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5. 교회사에서 본 성과 결혼과 가정

‘결혼의 신분에 관하여’ 라는 설교를 루터가 할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하여

Narin Pusil 2021. 5. 12. 11:38

   01  /  May  / 2017

 

■1519년에 발표하고, 1525년에 수정했던,  Martin Luther의 “결혼과 신분에 관한 설교

    : " 결혼,  인간의 삶속에서 차지하는 그 위상에 관하여 설교를 할 수 있었던, 

         역사적-시대적-사회적-성서적 배경에 대하여…”   

 

 

ㅡㅡ<차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들어가며

◆본문

1.     15-16세기의 유럽의 정세

2.     여성 위상의 변천사

3.     당시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천

4.     신학속의 여성의 위상

5.     루터가 결혼의 위상을 쓰게된 배경

           1) 종교적 사회적 배경

           2) 에라스무스의 영향

           3) 정치적 종교적 배경

 

◆루터의 결혼관과 그를통한 종교개혁의 의의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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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결혼을 통하여 생산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비록 루터가 성직자의 결혼을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신'과 '결혼'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신학적, 실천적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살펴 여성의 위상을 올려 논 그 시대의 개혁자라고 볼 수 있다.

 

 

2.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 변화를 강조한 루터의 결혼에 대한 위상은, 그의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혼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서로를 위한 섬김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신이라는 절제 행위가, 성직자와 평신도를 영적으로 구분짓고 세상적으로도 차등을 두게 했을 뿐 아니라, 소위 성직자라는 그 시대의 신의 대리자들을 고통과 좌절속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독신이 아닌 결혼이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드러내는 것이라는 루터의 결혼관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위치를 회복시키고 성직자들에게는 결혼의 자유를 헌정했다.

 

 

3. 사실 루터의 결혼에 대한 종교개혁은 <'독신으로 형성되는 위선적 거짓 영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완벽한 독신의 수행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비롯한 삶의 모든것에 있어 서로를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받는다고 루터는 확신했다.

 

 

들어가며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창세기3:16) 

 

1. 이와같이 창세때부터 창조주에 명령에 의한 여성의 위치는 좀 불길했다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그 불길한 징조가 유대인 세계에 관습으로 전통으로 내려오고, 급기야 그리스도교에도 수용되어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물론 가부장적 통제에 의한 결혼이 이루어지고 남성으로 부터 그에 합당한 정절의 요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남에게 소개 할때도  ‘집사람’이라 하듯이) 여자를 집에 가둬놓기등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2.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페미니즘을 불러오게 하는 원인이 비단 기독교 전통과 제도만은 아니다.[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되는 여성차별은 공통된 역사적 문제였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구조와 그 테두리 안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2]  그렇게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여성-잔혹사(?)가 내려오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이 전유럽으로 퍼진 15~16세기에  와서야 비로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또한 사랑을 중시하는 결혼관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적인 결혼관은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동지애'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 역시 자녀출산과 성공적인 종교교육과 더불어 정절의 결혼의 의미를 혁신적으로 바꿔놓는 시점을 마련했던 것이다.

 

3.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던 그런 결혼관의 혁신의 단초가 되는 주장은 1519년, 루터가 “결혼 신분에 관한 설교(A Sermon on the Estate of Marriage 1522)”를 하게되고  또 1525년에 그 설교 본문을 수정한 내용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루터가 1523년이 되어서야 결혼을 “죄에 대한 치료” 라는 어거스틴적 전통에서 벗어나, “믿음의 신분(a Estate of Faith)”으로 보는 관점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이렇게 결혼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과 함께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시대적 여건을 보기로 하자.

 

 

A Selection of Three Sermons of Dr. Martin Luther on the Marriage Estate&nbsp;Hardcover &ndash; January 1, 1904

본문

 

1.  15-16세기의 유럽정세

1453년은 오스만-투르크의 메호메트 2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킴으로써 멸망시킨 해로써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던 아우구스투스 이래 1500년여 간의 로마 제국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것과 함께 중세시대도 끝나게 된다. 거기다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4C 부터 15세기 중반까지는 전반적으로 경제 쇠퇴의 시기로  물질적으로 빈곤했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사회적으로는 혼란스러웠다.

 

② 16세기들어 카알5세 황제의 명령으로 교황 클레멘스7세의  로마가, 신성로마제국의 용병들에 의해 약탈 당하고 심지어 루터파에 의해 복수극이 자행되었던 The War of the League of Cognac (1526–30) 전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의 종교 권위가 있었던 반면에 그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황제에게 철저하게 굴복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 교리교육 정도의 학습수준과  종교전쟁에 치여 살던, 전반적으로 지적으로 몽매했던 시기이기도 하여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워졌던 때 이기도하다.

 

③ 사회 구조적으로는 봉건제도의 틀 안에서 지배되던 시기였다. 특히 독일 지역과 같은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각각의 지주에게 권력이 분산화 되어 있었다. 따라서 압도적으로 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중심’이 없었기에 봉건 영주국가가 난립한 상황이었고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 VS 개신교 대결의 장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2.  여성 위상의 변천사[3]

         

    1. "인간의 욕구 중 성욕처럼 극단적인 취급을 받는 것은 없다.” - 에케하르트 로터 

    2.  번식능력의 축복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Gen. 1:28)

 

① 고대 중근동에서 행해지던 이쉬타르 여신의 축제 혹은 숭배도 ’번성하라’는 창세기 기록대로 야훼의 축복과 같이 ‘다산과 풍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 (그렇다면 창세초의 야훼도 바알등과 같은 생육과 번성과 풍요를 표방하던 신들중에 하나가 아니였을까? ) –  이 역시 그리스 문화(신화)에 깊이 침투되어 ‘뿌려지고 생장하고 거두어진다’ 라는 순환적인 패턴의 인간의 태어남, 자람, 죽음결합되어 이쉬타르 여신의 숭배를 인간의 삶과 연결시켰다.

 

② 이쉬타르 숭배는 성적 자유 축제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인의 관점일 뿐이지 그 사실적 내용을 알고 있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서구 기독교 사상적 시각으론 본 그런 성적 방종처럼 보이는 이 의식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일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앞서 말한 ''자연의 순환을 모방하여 행하였던 축제적 의식'' 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이쉬타르 의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자연의 순환보다는 그들의 시조 로물루스로 올라가는 자신들의 기원에 연결시켰다.  

 

③ 그러다가 맞이한 콘스탄티누스의 313년의 로마제국은 더 이상 다신교의 제국이 아니었다. 로마는 자신들이 박해하였던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로마황제가 공인하였다. 이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종교정책으로 사회변혁을 의미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고 공경하였던 신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④ 이슈타르-아스다롯의 특성이 흡수된 그리고 이전의 그들에게 자연의 생식력을 민족의 기원인 비너스(‘아프로디테’) 신전의식은 중지될 수 없는 자연 순환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틀어지거나 중지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재앙이듯이,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의 의식을 중지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인재보다는 자연재해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⑤ 아무튼 그레코-로망의 민족의 어머니로 추앙되던 비너스(아프로디테)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어머니가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단 한번의 임신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낳았다. 이것은  로마사회 문화에 충격적인 일이였을 뿐만 아니라 획기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동안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다산과 풍요, 민족의 번성과 관련된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단 한번에 그것도 일거에 사라지게 하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단 한번의 행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냈다면 더 이상 여성의 생식행위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는 고대세계의 자유분방했던 여성의 성적 요소를 확실하게 제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내일 오실 신랑을 기다려야 하는 종말론이 대두되었고 그 사상은 로마사회 곳곳에 그 영향도 컷다.

 

3. 당시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천

① 16세기는 조혼의 경향이 있어 나이가 많아야 여자는 19~20세, 남자는 24세정도에 결혼하였고 미혼 비율은 20%까지 되었는데 이는 외적요인들로 인한 질병과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하기도 했지만 당시 1인당 소득의 현저히 감소 했다는 것이 주된 요인이다. 거기에 하인들과 사제들과 그리고 고위 귀족들의 사회관습 때문에 미혼 비중이 컷다. 그런 관습은 17세기가 오기전까지 계속되었다.

 

② 그리고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결혼관은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으로 전파됐고 18세기 후반에서야 유럽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의 감정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차츰 부부가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는 결혼 형태가 확산되어 갔고 19세기 이후로 여성의 교육과 취업 기회가 많아지고, 더불어 사회적‧정치적 참여가 빈번해지면서 남편과 아내는 좀더 평등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4]

 

③ 이러한 흐름에 예기치 않은 진전을 가져온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때에는 전쟁으로 인한 남성의 빈자리를 메꾸는 ‘일하는 아내’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경제적으로 더 이상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아내는 지난날처럼 남편의 예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부부는 권리와 권위를 서로 공유한다. 아니 변화는 더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성별에 관계없는 시민결합이 결혼의 한 형태로 인정받기까지 하는 시대를 오늘날 살아가고 있다.

 

 

 

4. 신학속에 여성의 위상

    " 기록자의 상징적 표현인 창세기를 우리는 현실 그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JK)"

 

① 그리스도(혹은 이슬람)교의 신학은 여성을 남성의 아래에 위치시킨다. 그 까닭은 앞서 본, 번성과 풍요를 박탈당한 여성의 성적요소에 근거한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완성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도 역시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고대 시대의 자유롭고 풍성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②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보듯이 초기 교부들은 여성의 성적요인과 연결된 종교적 파급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인간의 성적인 요소는 동물이 지닌것 처럼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종교적 경건성과 인간의 원초적 본능간의 신학적 실험이 교부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③ 히에로니무스(영어이름Jerome)와 테르툴리아누스는 가장 극단적인 노선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고대 종교에서 숭배되었던 여성의 다산성풍요에 관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에덴의 이브’라는 여성의 모습에 집중함으로서 ‘성적인 요소가 악’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도록 기여하였다. 말하자면 다산과 풍요의 기원으로서 숭배되는 여성상이 아니라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한 악의 근원으로 규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다. 남녀 서로의 기쁨이 되어야 할 성행위는 죄악이었고, 그 결과는 임신으로 나타났고, 이로 인해 고통이 수반된다고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는 양으로든 음으로든 모두 죄악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까닭에 성은 더러운 것, 혹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죄악의 결과를 잉태하는 근원이 되는 여성이 결국 큰 피해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④ 초기 그리스도교때부터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고대의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던 풍요로운 숭배를 모두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숭배의 대상을 단 하나의 주제, 남성인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시킴으로서 고대로부터 존재하였던 ‘인간 정신의 자유’를 ‘예수-그리스도에로 종속’이라는 하나의 신학적 교리로 치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5]  이러한 신학적 배경의 흐름속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그의 논문, “성과 결혼의 유익에 대한 사상 [6] 은 당시 로마사회에 나타났던 종교문화적인 현상들 특히, 기독교 내외에 만연했던 엄격한 금욕주의에 반하여 온건한 금욕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과 결혼의 유익과 순결" 에 대한 그의 설명은,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보일 수 있는 교만과 그로 인한 죄에 대한 경계를 나타내며 온건한 금욕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7] 이러한 그의 온건한 금욕주의적 관점은, 이와 배치되는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북아프리카의 종교문화적인 상황으로, 성모마리아의 처녀성을 의심했다 하여 이단으로 파문 되었고, 결혼보다는 거룩한 동정 (童貞)을 더 선호한다는 이유로 정통 신앙을 가진 자들을 마니교의 후원자 라고 말한, 동시대의 새로운 이단을 추구하던 ‘조비니아누스’에 대한 논박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마니교주의자’들이나 히에로니무스가 엄격하게 금욕적으로 성과 결혼을 이해를 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도록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끌었다.[8] 

 

⑥ 결과적으로,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와 로마세계의 엄격한 금욕주의가 유행했던 정황에서 ‘성, 결혼, 그리고 순결의 순기능’을 교회 안과 밖을 위해 온건한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런 가운데도 자녀의 생산의 수단이 되는 결혼을 성례의 차원까지 끌어올려 부부의 연합과 사회적 기능을 강조할 수 있었다.[9].

 

 

루터의 결혼생활과 종교개혁

 

 

5. 루터가 결혼의 위상을 쓰게 된  배경

 

1. 종교적 사회적 배경

 

① 종교개혁기에 일어난 많은 시도중에 결혼개혁이야 말로 제도적 개혁으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종래의 로마 카톨릭의 결혼을 성례(SACRAMENT)라는 신비로운 연합으로, 거기에다 “독신이 영적으로 결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당시 결혼관의 핵심이었다. 또한 결혼은 하나님 은혜의 신적제도로 교회의 조정으로 통제를 받아야 함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그런 교권행사를 루터는 이를 은혜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 감옥으로 보았다. 그래서 결혼은 성례에 포함 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② 결혼은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 성스러운 7성례전에 포함되어 있는 성례의 하나로 성적순결과 독신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었으나, 이에 반동적으로 카톨릭 사제들의 성적 타락이 극치를 이루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던 루터는 삶의 위상에 있어 결혼이야 말로 독신보다 더욱 가치있는 상태이며 인간의 본성에 모순이 없고 영혼을 보호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 수도자의 독신의 맹세는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며 창조된 피조물의 본성은 물론 개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라 주장하게 된다.[10]  

 

③ 당시 사람들은 수도원의 삶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적합하고, 결혼은 진부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간으로서 충분하고 결코 성적상태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는 종말론적 사고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루터 역시 [Genesis 1:27], "So God created man…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From this passage we may be assured that God divided mankind into two classes,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2등급으로 창조하셨다.” 라는 말씀에 입각해  당시 카톨릭 교리대로 “…. God divided mankind into two classes.”   창조된 남과 여를 2-클래스(등급)로 보고 남녀의 차등을 두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덜 “지성적” 이라고 생각했고, 여자가 정치나 교회기관을 좌지우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때 그의 카톨릭 시절 전반을 통한 롤-모델이었던 에라스무스의 사고를 이어 받았다.

 

④ 그렇다해도 그는 1520년부터 1525년 사이에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와 가정의 행복을 단념했던 수도사들과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서 얻은 새로운 결혼관으로 결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결혼생활은 모든 이에게 적합하고, 매우 고상한 일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아가 결혼 위상에 대한 설교에서와 같이, 결혼을 비방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자는 현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라고 역설하고 그런 악마적 사고에 ‘대적하고 저항하기 위하여’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루터가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는 ‘성과 결혼’에 관해서도 역시 자신이 직접 혹은 함께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바르게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여행에서, 수도사 루터가 성적타락의 극치를 보았던 경험에서 온것이기도 하다)

 

 

2. 에라스무스의 영향

 

① 그처럼 결혼의 위상에 관하여는 앞서 이전 강의시간에 토론했던 5세기의 아우구스투스와 11세기의 빅토르 위고와 맥락과 같이하나 16세기의 루터는 획기적으로 그 개념을 보완을 했던것이다.  루터는 동정과 독신을 미화하는 대신에 결혼과 가정이 완전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여자들은 ‘지출과 절약’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여자가 없으면 세상은 허물어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개념들은 루터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앞의 본문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종교개혁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줬고 그것은 젊은 시절에 인문학적 지성을 흠모했었던 <에라스무스의 여성관-결혼관>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②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로마카톨릭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11] 이 혼란의 시기에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던 여성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였다. 거리투쟁과 무기를 손에 들고, 개신교가 범람하는 지역에 카톨릭 수호를 위해 혹은 개혁주의를 받아들여 이를 위해 애써가며 직-간접으로 도운 여성들도 있었다.  이런 여성들의 공적 참여에 비해 루터나 칼벵의 아내, 카타리나와 이델렛은 가사 돌봄이로 국한된 삶을 살았던 것을 보면 동시대의 휴머니스트나 종교개혁가들 보다 비교적 차별적-진보관을 지녔던 루터나 칼빈에게 어떤 내적 트라우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그들보다 앞선 세대이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에라스무스는 여성의 공적영역에서의 사회참여에 대해 루터나 칼빈보다 이미 앞서나가 있었다.

 

ㅡRoland H. Bainton, Women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and Italy

 

 

③ 에라스무스는 당시에 뉘른베르크에서 수준높은 교육을 받은 피르크하니머의 수녀들과 콘스탄츠의 대표 지성인이며 행동가였던 ‘마가렛트 블러머’를 만난뒤에 성공적인 교육이 여성들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게 되었다.[12] 그래서 그의 책 “대화(Colloquien)”에서 여성들이 신앙의 경건성과 교육과 인식의 능력에 있어 남성들 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던 것이다.[13] 또한 그의 1516년 라틴어 성서 번역본 서문에서, “ ….. 나는 모든 여성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서들을 읽게 되기를 바란다 …. 그리하면 그것들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종교개혁자들과 특히 에라스무스의 결혼관으로 말미암아 성적 순결을 강요하던 시대에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고 세상과 단절된 금욕주의적 삶을 중시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딸들이 상속재산을 들고 수녀원으로 들어 가지 않아도 되는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찾아온 시대가 되었다.[14]

 

④ 예수가 참석했던 가나의 혼인잔치를 들어 ‘수도사의 맹세’는 성서에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황 레오10세에게 보낸 반박 편지와 같이 이미 사제들의 결혼 허용을 1498년부터 주장하며 많은 사제들과 그들과 연을 맺고 있던 창녀들을 불륜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어떤 것들도 결혼보다 안전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평온하지 못하고, 즐겁지 않고, 더구나 사랑스럽지 못하다” 라고 에라스무스는 사랑을 통한 결혼과 부부관계를 극찬하였다.[15] 그러나 성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성서해석을 하였고 침묵하지 말고 말을 하도록 여성들에게 촉구하였던 에라스무스는 그렇게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고 여성의 교육권을 옹호하였음에도 부부간의 위계질서를 여성의 의무라고 보았다.[16]  앞서 언급한대로 이것 또한 루터는 받아 들였다.

 

3.  정치적 종교적 배경

 

① 루터가 결혼신분에 관한 설교를 했던 1519년은 교황을 대변하는 신학자 엑크와 교황의 반대세력인 루터간에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라이프니찌 논쟁 (교황/ 성경/ 연옥/ 면죄부)이 일어난 해여서, “저주받은 교황의 영적 허술한 권위와 법에 의해 삶의 혼란속에서 무서운 학대와 거짓 상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루터가 선언했던 때였고 무엇보다도 종교 교육만을 주장하면서도 교황청은 물론 교황청 교육에도 반기를 들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② 또한 루터는 그의 저서 ’바빌론 포로 생활(De Captivitate Babilonica 15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는 바와 같이 영세를 받은 크리스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는 비록 구령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신앙을 거부하기 전에는 얼마든지 죄를 범하든 간에  그 ‘구원의 명령’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신앙만 빼고는 어떠한 죄도 그를 지옥에로 떨어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 (Cf, 그렇다면 자신들이 지닌 총 재산의 반을 헌납하고도 저주받아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그 두 부부는 예수를 따랐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왔을 터인데….) - 이는 믿음으로 의를 얻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와 연결이 된다. 따라서 자연법과 신법위에 세워진 카톨릭 교부들의 그리스도교적 도덕규범들은 루터의 새로운 사상으로 무너져 갔다.  

 

③ 루터는 먼저 인간의 육체적 본능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성적 충동은 인간의 필연적이며 본성적인 것으로 따라서 예수 하나님을 위하여 약속하던  ‘동정서원’은 마귀의 짓이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직자의 독신생활 제도의 폐지와 인간의 자연적 성욕을 억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실천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동지 수사인 칼스탈은 41세의 나이로 서원을 깨뜨리고 루터의 찬성으로 15세의 소녀와 결혼했고, 그 뒤에 많은 수사들이 그 뒤를 이어 결혼했다.  그러나 세 명의 개혁진영 사제들이 투옥됐고 그 중 한명은 처형당했다. 

 

④ 그리고 루터 자신도 1525년 6월 13일 저녁 수도원에서 루터가 42세때, 요한네스 부겐하겐 목사의 주례로 이미 수녀원을 탈출해 나온 27세의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17]와 결혼했다.  루터가 결혼의지를 밝혔을 때 교황주의자들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종교개혁에 대한 지지를 잃었다.[18]  "결혼에 관한 중세의 가장 '창의적'인 미신은 "적그리스도가, 배교한 수도사와 도망친 수녀 사이에서, 즉 영적인 근친상간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결혼이 바로 이 요소를 정확하게 갖춘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19] 루터의 첫 아들 요하네스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루터의 결혼생활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로 인해 개혁 사제들의 결혼이 일반화, 본격화돼 독신에 실패해 자책해오던 수많은 성직자들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⑤ 루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교황에게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시도한 루터는 심지어 에라스무스에게서도 질책을 받았던  자신의 종교개혁의 강력한 지지자의 한 사람인 헷센의 백작 필립의 중혼을 허락함으로써 일부일처제에 대한 예수와 당시 로마 카톨릭교의 교훈을 저버리기도 했다.  필립은 8명의 자녀를 둔 병약한 본처와 여전히 결혼생활을 하면서 역시 작센의 누이의 궁정에 있는 묘령의 17세의 처녀 마르가리타 폰 델 사일과 결혼하고자 루터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루터는 처녀를 첩으로 두는 것을 다만 비밀로 한다는 조건 밑에 허락하였다. 그러나 필립은 목사의 주례로 공공연히 결혼식을 올려버렸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질책하거나 제지하지 않고 혼인의 단일성과 영속성을 믿는 이전 그리스도교 신앙을 넘어섰다 .  이는 그가 ’혼인은 그저 세속적인 일 ‘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비롯된다.[20]

ㅡDr. Martin Luther&rsquo;s Saemitliche Werke

⑥ 또한 루터는 설교단에서 자기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남편들은 페르시아 왕의 본을 따라 왕후 와스디를 에스더로 갈아치우고, 종을 높여 여주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처럼 이혼에 대해 말했다.[21]  그것은 루터가 성서에 입각한 신앙의 규범이라고 한 ‘오직성경’이라는 주장과는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해석에 있어 루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려 ’의’를  ’신앙’으로, ’교회’를  ’신자’로 하고,  ’사제’를 ’장로’라고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이전의 카톨릭 교부들이 남겨논 성서의 교훈보다 앞세웠다. 

 

⑦ 그럼에도 루터를 사회개혁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루터가 말하는 결혼생활 및 여성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결혼의 3가지 유용성에 대해  힘을 썼기때문이다.  ① 타락하기전에 하나님이 맺어준 이와같은 남녀 연합의 신성한 영적 표징인 결혼은 성례라고 말하는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빅토르와는 달리) 육체의 악한 욕망은 부부간의 의무이며 결혼안에서 표현 되었을때는 비난할 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② 서로에게 충실한 상태로 남아 있기로한 결혼은 정절(fidelity)의 언약이라며 아이들을 생산하기 위한 일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경우를 하나님은 용납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연합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자녀가 결혼 배우자를 요청하는 것을 일반화 시켜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③ 또 하나의 교회요 제단이요 유언(testament)인 아이를 낳아 바르게 기르는 기쁨이 결혼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다.[22]

 

 

루터의 결혼식

 

6. 루터의 결혼관과 그를통한 종교개혁의 의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결혼을 통하여 생산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 루터

 

① 앞서 말한대로, 루터가 성직자의 결혼을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신'과 '결혼'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신학적, 실천적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살펴 여성의 위상을 올려 논 개혁자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 변화를 강조한 루터의 결혼에 대한 위상은 그의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혼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서로를 위한 섬김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독신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영적으로 구분짓고 세상적으로도 차등을 두게 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를 고통과 좌절속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독신이 아닌 결혼이 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루터의 결혼관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위치를 회복시키고 성직자들에게는 결혼의 자유를 헌정했다. 사실 루터의 결혼 종교개혁은 '독신으로 형성되는 위선적 거짓 영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완벽한 독신의 수행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비롯한 삶의 모든것에 있어 서로를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받는다고 루터는 확신했다.

 

 

&clubs;루터와 카타리나는 결혼초부터 삐걱거렸다. 카타리나는 말이 빨랐고, 루터는 성질이 급했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의 그것에 비해 종교사회는 물론 일반사회에 있어 비교적 동등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전에 일이다. 신앙이 무엇이관데 인간의 윤리나 이성적 언행을 무시하며 까지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옳은 것인지 .. 그것은 과연 예수(가르침)사상과 일치 하는 것인지…. 물론 그 시대적 사회구조와 분위기속에 나온 사고속에서 보여주는 결심에서 나온 행동임에는 틀림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기독교 생성 초기에는 여성들이 활발하게 교회에 기여했다. 그러다가 교회가 제도화 되고나면서 부터 공적지위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여성들이었다. 이러한 중세 카톨릭 교회의 문제성에 대항하고 나왔던 종교개혁 시대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문제에 대항하였던 종교개혁 역시 성적, 계급적 폭력에 의한 계층 차별, 인종차별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과학의 혁명’의 토마스 쿤이나 ‘사회계약론’의 루소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각 시대마다의 정상적 사고인 패러다임에 따라, 계약들이 다시 이루어져 새로운 법이되고 또 낡은 패러다임이 깨져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처럼  결혼관뿐만 아니라 사회변천에 따라 성서의 계약이나 삶 역시 변천하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의 신학의 패러다임의 전개도 이와 같을 것이다.

 

여성관의 변천에서 보듯이 ‘여성비하’는 종교적 전통에서 그래서 사회적 전통으로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현상이었다. 여성의 권리가 얼마만큼 위치해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공평한 권리및 대중문화의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함께 선진국 진입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1890년도부터 시작되어 그리고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인 페미니즘(feminism)이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신학적 패러다임도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참조서적 및 논문]

 

[1]  “성차별’의 기원, 계급의 발생과 남녀 지위의 변화”, 한림학보 

 http://news.hallym.ac.kr/news/articleView.html?idxno=84

[2]  基督敎思想, Volume 35, Issues 5-8 p67

[3] 에케하르트 로터, “비너스. 마리아. 파티마”, (울력, 서울,  2001년)

[4] 그레고리 클라크,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알 수 없는 신세계 , 이은주 옮김 (한스미디어, 서울, 2009) 41~43

[5]  에케하르트 로터, 비너스. 마리아. 파티마 ,  (울력, 서울, 2001년)

[6]  이정숙, 교회사에서 본 성,결혼, 가족 – 강의안

[7]  이정숙, 여성과 초대 기독교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경기도,2002)

[8]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혼론,  박일민(야웨의말씀, 서울, 2010) 제1부 결혼의 선함에 관하여 중에서

[9]  에케하르트 로터,”비너스. 마리아. 파티마”(울력, 서울, 2001년)

[10] 김주한 , “마르틴 루터의 생애 연구에 관한 논문” : 맹세에 관하여(On Monastic Vows, 1521)

 

[11] Roland H. Bainton, Women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and Italy,(Minineapolis, Ausberg Pub. House, 1971)

[12] Christin Christ-von Wedel, Erasmus of Rotterdam : advocate of a new Christanity, 240

[13] 정미현, 에라스무스의 여성관, (논문 연세대)201

[14] Ibid, 210

[15] R. H. 베인튼, (공동체 안에서의)에라스무스 : 그의 학문과 경건의 조합,99

[16] Christine von-Christ-von Wedel, Erasmus oh Rotterdam : advocate oh new christianity, 241

[17] 키르시 스티예르나, 여성과 종교개혁, 박경수 (대한기독교서회,서울,2013) 138, 139 -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 응답하도록 만든 것이 카타리나라고 했으나,  그녀의 전기작가 Kroker에 의하면 루터는 카타리나의 신학적 통찰에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다는 것으로 보아 사랑하는 남편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응전할 용기를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18] Ibid, 114, 결혼식에 루터의 절친 멜랑히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인문주의자인 그는, 에라스무스적 결혼관을 지니고 있었다.

[19] Ibid, 106,114

[20] Dr. Martin Luther’s Saemitliche Werke, Vol, XVI, p. 518-519

[21] Sermon on Marriage, Vol. XX ‘에스더’ 인용

[22] 이정숙, 교회사에서 본 성,결혼, 가족 – 강의안