경향과 연결되는 부분으로, 영국은 유럽 대륙과 달리 일찍 혁명을 경험하여 18세기에 들어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으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제도들에 대체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 서술에서 다소 표면적인 사고에, 사실에 대한 분석보다는 설명을 선호하여 수사학적인 표현과 미학적인 서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독특한 표현 방법에 대한 기번의 개인적인 관심에 더해 그의 역사 서술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큰 문장가인 기번을 동시에 위대한 역사가로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냉철함과 독창성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기번의 과감하고 정확한 기준,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지혜, 현명한 유보와 적절한 회의 등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서술하면서 끊임없이 곱씹어 보는 화두가 되었다.
또 한 가지 기번이 색다른 점은 역사가의 주요 역할이 도덕적인 교훈을 찾아내는 데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에, 사회의 운명을 결정짓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거나 흥망성쇠의 필연적인 주기를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과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과거와 과거의 다양하고 복잡한 사건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유럽 여행을 하던 에드워드 기번이 1764년 가을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의 폐허를 바라보고 로마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은 그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대작을 탄생시켰다. 기번은 정치(精緻)하면서도 재미있다. <쇠망사>가 발간되고 그 견고한 구조를 헐뜯는 비판서들이 많이 발표되었지만, 로마 제국의 쇠망의 과정을 기번만큼 설득력 있게 다룬 사람은 없을 것이며, 아직도 그를 뒤집거나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대들은 군주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머리 위에는 언제나 검이 매달려 있다네. 군주는 자신의 근위병들마저 두려워하며, 동료도 믿지 못한다네. 움직이거나 쉬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더 이상 군주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네. 또한 나이나 덕성, 품행 그 어떤 것도 질투심에서 비롯되는 비난에서 보호해 줄 수 없다네. 이렇게 나를 제위에 올려놓았으니, 그대들은 나에게 근심 가득한 일생과 때 이른 죽음이라는 운명을 안겨 준 셈이네. 다만 남아 있는 유일한 위안은 나 혼자서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뿐이네.”
로마 황제의 변이다. 사실 로마 역사가 근본적으로 생경한 것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교양 터전에서 이 방대하고 포괄적인 역사 여행에 선뜻 참여하기가 주저되지만, 이 책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과 배반, 명예, 전쟁, 인물, 사건, 제도, 경제, 예술, 문화, 종교, 미신, 유럽 아닌 세계, 민중의 투쟁, 사랑, 덧없음, 지구온난화 문제 등 (26장에는 ‘Corea’가 나온다.) 인간사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이 영원한 고전은 우리에게 두렵지만 유익한 교훈이다.
* 일본에서는 동경대학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고 지난 1985년에 작고한 나카노 요시오(中 野好夫)외에 두 명의 번역자가 붙어서, 1976년부터 1993년에 걸쳐 <쇠망사>를 번역해 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완역이 아니다. 역자들 스스로도 기번을 따라잡지 못한(그의 언어 능력과 방대한 지식에 당황했다고 솔직히 밝혀 놓고 있다.) 번역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혀 놓았으며, 수많은 각주는 대부분 생략해 버렸다. 기번의 ‘잡담’이라고도 불리는 각주가 원본에는 8300여 개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편집판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번에 우리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버리(J. B. Bury) 판에는 4700여 개로 줄어 있다. 일본에서도 이 버리의 판을 번역했는데 본문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는지 각주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이번 민음사 판에서는 각주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였으며, 4700여 개 중에 본문 이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350여 개는 번역을 생략하였음을 밝힌다. 하지만 민음사 판은 영어판을 제외한 어느 다른 판본보다 각주를 많이 번역했기 때문에 감히 완역판이라 자부한다.
지난 2008년 7월 21일에 제1, 2권이 완역되어 나온 이래, 올 3월 2일에 제6권이 나옴으로써 총6권으로 완간되었다.
1.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1.2. 네 황제의 해1.3. 플라비우스 왕조1.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1.5. 다섯 황제의 해1.6. 세베루스 왕조1.7. 3세기의 위기1.8. 사두정치1.9. 콘스탄티누스 왕조1.10.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3.1. 테오도시우스 왕조3.2. 레오 왕조3.3. 유스티니아누스 왕조3.4. 이라클리오스 왕조3.5. 20년간의 혼란3.6. 이사브리아 왕조3.7. 니키포로스 왕조3.8. 아모리아 왕조3.9. 마케도니아 왕조3.10. 두카스 왕조3.11. 콤니노스 왕조3.12. 앙겔로스 왕조3.13. 라스카리스 왕조(니케아 제국)3.14. 팔레올로고스 왕조
-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 2 네 명의 황제의 해 ~ 플라비우스 황조
- 3 네르바-안토니누스 황조
- 4 난립기
- 5 세베루스 황조
- 6 군인 황제 시대 중의 황제들
- 7 테트라키아
- 8 콘스탄티누스 황조
- 9 발렌티니아누스 황조
- 10 테오도시우스 황조
- 10.1 서로마 제국
- 10.2 동로마 제국
- 10.2.1 테오도시우스 왕조(395~457)
- 10.2.2 레오 왕조(457~518)
- 10.2.3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602)
- 10.2.4 특정 왕조 없음(602-610)
- 10.2.5 이라클리오스 왕조 (610-711)
- 10.2.6 특정 왕조 없음(711-717)
- 10.2.7 이사브론 왕조 (717-802)
- 10.2.8 니케포루스 왕조 (802-813)
- 10.2.9 특정 왕조 없음(813-820)
- 10.2.10 아모리아 왕조 (820-867)
- 10.2.11 마케도니아 왕조 (867-1056)
- 10.2.12 특정 왕조 없음(1056-1059)
- 10.2.13 두카스 왕조 (1059-1081)
- 10.2.14 콤니노스 왕조 (1081-1185)
- 10.2.15 앙겔로스 왕조 (1185-1204)
- 10.2.16 라스카리스 왕조 (니카이아 제국, 1204-1261)
- 10.2.17 팔레올로고스 왕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 1259-1453)
- 10.2.18 팔레올로고스 왕조 (망명)
- 10.2.19 동로마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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